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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5일(수), 오후에 친구와 함께 남양주 조안면 송촌리 '친환경농장'에 가서 일이 본 후에 친구들과의 약속시간(18시)이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아 '다산생태공원'을 들렀다.
'다산생태공원'은 한강이 바로 인접해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에 위치해 있는 생태경관이 아주 잘 조성되어 있었으며, 시설과 경관이 아주 깔끔한 공원이었다. '다산생태공원' 내에도 다산 정약용 선생의 뜻을 기리는 다양한 조형물들이 마련되어 있으며, 다산 선생이 생전에 집필하신 수많은 서적들을 모아 놓은 조형물이 포토존으로도 마련되어 있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선생은 1762년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태어났다. 남한강과 북한강의 수운이 합쳐져 서울로 유유히 흘러드는 광주 마현 땅은 다산 정약용의 개혁의지와 학문적 열정이 배어 있는 곳이다.
청년시절 마을 앞 소내를 따라 서울을 왕래하며 관료이자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다짐하였고, 유배가 풀린 후에는 이곳 마현(능내리) 땅에 돌아와 집필한 원고를 다듬으며 노년의 삶을 마감하였다. 이처럼 정약용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마현을 기반으로 그의 사상적 깊이를 더하여 조선후기 실학의 학풍을 집대성한 학자로 기억되고 있다.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1730~1792)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로 조선시대 유명한 서화가인 공제 윤두서의 손녀였다. 다산의 아명은 귀농, 자는 미용, 송보이고, 호는 사암, 열수, 다산, 자하도인, 문암일인 등이며 당호는 여유당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7세때 지은 '산'이라는 시가 지금까지 이를 입증해 준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또 다산이 10세 이전에 지은 시문을 모은 '삼미자집'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1777년 다산은 자신의 학문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가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이다. 다산이 두 살 되던 해에 성호가 세상을 떠나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산은 성호의 길을 접하고 학문을 굳히게 되었다.
57세 되던 해 가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저술을 계속하였다. 이때 미완으로 남아있던 '목민심서'를 완성하였으며 '흠흠신서', '아언각비' 등의 저작을 내놓았다.
또한 회갑을 맞이해서는 자찬 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기도 하였으며, 북한강을 유람하여 여유있는 생활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신작 · 김매순 · 홍석주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유배지에서 쇠약해진 심신을 추스리며 자신의 생애와 학문을 정리한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은 고향으로 돌아온 지 18년 만에 75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못 다한 부부의 정을 달랬으나, 안타깝게 회혼일에 숨을 거두었다. '자찬묘지명'에서 다산은 다음과 같이 자신을 돌아보며 경계했다.
"내가 너의 착함을 기록했으니 여러 장이 되었도다. 너의 감춰진 사실을 죄다 기록했기에 이 이상의 기록이 없으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사서육경을 안다라고 하였으나 그 실천한 바를 생각해보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너야 명예를 널리 퍼뜨리고 싶겠지만 그러나 찬양이야 할게 없다. 몸소 실행하여 증명시켜 주어야만 널리 퍼지고 이름이 나게 된다. 너의 뜻 섞여 어지러운 것을 거두어들이고 너의 분별없이 함부로 날뜀을 그쳐서 부지런히 실천하기에 힘쓴다면 마침내 경사가 있으리라."
아래 시는 다산이 서거하기 전 회혼일에 맞추어 지은 시이다.
< "회근시" >
60년 풍상(風箱)의 세월 눈 깜짝할 사이 흘러가
복사꽃 활짝 핀 봄 결혼하던 그 해 같네.
살아 이별 죽어 이별이 늙음을 재촉하나
슬픔 짧고 즐거움 길었으니, 임금님 은혜 감사해라.
오늘 밤 목란사(木蘭詞)는 소리 더욱 좋을씨고.
그 옛날 붉은 치마에 유묵(遺墨) 아직 남아 있네.
쪼개졌다 다시 합한 것 그게 바로 우리 운명
한 쌍의 표주박 남겨 자손들에게 맡겨 주노라.
<권22, 18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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