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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시골에서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가기도 어려웠던 시절 우리마을(미평리)에 기독교를 전도하기위해 농민 복음전수학교라는 3년제 성서 학당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중학교 과정을 가리킨다고 하여 나와 비스한 처지에 있던 친구들은 그곳에 들어갔다. 그복음 전수학교를 설립한 분이 강태국목사님이다. 우리는 그당시 강박사님이라 불렀다. 예전에는 막연히 대단한 분이라고 만 알았는데 일대기를 읽어보니 정말 대단한분이란 것을 새삼느껴진다. 1999년 그분 일주년 추모행사한다는 소식을 듣고 참석하기도 했다. 그분은 농촌계몽에 앞장섰다. 아마도 우리나라 새마를 운동의 효시라고도 할수있다.
강태국(康泰國, 호: 一粒, 1904~1998)
강태국(Dr. T.K. Kang) 목사는 일찍이 도미하여 정통보수 학교인 밥 존스(Bob Jones)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새문안교회에서 목회하면서 한국성서신학대학교를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며, 천국운동 50년 운동 전개,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예장과 기장으로 나눠지는 것을 반대하여 새문안교회를 사임하고 중앙성서교회를 개척하여 은퇴할 때까지 시무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가 승동교회에서 회집될 때에 WCC(세계교회협의회) 가입을 놓고 찬성한 통합측(연동파, 연동교회에서 총회 가짐)과 반대한 합동측(승동파, 승동교회에 남아서 총회를 계속함)으로 나뉘어질 때(1959년 4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교단에 하나가 되기를 바라며 독립으로 남아있었다.
강태국은 1904년 6월 10일(음력) 제주시 남문 밖 한 모퉁이에 있는 초가지붕 밑에서 천주교인이었던 강용학과 이양기 양친 사이에 독자로 태어났다. 5년 후에 여동생 하나가 더 태어나 남매로 자랐다. 그렇게 부요한 가정은 아니었으나, 부친이 소공업을 하였기에 빈곤하지는 아니했다. 외조무 이영길 외 두 외숙은 제주도 신축년 천주교 박해시 같은 날 순교를 당했다. 태국도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았다(영세명:모세). 7세부터 동네에 있는 한문서당에 입학하여 10세까지 4년간 수학했다. 11세 되던 해 가정이 파산하여 어머니는 떠났고 아버지가 키우게 되었는데, 고모가 살고 있던 한라산 기슭에 있는 해안리라는 가난한 마을로 이사가게 되었다. 여기서 단칸방에 살게 되었다.
그 마을의 인심이 좋았으나, 서당이 없어서 아버지가 동네사람들을 모아놓고 춘향전이나 충열전을 읽어 주었다. 여기서 아버지는 체를 만들어 파는 수공업 및 장사를 하여서 자주 집을 비우게 되었다. 아버지가 외출하는 날 저녁이면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태국은 야간 서당을 시작한 것이 발전되어 밤, 낮으로 가르쳤다. 2년간 시골 생활을 청산하고 13세 때 제주시로 이사하여 단추공장을 경영하던 일본인의 쿡(cook, 요리사)으로 취직하였다. 1년 후 사촌 매부가 모슬포에서 단추 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10여명 직원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쿡으로 일하기도 했다.
바로 여기서 교회에 나가는 누나와 매부를 따라 주일 저녁에 교회에 갔다. 이때가 15세 정도가 된다. 어릴 적에 영세를 받았지만 부모를 따라 간 것이고, 모슬포 교회 윤식명 목사님께서 마태복음 7:7을 본문으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말씀을 통하여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이때부터 태국은 밤낮으로 하나님께 구하기 시작하였다. 보통학교(요즘 초등학교)에 진학하는 문제를 두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하나님, 저를 보통학교에 가서 공부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보통학교 뿐만 아니라 미국에까지 가서 공부하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했는데 훗날(18세때 보통학교에 입학, 44세에 미국유학) 그의 기도대로 모두 이루어졌다. 16세 때 단추 공장을 그만두고 제주시에서 광제의원이라는 시립병원을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의사 박진영 선생의 조수가 되어 간호사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또 병원 식당의 쿡으로 17세까지 일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11~17세까지 슬픔, 고통, 눈물, 땀, 피의 형극길을 걸어갔다. 이 기간 가장 중요한 사건은 15세 때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기도하기 시작한 일이었다.
