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영근 과장의 지시를 받고 올라온 홍 형사는 타버린 종이의 내용 판독이 끝나자 즉시 곽 과장에게 송전으로 보고했다. '과학 수사 연구소'에서는 재와 남은 종이의 글씨를 판독하는데 두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편지가 두 장, 메모가 한 장, 사진이 한 장이었다.
송전 내용을 받아든 곽 과장은 이해가 쉽게 가질 않는지 머리를 갸우뚱거린다. 사진은 미모의 여인이 고추가 뾰족이 보이는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었고 편지는 중간중간 판독되지 않은 부분이 있기는 하나 그리 연결이 힘들지는 않았다. 메모지에는 날짜와 호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곽 과장은 편지 내용을 다시 훑어보았다.
아버님.
다시 편지 드립니다... 이번이 마지막... 만일 제가 어떤 일을 저지른다고 해도 아버지께서는 정말 저와 어머니에게 어떤 방법을 지속적으로... 저도 이젠 돈도 벌었고 이름도 충분히 얻었습니다.
그보다도... 제가 사실을 폭로해 버린다면... 아버지께서는 다시는 재생하시기가... 파멸이란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실 것입... 따라서 저는 저의... 호적 정리를 즉시 해결해 주시고 지나간 날들의... 의를 어머님께 충분히 보상하게 된 것으로 알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장난쯤으로 생각 하실는지... 절대 그렇지 않다는 말씀 을... 통을 참아 가며 슬픔을 누르며... 아무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아버지의 아들... 꿈에도... 그러나 아버지는 한 번도 얼굴을 돌리시지 않... 다. 제가 벌써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이제사 그러므로 마지막... 때까지 분명히 해주십시요. 정말 저는 하겠다면 끝까지 해내는 악착 같은...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좀더 심사숙고하셔... 절대 집안에 풍파를 일으키려는 뜻이 아닌 것만은 알고 계실 것... 내 뜻이 꼭 관철될 것으로 믿고 이만 줄입니다.
... 진 드림
아버님
나온신다고 하셨으면... 이해할수 없습니다. 만일 저를... 그렇습니다. ... 극은 결코 실생활은 아닙니다. ...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코 돈보다도 삶 그 자체... 그런데 아버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데서 함부로... 그러므로 내가 더욱 아버님을... 하고 경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일찍... 호적 관계만 정상대로 해주시면 아무 불평도 불만도 없이... 더 이상 거론하지 않을 것... 부탁드립니다. 금년이 가기 전에 꼭 완결시켜 주시고요. 제가 제 눈으로 확인... 않으면... 이 사실을 들어... 어떻게 되는지는 아버님이 더잘 아시리라
... 이만...림
김만호 회장의 가정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야 없는 입장이지만 이 내용으로 보아 아들의 편지가 틀림없고 가정 내의 갈등과 불화가 심화된 것이 한눈에 판명되었다. 그러나 곽 과장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미국에 가있는 아들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두 아들이 모두 아버지 즉 김만호 측근에 있는 점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을 큰아들, 아직 학교에 다니는 막내, 든든한 자리로 결혼한 딸과 사위 외에 누가 있어 이런 편지를 보냈을까 하는 점이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협박하는 투의 편지를 거듭 씹어보면서 무엇인가 안개처럼 잡혀오는게 있었다.
"어이, 김순경 전화 좀 걸어."
"네? 어디로요."
"김 회장네 회사 총무 부장?"
김 순경이 전화를 걸어 곽 과장에게 바꿔 주었다.
"나 시경 형사 과장입니다, 김만호 회장 본적을 좀 알려고 하는데요"
"네? 무엇에 쓰시게요."
"그저 좀 참고할 일이 있어 그러니 바로 좀 알려 주십시오... 아 네, 네. 287이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곽 과장은 막바로 김 순경에게 다시 지시를 내렸다.
"김 순경 진구 부전동 산 29의 31호주 김만호의 호적을 열람해 봐. 직접 가진 말구 민원실로 전화해서 내용을 기록해 놓도록 해."
김 순경에게 김만호 호적을 열람토록 하고 다시 편지 내용을 검토했다. 아무리 봐도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가 틀림없는데 내용이 마음에 걸렸다. 이 때 전화를 걸던 김 순경이 곽 과장을 불렀다.
"과장님 구청 전환데요, 직접 받아 보시겠습니까?"
"이리 바꿔 줘, 아 나 시경 형사 과장입니다. 미안하지만 김만호 회장 아들 이름들을 죽, 불러 주십시오. 네, 네. 김영구, 김진구, 김한구 삼형제 맞죠? 그리고 네, 출가한 딸 김순희.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딸깍 수화기를 내려놓은 팍 과장은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이 호적에 등재되지 않은 아들임을 확인했다. 이미 편지 내용에 호적 정리 운운한 것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관계가 있어 갑자기 병원에서 종적을 감추었고 또 그렇게까지 해서 사진과 편지를 태우려고 했는가. 사진과 편지와 메모지를 보던 곽 과장은 무엇인가 실마리를 풀어낸 듯 수첩을 꺼내 메모를 시작했다.
"자, 자동차 준비해, 그리고 나 대진 물산에 갔다올 테니까 서울로 전화를 좀 걸어. 특별 수사반 박문호 씨를 찾아서 경부선 침대 특급 살인 사건 관계 때문에 그렇다고 지체없이 부산으로 좀 오시라고 그래. 내가 말하더라고... 그리고 해운대에서 발견됐던 장님 시체, 그 여자말야. 유품 좀 잘 정리해 놓고... 아 그리고 서울 박문호씨, 될수록 빨리 좀 내려오라구 그래. 차는 준비됐나?"
숨가쁘게 지시하고 난 곽 과장은 차량반에서 나온 차를 타고 김만호 회장님 집으로 정신 없이 달려갔다.
'사건이 복잡해지는데' 곽 과장은 혼자말처럼 뇌까리고 있었다. 그가 생각한 대로 김만호가 고강진 살해 사건에 깊숙이 관계하고 있다면 사건은 단순한 복수극이나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고 생각되어졌다. 원래가 큰 기업을 서너 개씩이나 거느리고 있고 사회 단체도 이끌고 있는 거물인데다가 정계에 진출할 커다란 꿈을 가지고 있는 그이니 만큼 그가 이번 열차 살인 사건의 배후자이거나 적어도 음모에 가담할 만한 여건은 있을 수도 있었다. 더구나 이런 사회적 지명도가 높은 사람이 사건에 관여되어 있다면 해결하는데 무척 힘이 든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곽 과장은 어깨가 지독하니 무거워옴을 느끼고 있었다.
"기사, 김만호 회장집으로 직행해."
그는 홍 형사로부터 송전된 사건과 편지 메모지를 움켜쥐고 차창 밖으로 흐르는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김만호 그의 발자국엔 어떤 그림자들이 묻어 있을까...
한편, 같은 시간 서울서 내려간 성기준 박사는 김만호 회장집에 도착하였다. 아침부터 경찰서에 불려가 마음이 잔뜩 찌푸려 있던 그가 부산에 도착한 것은 오후 세 시가 넘었다.
부산역은 이제나 예나 수많은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다. 열차 속에서 5시간 30분 동안 꼼짝 못하고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온몸이 쑤셔왔다.
더구나 이틀 동안 연이어 장거리 여행을 했으니 그 피로는 알 만도 했다.
"기사 양반 대한 극장 앞으로 가 주세요. 아니 부산 공원 앞으로 갑시다."
성기준 씨는 이 생각 저 생각 다 떨쳐 버리고 김만호 회장집으로 직행하기로 결심했다. 김 회장 부인이 직접 전화 걸었으니 집으로 먼저 가보는 게 순서일 것 같았다.
회사보다는 집에 있을 가능성이 더 높았기 때문이었다.
김 회장 부인은 성기준 씨를 안채로 안내했다. 김 회장은 방에 누워 링게르를 맞고 있었다.
"간호원이 방금 다녀갔어요. 링게르를 꽂아 놓고... 의사는 뭐 별게 아니라더군요. 정신적으로 안정하고 푹 쉬면 괜찮을 거라고... 이거 너무 신경 쓰게 해서..."
"사모님, 걱정이 너무 크시겠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글쎄, 저는 전혀 모르겠어요."
성기준은 김 회장 옆에 앉아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김 회장도 비로소 실눈을 뜨며 성기준 씨를 바라보았다.
"미안하오. 바쁠 텐데 오라구 해서."
"아 원,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래 지금은 좀 어떻습니까?"
"좀 괜찮아요. 저 여보 차 좀 끓여 와요."
"아니 차는, 이 경황에 무슨... 사모님 그만두십시오."
연령으로 보아서는 성기준보다 김만호가 한참이나 아래였다.
그러나 성기준이 김만호에게 깍듯이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한 마디로 오늘의 성기준이 있기까지에는 김만호의 경제적 뒷받침이
엄청난 힘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둘이 어떻게 해서 가까워졌는지는 모르나 학구파인 성기준이 대학 시절부터 유학 그리고 귀국해서 정착할 때까지의 뒷바라지를 맡아 주었다. 이미 그들은 젊은 시절부터 한몸처럼 붙어다녔던 것이다.
"여보, 잠깐만 나가 있어."
김만호는 부인을 밖으로 내보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던 부인이 성기준에게 약간 머리 숙여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갔다.
눈치를 살피던 김만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성 박사 누구하고 상의할 사람도 없고 또 답답한 일이 생겨 오시라고 했소. 피곤하실 텐데 미안합니다."
"원, 회장님도 별 말씀 다하십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무슨 일이..."
김만호는 성기준을 옆으로 다가앉게 하고 작은 소리로 무엇인가 말하기 시작했다. 놀라기도 하고 얼굴을 굳히기도 하며 둘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때 밖에서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 여보 시경에서 형사 과장님이 찾아오셨어요."
부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워 있던 김만호가 벌떡 일어났다.
이때 문이 열리면서 사복을 입은 곽 과장이 들어왔다.
"회장님 불편하신데 찾아와 죄송합니다. 꼭 좀 여쭤볼 말씀이 있어서요."
"무슨 일인가요? 회장님이 지금 몹시 피로해 계시는데 다음에..." 성기준이 곽 과장의 말을 가로채며 김 회장을 감싸고 돌았다.
"뭐 한두 마디면 됩니다."
"아아 됐소. 물어보시오. 말할 힘은 남아 있으니까."
