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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레위기 요약 1
레위기는 ‘제물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말할 수 있다. 제물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구약의 제사는 제물 자체는 완전했지만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온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온전한 제사를 드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제물을 원한 것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을 통해서 온전한 제물이 된 사람이 제물을 드릴 수 있는 자라는 것이 밝혀졌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물과 제물을 드리는 자가 하나인 복된 세계를 열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몸을 단번에 드리심(히10:10참)’으로써 다시는 송아지나 염소의 피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하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물과 제물 드리는 자가 하나 되어 드려짐으로 다시는 제물과 제물 드리는 자가 분리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도 우리 자신과 제물이 분리되지 않는 세계로 갈 수 있다는 소망이 되었다. 나 자신이 곧 제물이 될 수 있다는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제물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제물은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의 순서로 되어 있지만 실제적으로 제물을 드릴 때는 화목제가 마지막에 있다. 그 이유는 모든 제물을 드린 결과가 화목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든지 최종적인 목표는 하나님과의 화목에 있다.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과 사람의 완전한 화목은 어디서 왔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왔다. 구약에서는 제물을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이 화목하도록 중보가 되었지만, 이제는 인격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완전하게 화목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화목!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창세기 3장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생긴 문제를 죄라고 말하고 있다. 왜 죄를 지으면 안 되는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단절되기 때문이다. 만약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갈라지지 않는다면 문제가 안 된다. 그런데 죄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갈라지게 하고, 화목하지 못하게 한다. 제물과 제물 드리는 자가 하나일 수 없는 것이 비극이듯이 하나님과 사람이 화목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의 비극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최종적 목표는 교회이며 장차는 새 예루살렘이다. 교회와 새 예루살렘의 실체는 화목이다. 바울은 예수께서 오신 것은 중간에 막힌 담을 헐어서 둘로 하나가 되게 했다는 것이다(엡2:14). 흑인과 백인이 하나 되기 어려운 것처럼 이방인과 유대인은 종교적으로 영원히 하나 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십자가 때문에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하나 되게 한다. 만일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하나 될 수 없다는 것은 십자가가 온전하게 적용되지 않은 결과다.
1. 제물의 성질
레위기에 나오는 제물들의 종류는 크게 동물성과 식물성으로 되어있다. 동물성에는 송아지, 양, 염소, 비둘기가 있고, 식물성에는 곡식이 있다. 그리고 향품들, 감람으로 짠 기름과 소금(광물질)이 있다. 제물들의 성질은 그리스도의 성질이므로 우리는 제물들에 대하여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1).번제
제물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것을 말한다. “만일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이 새의 번제이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 예물을 삼을 것이요(레1:14).” 레위기에는 제물을 예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예물은 선물이라는 뜻과 같다. 선물은 상대방이 받아서 즐거운 것이다. 아무리 비싼 것이라도 상대방이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선물이 될 수 없고 싼 것이라도 상대방이 받고 즐거워한다면
선물이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 무슨 선물을 드리면 가장 기뻐하실 것인가? 하나님은 무엇을 가장 좋아하시는가?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7).”라고 했다. 자고로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보고, 어떤 일을 보고, 어떤 물건을 보고 이렇게 말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오직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보고 가장 기뻐하셨던 것이다.
레위기에서는 하나님이 받으시고 열납하시는 예물들에 대해서 아주 극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 예물들이 송아지와 양과 염소와 비둘기이다. 우리는 레위기의 예물들이 없다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 줄을 분간해낼 수가 없다. 이 짐승들을 보면 다른 것에 대해서 악기(惡氣)가 없고 사납게 생기지 않았으며 순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람과 아주 밀접하고 사람에게 친근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사람이 끌고 가면 끌려가는 것들이다.
예물이 되는 짐승들은 사람과 친근하기 때문에 사람이 목을 매고 끌고 가도 따라간다. 아무리 순하게 생겼어도 사람이 끌고 갈 수 없는 것은 제물이 될 수 없다. 다람쥐는 예쁘게 생겼지만 사람만 가면 달아나 버리기 때문에 예물이 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가장 중요한 형상은 하나님에게 이끌려 가는 분이다. 제단으로 가서 제물을 잡아야 되는데 제물이 끌려가지 않으면 제단에 갈 수 없고, 또 끌려가더라도 소리를 꽥꽥 지른다면 제물이 될 수 없다. 즉, 순종할 수 있는 것이어야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열납될 수 있는 인격은 어떤 인격인가? 하나님에게 끌려갈 수 있는 인격이다. 이러한 성질이 예수 안에서 확실하게 드러났다. 예수를 보고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눅3:22)”,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모두 그에게서 풍겨오는 이미지가 비둘기 같고 양과 같다는 뜻이다. 사람은 사람인데 그런 이미지가 풍긴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에게 합당하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 된다.
