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서예계의 거장 초정 권창륜 선생이 검은 먹을 적신 붓으로 화선지 위에 촘촘히 써내려 가고 있다.
초정 서예관에는 초정의 스승인 여초 김응현 선생이 쓴 당호가 걸려 있다. 당호에는 ‘방구예관’이란 글씨가 쓰여 있다. ‘방구’는 초정 선생의 생가 옛 지명이다.
“서예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도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한국서예계를 대표하는 거장이 된 초정 권창륜 선생이 말하는 서예에 대한 정의이다. 반세기 동안 검은 먹을 붓에 찍어 화선지 위에 꿈을 휘호해 온 그의 예술역정과 정신세계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예가로서 대성한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남들은 재주를 타고났다고 말하지만 나는 남보다 10배의 노력을 했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초정 선생은 서예를 단순한 예술이 아닌 도의 경지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장자의 양생주편에 나오는 포정해우의 고사를 가슴에 새기면서 삶 속에서 실천해 왔다. 신묘한 기술이나 달인의 경지를 말할 때 흔히 포정해우에 비유된다. 서예공부도 오랜 반복 속에서 붓과 먹의 어울림을 읽어내고 활용할 수 있는 심안을 얻어야 일가를 이루게 된다. 추사 김정희가 자신의 서론에서 “팔뚝에 309비가 없다면 하루아침에 쉽게 서예의 묘미를 얻지 못한다”고 강조한 말도 포정해우의 이치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초정선생 또한 지난 50년 동안 벼루에 먹물이 마르는 날이 없었다. 우직한 노력과 쉼없는 연찬으로 오늘의 경지를 일구게 된 것이다. 새삼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는 서여기인의 깊은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서예는 기능이 아닌 도입니다
초정선생이 애용하고 있는 붓걸이와 벼루.
초정 선생은 1941년 경북 예천군 용문면 능천리에서 권동진 어른과 윤수향 여사의 4녀 1남 중 네번째로 태어났다. 용문초등학교와 대창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중앙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한 그는 어려서부터 필재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 예천군 학예미술대회에서 한글서예로 대상을 받자 스승도 없이 글씨본을 보고 집안에 보이는 종이란 종이는 전부 먹으로 새까맣게 칠하는 서예공부에 빠져들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예천에서 글씨를 보는 안목이 높았던 춘강선생의 지도를 받았다. 고3 시절 대학입시를 치를 겸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이승만 팔순기념서화대전에 대나무 그림과 글씨 한 점을 출품했는데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서울의 작품양식과 고향에서 자신만만하게 공부해 온 자신의 작품과는 차이가 난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0년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하여 대학에 입학하면서 서예공부를 제대로 해 보려고 마음을 다져 먹었다. 마침 동아일보에 실린 서화강습소식을 보고 당시 서단에 이름을 올린 여초 김응현 선생과 일중 김충현 선생이 지도하는 동방연서회에 입회했다. 강습회는 초중고 교사들의 연수를 위한 특별강좌였지만 초정은 대학생 신분으로 강습에 참여했다. 강습에는 지금까지 공부한 환경과 글씨쓰는 법식이나 자료 등이 판이하게 달랐기에 두 배 이상 힘들었다. 공부하는 글씨본은 한석봉 천자문을 임서하다 안진경ㆍ구양순 등 당4대가의 법첩으로, 서체는 해서위주에서 예서ㆍ전서 등이었다. 종이는 창호지에서 화선지로, 붓은 작은 황모(족제비털)에서 양호로, 먹은 향과 먹색이 좋은 것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저녁시간에는 교과서에 등장하던 박종화ㆍ김동리 선생 등 명사들의 고담준론을 곁에서 들을 기회도 많았다. 