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지금도 삼척에 가면
山井 김 익 하
나는 지금도 입안이 궁금해지면 인근 재래시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여유로운 걸음새로 5분 남짓 거리에 있는 시장입구 꺾어진 모퉁이의 어물가게에 들리기 위해서다. 얼마 전부터 궁색한 자리를 비좁게 마련해서 그런지 아직까지 반듯한 진열대도 하나 마련치 못하고, 붉은 플라스틱 자배기(다라이:たらい)나 바구니에 어물을 담아 벌여놓고 파는 가게다. 그곳에 가면 삼척시장 안, 어물가게에 들린 듯하다. 횃대기, 풍덕궁이[고무꺽정이], 새치- 그런 생선뿐만 아니라 더러 꾸덕꾸덕하게 말라 찜하기 좋은 열기[불볼락]나 장치[벌레문치]를 만날 수 있으며, 껍데기가 봉긋하게 부풀어 오르며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알밴 참가자미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며칠 전에는 동해안식 식혜자료로 일품인 말린 ‘안경 가자미’가 눈에 띄어서 별천지에 온 듯 신기한 눈초리로 안주인에게 말을 건네 보았다.
“고향이 동해, 어디쯤인가요?”
“지는 충청돈디유우-.”
“분명 동해안에 연고가 없고서는 이런 어물이…….”
“바깥양반이 거기구만유우-.”
그 가게의 자리를 메우고 있는 섭조개도, 생미역도, 비단조개도 물론 동해에서 온 것이다. 아니 아예 동해 것만 취급하고 있는 어물전(魚物廛)이다. 육류보다 어물을 선호하는 식습관에, 또 자라면서 입맛에 익어진 그곳의 특유한 미각에 연연하다 못해 편협하기까지 한 내 식성에서 볼 때, 이런 어물가게가 서울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못해, 반가워 가게 앞을 빗자루로 싹 쓸어주고 싶을 마음도 솟아난다.
옛날 중국 진(晉)나라 장한(張翰)이란 사람은 고향의 명물인 순채(蓴菜)국과 농어회(鱸魚膾)를 먹기 위하여 관직을 버리고 귀향도 마다했다지 않는가. 농사지을 땅이 그리 너르지 않고, 물산도 많이 나지 않는 고향이지만, 엇구수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 입안이 궁금해질 때면 무턱대고 가고 싶었는데, 이제 그곳으로 서둘러 달려가지 않아도 아쉬운 대로 목축임을 채워줄 수 있는 곳이 생긴 것이다. 하기야 먹지 않고도 그곳 어물들은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푸만함을 느낀다.
내가 집안의 장남인 연유로 일 년에 네 번은 조상에게 제례를 올린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제사(祈祭祀)와 설날과 추석의 명절제사이다. 응당 제사상에는 찐 명태와 열기, 참가자미, 문어 따위의 그곳 어물이 진설(陳設)되기 마련이다. 우리형제는 삼형제인데, 나만 삼척에 본향을 둔 사람과 살지만, 계수씨들은 경기도 성남과 전라북도 정읍에서 각각 성장했기에 시집온 몇 해 동안은 제사 때마다 코를 싸쥐고 파제(罷祭) 상머리에 앉곤 했다. 양념도 하지 않고 쪄낸 어물이 비리다는 이유에서다. 뿐만 아니라 집사람 손끝으로 만들어지는 그쪽 음식이 선뜩 입맛에 당기지 않아 젓가락 끝으로 께적거리기만 했다. 나로선 늘 그런 비위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속으로 혀를 내찼다.
그런데 20여년이 지난 지금, 계수씨들은 쪄낸 어물의 그 깊은 맛에 코를 박고 산다. 이제 그곳 별미에 입맛을 들인 것이다. 아버지 묘가 삼척의 향리에 있었을 때, 형제들이 성묘라도 갈라치면 동행으로 나섰다가 응당 곰치국과 가자미회를 먹어야 하고, 곁들여 가자미식혜의 맛을 보고서야 상경 길에 올라야 직성이 풀어진다는 눈치들이다. 그런가하면 이제는 누구에게 언질을 받았는지 한술 더 떠 장치찜과 도루묵찜 얘기도 서슴지 않고 입에 올린다.