‘예수를 좋아한다.’는 말은 역사적으로 이천년 전 나사렛 땅에 온 그 사람을 좋아 한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예수와 같은 성질을 가진 모든 사람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예수를 사랑하기 때문에 안질이 있던 바울에게 눈이라도 빼서 주고 싶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왜 예수를 사랑하는데 바울에게 그런 말을 했는가? 예수의 성분이 바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좋아하는 인격도 바로 예수의 성분이다. 교회 안에서 이런 성분이 발견될 때 우리는 좋아한다. 이 성분을 좋아하는 것이 곧 예수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예수는 존경하지만 사람들(예수의 성분을 가진)은 존경하지 않아.” 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잘 모르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사과의 맛을 가지고 있는 예수를, 사과 맛은 있지만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안 먹겠다고 한 사람과 같다. 이러한 사람들은 역사적인 예수는 알아도 예수의 실제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는 어떻게 오늘날도 현재적으로 존재하는가? 그분은 그의 성분으로 존재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당신의 성분을 제자들에게, 우리에게 불어넣어서 그 성분을 유전시키려 세상에 오셨다. 세상이 예수의 성분으로 가득차서 김 아무개 예수, 박 아무개 예수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성분으로 모르면 역사적으로 단 일회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그 예수밖에는 모르는 것이 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성분을 안다면 영원한 예수를 알게 되는 것이다.
2). 소제
소제는 고운 가루(밀가루) 즉, 곡식으로 드리는 제물이다. 밀을 빻아서 곱게 친 고운 가루를 가지고 떡도 만들고 번철에 부치기도 하고 굽기도 하고 삶기도 하여 드렸다. 소제는 반드시 그 일부를 기념물로 불사른다. 이 말은 일부는 여호와를 위해서 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는다는 뜻이다. 소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나누기 위해서 드리는 제물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하필 부서진 가루를 좋아했을까? 고운 가루일수록 많이 갈아지고 오래 갈아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곱게 갈아진 인격을 좋아하신다. 무뚝뚝해서 잘 안 씹히고 소화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곱게 갈아져서 내 몸에 흡수되기에 용이한 것을 좋아하시는 것이다.
야곱은 형의 발꿈치를 잡고 따라 나온 사람이고, 아버지와 형을 속여서 장자의 명분을 가로챈 사람이며, 외삼촌을 속여서 재물을 모은 사람이다. 그는 탁월한 재능을 가졌지만 하나님이 그 탁월한 재능을 쓰실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너무 똑똑하고 모가 나서 어디에도 섞일 수 없는 부서지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꺾였다고 한 말은 야곱이 부서졌다는 뜻이다. 야곱은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의 연단을 받아 곱게 갈아졌던 것이다. 야곱을 하나님께서 고운 가루로 만드신 것이다. 인류사에서 가장 곱게 갈아진 사람은 예수이다. 이 고운 가루를 하나님은 받으신다. 우리도 하나님에 의해서 곱게 갈아져야 우리 안에서 고운 것이 나오게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완전하게 한 덩어리의 떡이 되고, 하나로 연합되는 나라다. 하나님 나라가 되려면 곱게 갈아져야 한다. 통밀에게 “완전하게 연합해라” 한다고 연합이 되지 않는다. 통밀의 성질 자체가 연합될 수 없는 것이 때문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통밀이 연합되기를 원하시지 않으신다. 통밀은 부서져서 곱게 갈아지면 저절로 하나가 된다. 갈아진 것은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고, 또 사람과 하나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셨다. 그래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3).” 했다. 이것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최초 교회의 원형이다. 교회는 둘이 합하여 하나가 된 것이다. 교회는 위대해도 소용없고, 놀라워도 소용없고, 능력이 있어도 소용없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연합이다.
3). 향품
향품은 관유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관유는 몰약, 육계, 창포, 계피의 네 가지 가루에 감람유를 섞어서 만든 기름으로 제사장을 위임할 때 머리에 부어졌다.
몰약과 창포는 어떤 것인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묘사 되는 몰약은 소나무의 송진 같은 것으로, 식물의 진액이 응고되어서 생긴 것이다. 송진에서 가장 강하게 솔의 향기가 나듯이 몰약에서 가장 짙은 향기가 난다. 죽음의 향기는 가장 짙은 향기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향기는 짙은 몰약의 향기이다.