1921년 3년만에 기도응답을 받아 18세의 나이에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7년간 살던 제주도를 떠나 광주 숭일학교(당시 교장 Dr. Knox)에 5학년으로 편입학하였다. 나이가 많은 탓이었다. 돈이 없어서 고학을 하였는데 방과후 3시간씩 노동을 하였고, 친구의 소개로 남대리(Dr. L.T. Newland) 선교사의 집에서 정원일을 시작한 것이 인연이 되어 미국 유학시절에도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받았다. 이리하여 최선을 다한 결과 1학기 말 시험 결과는 45명 중 5등을 했고, 6학년 졸업할 때는 1등을 하였다. 그래서 2년 제 숭일고등과에 진학할 때는 등록금 전액 면제 장학금을 받았다. 고학은 계속 되었다. 생활비는 벌어야 해서 이발소에서 일했다.
고등과를 졸업하고 1925년 3월말에 평양 숭실학교(교장:마포삼열 선교사)에 진학하기 위해 평양으로 갔다. 숭실중학교 3학년 편입시험에 합격되어 한봉상 선생의 도움을 받아 등록을 할 수 있었으며, 한 선생이 운영하던 인쇄소에서 일을 도우며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후에 학교 수위 일도 하였다. 1년만에 미국에서 돌아온 남대리 선교사가 미국에 가서 강태국의 후원자를 찾아 소개하였는데 무명의 독지가는 등록금을 대어 주며, 그가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매월 6원씩 도와주었다. 강태국 학생은 숭실에서 배위량(Dr. Baird)선교사와 마포삼열(Dr. Samuel Moffett)선교사로부터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웠다.
이리하여 그는 25세인 1928년 3월에 숭실학교를 졸업하고(24회) 숭실전문학교(숭전, 교장:윤온산 I.S. Mackun 선교사) 별과에 진학하였다. 재학중 광주학생사건으로 점화된 만세사건에 가담되어 29일 동안 평양형무소에서 고생한 후 1930년 2월 25일에 기소유예로 출감하였다. 출감 후 1년간 정학을 당해 다른 일을 하다가 다시 복학하여 1932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일본을 타도하기 위해 일본을 알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1932년 3월 말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4년간 학업을 하였다. 신호시에 위치한 중앙신학교(교장: S.P. Fulton 선교사)에 2학년으로 편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미국 남장로교 외지 전도부에서 운영하고 있었고 학제는 5년제였다. 철두철미한 보수 정통학교였는데, 이 학교에서의 훈련이 강태국목사의 신앙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하천풍언도 여기 출신이다. 그는 4년제 전문학교를 졸업했기에 2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2학년 때 하천풍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마야스 박사에게 예수의 행적을 배웠는데, 여기에서 정리한 것을 졸업하던 해 1936년에 <종합4복음 연구>라는 기독전을 출판하였다. 입학 후 얼마 되지 않아 병고현 식가마라고 하는 곳에 교포 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하여 1년간 주말목회를 하였다. 그리고 1933년에는 오사까 대인본정(大仁本町)에서 역시 교육 전도사로 부임하여 3년간 섬겼다. 이 교회는 당시 교포 교회 가운데 대표적인 교회였다.
1934년은 한국에 복음이 전파된 지 50년이 되는 희년이었다. 국내의 교회들이 대대적으로 희년을 지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는 일본에서 한국 전국 복음화를 위한 ‘천국운동 50년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오랜 기도 후에 금후 50년간 전국 복음화를 위해 여생을 바치기로 작심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농촌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 이유는 도시에는 교회가 많으나, 농어촌에는 별로 없었다. 농촌인구는 우리 나라 인구의 70%를 차지하고 있으니 먼저 농어촌에서부터 복음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도 방법은 교회를 세우기 전에 각 농촌 마을에 성경 서당(3년제 농민 복음학교)을 하나씩 세울 계획을 구상했다.