“그거 뭐 별 거 아닌데요. 그냥 올라가죠?”
내가 슬쩍 딴청을 부리면 계수씨들은 나보다 더욱 정색한다.
“왜요? 아주버니, 그게 얼마나 맛있는데요.”
가자미식혜는 서울로 이사한 이후에도 집에서 종종 담아온 음식이다. 늘 밥상머리에 올리는 게 아니라 입 끝이 까슬까슬할 때. 한 젓가락 우벼 물면, 입안으로 꽉 들어차는 맵게 곰삭아진 미감에 가신 입맛이 거짓말처럼 되살아 오른다. 마른 가자미를 구하기 어려울 때는 깨끗하게 마른 노가리로 담는데, 오히려 잘못 담가진 가자미식혜보다 맛이 덜 비리다.
인천 주안에 살 때인데 한번은 아파트 아래층에 사는 할머니가 집사람을 대하길 딸처럼 너무나 살갑게 하기에 동해안 음식이라면서 가자미식혜를 한 접시 드렸단다. 그 할머니는 그걸 맛보고 입숨을 확확 불어내며, 위장을 망칠 음식은 왜 만들어 먹는지 모르겠다면서 머리를 내저었다. 식혜(동해안에서는 감주)에 익숙한 서울토박이였으니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게다. 지금도 가자미식혜가 눈앞에 놓이면, 그 할머니의 못마땅해 하던 얼굴빛이 선연하게 떠올라 웃음을 머금는다.
내가 서울로 이사한 처음, 회사근처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해결하였는데, 튀김가루에 묻혀 프라이팬으로 지져내는 어물 튀김요리에 선뜩 젓가락 끝이 가지 않았다. 튀김가루를 뒤집어쓴 음식에서 어물의 참맛을 느낄 수 없어서다. 또 생선기름과 튀김기름이 범벅이 되어서 본디의 맛이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식생활이 지리적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이어서 서울사람들 태반은 굽고 고춧가루를 뿌려 쪄내는 게 아니라 그저 튀김가루에 묻혀 식용유에 튀기는 방식으로 생선요리를 하고 있었던 게다.
나는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참가자미를 보면 집엣 사람에게 건네는 농(弄) 한마디가 있다. ‘이것 때문에 당신과 결혼했지.’ 맞선을 보고 처가로 어른들을 뵈러갔을 때, 처음 밥상에 오른 게 장작불에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참가자미였는데, 이미 칠순을 눈앞에 둔 장모님이 상 끝에 앉아 일곱 자녀 가운데 막내인 딸을 주십사하고 찾아온, 나를 위하여 그것을 맨손으로 발라주며 식사를 많이 해야 힘을 쓸 수 있다고 했다. 그로부터 장모님은 아흔 다섯으로 임종을 거둘 때까지 달래로 만든 양념간장에 찍어먹기 알맞게, 그것을 발라주기 위하여 예순을 치차 오르는 막내사위의 밥상머리에 앉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구워진 참가자미 때문에 당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농을 집엣 사람에게 건네는 것이다.
서울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어류가 서해안에서 잡히는 것들이다. 서해안에서 잡히는 생선들은 동해안에서 잡히는 어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동해안의 것에 비하여 서해안에서 잡히는 어류는 비교적 살이 무르고 비리며, 살집이 등뼈를 겨우 감추고 있어 푸짐하지 않다. 그것에 비하여 동해안의 것들은 깊은 수심의 수압 탓인지 육질이 모질고 푸짐하며, 덜 비리다. 맛의 깊음과 얕음의 차이를 금시 느낄 수 있다. 해서 어물을 먹는 방법도 당연 다를 수밖에 없다.
