중국의 9년 대홍수를 다스리게 해 준 단군왕검
단군왕검 재위 50년(서기전 2284년)에 홍수가 나서 강이 범람하여 백성이 편안히 살 수 없게 되자 왕검께서 풍백 팽우에게 물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 다음 해에는 운사 배달신을 시켜 강화도 마리산에 삼랑성과 제천단을 쌓고 천제를 올렸습니다. 그 제천단이 지금도 남아 있는 참성단입니다.
당시 중국은 요임금이 다스리던 때로 단군조선이 물난리를 치르고 몇 년이 지나, 중국 땅 역시 큰 물난리를 겪게 됩니다. 요임금의 신하 곤이 홍수를 다스리려 했으나 실패했고, 곤의 아들 사공 우가 치수를 맡았습니다. 우는 치수에 힘쓰는 수 년 동안 자기 집 앞을 세 번이나 지나갔지만 한 번도 들르지 않을 정도로 전력을 쏟았습니다. 그럼에도 홍수가 그치지 않고 국가의 존립마저 위태로운 지경이 되자, 중국은 동방 천자국의 단군왕검에게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단군왕검께서 도산(회계산) 회의를 소집하고, 태자 부루를 파견했습니다. 그 회의에서 부루태자가 사공 우에게 '오행치수법(오행의 원리로 물을 다스리는 법)'을 전하여, 중국은 마침내 물난리를 해결 할 수 있었습니다(서기전 226년). 이것이 '중국 9년 홍수 치수'의 전모입니다.
『구약』에서 전하는 노아의 홍수는 겨우 40여 일이지만 중국의 홍수는 무려 9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중국의 9년 대홍수는 고대 동북아의 대재앙이자 인류사의 가장 큰 자연재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단군왕검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중국의 역사는 요순시대에서 더 이상 전개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단군은 중국의 국난을 끌러준 후 나라의 경계를 정하였는데, '회수와 태산 지역(지금의 산동성, 안휘성, 강소성, 절강성)'을 단군조선에 귀속시키고 분조를 두어 우순(순임금)으로 하여금 단군을 대신하여 다스리게 했습니다.
단군은 또 산동 지역의 낭야성에 감우소(우순의 정치를 감독하는 곳)를 설치하여 순으로부터 분조의 정사를 정기적으로 보고 받았습니다.
부루태자가 단군왕검의 명을 받고 특사로 도산에 갈 때, 도중에 낭야성에 들러 반 달 동안 머무르며 백성의 사정을 묻고 들었는데, 이때도 순임금이 치수에 대한 모든 일을 부루태자에게 보고하였습니다『환단고기』「태백일사」.
이것을 증명해 주는 기록이 『서경』「순전」의 "사근동후"입니다. 이것을 대개 '순임금이 동쪽의 제후를 만났다"라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후인 순임금이 동방의 천자인 단군왕검을 알현하였다'라고 해석해야 맞습니다.
낭야성은 그 성을 개축한 번한의 2세 왕 낭야(치우천황의 후손)의 이름에서 유래합니다. 오늘날에도 '낭야'로 불리는 이곳은 진시황이 불사약을 구해오라고 동방 신선의 나라로 사람을 보내기 위해 다녀간 곳으로도 유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