창포는 다른 식물들이 살 수 없는 늪지대에서 살아있는 갈대 같은 것이다. 다른 식물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헤맬 때 거기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고난을 이기고 불가능을 이기고 서 있는 생명을 말한다. 창포는 십자가와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육계와 계피는 계수나무 나무에서 나온 두 가지의 껍데기이다. 육계는 두꺼운 껍데기로 무거운 향기가 나고, 계피는 얇은 껍데기로 가벼운 향기가 난다.
어떤 죽음을 통해서 나타나는 향기, 고난을 통해서 나타난 향기를 감람유에다 섞어서 만든 것이 관유이다. 제사장의 머리에 이 관유를 붓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제사장,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하나님을 대신하는 제사장의 신분과 모양은 어떤 것인가? 몰약을 통해서 나오는 육계의 향기이며, 창포를 통해서 나오는 계피의 향기이다.
감람유는 감람나무 열매에서 짠 기름이다. 감람나무는 팔레스타인 지방에 가장 흔히 있는 나무로, 오래 동안 자라야 열매를 맺을 수 있고, 반드시 원 감람나무에 접을 붙여야 한다. 감람나무의 이러한 성질들은 그리스도의 성질을 묘사하고 있다. 감람나무의 열매를 기름으로 짠 것이 감람유이다. 기름은 비틀고 눌러서 압력을 가해야 나온다. 감람나무 열매를 그냥 두면 기름이 되지 않는다. 짜야 기름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짜낸 기름은 향기가 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의미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여러 가지 과정 속에서 짜 가지고 기름이 되게 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기름만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이 기름으로 성전의 등불을 켜고, 제사장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로 편안하고 살기 좋은 데서 기름이 나온 사람은 없다. 반드시 하나님의 압력에 의해서 짜져야만 기름이 나온다.
4). 포도주(술)
전제로 모든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는데, 전제는 모든 제물들의 성분을 북돋기 위한 것이다. 포도주를 부으면 50의 힘을 가지고 있던 사람에게 50의 힘이 더 생기는 것이다. 즉, 용기가 없던 사람이 술을 먹고 나서 갑자기 용기가 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것은 술이 깨면 사라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경우에 우리에게 전제와 같은 술이 되기도 한다.
사도행전을 보면 새 술에 취한 사람들이 나온다(행2:13). 이 말은 그들을 보는 사람들이 “저 사람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갈릴리 어부들이고 어제까지 빌빌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 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서 얘기할 때, 갑자기 술 먹은 사람처럼 흥분해서 나 자신도 있었는지 없었는지 몰랐던 그리스도의 향기가 막 품어져 나올 때가 있다. 이것은 전제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부어졌기 때문이다.
5). 금기물 - 누룩, 꿀
제물들 속에는 두 가지 금기물이 있다. 소제물에는 절대로 누룩을 넣지 말고 누룩이나 꿀을 화제로 드려 사르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레2:11). 먼저 누룩은 변질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금기 시켰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세계는 원래 있는 그대로이어야지 가공을 해서 변질시키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단을 쌓을 때 돌을 다듬지 말고 그냥 생긴 대로 쌓으라고 하셨다. 우리 생각에는 돌을 매끈하게 잘 다듬어서 쌓으면 좋을 것 같지만 하나님은 인공적인 것을 아주 싫어하신다. 인공적인 것으로 이루어진 것은 세상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마저 여러 가지 문화적인 방법, 전통적인 방법으로 다듬어 놓고 있다. 의식과 형식, 제도를 아주 반듯반듯하게 다 만들어 놓았다. 이것이 사람이 볼 때는 좋겠지만 하나님은 변질시키는 것을 아주 싫어하신다.
다음으로 꿀을 넣지 말라고 했다. 꿀은 벌이 꽃에서 과당을 흡수해서 그것을 삼켜 자기 체액(침)을 섞어 발효시킨 식품이다. 발효가 된 것이기 때문에 오래 두어도 변질이 안 된다. 그러나 한번 발효가 되었다는 것은 한번 변질되었다는 뜻이다. 유월절 속에는 달콤한 것이 없고 쓴나물이 들어 있다. 우리의 문화와 문명을 조금이라도 하나님 나라에 섞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소금을 치라고 했다. 소금은 바닷물 속에서 염분을 농축시켜 놓은 것으로, 오히려 변질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예수님에게는 누룩과 꿀이 없다. 오직 쓴나물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