이렇다 보니 학교수업이 끝나면 바로 서실로 달려갔고, 일요일도 빠짐없이 서실에 들러 서예공부에 몰입했다. 백지상태에서 새로 출발한다고 생각하고 가로와 세로선부터 다시 긋기를 시작해 기본 글자를 익혀나가면서 남보다 열 배 이상 시간을 쏟아 부었다. 그런 다음 안진경체로 들어가 기본 글자들을 눈감고 휘호할 수 있을 정도까지 익힌 뒤 서대문 앞 서점에 가서 ‘쌍학명’, ‘현비탑비’, ‘구성궁예천명’ 등 번각본을 어렵게 구해 책장이 너덜너덜할 때까지 수백 번 임서했다. 얼마나 임서했는지 고전자료를 거꾸로도 베껴낼 수 있게 될 정도였다. 그러면서 여초 선생, 일중 선생, 백아 김창현 선생이 지도하는 서예사ㆍ서예이론, 한문강독 등 다양한 특강을 통해 폭넓게 공부했고, 한문오체ㆍ 전각 ㆍ사군자까지 두루 맛을 보는 등 이론과 실기를 동시에 공부하게 되었다. 밤낮없이 공부한 성과는 공모전을 통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5.16 뒤 1963년 신인예술상에 시험삼아 출품해 선배들을 제치고 장려상을 받으면서 비범함을 보여줬다. 또 초정선생이 23세였던 1963년 국전인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육조해서로 첫 입선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여초선생이 육조체를 잘 썼고 검여 유희강 선생도 가끔 서실에 와서 육조체에 대해 조언해 주었다. 이런 영향으로 여름방학 동안 두문불출하면서 집중적으로 연습하여 가을 국전에 출품해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공부과정을 스스로 점검하고자 매년 다른 서체로 출품하면서 공모전을 자신의 서예학습 장으로 적극 활용했다. 1968년(28세) 제17회 국전에서 특선하면서 청년서예가로서 전국에 필명을 알렸다. 이런 성과는 우연이 아니었다. 대학 졸업 후 자동차회사에 입사했는데 주경야독을 하면서 월급을 몽땅 투자해도 필요한 책을 구할 수 없었다. 보너스까지 보태서 안진경의 ‘마고선단기’를 손에 넣었을 때도 있었고, 남의 책을 빌려 밤샘해 가면서 쌍구를 떠서 법첩을 만들기도 했다. 60년대 말부터 일본 이현사 법첩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귀한 자료를 구하면 애지중지하면서 임서했다. 이렇게 밤을 낮삼아 붓 농사를 지었다. 1977년(37세) 26회 봄 국전에서 원필의 석문명 필의로 창작을 하여 대통령상 없는 최고상인 총리상을 수상하면서 일반인들의 입에도 서예가로 오르내리게 된다. 돌이켜 보면, 그의 20대와 30대는 서예를 위해 전력투구한 열정의 시기였다.
◆초정서예관에서 움터 오르는 한국 서예의 내일
경북 예천에 위치한 초정서예관 정문.
초정 선생은 1967년 회사에 입사한 몇 년 뒤 서예가의 길을 걷기 위해 미련없이 사표를 던졌고, 1972년 국립중앙공보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 뒤 6번의 개인전과 30여회의 잘 알려진 국내외 초대전, 40여년 동안 이화여대, 고려대 등 수많은 교육기관에서 후학들을 지도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서예부문의 운영위원장과 심사위원장을 역임했고,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 이사장, 한국미술협회 고문, 한국전각학회 회장 등 서예계활동과, 고등학교 서예교과서 등 10여 편의 논문과 저서, 40여 편의 서발문, 40여 점의 금석문과 제액을 휘호하는 등 이론과 실기를 겸전한 서예가로 국내외에서 명성을 얻고 있다. 무엇보다 선생의 작가적 역량은 국외에서 높이 평가됐다. 2000년 예술의 전당에서 중국서법가협회 주석인 심붕과 선생의 ‘한중서예양인전’이 열렸다. 전시를 본 북경대 장차부 교수는 “초정선생은 해ㆍ초ㆍ예ㆍ전ㆍ비첩ㆍ종정에 모두 뛰어난 수준 높은 서가이다. 당대 이름을 얻고 역사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라고 평했다. 선생의 작품은 예서 가운데 목간에서 개성미를 드러내고 행초서에서 신운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그는 작품을 제작할 때 기운미의 완급을 능숙하게 조절하여 운치를 자아낸다. 그리하여 감상자로 하여금 결구와 장법에서 재미를 느끼게 한다. 그의 서품은 그의 청백이란 가훈처럼 맑고 분명한 아취를 풍긴다.