이 청사진을 수립하고 1936년 3월에 중앙신학교를 졸업하고 만 4년만에 일본의 생활을 청산하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1936년 4월 17일에 제주도에서 결혼을 하였다(33세). 부인은 수피아여학교 출신이다. 1930년 여름에 약혼했으니 7년만에 결혼하였던 것이다. 결혼하자마자 각기 직장따라 신랑은 광주 양림동으로, 신부(일본에 유학함)는 황해도 재령 명신학교에 취직이 되어 헤어져야만 했다. 1년 후 아내는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이 있는 광주로 내려왔다. 광주를 중심으로 “천국운동 50년 계획”을 실행하여 남대리 선교사와 함께 지방 순회를 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경에 체포되어 취조받고 독립운동으로 오해받았고 신사참배 거부로 2년간 투옥되어 온갖 고초를 치렀지만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고 오히려 사랑으로 그들까지 감싸 안았다. 그가 광주에 있으면서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분열되지 않도록 많은 노력과 기도를 하였다. 1936년 9월에 광주 양림교회에서 총회가 열렸는데 총회원들이 남북 투쟁하는 것을 보고 언젠가 분열될 것으로 직감하였다.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교회에서 회집된 27회 총회에서 193명의 대표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1953년 6월 10일 서울 새문안 교회에서 회집된 38회 총회에서 분열되고 말았다?기장과 예장으로).
일종의 은신방법으로 1940년 4월에 서울로 올라와서 유한양행에 취직하였다. 유명한 사장의 배려로 입사시험을 치르지 않고 취직된 것이었다. 일전에 광주 제중원에서 예배인도 한 후 어느 할머니가 자기 아들이 수혈이 급히 필요하다고 호소하여 다행히 강강도사의 혈형이 맞아 피를 제공한 적이 있는데, 이 때 살아난 이가 바로 유한양행 사장의 동생 유성한씨여서 인연이 된 것이다. 2개월 근무하고 1940년 7월 초에 200여 명이 모이는 개원교회에 부임하기 위해 만주로 향하였다. 그는 이 교회의 청빙서를 가지고 봉천노회의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그가 외국에서 신학을 했으니 국내에서 안수를 받으려면 평양신학교에서 1학기 동안 공부를 해야 되었는데, 만주에 와서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1945년 8월 광복될 때까지 만주에 머물면서 목양생활을 하면서 봉천신학교(교장: 박형룡)에서 강의를 하였다. 여기에서 박형룡목사, 박윤선목사를 만났다. 박형용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일본으로 피신하였다가 만주로 도피해 온 것인데 강목사에게는 박형룡목사가 스승이요 동료교수가 된 것이다.
해방되자 만주인들의 박해로 인해 한인들이 농촌에 머물 수 없었고 도시로 몰렸다. 일부 친일적인 한인들이 일본인으로 행세하면서 만주인들을 멸시하고 박대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을 모두 교회에서 숙식을 제공했는데 곧 한계상황에 부닥치고, 또 소련군의 훼방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는 그는 일찍이 꿈꾸어오던 미국유학을 추진하기로 마음먹고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부터 입학허가를 받고, 광주의 로라복(Knox) 선교사의 주선으로 선박비를 지원받아 1947년 12월 말에 군함(뱃삯 500불)을 타고 보름만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1948년 1월) 상항 한인교회를 방문하며 하루를 지난 후, 그레이하운드 버스로 일주일만에 필라델피아에 도착하였다.