집엣 사위의 고향은 법성포와 근접해 있는 전북 고창인데, 식성을 보면 굴비구이 외의 어물은 저승길 보듯 한다. 오직 굴비구이에 연연하는데 젓가락으로 한 점 한 점 뼈에서 발겨내 한 마리로 밥 한 그릇은 너끈히 해치운다. 한 마리의 굴비의 살점을 발개놓고 보면 그 양이 실은 얼마나 되는가. 깊은 살점을 움벅움벅 베어 넘겨야 직성이 풀리는 나의 식성에는 그저 밥 한 숟갈감일 뿐이다. 그러니 나는 굴비가 여러 사람들이 선호할 만큼 비싼 어물임에도 불구하고 깜냥에 선차지 않아서 그리 반기는 어물이 아니다. 동해안에서 잡히는 어물은 살집이 얼마나 푸짐한가. 지붕 밑에 연기를 피워 올리면서 왕소금을 툭툭 튀겨내며 구워진 꽁치를 반으로 갈라 입안으로 우겨넣어 움벅움벅 베어 먹는 맛을 어찌 벌써 잊을 것인가.
여행문화의 발달로 향토음식들도 이제 지역의 한계를 벗어나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여행객의 심리저변에는 널리 알려진 그 고장의 맛 체험도 반드시 해보려고 한다. 이제 동해안으로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의 입에서 곰치국, 도루묵찜, 가자미회, 가자미식혜, 그런 음식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을 서울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때면 ‘거기 갔더니만 먹을 만한 것이 없어 굶고 왔다’는 말이 아니어서 괜히 어깨가 으쓱거려지고 귀 위안이 된다.
이제 더러 곰치국을 판다는 음식점이 서울에서도 눈에 뛴다. 곰치국이 음식의 전국구(全國區)로 등극한 셈이다. 그러다보니 특히 곰치의 인기는 만만치 않다. 이곳 시장에서 물메기라야 통하던 것이 이제 뻐젓이 곰치로 통칭되는 추세로 변했다. 본디 곰치는 어물취급을 받지 못할 정도로 값이 싸서 구황식품(救荒食品)이었다는 게 윗대들의 전언이다. 그런데 지금은 몸값을 제대로 받는 귀한 어물로 품격이 바뀌었다. 아마 꾸덕꾸덕하게 말렸다가 고춧가루를 뿌려 쪄낸 찜까지 널리 알려진다면 더욱 선호하는 먹거리로 대접받으리라.
그리고 가자미회와 같이 권장하고 싶은 삼척음식이 있는데, 바로 가오리회다. 유독 삼척지방의 말투에는 성씨(姓氏)에 대한 호칭이 특이하게 진화되어 있다. ‘척김(삼척 김씨)’이니, ‘고무신 김가(삼척 김씨)’, 또 ‘강김(강릉 김씨)’이니, ‘홍가오리(홍씨에 대한 애칭, 넓은 홍(洪)자를 가오리로 비유)’, 그리고 ‘조롱박(몸체가 왜소하거나 하는 짓거리가 좀스럽게 처신하는 박씨 성을 가진 사람)’과 ‘심방중이(삼척 심씨)’ 등. 이를 유추해보면 가오리는 홍씨 성에 비유할 정도로 삼척인근 해안에서 많이 잡혔던 어족임에 분명하다. 오들오들하게 입안에 씹히는 맛을 본다면 삼척의 바다 빛을 영원히 잊지 못하듯 그리워 다시 찾아오리라.
입맛은 언제나 본고장으로 찾아가기 마련이다.
서울에서 삶의 우리를 턴 지 어언 40여년, 뜨겁고 찬 음식으로 입안의 감각이 무뎌져 유년기에 길들여진 향토음식 맛을 이제 잃을 만도 한데, 고향음식을 대할 때마다 되살아나는 지미감각(知味感覺)은 영원불변한 것인가. 이정전서(二程全書)의 상곡군가전(上谷君家傳)에 따르면 정호(程顥)와 정이(程頤)의 형제는 평생 음식이나 의복을 마음대로 고를 수 없었다고 했다. 어려서 밥을 먹을 때, 어머니가 국에 간을 더 넣을라치면 ‘어려서부터 그렇게 입맛에 맞는 대로 먹으려고 하면 자라서 욕구를 감당할 수 없다’라고 훈육했기 때문이다.
그런 훈육을 일찍이 받지 못한 채 삼척음식 맛에 길들여진 나로선 지금도 입안이 궁금할 때, 집엣 사람에게 늘 되뇌는 언사가 있다. 지금도 삼척에 가면…….[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