"뭐 별달리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뜻도 없구요. 단 부탁 드리고 싶은 말씀은 회장님께서 숨김 없이 대답만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회장님 이분 자리 좀 피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김 회장은 눈짓으로 성기준을 내보냈다. 성기준이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한 곽 과장은 정색을 하고 다가앉았다.
김 회장의 시선은 곽 과장에게서 창으로 옮겨졌다. 시선을 창 밖으로 못박아 놓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아들은 모두 셋입니다. 큰놈이 영구, 둘째가 진구, 셋째가 한구 그리고 출가한 딸애가 하나 모두 넷이죠."
"회장님 지금의 세 명 말고 또 하나가 있을텐데요. 왜 말씀하지 않습니까?"
"..."
"말씀해 주십시오."
곽 과장이 다그쳐 물어도 김회장은 시선을 창밖으로 못박아 놓은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 알고 왔습니다. 오늘은 이 정도로 물러가겠습니다. 회복이 되시면 다시 들리겠습니다."
곽 과장은 이렇다 저렇단 말 한 마디 없는 김 회장의 등에 대고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는 성큼성큼 걸어 밖으로 나갔다.
경찰이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성기준이 쫓아 들어왔다. 얼굴이 창백해 있었다.
"뭐라고 합니까?"
"다 알고 온 것 같소. 분명하게 대답하진 않았지만, 다시 오겠다더군요."
"이거 나도 입장이 난처하게 됐는걸."
"글쎄 말이오."
둘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볼 뿐 무어라 할 말을 잃었다.
본서로 돌아온 곽 과장은 무엇인가 자신에 찬 듯 사건을 일목 요연하게 기록하며 서울에서 내려올 박문호 형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 회장, 그가 정신 충격을 받고 쓰러진 최초의 원인은 고강진이 피살되었다는 뉴스를 접한 직후가 틀림없을 것이고, 병원에서 사라진 이유는 자기 혼자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편지나 사진 메모지 등을 없애버리려고 급한 마음으로 뛰어다닌 것으로 판단되었다.
메모지와 편지 그리고 사진의 내용으로 보아 고강진의 생부는 당대의 재벌이며 장차 정계에 진출할 꿈을 안고 있는 그가 틀림없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을 종합해서 검토한 결과 김만호는 고강진으로부터 꾸준히 협박을 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만약 편지의 발신인이 고강진이 아니었다면 김만호 회장의 편지나 사진을 태우려 했던 이유나 고강진이 아니 죽어야 할 이유가 연결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중요한 점은 바로 이런 연계성이었다.
보도에 의하면 고강진을 죽인 범인은 정말 교묘한 방법으로 시체를 열차에 유기시켜 놓고 달아났다고 했다.
그리고 누군가 공범이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었다. 공범과 죽여야 했을 필연적인 사연을 가지고 있는 배후의 인물, 신문, 어제 석간, 오늘 조간. 생각에 잠겨 있던 곽 과장이 갑자기 소리질렀다.
"누구 어제 석간, 아니 오늘 아침 Q신문 찾아봐."
사환 아이가 Q신문을 찾아다가 과장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먼저 사회면을 펼쳐보았다.
'탤런트 고강진 의문의 피살'
S-TV전속 탤런트이며 인기 절정에 있는 미남 배우 고강진(25, 사진)은 지난 11윌 29일 21시 45분 경부선 특급 열차 침대차03-03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체는 대형 가방 속에서 나왔는데 가방을 버리고 달아난 자는 40대 중반의 왼쪽 검은 자위가 없는 애꾸임이 밝혀졌다.
시체가 발견될 당시 특급 열차는 대전 도착 직전이었는데 열차 내의 목격자에 의하면 범인은 천안 출발
직후에 침대에 있었음이 밝혀졌고 차 내의 승무원에 의하면 시체 발견 직전에도 범인은 침대 속에 있었음이 증명되었다.
승무원이 확인 할 수 없는 10여 분 내에 범인이 사라져 언제 어떻게 시속 120km의 열차에서 빠져나갔는지 또 어디로 잠적해 있는 지가 미궁이라고 했다.
경찰은 총력을 기울여 범인 색출에 나서고 있는데 열차 내에서의 공범 존재 여부에 대해서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다.
특히 이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박문호 형사는 시체가 발견된 03-03침대 맞은편에 있는 60대 초의 승객 S씨를 유력한 공범 혐의자로 추적하고 있는데 그를 공범자로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범인이 증발된 직후 열차 내의 화장실에서 나오는 S씨를 목격한 승무원이 열차 내를 수색할 때 S씨가 사용하고 나온 화장실만 제외했고, 범인은 화장실 속에 은닉해 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 S씨는 범인을 애꾸가 아니라고 허위 진술했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S씨는 이학박사이며 사회 저명 인사로 밝혀졌다.
다 읽고 난 곽 과장은 신문을 팽개치고 벌떡 일어났다.
"그 양반이구만, 제길."
혼자말로 소리 지르자 과 내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범인을 열차 내에 은닉시켜 준 공범, 그가 지금 김만호 회장집에서 만나고 온 바로 그 사람이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이었는데 언젠가 신문에서 보았던 이학박사 성기준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곽 과장이 예측한 대로 성기준은 공범이고 김회장, 그가 배후를 조종한 주범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에게는 움직일 수 없는 물적 증거, 비록 간접 증거이긴 했지만 스스로 없애 버리려 했던 편지와 사진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지금 당장 소환해 볼까 어쩔까 하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서울에서 박문호 형사가 내려온 뒤가 좋을 것 같았다. 다행히 그들이 어디로 숨거나 잠적하지 못할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마음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한편, 진남포의 여동생 박영숙이 부산 해운대에서 음독 자살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문호는 부산에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부산에 가기 전에 방금 전화 연락을 보내 준 민형규 형사를 만나기로 했다. 대학 동문으로 어려울 때마다 결정적인 자료를 보내 주어 사건을 풀어갈 수 있도록 밀어 준 Q신문 민형규, 다른 기자와는 달리 냉정하고 명석한 판단으로 사건을 추적해 가는 기막힌 머리, 그리고 언제나 호의적이고 우정어린 진실로 대해 온 형규를 만나는 시간은 언제나 미소부터 떠올랐다.
만일 형규에게 특별한 일만 없다면 오늘 고강진 검시 결과에 대해 논의해 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민활한 판단력보다는 꼼꼼하고 세심해서 자칫 그냥 흘려보낼 자질구레한 그러나 사건 해결에는 결정적 도움을 주는 단서를 잘도 찾아내는 게 그의 장점이었다.
문호가 막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려 할 때 한 묶음의 박스가 자료로 올라 왔다. 열차 내에서 발견된 물품들 다시 말해서 범인의 유품과 현장에서 찍은 사진들이었다. 범인의 유품에는 하나하나 꼬리표가 달려 있고 꼬리표에는 일련 번호가 기록되어 있었다.
#1번 유품은 대형 가방이었고,
#2번 유품은 열차 내에 비치되어 있는 슬리퍼.
#3번 유품은 그가 피우다 버린 꽁초.
#4번 유품은 빈 콜라병이었다.
소견서에 의하면 유품에서 지문 채취는 전혀 되지 않았고 담배꽁초와 콜라병에서 혹 혈액 감정이 가능할지 모른다고 했다.
문호는 꽁초와 콜라병을 다시 국립 과학 수사 연구소로 보내며 가능한한 자료를 찾을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특히 꽁초와 콜라병은 입을 댄 흔적이 있을 테니 그 점에 각별히 유의해 줄 것을 부탁했다.
몇 가지 지시를 하고 막 나가려는데 부하 한 명이 손짓을 하며 뒷문으로 나가라고 손짓했다. 이를 눈치챈 문호가 비상구로 빠져나가자마자 뒤이어 J신문 기자 두어 명과 카메라맨이 우르르 하고 몰려 왔다. 가까스로 피해 형규와 만났다.
"이거 뭐야. 다른 기자 피해서 도망 나왔는데 만나는 사람이 또 신문 기자니."
형규를 보며 투덜대자 형규가 빙글빙글 웃으며 문호에게 묻는다.
"뭐 다른 진전은 없어?"
"별 다른 건 없는데 말야. 진남포 있잖아. 그 동생이 장님이야. 어제 밝혀진 바로는 '대광 안마시술소'에서 안마사로 일하고 있는데 이게 부산에서 음독 자살했다더군. 부산에서 전화가 왔어. 그래서 오늘 저녁 내려가려고. 지금 진남포 때문에 한 사람이 따라붙어 있거든. 오늘까지의 상황도 받아 보고 또 고강진 검시 결과도 보고 그리고 진남포 상처도 조사해서 종합 검토를 한 후 가려고 해. 그런데 참 이상해 부산이 아주 당기고 있거든. 뭔가 꼭 있을것 같은 예감..."
"애꾸가 사라진 방법은 어떻게 됐어"
"일단 그 문제는 접어놔야겠어. 그보다는 용의자들을 먼저 추적해야겠어. 이들을 추적하면서 천천히 생각해야지, 그 성기준이 공범이라는 것만 확실하면 모든 건 만사가 오케이인데. 이 사람 오늘 아침에 연행해 왔었거든. 그런데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는데 미치겠더군. 왜 자기가 공범이라는 거야. 할 말이 있어야지 그냥 돌려보내긴 했는데 뭔가 있을 것 같아."
"미심쩍은 게 있어? 그 사람."
형규는 커피와 담배를 주문하고 수첩을 꺼내 메모를 훑어보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문호가 입을 열었다.
"사고 당시 성기준은 부산 가는 길이라고 했거든. 그런데 그날 밤 다시 비행기로 올라와서 어젯밤 서울에서 묵고 오늘 아침 또 부산에 내려간다고 갔어. 부산에 있는 김만호라는 사람한테 초청을 받았는데..."
"뭐? 김만호. 부산 재벌 말야?"
"응, 왜 어떻게 알고 있어?"
"아냐 그게 아니고... 응, 우리 문화부에 이기형이란 연예 담당 기자 선배가 있거든. 연예 기사도 기사지만 연예인들 내막 폭로하는데 귀신같은 사람이야. 벌써 그 손에서 녹은 사람들도 여럿이지. 그런데 요즈음 누군가를 추적하고 있는 모양이야. 얼핏 들은게 있어서 그런데 한달 전이던가 그 죽은 고강진말야. 그의 아버지가 김만호일 것 같다는 거야. 아무래도 그렇게 추측하고 있는거 같더군. 그럼... 그거 이상한데..."