초정 선생이 법첩(고전자료)을 보고 체본(글자본)을 한 후 제자들에게 주묵(붉은 먹)으로 한자한자 수정하며 지도하고 있다.
초정선생이 아끼는 고전자료를 제자들과 함께 펼쳐 보고 있다.
경북신도청에서 20여분 거리에 있는 초정 선생의 고향마을에 대규모 서예관이 건립되어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 서예술의 중심을 꿈꾸면서 2009년 개관하여 현재 100여명의 전국 서예가들이 서학연구에 전념하고 있고, 지하 1층 지상 2층의 기와집에 전시관, 이론강의실, 실기체험실 등이 갖춰져 있어 한국서예의 구심점으로 비상하고 있다. 초정서예관을 찾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선생은 자신의 학습경험을 바탕으로 ‘서두르지 말 것’을 주문한다. 이곳에서 선생은 현재 추사가 노경에 심취했던 파격과 일탈미를 보여주었던 결구에 대해 연구를 거듭하고 있고, 행초와 예서에서 신운이 넘치는 필세를 융합한 새로운 서풍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초정 선생은 한국현대 서예사에서 거목이었던 일중ㆍ여초선생의 의발을 이어 개인의 체본에 의지하던 학서방식에서 고전자료에 입각한 교육방식으로 정착되는데 앞장서 왔으며, 오체를 넘나드는 융합서풍으로 다양한 작품세계를 선보인 작가로 평가된다. 한국의 정체성을 살린 독자적인 서품으로 한ㆍ중ㆍ일을 넘어 세계인의 영혼을 울리길 기대한다.
한국 서예계의 거장 초정 권창륜 선생이 검은 먹을 적신 붓으로 화선지 위에 촘촘히 써내려 가고 있다.
초정 서예관에는 초정의 스승인 여초 김응현 선생이 쓴 당호가 걸려 있다. 당호에는 ‘방구예관’이란 글씨가 쓰여 있다. ‘방구’는 초정 선생의 생가 옛 지명이다.
“서예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도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한국서예계를 대표하는 거장이 된 초정 권창륜 선생이 말하는 서예에 대한 정의이다. 반세기 동안 검은 먹을 붓에 찍어 화선지 위에 꿈을 휘호해 온 그의 예술역정과 정신세계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예가로서 대성한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남들은 재주를 타고났다고 말하지만 나는 남보다 10배의 노력을 했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초정 선생은 서예를 단순한 예술이 아닌 도의 경지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장자의 양생주편에 나오는 포정해우의 고사를 가슴에 새기면서 삶 속에서 실천해 왔다. 신묘한 기술이나 달인의 경지를 말할 때 흔히 포정해우에 비유된다. 서예공부도 오랜 반복 속에서 붓과 먹의 어울림을 읽어내고 활용할 수 있는 심안을 얻어야 일가를 이루게 된다. 추사 김정희가 자신의 서론에서 “팔뚝에 309비가 없다면 하루아침에 쉽게 서예의 묘미를 얻지 못한다”고 강조한 말도 포정해우의 이치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초정선생 또한 지난 50년 동안 벼루에 먹물이 마르는 날이 없었다. 우직한 노력과 쉼없는 연찬으로 오늘의 경지를 일구게 된 것이다. 새삼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는 서여기인의 깊은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서예는 기능이 아닌 도입니다
초정선생이 애용하고 있는 붓걸이와 벼루.