Westminster 신학교에서 전영창씨(부산 고려신학대학교 의과대학을 창설하는데 공헌함)와 안용준씨(후에 <사랑의 원자탄>을 씀)을 만났다. 학생들 전원이 기숙사에 기거했으며, 기숙사는 학교 위층에 있었다. 여기서 세계적인 변증학자 베틸교수의 강의를 인상깊게 수강했다. 1948년 7월~12월에는 바로 근처에 있는 페이스신학교(Faith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를 했는데 웨스트민스트보다 더 경건하고 복음적인 분위기속에서 고학하면서 공부를 하였다. 컴잉 박사(남장로교 선교사, 광주 수피아 여학교 교장으로 봉직)을 뜻하지 않게 만나 남장로교 신학교로 전학하면 일년에 1000불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1949년 1월에 컬럼비아 신학교(Columbia Theological Seminary)로 전학하였다.
계일승 목사를 만났다. 그는 강목사보다 일년 앞서(1949년 5월) 졸업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분위기가 매우 자유스러워서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여기에서 애댄스조지아에 있는 라우랜드(C.A. Rowland)를 만났는데 당시 70세 이상된 노인으로 열심히 전도생활하는 모습에 많은 도전을 받았다. 또 특기할 사실은 이미 1934년도 계획한 천국운동의 기금이 3년 8개월 미국생활하면서 모인 돈이 3000불이 되어서 후에 시작한 사단법인 한국 복음주의 학원 및 한국 성서 선교회, 한국성서 신학교를 설립하는데 기금이 되었다. 1950년 4월 어느 날 컴잉 선교사가 다시 찾아와서 묻기를 “한달 후면 신학석사학위(Th.M.)을 받게 되는데 그 뒤에는 어떻게 하시렵니까?”라고 묻고는 대전에 시작하려는 대학에 가서 수고해 줄 것을 부탁하였지만 강목사는 계속 공부하려는 의사를 밝혔다.
콜롬비아신학교에서 만난 5명의 경건한 학생들을 만났는데 이들은 흡연이나 댄싱같은 것은 멀리하고 매일 저녁마다 한 방에 모여 합심기도하던 친구들인데 알고 보니 모두 밥 존스 대학 출신이었다. 여기서 강태국은 이들의 추천을 받고 밥 죤스대학(Bob Jones University)에 신학박사(Ph.D.)과정으로 입학을 허가받고 1950년 6월부터 1951년 5월 30일까지 열심히 공부하여 학위를 취득하였다(47세). 15세 소년이 매일 새벽 드리던 기도가 응답된 것이었다. 공부하는 동안 등록금과 기숙사 입사금까지 모두 받았으며, 텍사스에 있는 무명의 성도가 매달 50불을 보내주어 공부에만 집념할 수 있었다. 이 학교는 성서적이고, 칼빈적이며, 보수적이며, 근본주의적인 가르침으로 무장을 받을 수 있었다. 음주, 흡연, 연애, 덴싱을 엄격하게 금지하며 만약 탄로가 나면 퇴학이었다.
그가 졸업하는 날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그 뿐이어서 카메라 세례를 많이 받았다. 졸업 후 1달도 되지 않던 6월 25일에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밤잠을 지새며 기도를 하였다. 그의 미국유학도 사실은 조국의 전국복음화를 위한 천국운동 50년 계획을 위한 일이었다. 만나서 교제를 나눈 미국 친구들에게도 ‘한국에 와서 우리를 도우라(Come over into Korea and help us)’란 구호에 관심을 보여 12명이 모여 ‘한국복음주의 선교회’(Korean Evangelical Movement)가 1950년 10월경에 조직이 되었다. 또한 이해 8월에 빌리 그래함 집회에 참석하려고 몬트릴 노쓰캐롤나이나로 가는 도중에 직업 방송을 하는 미국인을 만나 한국에 가서 복음방송을 시작해 달라고 주문했는데 묵묵부답이었다. 그 때로부터 1년 후 4년간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1951년 10월에 귀국하려고 화물선을 타기 위해 상항에서 배를 타면서 다시 이 분을 만났는데 한국에 간다는 것이다.
이 분이 바로 인천에 극동 방송국을 개설한 탐 왓슨(Tom Watson) 장로였다. 그가 한국에 오기 위해서 팀 선교부에 가입해 자기 경비를 자기가 모금해서 한국으로 왔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극동방송이 시작이 되었고, 성서학교 학생들이 적극 도왔다.