고강진의 생부가 김만호일 것 같다는 민형규의 말에 문호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래?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성기준 씨가 부산에 내려간 것도 우연은 아니겠는데. 가만 있어 이거 논리가 성립되는데. 김만호가 고강진의 아버지라... 그리고 성기준이 강력한 공범으로 떠오르고 있고 또 둘이 밀착되어 있다. 이게 우연일까? 부산에 내려가서 조사해 보면 알겠지만... 그런데 그게 이상하단 말야. 고강진인 그렇다 치고..."
"뭐 말야. 넌 뭐가 밤낮 이상하기만 하다고 그래."
"이봐, 형규 김만호와 성기준이 밀착되어 있는 건 그렇다고 치고 진남포는 누구한테 왜 습격을 당했으며 동생 박영숙은 왜 자살했느냐 이거야."
둘이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동안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고강진 사건은 둘을 몰고 가다 보면 무슨 결정이 나겠지만 진남포 사건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과연 두 개의 사건은 별개이며 전혀 성질이 다르다는 것일까. 또 두 사건이 동시에 터졌다는 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둘은 나름대로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자 문호 서둘지 말고 하나하나 해결해 보자구. 어떻든 줄기를 뽑으면 뿌리나 잔가지는 저절로 따라오게 마련이니까 말야. 그리고 김만호가 과연 고강진의 친아버지냐 아니냐 하는게 사건의 핵심으로 대두될것 같은데... 아, 아까 자네가 말한 대로 만일 김만호가 고강진의 아버지가 틀림없다면 상황은 달라져.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죽일 만한 확실한 동기가 있을거야. 자 한꺼번에 너무 여러가지를 생각하면 골치 아프니까 진남포 사건은 일단 접어 두자고. 몰아붙일 때는 한 가지에만 전념하자구."
"형규, 지금부터 시간 어때. 고강진 검사 결과 좀 알아보려는데... 그리고 오늘 부산에 좀 갔다와야겠어."
호기심이 발동한 형규는 주저없이 문호를 따라나섰다. 아직 자동차를 구입하지 못한 문호를 옆에 태우고 신나게 차를 몰았다.
병원은 신당동 중앙 시장과 왕십리 네거리 중간에 있는 경찰 병원이었다. 외과를 담당하고 있는 의사가 마침 검시 결과를 기록하고 있었다, 강력 사건을 오래 맡아온 문호와 외과 담당 의사는 오랜 친분이 있는 터였다.
"어이구, 이거 대 박문호 선생께서 드디어 등장하셨구만. 앉으시지. 이분은?"
"내가 소개하지. Q신문 민형규 기자. 이쪽은 닥터 윤. 외과 전문의야. 법의학엔 권위자지. 자, 서로 인사 나누라고."
"아니 신문 기자라면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다니는 박 형께서 오늘은 웬일이십니까? 기자를 다 대동하고 다니게. 이거 정보 누설되는 거 아닙니까? 하하..."
"이 친구 이거 말이 신문 기자지 반은 형사라구요. 만일 우리 나라에 사설 탐정 제도가 허용되면 일착으로 신청할 겁니다. 뽀와르 국산판이니까요."
문호가 형규를 보며 씩 웃는다.
"이 친구... 누굴...뽀와르 머리로 친다면에 네가 나보다는 훨씬 몇수위지. 뽀와르가 회색 뇌세포라면 자넨 아주 까만 뇌세포 소유자 아냐?"
"그럼 난 멍청하게 밤낮 컴컴한 미로만 헤매고 다닐 테니... 어쨌거나 오리무중 헤매는데야 내가 도사지. 그렇지 않구서야 지금 내가 여기 있을 리가 없잖아. 안 그래?"
셋은 윤 의사가 준비한 차를 마시며 그렇게 웃고 있었다. 찻잔이 물러가자 문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윤 형, 고강진 검시 결과가 어땠습니까?"
"검시 결과요? 차차 이야기하겠지만 꼭 이상한 상처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상한 상처요?"
"네, 아주 이해할 수 없는 상처였습니다, 목에 무엇인가에 물린 자국이 있는데 어린아이 이빨 자국으로 보기에는 치흔의 수량이 너무 많고 어른의 이빨 자국으로 보기에는 끝이 너무 예리하고 크기가 작단 말이에요. 그렇다고 짐승 이빨로 볼 수도 없고."
"어떤 판단이 서는 것 같습니까?"
"글쎄, 그게 다른 것은 선명하게 나타났는데 그 이빨 자국이 좀. 아무튼 사람 이빨은 틀림없는데 특수하단 말이에요. 틀니는 절대 아니구."
"그 외에 다른 것은."
"피는 O형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망 원인은 질식사인데 목에 나타난 흔적으로 보아 두 손으로 눌러 죽인 겁니다. 상처의 깊이로 보아 아주 강인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위에서 검출된 것은 약간의 고기류와 알콜이 있구요. 독물을 사용한 흔적은 없습니다."
이때 혈액형 얘기가 나오자 문호가 머리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윤 형, 이거 전에 어디서 들은 얘긴데 말입니다. 에, 부모의 혈액형을 알면 자녀의 혈액형을 알 수 있다는 게 이게 가능한 얘깁니까?"
문호의 질문을 받은 윤 의사는 서랍에서 커다란 대학 노트를 꺼내 뒤적이고 있었다. 형규가 몹시 흥미를 느꼈는지 의자를 당겨놓고 눈을 크게 떴다. 이 꼴을 보던 문호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껄껄거렸다.
"야 형규, 하하... 왜 아버지 어머니가 가짜 같아? 내가 알기로는 자네 부모님은 틀림없으니까 걱정 말라고."
"또 지랄이군. 그래 그 얘긴 저도 들은 것 같습니다. 어떤 겁니까?"
노트를 뒤적이던 윤 의사가 어느 페이지인가를 펼쳐보았다.
"자, 이걸 보라구."
노트에는 부모 혈액형 간의 곱하기가 있고 옆에는 자녀의 혈액형 비고에는 O X로 구분한 표시가 있었다.
"어때 알아보겠어요? 이건 정확한 데이터예요. 가령 아버지나 어머니가 모두 O형인데 아들이란 자가 나타나서 조사해 보니까 피가 B형이다 . 그러면 그건 가짜예요. 혈액형엔 또 재미있는 게 있어. 혈액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외에도 RH형이 있고 이것도 Rh, Rh^3^, Rh^3,3^, RhO, Rh^2^, Rh^23^는 것도 있지요. 그리고 이것을 분류한 새로운 응집형 즉 모든 피에는 유전성이 응집원인 M형, N형 MN형으로 도 구분합니다. 이러한 혈액의 이중 조사를 하고 나면 친자 유무는 거의 판명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과거보다 훨씬 정밀하게 나타나죠."
자세히는 알 수 없었으나 앞서 기록된 혈액형 구분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이 도표를 보던 형규와 문호는 순간적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형규가 알았다는 듯 윤 의사에게 머리를 돌렸다.
"저, 고강진 모친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뭣 좀 알아보고 싶은데요."
"글쎄요. 아마 대기실이나 어디 있겠죠. 왜 무엇을 알아보시려구요?"
"미안하지만 간호원을 시켜 혈액형을 조사하고 싶은데요. 수사상 필요해서..."
문호가 윤 의사에게 정식으로 요청했다. 고강진이 김만호의 아들이란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혈액형부터 조사해서 이상이 없어야 했다.
그러자면 서울에 와 있는 고강진 어머니와 부산에 있는 김만호 그리고 고강진의 혈액형을 대비해 볼 필요가 있었다.
윤 의사가 간호원에게 지시하자 문호는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 더 질문을 했다.
"사실 이번 사건 때문에 골치거든요. 범인이 탈출한 자리에서 꽁초와 빈 콜라병이 수거되어 조사했는데 전혀 지문이 없어요. 그래서, 혈액형을 알아봐 달라고 의뢰했는데 결과가 나올까요? 또 정확할까요?"
"경우에 따라서는 정액이나 침을 통해서 혈액형을 알아낼 수도 있지요. 정액이나 침 외에도 눈물, 땀, 오줌, 담즙 심지어는 젖에서까지 혈액이 밝혀집니다. 그러나 A형, B형, O형, AB형의 피를 가진 모든 개개인의 혈액이 항원체를 분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누구나 다 침이나 눈물, 정액 따위로 혈액형을 누출시키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입증된 바에 의하면 분비자와 비분비자의 형태에서 그 비율은 70대 30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다 모든 걸 의존할 수는 없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침 속에다 혈액형 항원체를 분비하는 힘은 개인의 특성으로 '멘델'의 우세 지배 법칙에 따라 유전까지 한다는 것이죠."
둘은 윤 의사의 설명을 일일이 노트에 기록하고 있었다.
"이거 오늘 큰 공부했는데요."
"그럼 수업료 내셔야죠."
다분히 밝은 성격에 유머 감각까지 갖춘 윤 의사는 계속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혈액형은 그렇다치고 문제는 그 이상한 이빨 자국인데. 내 기억으로는 배운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만... 아무튼 이빨 자국의 이해할 수 없는 비밀도 오늘 중으로는 밝혀질 겁니다. 이빨 형태가 특이한 것은 특수 체질이거나 특수병을 앓고 난 사람의 증후일 테니까요. 또 범죄를 위해 이빨에 무엇인가를 만들어 씌우고 물어뜯었는지도 모르구요."
이때 간호원이 들어왔다. 고강진의 어머니 혈액형은 O형으로 나타났다. 어느 누구가 물어와도 고강진의 과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응답도 없는 고강진의 어머니. 그는 과연 김만호와 어떤 관계일까.
"고강진 모친의 혈액형은 무엇에 쓸 겁니까?"
윤 의사가 의아한 듯 묻자 문호는 그제서야 수사 내용을 설명했다.
"알다시피 고강진이 탤런트로 성공하자 이상한 가십이 떠돌기 시작했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온 그의 아버지가 누구냐 하는 거였죠. 항간에서는 유명한 정치가다. 아니다, 모 재벌의 아들이다. 또 어떤 사람은 처음엔 학자였는데 나중에 스님이 되었다는 등 별의별 소리가 다 많았죠. 처음엔 중이 된 학자 출신이라는 말이 지배적이었답니다. 그 원인은 고강진의 본명 때문이었죠. 김석오, 좀 불교 냄새가 납니까. 입담 좋은 사람이 여기에 착안해서 퍼뜨린 루머였죠. 그런데 최근 모 기자가 추적한 바에 의하면 고강진의 아버지가 김만호라는 재벌이라는 게 가장 유력한 말이랍니다. 문제는 거기 있죠. 무엇이냐 하면 이번 사건에 강력한 공범으로 떠오른 사람이 김만호와 아주 밀착되어 있다는 겁니다. 오늘밤 부산에 가려고 하는데 가기 전에 혈액형을 조사해 보려구요."