초정 선생은 1941년 경북 예천군 용문면 능천리에서 권동진 어른과 윤수향 여사의 4녀 1남 중 네번째로 태어났다. 용문초등학교와 대창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중앙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한 그는 어려서부터 필재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 예천군 학예미술대회에서 한글서예로 대상을 받자 스승도 없이 글씨본을 보고 집안에 보이는 종이란 종이는 전부 먹으로 새까맣게 칠하는 서예공부에 빠져들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예천에서 글씨를 보는 안목이 높았던 춘강선생의 지도를 받았다. 고3 시절 대학입시를 치를 겸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이승만 팔순기념서화대전에 대나무 그림과 글씨 한 점을 출품했는데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서울의 작품양식과 고향에서 자신만만하게 공부해 온 자신의 작품과는 차이가 난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0년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하여 대학에 입학하면서 서예공부를 제대로 해 보려고 마음을 다져 먹었다. 마침 동아일보에 실린 서화강습소식을 보고 당시 서단에 이름을 올린 여초 김응현 선생과 일중 김충현 선생이 지도하는 동방연서회에 입회했다. 강습회는 초중고 교사들의 연수를 위한 특별강좌였지만 초정은 대학생 신분으로 강습에 참여했다. 강습에는 지금까지 공부한 환경과 글씨쓰는 법식이나 자료 등이 판이하게 달랐기에 두 배 이상 힘들었다. 공부하는 글씨본은 한석봉 천자문을 임서하다 안진경ㆍ구양순 등 당4대가의 법첩으로, 서체는 해서위주에서 예서ㆍ전서 등이었다. 종이는 창호지에서 화선지로, 붓은 작은 황모(족제비털)에서 양호로, 먹은 향과 먹색이 좋은 것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저녁시간에는 교과서에 등장하던 박종화ㆍ김동리 선생 등 명사들의 고담준론을 곁에서 들을 기회도 많았다. 이렇다 보니 학교수업이 끝나면 바로 서실로 달려갔고, 일요일도 빠짐없이 서실에 들러 서예공부에 몰입했다. 백지상태에서 새로 출발한다고 생각하고 가로와 세로선부터 다시 긋기를 시작해 기본 글자를 익혀나가면서 남보다 열 배 이상 시간을 쏟아 부었다. 그런 다음 안진경체로 들어가 기본 글자들을 눈감고 휘호할 수 있을 정도까지 익힌 뒤 서대문 앞 서점에 가서 ‘쌍학명’, ‘현비탑비’, ‘구성궁예천명’ 등 번각본을 어렵게 구해 책장이 너덜너덜할 때까지 수백 번 임서했다. 얼마나 임서했는지 고전자료를 거꾸로도 베껴낼 수 있게 될 정도였다. 그러면서 여초 선생, 일중 선생, 백아 김창현 선생이 지도하는 서예사ㆍ서예이론, 한문강독 등 다양한 특강을 통해 폭넓게 공부했고, 한문오체ㆍ 전각 ㆍ사군자까지 두루 맛을 보는 등 이론과 실기를 동시에 공부하게 되었다. 밤낮없이 공부한 성과는 공모전을 통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5.16 뒤 1963년 신인예술상에 시험삼아 출품해 선배들을 제치고 장려상을 받으면서 비범함을 보여줬다. 또 초정선생이 23세였던 1963년 국전인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육조해서로 첫 입선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여초선생이 육조체를 잘 썼고 검여 유희강 선생도 가끔 서실에 와서 육조체에 대해 조언해 주었다. 이런 영향으로 여름방학 동안 두문불출하면서 집중적으로 연습하여 가을 국전에 출품해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공부과정을 스스로 점검하고자 매년 다른 서체로 출품하면서 공모전을 자신의 서예학습 장으로 적극 활용했다. 1968년(28세) 제17회 국전에서 특선하면서 청년서예가로서 전국에 필명을 알렸다. 이런 성과는 우연이 아니었다. 대학 졸업 후 자동차회사에 입사했는데 주경야독을 하면서 월급을 몽땅 투자해도 필요한 책을 구할 수 없었다. 보너스까지 보태서 안진경의 ‘마고선단기’를 손에 넣었을 때도 있었고, 남의 책을 빌려 밤샘해 가면서 쌍구를 떠서 법첩을 만들기도 했다. 60년대 말부터 일본 이현사 법첩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귀한 자료를 구하면 애지중지하면서 임서했다. 이렇게 밤을 낮삼아 붓 농사를 지었다. 1977년(37세) 26회 봄 국전에서 원필의 석문명 필의로 창작을 하여 대통령상 없는 최고상인 총리상을 수상하면서 일반인들의 입에도 서예가로 오르내리게 된다. 돌이켜 보면, 그의 20대와 30대는 서예를 위해 전력투구한 열정의 시기였다.