1951년 11월에 귀국하여 그는 쉴새없이 일할 것을 구상하였다. 그는 먼저 전국 복음화를 위해서는 농촌 복음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신당동 신일교회를 수년간 자원봉사를 한 일이 있을 때 사귄 친구로 김용기장로, 박대혁장로, 여운혁집사였는데 이들과 1952년 1월 10일에 한국 복음주의 선교회를 부산에서 발족하고 그는 이 선교회의 회장직을 맡게 되는 동시에 운영을 위한 재정 조달의 책임도 가지게 되었다. 이 선교회가 태동되기 3일전 부산 영도 일대가 대 화재가 나는 바람에 그의 집도 태워졌고 많은 책들이 불에 타버린 일이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선교회는 출범하였다.
먼저 농촌사업을 시작하여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사암리에 복음 농도원을 세워 이 책임을 김용기장로에게 부탁하였다. 김장로는 여운혁집사와 함께 이 운동을 적극 도왔다.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미평리에도 복음 농민전수학교를 시작하여 이근태장로에게 책임을 맡겼다. 이 학교는 3년 제였으며 타지방에서 온 학생들은 기숙사와 식사까지 무료로 제공하였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농장에 나가 실습을 하여 농촌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1965년 2월까지 학교를 운영하였다. 수년 후 김용기 장로가 사정에 의해서 농도원을 떠나고 다른 사람을 그 농도원에 배치하여 과수원을 이룩하였다. 몇 해 후 재정적자로 농도원도 문을 닫았다.
1957년 3월에서 1962년 2월에는 조치원에 있는 숭신 고등학교를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농촌운동은 그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심은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을 체험했고,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는 말씀을 평생 좌우명으로 삼는다. “당년에 거두려거든 곡초를 심고, 십년에 거두려거든 나무를 심으라. 백년에 거두려거든 사랑을 심고, 영원히 거두려거든 복음을 심으라”는 교훈도 모두 산 체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강목사는 또 다시 목회하게 인도하셨다. 1951년 11월 25일에 새문안교회 임시목사로 부임하였다. 6?25사변 때에 김영주 목사는 납치되어 갔고 교인들은 다 흩어져버렸다. 그 흩어진 신자의 다수가 부산에 피난하여 소수나마 모였는데 당시 교회의 우정신 여전도사가 찾아와서 간곡하게 부탁하는 바람에 예배를 인도하게 된 것이다. 미국에서 귀국하자마자 있었던 일이다. 첫 주일을 부산 새문안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다음날 서울에 올라와서 새문안 교회를 인도했다.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사람들이 서울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그는 서울이 수복되기까지 한 주일씩 번갈아 가면서 서울과 부산을 왕래하며 목회를 하였다. 1955년 9월 11일에 사임하기까지 약 4년간 시무한 셈이다. 그가 사임하게 된 이유는 교단 분열 때문이었다.
1953년 7월에 6?25사변이 종식되면서 서울은 수복되었고, 수복 후 처음으로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새문안교회에서 회집되었다. 이 때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가 기장, 예장으로 완전히 나뉘게 되었다. 그는 총회 석상에서 선언하기를 오늘 분열된 이 총회가 다시 하나로 될 때까지 새문안 교회는 아무 편으로도 가담하지 않고 독립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가 미국으로 떠나면서 최화정목사에게 교회를 지켜 달라고 부탁을 하고 돌아와 본즉 그는 이미 새문안교회를 예장측으로 가입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귀국 후 첫 주일 예배를 드리고 사표를 당회에 제출하였다. 그 후 새문안교회는 강신명 목사가 부임하여 안정을 시켰다.