"아, 그렇군요. 진작 얘기하시지. 자 그럼 몇 가지 더 알려 드릴께요. 아까도 잠시 말했지만... 노트 꺼내서 메모하세요. 이런 건 알아두는 게 좋으니까. 아까 말씀 드렸던 M, N, MN형은 1928년 란트 슈나이터라는 사람과 레빈이라는 사람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이 응집원에 포함되지 않은 피는 하나도 없습니다. 혈액을 조사할 때 이것도 함께 조사하면 더욱 확실합니다. 이것으로 친자 확인을 하는방법도 있으니까요. 아까와 같은 공식 도표가 있습니다."
윤 의사는 다른 도표를 건네 주면서 일어섰다.
"기록하고 계십시오. 그동안 나는 고강진 어머니의 혈액을 확인할 테니까요."
윤 의사가 나가자 둘은 노트에 옮겨 쓰기 시작했다.
"이거 참 별 게 다 있군."
"응, 세상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 그거 위험 천만이야."
"그럼 아까 직접 혈액형하고 이 응집원 양쪽 다 조사하면 거의 80, 90%는 맞겠는데 응? 잘못 바람 피우다 큰 코 다치겠어."
"야, 넌 소위 신문 기자라는 게 바람 필 궁리만 하고 있냐. 점잖지 못하게."
"웃기지마. 그냥 해 본 소리야."
둘이 신비로운 듯 도표를 보고 있을 때 윤 의사가 돌아왔다.
"기록 끝났습니까? 자, 혈액 조사가 끝났습니다. 고강진은 N형이고 어머니는 MN형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어머니와 같은 MN형이어야 하고 어머니나 고강진이 O형이니까 아버지도 따라서 O형이어야 합니다. 참 운이 좋군요. 둘 다 똑 떨어지는 피를 가지고 있어서 만일 부산 가서 조사할 수 있으면 해보십시오. 보나마나 아버지는 O형에다 응집원이 MN일 테니까요. 뭐 심지 뽑기도 아니고 과학적 반응으로 뽑는 거니까 틀림없을 겁니다."
"이거 정말 뜻밖의 수확인데. 수업료 단단히 내야겠습니다. 술 한잔 사죠."
"아니 술 한 잔으로 묶으려고 흥 어림없는 소리 마쇼. 허허."
셋은 그렇게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때맞춰 일어났다.
"정말 오늘 여러 가지로 고마웠습니다. 부산 갔다와서 다시 들르겠습니다. 아 문호, 지금 고강진 어머니 만나보는 게 어떨까?"
형규가 문호를 바라보며 제의했으나 문호는 이미 그에게서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둘은 그대로 병원을 빠져나왔다.
"아주 재미있는 자료야. 김만호가 아무리 우겨대도 혈액형 가지고 족쳐대면 군소리 못하겠지? 그 외에 또 수사하다 보면 무슨 꼬투리가 잡혀도 잡히겠지."
"문호, 자네 부산엔 언제 갈 거야."
"부산? 오늘밤 9시 45분 특급 열차 그 범인이 탔던 침대차로 갈 거야. 03-15 바로 성기준이 타고 있던 자리야 예약해 놓으라고 했어. 가면서 연구 좀 해보게."
"그래? 내가 따라가도 될까?"
"좋지, 단 조건이 있어 넌 지금부터 신문 기자 자격이 아니라 형사, 내 조수격으로 가는 거야. 딴 데서 알면 아우성칠 테니까."
"좋아, 그럼 이따가 역에서 만나자구."
형규의 차에서 내린 문호는 본부로 다시 돌아왔다. 전화기 밑에 무엇인가 적혀 있는 메모지가 깔려 있었다.
발신: 부산 시경 형사 과장 곽영근
수신: 박문호
시간: 15시 20분
내용: 금일 중 부산 시경 출장 요망.
#1 김만호 및 고강진에 관한 수사 협조
#2 김만호에게 의혹이 발견됨
#3 고강진 피살과 관계 있음
메모를 보던 문호가 벌떡 일어났다.
"이 메모 누가 받았지?"
"제가 받았는데요."
여자 사환이 문호를 빤히 보며 대답했다.
"다른 얘긴 없었어?"
"예, 다른 말씀은 없고 오늘 꼭 내려오셔야겠다고 하셨어요."
"부산 시경 곽 과장한테 전화 걸어서 내가 오늘밤 9시 45분에 떠난다고 해. 그리고 또 다른 전화는."
"최찬일 형사님한테서 전화 왔었어요. 전화 또 걸겠다고 기다리시라구요."
말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벨이 때르릉 하고 울어댔다. 문호가 잽싸게 받았다.
"누구? 누가 돌아왔다고."
"이화영이요. 왜 고강진하고 싸웠다던."
"도대체 누구십니까?"
"아이구 죄송합니다. 급한 마음에 저 지 실장입니다. 지대로."
"아, 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그리로 가겠습니다."
문호는 지체하지 않고 S-TV를 향해 달렸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그런지 사람들이 동동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차창으로 흐르는 건물과 건물 아래로 거니는 사람들, 거리의 풍경으로 보아서는 세상에 아무런 일도 일어날 것 같지가 않은 평화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이런 외형적인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가슴 속에 있는 감정과 얽혀 있는 이해 관계, 그리고 사랑과 증오, 갈등 같은 것이었다,
인간은 인간끼리 얽혀 비극을 창조해 내고 있었다. 미워하고 죽이고 복수하고, 그리고 또 한무리에 서는 이를 해결하러 쫓아다니고 참으로 알수 없는 인간 세계였다. 착잡한 마음으로 창 밖의 거리를 보던 문호는 육교 난간을 거의 다 내려와서 그만 넘어지고 만 어린아이를 발견했다.
괜찮을까. 추운데 많이 다치진 않았을까. 갑자기 넘어져 뼈라도 상하진 않았을까. 얼핏 본 어린아이 넘어지는 모습이 한동안 마음에 걸려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한 곳에 멈춰졌다.
응! 사람이란 게 꼭 그렇게 쓸모없는 존재만은 아니야. 가끔 이런 착한 생각이 들 때도 있으니! 혼자 빙긋이 웃고 있었다.
차가 멈춰졌다. S-TV 광장에 도착한 것이다. 낯익은 건물이라 지 실장을 찾는데 그리 힘들지 않았다. 지 실장은 문호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옆에는 웬 아가씨가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이구, 오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날씨가 무척 쌀쌀해졌죠?"
"감사합니다. 이 아가씨가 바로 이화영 씨인가요?"
"네."
"지 실장님 잠깐만 자리를 비켜 주시겠습니까?"
문호와 이화영 둘만이 남았다. 형사와 탤런트로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서 심문하고 싶었다.
"이화영씨 그동안 어디 있었습니까?"
"..."
"납치되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처음부터 이야기해 주십시오. 상황이야 어떻든 타인에 의해서 강제로 감금되어 있었다면 누가 왜 그랬는지를 알아야 하거든요. 지금 상황은 이화영씨가 생각하고 있는 거보다 훨씬 더 큽니다."
"..."
"이화영씨 하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알고 있겠지만 고강진이 죽었습니다."
"어젯밤 늦게 알았어요."
"늦게요? 어제 아침부터 방송이 나갔는데 도대체..."
"죄송합니다."
"말씀을 하셔야죠."
"저...사실은... 그저께 그러니까... 사실은 지 실장님한테도, 아직..."
"괜찮아요. 말씀하세요. 잘못하면 이화영 씨에게 아주 불리합니다."
"저, 사실은 제가 납치당했다고 신고한 건 제가 고의적으로 그랬던 거예요."
"고의적으로? 왜요?"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아까 지 실장님한테 말씀 듣고 제 입장을 비로소
알았는데... 사실은 저는 그 시간에 어떤 분과 근교 별장에 있었어요. 같이 가자구 자꾸 졸라서 따라간 것뿐이에요. 정말이에요."
이화영은 말끝도 못 맺고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우는 이유는 알수가 없었다. 자책감이 발동한 것만은 분명했다,
요점은 그 시간에 누구와 무슨 짓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와 같이 있던 사람이 왜 하필 그 시간에 이화영을 초대했으며 그것이 이화영 개인을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고강진 살해를 위해서였는지 그게 문제였다.
그러나 짐작컨대 이화영 자신과는 큰 관계가 없을것 같았다.
"같이 있던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
"대답하세요."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소리를 빽 지르며 위압을 넣었다. 아무래도 혼좀 나 봐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 실장님이나 이성구 이사님한테는 말씀하지 마세요. 그럼 말하겠어요."
"약속하죠. 그러나 확실하게 말씀하셔야 합니다."
"알겠어요. 사실은 R-TV 조남웅 이사님이랑 같이 있었어요."
"예? 조남웅."
"네."
"왜 거기에 그분과..."
"사실은 작년부터 절 스카웃하겠다고 했는데 제가 기간이 다 차질 않아서 마음대로 못 간다고 그러니까 그럼 가계약이라도 하자고 여러번 절 초대했어요. 어제는 사실 제 생일이었어요. 그래서 조 이사님이 절 초대했어요. 안갈수도 없고 핑계댈 수도 없고 해서 할수 없이..."
어이가 없었다. 고강진과 싸운 다음날 사라진 이화영. 그는 스카웃 싸움에 밀려 납치 연극을 벌인 것이다.
별장에서 벌어진 파티 때문에 라디오도 TV도 신문도 보지 못해 사건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화영이 고강진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짐을 덜어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남웅 이사가 아무리 고강진에게 모욕을 받고 드라마 작품에 곤란한 입장이 되긴 했어도살인에 가담할 만큼 큰 문제가 아니라서 그의 개입에 회의를 품고 있던 생각도 어느 정도 굳혀지게 되었다.
"납치 허위 신고를 하면 어떤 법에 저촉되는지 아십니까?"
"..."