◆초정서예관에서 움터 오르는 한국 서예의 내일
경북 예천에 위치한 초정서예관 정문.
초정 선생은 1967년 회사에 입사한 몇 년 뒤 서예가의 길을 걷기 위해 미련없이 사표를 던졌고, 1972년 국립중앙공보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 뒤 6번의 개인전과 30여회의 잘 알려진 국내외 초대전, 40여년 동안 이화여대, 고려대 등 수많은 교육기관에서 후학들을 지도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서예부문의 운영위원장과 심사위원장을 역임했고,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 이사장, 한국미술협회 고문, 한국전각학회 회장 등 서예계활동과, 고등학교 서예교과서 등 10여 편의 논문과 저서, 40여 편의 서발문, 40여 점의 금석문과 제액을 휘호하는 등 이론과 실기를 겸전한 서예가로 국내외에서 명성을 얻고 있다. 무엇보다 선생의 작가적 역량은 국외에서 높이 평가됐다. 2000년 예술의 전당에서 중국서법가협회 주석인 심붕과 선생의 ‘한중서예양인전’이 열렸다. 전시를 본 북경대 장차부 교수는 “초정선생은 해ㆍ초ㆍ예ㆍ전ㆍ비첩ㆍ종정에 모두 뛰어난 수준 높은 서가이다. 당대 이름을 얻고 역사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라고 평했다. 선생의 작품은 예서 가운데 목간에서 개성미를 드러내고 행초서에서 신운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그는 작품을 제작할 때 기운미의 완급을 능숙하게 조절하여 운치를 자아낸다. 그리하여 감상자로 하여금 결구와 장법에서 재미를 느끼게 한다. 그의 서품은 그의 청백이란 가훈처럼 맑고 분명한 아취를 풍긴다.
초정 선생이 법첩(고전자료)을 보고 체본(글자본)을 한 후 제자들에게 주묵(붉은 먹)으로 한자한자 수정하며 지도하고 있다.
초정선생이 아끼는 고전자료를 제자들과 함께 펼쳐 보고 있다.
경북신도청에서 20여분 거리에 있는 초정 선생의 고향마을에 대규모 서예관이 건립되어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 서예술의 중심을 꿈꾸면서 2009년 개관하여 현재 100여명의 전국 서예가들이 서학연구에 전념하고 있고, 지하 1층 지상 2층의 기와집에 전시관, 이론강의실, 실기체험실 등이 갖춰져 있어 한국서예의 구심점으로 비상하고 있다. 초정서예관을 찾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선생은 자신의 학습경험을 바탕으로 ‘서두르지 말 것’을 주문한다. 이곳에서 선생은 현재 추사가 노경에 심취했던 파격과 일탈미를 보여주었던 결구에 대해 연구를 거듭하고 있고, 행초와 예서에서 신운이 넘치는 필세를 융합한 새로운 서풍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초정 선생은 한국현대 서예사에서 거목이었던 일중ㆍ여초선생의 의발을 이어 개인의 체본에 의지하던 학서방식에서 고전자료에 입각한 교육방식으로 정착되는데 앞장서 왔으며, 오체를 넘나드는 융합서풍으로 다양한 작품세계를 선보인 작가로 평가된다. 한국의 정체성을 살린 독자적인 서품으로 한ㆍ중ㆍ일을 넘어 세계인의 영혼을 울리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