그는 1956년 3월 2일에 삼청동 한국성서학교 강당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시작한 것이 오늘의 중앙성서교회가 된 것이다. 이때 첫 예배에 참석한 성도 수가 15명이었다. 이 중 성석순, 이옥경, 조용호, 박계금, 오용순, 양계숙 등은 새문안교회에서 나온 성도들이었다. 1957년 5월에 교회를 서대문구 순화동 4번지 소재 약 20평 가량의 목재 건물을 임대하여 이전하였다가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1960년 3월에 서대문구 을지로 1가 17번지로 이전하였다. 이미 삼청동을 떠났기에 교회이름을 삼청교회에서 성서교회가 개명하였다. 1962년 4월에 불광동 산 66에 위치한 한국성서학교 강당으로 교회를 다시 이전하여 후에 은평구 갈현동 455-6번지에 250평 대지 위에 연건평 498평의 성전을 건축하였다. 교회를 개척하여 27년간 목회하다가 1882년에 원로목사로 은퇴하였다. 1963년 8월 1일 극동방송 3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봉사하기도 했다.
그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한국성서대학교(Korean Bible University)를 1952년 5월 13일에 한국성서학원이라는 교명으로 7명의 학생들을 모집하여 공부를 시작하여 1953년 3월 1일에 종로구 삼청동 소재 홍종관씨 사가를 매입하여 공부하다가 미국을 왕래하며 부지런히 모금한 열매로 1957년 5월 1일에 은평구 불광동 산 66번지의 대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계속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1955년 2월 25일 대학령에 의한 4년제 각종 학교로 교육부장관의 인가를 받아 학교명을 한국성서학교라 개칭하고 성서과, 기독교사회사업과를 병치하고 초대 교장에 강태국 박사가 취임하다. 1963년 12월 16일에 교육부장관으로부터 학교법인 한국복음주의학원 인가를 받고, 초대 이사장에 신석호 박사가 취임하였다.
1976년 6월 15일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 205번지 대지 6,000평과 700여평의 교사를 매입하여 1977년 12월 30일에 이전하였다. 1978년 6월에 학교법인 한국복음주의학원 제2대 이사장에 김봉학 박사가 취임하였다. 1983년 12월 7일에 학교명을 한국성서신학교로 바꾸었으므로 1984년 11월 16일에 교육부로부터 4년제 일반대학과 동등한 학력인정학교로 지정받았다. 1989년 12월에 학교법인 한국복음주의학원 제3대 이사장에 김영수 장로가 취임하였다. 1992년 3월 1일 제2대 학장에 강희정 박사가 취임하였다. 1992년 5월 13일에 강태국 박사를 명예학장으로 추대되었다. 1999년 11월 2일에 대한민국 교육부령(대원45160-309)에 의거 일반대학원(M.A.및 Ph.D.)및 신학대학원(M.DIV., M.R.E., Th.M.) 인가를 받아 2000년 3월 2일 개원하였다. 2000년 3월 1일에 한국성서대학교 제2대 총장에 강우정 박사가 취임하였다(현주소:139-791 서울 노원구 상계7동 205번지).
이 성서대학의 설립 이념은 밀알 정신이다. 밀알정신(요 12:24)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본질적인 변화를 받은 새 생명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회에 대하여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희생하여 많은 새 열매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밀알의 정신으로?영원히 거두려거든 복음을 심으라.”
본교의 교육목적은 밀알정신을 구현하기 위해서 성서에 입각한 기독교 신앙의 복음주의 교리를 고수하여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신앙을 갖춘 초교파적 전문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신학적 자유주의, 인본주의, 세속주의, 유물주의적인 흐름에 합류하는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에서 벗어나 철저하게 성서중심적 신학적 입장을 견지하는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적인 인격을 도야하고 창의적이고 전문적인 학문을 발전시키고 보급하며 지역사회와 국가 및 세계 평화와 발전에 기여하는 교육을 한다. 천국복음 운동을 평생 바친 강태국목사는 노환으로 1998년 7월 25일에 94세의 일기로 별세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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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도 농도원에 있는교회 자주 갔습니다,크리스마스때 맛있는것을 줬거든요~ㅎㅎ
복음학교 운동장에서 사암리 7개동네 축구대회도 했구요~
우리 2년 선배들까지 복음학교에 다녔습니다.
복음학교에 대한 자세한 내력을 소상하게 잘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