"좋습니다. 이번 사건만은 묵인하겠습니다. 그러나 방송국 자체 제재만은 제가 과언하지 못합니다."
문호는 두 번 다시 그를 돌아보지 않고 방송국을 나왔다. 지실장이 미안한 생각이 들었는지 광장까지 배웅해 주었다.
문호는 속으로 조남웅 이사에 대한 불만이 싹트기 시작했다. 나이 어린 타 방송국 스타들을 이런 식으로 스카웃하려 들다니. 문호는 언젠가 한번 두고 보겠다는 식으로 벼르며 시내로 차를 몰았다.
두개의 현장검증
범인이 2인 이상일 것으로 생각하며 핏자국을 보고 있던 최찬일은 피가 땅에 떨어진 형태를 그대로 백지에 옮겼다. 그가 범인이 복수 이상일 것으로 판단한 것은 이 핏자국 때문이었다,
핏방울은 떨어진 높이에 따라 그 모양이 서로 다르다. 가령 핏방울이 3인치 정도의 높이에서 떨어지면 그냥 동그랗게 나타난다. 그러나 15인치나 50인 치가 넘으면 핏방울의 둘레는 톱날 같은 이빨 모양을 나타낸다.
그리고 피를 흘리며 뛰어가면 느낌표의 모양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아스팔트의 핏자국으로 보아서는 #1의 형태(동그란 형태)와 #4의 형태(느낌표의 모양)밖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는 칼을 맞으며 움직이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자면 누군가가 뒤에서 진남포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들고 있었고 앞에서 칼로 찔렀다는 것을 입증한다. 범인은 적어도 두 명 내지 세 명은 있어야 가능하다. 그 인원이 갑자기 어디서 어떻게 나타나서 그를 피습했고 또 진남포는 왜 소리 지르거나 구원을 청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범인들은 어디로 도주했을까.
아무리 부근을 뒤져 봐도 사람이 몰려 있었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또 있었다. 그것은 범인들이 진남포에게서 무엇을 얻고자 했나 하는 점이었다.
만일 그를 죽이겠다고 생각했으면 충분히 죽여 버릴 여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날씨는 짙은 안개가 끼여 시야를 가리고 있었고 상대는 여러 명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칼을 가지고 있었고 진남포는 맨 손이었다.
지금까지의 현장 검증으로 보아 범인들은 진남포에게 상처만 입히고 되돌려보낸 셈이 된다. 그렇다면 범인과 진남포는 서로 잘 알고 있는 면식범이란 말인가. 결코 우발적인 피습이 아님은 핏자국이 증명하고 있었다. 이러한 비밀의 자세한 내막은 오직 진남포만이 알고 있는데 오히려 진남포측에서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고 있다. 왜 그는 입을 꽉 다물고 있을까.
최찬일은 범인이 두 명 이상일 것이라는 추측과 칼에 찔린 후 곧바로 아파트로 돌아왔을 상황을 머리로 그려보면서 의문점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다음은 택시 머리에 별표가 그려져 있는 회사를 찾아야 했다.
택시 회사를 수배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를 것으로 생각되어졌다. 택시 회사라는 것이 너무나 영세해서 다섯 대나 여섯 대만 소유하고 있어도 회사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는 시계를 들어다보았다. 바늘은 벌써 세 시를 넘기고 있었다.
저녁 6시에는 수사에 관한 종합 회의가 열린다. 아무래도 오늘은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았다.
택시 회사를 찾는 일을 뒤로 미루고 곧바로 갈매기 주점을 찾아갔다. 주모가 한가롭게 앉았다가는 벌떡 일어나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아이구, 이 양반 또 왔네, 어서 오슈. 뭐 이 근처에 애인이라도 있남. 이렇게 뻔질나게 드나들게."
"안녕하쇼. 순대 생각이 나서 또 왔죠. 순대 한 접시하고 소주 반 병만."
"에게게, 누구 코에다 묻히려고 반 병이야 반 병이."
"아녜요. 근무 시간이라 지금은... 아주머니가 잡숴 준다면 병으로 사죠."
"이 양반 이러다 정들겠어."
주모는 부지런히 움직이며 순대와 소주를 차려왔다.
"그래 배우 찔렀다는 거 어떻게 됐수. 잡혔수. 에이 무서워. 세상 참..."
"잡혔으면 내가 또 왔겠수. 근데 아줌마. 자, 우선 한잔 먼저 드시고."
최찬일은 주모의 비위를 한껏 맞춰 주며 질문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 참, 이 양반 오늘 올 때 가수한명 데려온다더니 왜 혼자 왔수 섭섭하게"
"아줌마두 참. 내가 가수를 데려오면 나한테 신경을 쓰겠어요. 질투나게. 난 밑지는 장사는 안 해요."
"어이구, 이 양반 좀 봐. 남자는 그저 그놈이 그놈이라니까."
이번엔 주모가 소줏잔을 내밀었다.
"근데 아줌마 한 가지 더 물어볼 게 있는데요."
"이거 앉자마자 술맛 달아나겠네. 그래 물어볼 게 뭐예요?"
"엊그제 자동차 봤다는 거 말이에요. 꼭지에 붙은 표시가 별표라고 했죠."
"예, 맞아요. 틀림없이 별표예요."
"그리고 차에서 내린 사람이 한 사람이라고 했죠."
"미쳤수? 내가 거짓말하게 분명히 한 사람이었어요."
"그 후에 무슨 소리 못 들었습니까? 가령 사람 발자국 소리라든가 아니면 비명 소리 아니면 자동차 소리 같은 거..."
"그런 건 못 들었는데. 보다시피 우리 가게 문닫는다고 해야 앎은 철판 하난데. 사람이 뛰어가거나 자동차가 지나갔다면 그 소리를 못 들을 리가 없지."
"가게 문닫고 바로 주무셨나요?"
"웬걸요. 내 팔자에 가게 문닫는다고 바로 잠자리 들 수 있나요. 찬거리 준비하고 쌀 앉히고 순대거리 썰어놓고 한 시간 이상은 꾸물거려야... 아니 그런데 그런 건 왜 자꾸 물어요. 이 양반 방송국 있다는 거 아무래두 공갈 같애. 진짜 방송국 사람 이에요? 혹 경찰 아니우."
"아, 나참. 아니라니까. 그런데 내가 형사라면 이렇게 묻겠소? 공식적으로 대하지. 아무 생각 말고 쇠주나 한잔 더 합시다. 가야 할 시간 됐으니... 그런데 아까 말한 거 틀림없죠?"
"틀림없다니까. 원 의심두."
"자, 그럼."
최찬일이 막 일어서려는데 주모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나 저나 단골이 하나 줄었으니 어쩐담. 안 되려니까, 참."
"단골이 줄다뇨. 난 또 올 텐데."
"아따 누가 댁 얘기한 줄 아시우? 그 배우 말이에요. 다쳤다는 배우."
"그 배우가 여기 단골이었습니까?"
"뭐 단골이라고까지 할수야 없지만 자주는 들렀죠. 근데 요즈음 통 우울해 보이더라니. 웬만하면 농담 한두 마디는 꼭 하고 가는 사람인데"
진남포. 그는 평소 많은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때때로 이 갈매기 주점에 들러 한 잔씩 마시고 들어가는 편이라고 했다.
그런데 요즈음 와서는 왠지 우울해 보이고 말수도 퍽 적어졌다는 것이다. 아무튼 사고가 나기 직전부터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변화가 일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의 주변, 그만이 아는 변화. 그것의 요인은 무엇일까.
최찬일이 현장 검증을 마치고 본부로 돌아오자 회의가 바로 시작되었다. 박문호를 중심으로 최찬일, 성기준을 맡고 있는 김형사와 최찬일을 돕고 있는 이 형사, 마포서에서 차출된 임 형사 등이 회의탁자에 둘러앉았다. 회의가 시작될 무렵에서야 최 형사의 지시를 받고 별도로 활동하던 진 형사가 헐레벌떡 쫓아 들어왔다.
"이제 다 모였군. 오늘 상황들 보고해."
박문호가 최찬일을 돌아보았다. 임무의 비중으로 보아 순서는 당연히 그로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최찬일이 수첩을 꺼내며 얼굴을 긴장시켰다.
"먼저 안마시술소에서 얻은 정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진남포는 그가 피습당하기 전 날 안마소에 들러 동생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때 이 대화를 들은 자가 나타났습니다. 이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동생이 오빠인 진남포에게 '오빠에게 미안하다'는 투의 말을 되풀이했고 진남포는 '애송이 같은 자식 죽여 버리겠다'고 했답니다. 그러나 자세한 내용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진남포는 동생에 관계된 일로 누군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고 또 동생은 오빠에게 무엇인가 피해를 준 것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또 진남포는 동생에게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놀라지 말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다음 진남포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진남포는 가슴에 대여섯 번 찢긴 칼자국이 있는데 순서를 보아서는 먼저 가슴을 베이고 다음 옆구리를 당한 것 같습니다. 의사의 소견으로는 출혈은 좀 있었지만 칼이 위험 부위를 아슬아슬하게 피해가 위험하진 않다고 했습니다. 저는 진남포가 피를 많이 흘렸다는 말을 듣고 그가 아스팔트에서 습격당했을 때 흘린 핏방울 생각이 나서 다시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다행히 핏자국은 그대로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는데 핏방울의 형태로 보아 범인은 두 사람 이상이었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피는 지상에서 약 15인치 정도에서 떨어진 것 같은데 칼에 찔린 후 곧장 아파트로 달려간 것 같았습니다. 여기서 의문점이 몇 개 발견되었는데 첫째, 진남포가 힘이 장사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왜 이 사람이 저항을 하거나 소리질러 구원을 청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둘째, 범인은 진남포를 꿇어앉게 하고 칼로 그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핏방울이 떨어진 흔적으로 보아 15인치를 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제가 어제 갔다온 '갈매기 주점'의 주모에 의하면 최근 진남포가 몹시 우울해 있었다는 점입니다.이상입니다."
최찬일이 보고를 마치자 메모를 하던 문호가 이상한 듯 머리를 갸웃거렸다.
"고생했구먼, 이 보고 말야. 내일 한 시까지 서면으로 정리해서 올려 . 다음 택시 회사는 어떻게 됐지?"
문호가 이 형사를 바라보자 이 형사가 머리를 숙이고는 대답했다.
"택시 머리에 별표가 달린 회사는 여덟 군데도 넘었는데 겨우 다섯 군데만 돌았습니다. 그나마 비번자들이 많아 다 만나보지는 못했습니다."
"할 수 없지. 내일 또 만나기로 하고 다음 김 형사는, 추운데 혼났지?"
"저는 일단 S-TV에 들러서 중요 간부의 사진을 입수했습니다, 그리고 성기준의 집 앞에서 종일 진을 치고 있었는데 별다른 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김 형사는 다리가 아픈지 계속 두 손으로 허벅지를 두드리고 있었다. 김 형사뿐만 아니라 모두가 녹초가 되어 있었다. 적은 수사비를 아껴 가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부하들이 딱하게 보였다.
오늘 부산 가기 전 회식이나 시켜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주머니를 뒤져 보니 출장비 외에 약간의 여유 돈이 있었다. 본격적으로 돌입한 수사 첫날 무슨 큰 수확이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오늘 최선을 다해 뛰었다고 판단했다. 미국이나 영국 아니 가까운 일본만 해도 수사 조건이 우리 나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현대화되어있다. 장비에서부터 인원, 수사비까지 충분히 갖추어져 있으나 우리 나라 실정으로는 일인삼역까지 해내야 한다.
그래도 우리 나라 수사 요원들은 어느 나라에 못지 않게 민활하게 움직이고 있고 또 그만큼 해내고 있었다. 우리 민족 특유의 끈기와 승부욕이 이를 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문호는 이 점이 자랑스러웠다.
문호는 내년 에 미국에 교육받기 위해 출국하기로 되어 있었다. 특수 훈련까지 받고 FBI식 수사 방법도 배우게 되어 있었다. 욕심 같으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요원과 함께 가서 견문과 지식을 넓히고 싶었지만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 못하는게 못내 아쉬웠다.
성기준의 집 근처에 잠복해 있던 진 형사의 보고 내용도 별다른 점은 없었다. 종일 집 근처에서 어슬렁거려 보았지만 별달리 출입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도 오늘 수사 중 최찬일이 가장 많은 성과를 올린 셈이었지만 그러나 결과는 하나도 없었다. 더 이상 회의를 진행한다고 해도 별 뾰족한 수는 기대할 수 없었다.
문호는 최찬일에게 오만 원을 건네 주었다.
"오늘 고생들 했으니 어디 가서 저녁들이나 먹고 퇴근해. 난 좀더 있다가 퇴근할 테니까. 그리고 오늘 밤 9시 45분 특급 열차로 부산에 갔다가 내일 오후에 올 거야. 그동안 무슨 일이 있으면 잘들 좀 챙기라구. 내려가서 수시로 전화할 테니까. 아무래도 이번 사건은 내가 부산에 갔다와야 마무리가 지어질 것 같아. 너무 마음 조이지들 말라구. 제까짓게 뛰어봤자지. 꼭 잡힌다는 신념들 잊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자, 오늘은 이것으로 끝을 내자구."
요원들을 돌려보내고 난 문호는 이 사건이 의외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고 또 미묘한 상황이 겹쳐지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강진 피살과 진남포의 피습 사건의 연결성 문제였다. 탤런트이며 가수인 이화영 증발 사건은 제발로 걸어왔으니 의외로 싱겁게 끝난 셈이지만 이번의 두 커다란 사건은아무래도 소홀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부산에서는 김만호와 성기준이 깊은 관계로 밀착되어 있음을 냄새 맡고 수사를 착수한 것이 틀림없고 또 진남포의 동생이 부산에서 죽었다는게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문호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두 사건을 연결시켜주는 '끈'이 좀체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고강진과 진남포 두 사람이 같은 작품에 출연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평소 진남포가 고강진에게 죽어지내며 왔다는 점. 고강진이 진남포에게 함부로 대해 진남포의 자존심에 여러번 상처를 입혔다는 둘만의 감정 문제가 짙게 깔려 있기는 해도 이 두 사람을 동시에 공격할 제 3의 인물이 나타나지 않는 점이었다.
고강진이 이성구 제작 담당 이사에게 진남포와 같이 공연할 수 없다고 버틴 점이나 어린 고강진이 진남포에게 잔심부름을 시켰다는 둘만의 관계 외에는 어떤 인물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고강진은 새로운 작품을 맡을 때마다 한두 명의 희생자가 있었다고 하니 꼭 그것을 문제 삼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더구나 진남포의 뒤에는 자살한 여동생 이 있고 진남포 자신에게는 자칫하면 생명을 잃을 뻔한 피습 사건이 있었다.
이러한 복잡한 관계도 머리를 아프게 하려니와 범행 현장, 두 사건의 범행 현장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애꾸의 증발 방법, 성기준의 이상한 진술, 김만호의 클로즈업 그리고 진남포의 갑작스러운 피습과 동생의 자살이 한데 얽혀 풀어지지가 않았다.
방법은 민형규의 의견대로 하나하나 풀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문호는 생각을 잠시 멈추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오후 7시 30분이나 되었다. 열차 시간까지는 그래도 두 시간이나 남았다.
문호는 천천히 일어나며 스케줄을 짜보았다. 두 시간의 시간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문호는 진남포가 입원한 병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야근 담당 의사와 간호원 몇이 2층 카운터에서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문호가 카운터를 지나 병실로 들어가려는데 간호원이 저지했다.
"저 선생님, 어디 가세요?"
"저요? 706호 병실에 가는데요."
문호가 간호원을 보며 대답하자 간호원이 문호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면회는 지금 안 되는데요. 내일 오세요."
하고는 돌아앉는다.
"나, 형 되는 사람입니다."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병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간호원이 뒤따라오지는 않았다, 그저 형식적으로 한 마디하고 만 것이다. 문호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진남포는 침대의 등을 15도 정도의 각도로 높이고 멍하니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문호가 옆으로 바짝 다가서자 비로소 자기의 방문객임을 의식했는지 고개를 돌렸다. 안색이 창백하고 여위어 보였다.
"진남포 씨죠? "
"네."
"좀 어떻습니까? 아픈 데는 없습니까?"
"..."
"아직 치료중인데 미안합니다. 특수반 박문호 형삽니다."
문호가 신분을 밝히며 의자로 다가앉았다. 얼굴에 미소까지 띠었다. 이때까지 평화스럽게 누워 있던 진남포가 갑자기 고개를 반대편으로 홱 돌리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대화의 실마리가 풀리는지 문호는 잘 알고 있었다.
부하가 몇 번이나 다녀갔지만 어느 누구도 정보나 상황을 얻어오지 못했다. 문호는 진남포의 이마를 짚어보며,
"열은 별로 없군요. 사실 제가 여기 온 것은 진남포씨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문호가 손을 떼지 않고 귀에다 속삭이듯 말하자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박영숙! 당신의 동생 문제로 온 겁니다."
단 한 마디에 진남포는 눈이 휘둥그래지며 몸을 움츠렸다.
그러다가 통증이 심하게 오는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처음의 위치대로 다시 누웠다.
"영숙이, 영숙이한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내가 여기 있는거 말하지 마세요."
"동생이 걱정되십니까? 소식이 궁금하죠."
"영숙이... 걔... 불쌍한 애예요."
"몸은 좀 어떻습니까? 의사는 뭐라고 그러구요. 빨리 일어나셔야죠."
"가슴에 칼로 그은 자리는 괜찮은데, 옆구리가 움직이면 쑤셔요. 한 2주는 더 지나야 완치되겠답니다."
"방송국에선 누가 왔다갔습니까?"
"네, 지 실장님하고 동료 탤런트들이 왔다갔구요. PD도 왔다갔어요. 그보담도 영숙이가..."
그러나 이 시점에 그것을 밝힐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만일 그의 마음에 동요가 일면 어떤 행동으로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문호는 동생의 이야기를 꼬투리로 피습 상황을 알아보려고 있는 지혜를 다 짜며 접근해 갔다. 동생의 얘기가 나오자 마음이 흔들리는지 얼굴이 몹시 일그러졌다. 그는 문호에게 담배를 얻어 깊게깊게 빨아들였다.
"영숙이 정말 별일 없죠?"
"네, 그런 걱정 마시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주십시오. 진남포 씨를 습격한 사람은 누구며 또 몇 사람이나 되었습니까? 좀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모르겠습니다. 정말. 너무 갑자기 당한 일이라 뭐가 뭔지."
"아는 얼굴은 없었습니까?"
"기억이 잘... 아무튼 아는 얼굴은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안개 속에서 갑자기 당한 일이라."
"왜 소리 지르거나 맞붙어 싸우지 않았습니까?"
"정말 그럴 정신도 없었어요."
"뒤에서 누가 붙잡은 사람은 없었습니까?"
"뒤에서요? 그런 것도 같고... 아무튼 너무 갑자기 당해서."
"당할 때 어떻게 당했습니까? 그때 상황을 좀..."
"제가 바람을 쏘이려고 아파트를 나와서 빈 공터 방향으로 걷고 있는데 누군가 갑자기 나타나서 옆구리를 찌르기에 그만 엎어졌죠. 그런데 칼로 다시 가슴을 마구..."
그는 갑자기 통증이 오는지 얼굴을 찡그리며 두 손으로 침대살을 움켜잡았다. 문호가 벌떡 일어나 부축해 주었다.
"이거 불편하신데 실례가 너무 많군요. 한 가지만 더 여쭤 보고 가겠습니다. 왜 이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뭐 마음에 집히는 일이라도. 사실은 영숙 씨 하고 잠깐 얘기를 나누었는데..."
"영숙이가 선생님한테요? 선생님은 뭔가 거짓말 하시는 것 같은 데요. 영숙이는 내가 왜 입원하고 있는지를 모를 텐데요. 선생님 정말 영숙이 별일 없죠. 정말 영숙이 만난 거죠 . 개 이리로 좀 오라고 해주세요. 그러면 말씀 드릴 수 있어요. 영숙이 영숙이만 있으면 다 말씀 드릴께요. 으흐흐..."
그는 말끝도 맺지 못하고 동생을 보내달라며 짐승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문호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내용으로 보아 입원하게 된 사유를 동생이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는 왜 동생이 있으면 모든 걸 털어놓겠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문호에게 확실한 것은 지금 진남포의 동생, 죽은 박영숙을 이곳에 데리고 올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동생은 내일이라도 데려올 수 있습니다. 이 밤중에 데려올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가서 내일 오라고 할까요?"
"아 아니 괜찮습니다. 그런데 아까 동생 때문에 오셨다고 하셨는데 무슨 일입니까?"
"사실 영숙씨는 오빠가 입원하고 있는 것에 몹시 마음이 상해 있습니다. 자꾸 죽고 싶다고 하고 있어요. 그 이유를 알고 싶어 그러는 겁니다."
"..."
"동생과 무슨 일이 있는지 말씀해 주실수 있습니까?"
"동생 좀 잘 보살펴 주세요. 정말 불쌍한 애예요. 걔는..."
진남포는 시트를 뒤집어쓰고 다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잠잠해지기는 했지만 다시는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그렇게 10여 분이나 앉아 있었다. 웬일인지 마음에 구름이 낀 것처럼 무거웠다 . 더 이상 앉아 있을 수만 없어 다시 카운터로 나왔다. 의사는 보이지 않고 간호원 두 명만이 앉아 있었다.
"저 간호원 아가씨."
"네? 무슨 일이시죠."
"706호 진남포씨 말입니다."
"..."
"진남포 씨 병력 카드나 기타 질문에 답하실 만한분안 계십니까?"
"뭐 때문에 그러시죠. 지금 야근 담당 과장님이 계시기는 한데."
문호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신분증을 보여 주었다.
"미안합니다. 오늘 꼭 좀 뵙고 알아봐야 할 일이 있어서요."
"네, 경찰이시군요. 그러시다면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간호원이 여기저기 전화를 걸더니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 2충에 가시면 박용규 박사님이 계실 거예요. 가서 만나보세요"
"감사합니다."
문호는 간호원에게 가벼운 목례를 보내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순식간에 2층에서 멈춰섰다. 사무실에는 간호원들이 카드를 정리하고 있었고 박용규 박사인 듯한 중년의 남자가 신문을 보고 앉아 있었다.
"저 박용규 박사님 맞습니까?"
"네, 맞는데요. 아 조금 전에 전화받았습니다. 앉으시죠."
"이거 밤중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오나가나 죄송하다는 말에 바쁜 날이 되어 버렸다. 범인 수사하는 데도 여기 가서 '죄송' 저기 가서 '죄송' 이 짓도 못해 먹을 짓이라고 생각하니 피식 웃음까지 나왔다.
"뭐 여쭤 보실 말씀이라도."
"배우 진남포 말입니다. 피습당해서 상처를 입었다는데 상태가 좀 어떤지. 또 상처 부위는 어떤지 좀 알고 싶습니다."
"아, 그 조역 배우라는 사람 말이죠. 내가 회진하고 왔습니다만 전혀 말이 없는 사람이더군요. 에... 또."
그는 캐비닛에서 무엇인가를 한참이나 뒤적이더니 카드를 한 장 뽑아냈다.
"진남포. 혈액형은 AB형이구요. 상처는 오른쪽 배 방향으로 약 15cm, 10cm, 20cm, 8cm가량의 칼자국이 있구요. 옆구리를 찔렸군요. 옆구리는 그리 깊이 찔리지는 않았는데 옆으로 약 4cm가량 찢어졌습니다. 출혈이 많았던 것은 이때문이었지요. 다행히 본인이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고 또 헝겊으로 틀어막아 위험한 고비는 넘긴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의식도 완전히 회복되었고 회복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실이나 뽑고 사후 관리만 잘 하면 곧 퇴원할수 있을 겁니다. 자, 이 그림을 보시죠."
박용규 박사는 상처 부위를 그련 그림을 보여 주었다. 그림으로 보아 상처는 몹시 심하게 보였다.
"상처로 보아 위에서 아래로 내려그은 자국이 분명합니다. 여러 번 그은 것으로 보아 순식간에 당한 것 같습니다."
"순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에, 대략 이런 경우 먼저 가슴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긋고 다음 이 상처를 감싸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순간 옆구리를 찍은 것이 아닌가합니다."
"그래요? 그럼 진남포는 엉겁결에 당해서 잘 모르고 있는 것 같군요. 그는 옆구리를 먼저 당한 것 같다고 하던대."
"환자야 뭐 압니까? 그럴 땐 정신 하나 없어요, 죽을 경우가 돼도. 가령 옆구리가 찢어져 창자가 밖으로 나와도 이것을 움켜쥐고 5, 6m는 뛰다가 죽는 게 사람이니까요. 그럴 땐 아픈 것도 모릅니다."
문호는 상처를 그린 그림을 다시 자기 노트에 섬세하게 옮겨 그렸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이거 혼자서 상처 입힌 것으로 보입니까? 아니면..."
"글쎄요. 이 칼자국으로 보아 습격해서 칼질을 한 사람은 한 사람이 분명합니다."
"제 추측입니다만 가령 한 사람이 뒤에서 붙잡고 앞에서..."
"아니죠. 만약 두 사람 중 하나가 뒤에서 불잡고 앞에서 한사람이 그었다면 옆구리 상처가 이렇게 옆으로 찢어질 이유가 없습니다. 깊게 푹 찔렀다가 확 빼 버릴 테니까요 . 피습자가 칼로 가슴을 긋고 진남포가 허리를 굽히니까 그때 찔렀다고 보아야죠. 구부린 힘에 칼이 옆으로 빠진 거죠. 상처가 깊지도 않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살아있다는 게 범인이 하나라는 증거가 됩니다. 둘이라면 이 상처의 양상으로 보아 틀림없이 죽었을 것입니다."
"이 가슴의 상처는 깊이가 어떻습니까? 사람이 힘을 못 쓸 정도로 치명적입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4번의 상처 중 최초의 칼자국이 좀더 깊었으면 심장에 상처가 나서 치명타가 됐을 텐데 다행히 그곳은 피해갔습니다. 이 정도 상처야 애들 싸움에서도 종종 일어나죠. 상대는 힘이 약한 사람이 아닌가 합니다. 특히 #5번 옆구리 상처는 힘있는 사람의 솜씨가 아니에요."
"거 참, 이상하네."
"네?"
"아, 아닙니다."
문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박용규 박사에게 인사도 변변히 못하고 허겁지겁 병원문을 나섰다. 기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이다.
택시를 집어타고 서울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문호가 이상하다고 한 것을 의사가 알 리 없었다. 칼을 든 피습자가 힘이 약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의견은 타당했다. 그러나 힘이 강한 진남포가 비록 칼을 가졌다고는 하나 힘없는 사람에게 그토록 무자비하게 무너진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이미 최찬일 형사가 지적한 대로 같은 의문만이 계속 되풀이될 뿐이었다. 그러나 아파트 경비원의 진술에 의하면 피를 흘리며 돌아온 진남포가 '어떤 놈이, 어떤 놈이' 했다고 하니 그 피습자 신원을 진남포는 모르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또 칼이 몸을 다섯 번이나 찢도록 진남포는 아무런 방비도 못했다는 결론이다.
피습당한 상처의 순서가 뒤바뀌어 옆구리부터 찔렸다고 해도 전체적인 상황은 납득되지 않았다. 옆구리를 찔렸으니 허리를 굽혔을 테고 허리를 굽혔으니 가슴은 보호가 되었을 텐데 어떻게 칼로 긋는단 말인가.
또 가슴을 먼저 당했다면 옆구리를 찌르기 전에 도망하거나 피할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최찬일이 조사한 핏방울 흔적에 의하면 옆구리를 먼저 찔리고 그래서 주저앉으면서 피를 흘렸기 때문에 핏자국에 톱니가 생기지 않았다는 추리를 할수 있었다.
정말 피습당한 상황은 어떻게 생각해도 순서가 맞질 않았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는 사이에 차는 서울역에 도착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 때문인지 어깨들을 움츠리며 체온으로라도 추위를 이기려는 듯 어깨들을 부비며 옹기종기 서 있었다.
형규가 손을 흔들며 신호를 보냈다. 이미 침대 열차의 03-03과 03-15의 좌석을 예매해 놓았으므로 개찰 시간까지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되었다.
"왜 늦었어, 한참 기다렸는데."
형규가 문호의 어깨를 툭치며 짜증을 냈다.
"진남포 면회 좀 하고 왔어. 거기도 골치 아픈 일 뿐이야."
"자, 문호 부산갈 때까지 딴생각은 하지 말자구. 지금부터 범행 방법을 복습해 보는 거야. 범인이 사람인 바에야 무슨 트릭을 써도 썼지. 제가 무슨 의도의 마법사라고 펑 하고 사라져, 사라지긴. 안 그래? 자 꼼꼼히 생각해 보자구."
"허긴 그래. 그런데..."
이때 장내에 방송이 들려 왔다.
"경부선 21시 45분 특급 열차를 기다리는 분께 알립니다. 지금부터 개찰이 시작되오니 일렬로 질서 있게 서서 승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경부선 21시 45분 열차를 기다리시는 분은 이제 곧 개찰이 시작되오니 일렬로 질서 있게 서서 승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형규가 문호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드디어 떠나게 되었다는 표시였다. 그러나 병원에서의 알수 없는 상황을 생각하고 있는 문호는 무표정하게 표를 꺼내어 손가락에 끼우고는 일렬로 서 있는 대열로 끼어들었다.
이미 답사를 통하여 낯익은 03-03 좌석과 03-15 좌석을 하나씩 차지했다.
"내일 다시 올라올 텐데 웬 짐이야."
"어? 이거, 별거 아냐."
둘은 마주 보이는 커튼을 열어젖히고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를 빼어 물었다.
승무원이 다가와 표를 회수한다.
"부산까지 가시는군요. 부산 도착 10분 전에 표를 되돌려 드리겠습니다."
승무원이 돌아서서 다음 칸 사람에게로 갔다.
"이거 정말 불편하군. 이게 어디 침대차야 닭장이지. 구라파 여행했을 때 침대차를 타 보았는데 이건 숫제 호텔이더라고. 침대 한 칸이 작은 방만 했으니까. 이거야 원..."
형규가 구라파 취재갔을 때 이용했던 침대차를 머리에 떠올리며 투덜거렸다.
"야, 우리 나라 실정에 이것도 과분하지 뭘 투덜거려. 환자 승객이나 노인 승객에겐 아주 편리하겠어."
"허긴, 이 정도면 됐어. 또 아무리 걸려도 서울서 부산까지 5시간 30분 이상은 걸리지 않으니까."
둘이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 덜컹하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시작이야."
형규가 찡긋하고 신호를 보냈다. 03-15에 타고 있던 형규가 커튼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문호가 담배를 빼어 물고 03-15의 커튼을 열었다.
"형규 담뱃불 좀 빌려 줘."
"자-"
형규가 라이터에 불을 켜며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시선이 자연히 문호의 눈으로 옮겨졌다.
"어때?"
"이거 의식적으로 해서 그런지 눈이 자꾸 자네 눈으로만 가는구만. 그렇지만 대화를 나누었다면 얼굴을 안 볼 수 없지. 아무리 어두워도 횐자위 검은자위 구별 못할 정도는 아닌데... 아주 또렷이 보이잖아."
"됐어. 아무리 시력이 나빠도 이 상황에서 눈동자를 못 알아본다는 건 말도 안돼. 분명히 식별할 수 있어."
"그럼, 다음."
문호는 다시 신발을 벗고 들어가 커튼을 닫았다. 형규가 복도로 나서서 문호의 침대 앞으로 다가섰다. 문호가 커튼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형규가 복도 끝에서 걸어오며 커튼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역시 얼굴은 확실하게 보여 눈동자가 확실하게 보이거든. 그 정도면 이빨 빠진 거까지 알아볼 수 있겠는데."
"지금 몇 시지? 22시 40분. 조금 있으면 천안 도착 시간이야. 좀 쉬자구"
둘은 각기 자기 침대로 돌아가 누워 나름대로의 생각에 빠졌다.
지금까지의 실험으로 보아 눈에 착시 현상을 일으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사람이 사람 얼굴을 볼 때는 상대방의 눈부터 보게 된다. 그런데 검은자위를 흰자위로 보거나 흰자위를 검은자위로 볼수는 없다. 누군가 한편은 거짓말하고 있는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성기준, 그는 왜 애꾸가 아니라고 했으며 성기준을 불러내린 김만호는 어떤 인물일까? 얼마쯤 지났을까
덜컹하며 차가 멈추는 진동이 울려 왔고 이에 정신이 번쩍들은 형규는 커튼을 살짝 쳐들고 문호의 침대를 바라보았다. 커튼 사이에서 담배 연기가 하늘거리며 빠져나왔다. 머리를 커튼 속으로 집어넣고 속으로 다섯을 세기 전에 열차는 천안을 떠나기 시작했다.
"어때, 이때까지는 별일 없었지?"
"자, 그럼 지금이 23시 40분쯤 됐다고 생각하고 십분후에 내 자리로 다시 들어와 봐."
문호는 형규에게 각본대로 다시 자기의 침대를 확인하라고 일러놓고 커튼을 닫아 놓은 후 승강구 쪽으로 나가 출입문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그의 등을 덥썩 움켜쥐는 커다란 손이 있었다.
문호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문호의 각본대로 하자면 형규는 앞으로 10분 후 문호를 찾게 되어 있었다. 문호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디론가 숨고 형규가 이를 찾기로 했던 것이다.
만일 형규가 문호를 찾지 못하면 문호가 숨어 있는 곳이 범인이 있던 자리가 되고 만일 어딘가 숨을 곳이 없어 찾아낸다면 모든 공범 혐의는 성기준이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성기준이 공범이 아니라는 가정과 화장실에 아무도 없다는 전제하에 시작되는 게임이었다.
약 5, 6분이 지나자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참다 못한 형규가 벌떡 일어나 문호의 침대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침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복도를 훑어보았으나 문호도 승무원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3호차 승강구로 가보았으나 승강구에도 없었다. 형규는 땀이 촉촉히 배어오는 손바닥을 의식하고 있었다. 오늘 따라 3호차에는 손님도 별로 많지 않았다. 비어있는 침대를 일일이 조사해 보고 승강구까지 조사해 보았다. 승강구의 출입문도 안에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밖에서 매달려 있을 방법이 없었다.
끝내 문호의 그림자도 찾을수 없었다. 형규는 조심스럽게 2호차로 옳겨 갔다. 그때 2호차 첫번째 칸, 즉 화장실 맞은 편 작은 방에서 문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형규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거기서 문호는 승무원과 무엇인가 시비가 벌어진 듯 얼굴이 벌개서서 있었고 승무원은 승무원대로 얼굴을 붉히며 따지듯 덤비고 있었다.
"이봐요. 글쎄 당신이 형산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았느냐 말이오. 처음 탈때부터 복도에서 수상하게 왔다갔다 해서 제가 신경을 좀 많이 쓴 줄 아세요. 손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함부로도 못하고."
형규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허기야 조용히 정숙을 지켜 숙면하는 승객에게 방해를 주지 말아야 하는데 침대차에 올라타자마자 현장 검증한다고 설쳐댔으니 승무원이 수상하게 보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었다,
처음부터 신분과 목적을 밝혔으면 협조가 잘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될수록 누설시키지 않고 둘의 힘으로 풀어 보자는 의도였기 때문에 의외의 부작용이 생겼던 것이다. 결국 문호와 승무윈은 서로 사과하고 돌아왔다.
"제길. 어떻게나 빡빡하게 구는지 신경질 나서 혼났네."
"자, 잊어버려. 그건 그렇고 어디 숨을 만한 곳은 없었어?"
"없어, 화장실밖에는... 만일 숨을 만한 곳이 또 한 군데 있었다면 아까 내가 있던 승무원실 뿐인데 거긴 생각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면 정말 성기준의 개입이?"
"달리는 해석할 도리가 없어. 부산에 내려가는 즉시 김만호 신상을 조사하고 조사가 끝나면 성기준을 나꿔채는 거야. 더 이상 우물쭈물 할 수가 없어."
문호는 입을 꽉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형규가 잠시 바라보다가는 격려를 했다.
"자자, 그만하고. 문호 우리 말야 처음부터 검토하자구. 아무래도 뭔가에 속고 있는 것 같아."
"맞아 우린 지금 뭔가에 속고 있어. 이거 어디 자존심 상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꼭 길가에서 눈뜨고 네다바이당한 기분이란 말야. 에이참..."
"그건 그렇고 아까 낮에 갔다가 만난 윤 의사말야 그 이빨..."
"응, 참. 그 이빨 사건도 있지."
문호가 '이빨' 사건을 상기하며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고강진을 죽인 놈은 뒤에서 목을 눌러 죽인 게 분명해. 형규 자네 입 좀 열어 봐."
"이거 왜 이래. 자, 아."
형규가 입을 좌 벌리고 문호의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됐어. 이제 내 설명 좀 들어봐. 보통 정상의 사람들은 왼쪽 송곳니에서 오른쪽 송곳니까지의 길이가 약 6cm정도 되거든. 고강진의 목에서 발견된 이빨 상처의 길이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물린 이빨의 끝이 이상하단 말야. 보통 성인들의 이빨 끝은 넓적넓적 하거든. 그런데 고강진의 목에서 나타난 이빨 자국은 그게 아냐. 마치 송곳니만으로 물어 버린 듯 상처가 묘하단 말야. 듬성듬성 자국이 나 있고. 끝이 뾰족하고... 도대체 무슨 상천지 모르겠어."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뭐가 뭔지..."
"형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 기록 좀 해보자고. 그리고 하나하나 생각해 보자구. 한꺼번에 풀어가려면 힘들어."
둘은 눈을 부릅뜨며 불빛이 흐린 실내에서 하나하나 메모를 시작했다.
1. 범인이 달리는 열차 내에서 증발한 점
2. 김만호와 성기준이 갑자기 밀착되어 있는 점
3. 진남포의 피습과 고강진 피살의 연관성
4. 진남포 동생이 자살한 이유
5. 고강진 목에서 발견된 이상한 이빨 자국
6. (서울 방향? 혹은 부산 방향?) 범인(고강진 살해범)이 도망친 방향
얼핏 보아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점은 이만큼이나 많았다. 어느것 하나 만만히 대들 것도 없었다 , 아직은 수사가 혼미를 거듭하고 있지만 내일 부산에 도착하면 어느 정도 실마리는 풀리리라. 문호가 기록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기는 동안 형규도 형규대로 자기 수첩을 들여다보며 무언가 골똘이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조금 전 문호와 시비가 붙었던 승무원이 찾아왔다.
"아까는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말씀하시던 살인 사건 때문에 저희들도 여간 신경쓰고 있는 게 아닙니다."
"미안한 건 오히려 저희들이죠. 사전에 말씀 드렸어야 하는 건데. 그만 저희들 사정대로 움직이다 보니 오해가 생겼군요. 이해해 주십시오."
둘은 좀전의 태도와는 달리 금세 친숙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담배까지 주고받으며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놈의 차에서 그런 사고가 생겨서... 그런데 도대체 범인은 어떻게 된 겁니까? 형사 분들께서 고생하시니까 금세 체포되겠지만."
"글쎄요. 저회들도 그 문제 때문에 부산에 내려가는 길입니다. 부산가는 길에 보다 철저히 현장 검증을 하려고 이 침대차를 탄 거죠. 정말 이 침대차엔 사람이 깜쪽같이 숨을 만한 곳이 없겠습니까?"
"저회들도 이번 사건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마는 비어 있는 침대나 화장실 외에는 사람이 숨을 만한 곳이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이차 구조야 저희들이 가장 잘 알고 있죠."
승무원은 어느 구석에도 사람이 숨어있을 만한 곳이 없음을 누누이 강조했다. 승무원뿐만 아니라 문호 자신이 생각해도 상태는 마찬가지였다. 문호와 형규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마주쳤다.
둘의 생각은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결국 범인은 성기준이 감추어 준게 분명해, 성기준의 심리전에 당한 거야'
"한 가지만 더 여쭤 보겠는데요. 천안에 도착할 때와 대전에 도착하기 전 승무원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네, 그게 그러니까. 천안에 도착할 때는 별로 하는 게 없습니다. 열차표를 미리 회수하기 때문에 천안에 내릴 승객이 있는지 없는지는 금세 확인이 되죠. 만일 하차 승객이 없으면 저희들도 쉽니다."
승무원의 말을 듣지 않아도 상황은 잘 알 수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오직 빨리 부산에 도착해서 수사하는 길밖에는 없었다. 이때 승무원이 벌떡 일어났다.
"아이구, 이거 늦을 뻔했네. 대전 내릴 분들 표 나눠줘야 하거든요. 자 그럼 수고들 하십시오."
승무원이 돌아가고 둘은 한참이나 그대로 앉아 있었다. 승무원이 대전에서 하차할 승객에게 표를 나누어 주고 난 얼마 후 덜컹 하고 열차가 멈추어섰다. 대전에 도착한 것이었다. 둘은 시계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