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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기척에 놀랐는지 마른 풀 더미 속에서 먹이를 찾던 박새들이 포르르 옆 나뭇가지로 날아가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새들은 다시 서둘러 풀 더미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쇠딱따구리가 부지런히 나무줄기를 쪼아대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도 먹이 찾기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날씨가 추워지니 새들이 더 부산스러워진 것 같다. 모습을 가려주던 잎이 다 떨어져 움직임이 더 잘 드러나 보여 그렇기도 하겠지만, 이맘때는 새들이 부산을 떨 때다. 한 곳에 붙박여 사는 텃새들은 많이 먹어 살을 찌워야 매서운 겨울 추위를 견딜 수 있다. 또 먹이가 부족한 겨울 먹을 것을 미리 모아 두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산자락 텃밭에 자라던 김장 배추며 무 따위가 어느새 다 뽑혔다. 겨울은 새들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힘든 계절이다. 사람들도 부지런히 겨울을 날 준비를 하는 때다.
텃밭 그늘진 길옆에는 벌써 얼음이 얼었다. 얼음 언 길 아래 도랑 가에 황새냉이가 수북수북 자라고 있다. 황새냉이는 계절을 잊은 듯 한여름 잎처럼 싱싱하다. 듬성듬성 흰 꽃도 피어 있다. 이것들이 어떻게 겨울을 견디려나? 안타까운 마음에 잎사귀를 들춰보는데 꽃대에 삐죽삐죽 달려 있는 열매 몇 개가 툭 터지면서 씨앗을 퉁긴다. 황새냉이 열매는 다 여물면 겉껍질이 둘로 갈라져 뒤로 말리면서 그 힘으로 씨앗을 날린다. 도감에는 4∼5월에 꽃이 피고 꽃이 진 뒤에 열매가 달린다고 나와 있지만 지금까지도 멈추지 않고 꽃 피고 열매 맺고 있는 것이다. 제 철만큼에야 못 미치겠지만 이대로 겨울을 날 기세다.
꽃대를 달고 있는 황새냉이 겉에는 생김새가 많이 다른 또 다른 황새냉이가 자라고 있다. 뿌리에서 바로 잎이 나서 둥글게 자랐고 줄기를 뻗지 않은 게 지난 가을 싹터 자란 로제트 형태 황새냉이다. 잎자루에 작은 잎이 다닥다닥 달려 있고 그 색깔도 검푸르다. 뿌리에 붙은 잎자루 끝은 아예 붉은 색이다. 로제트 형태를 한 이 '다음세대' 황새냉이는 바짝 긴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두해살이 풀인 황새냉이는 이런 모양으로 겨울을 나는 것이다. 도감대로라면 지금쯤은 이런 것들만 남아 있어야 한다. 지구 온난화 때문일까? 황새냉이는 이제 겨울 석 달을 빼고는 항상 꽃 피고 열매 맺는 풀이되었다. 이미 겨울을 날 '다음세대' 황새냉이가 곁에서 자라고 있어서인지 '지난 세대' 황새냉이는 한결 여유 있어 보인다. 한 가지에서 자라난 잎사귀도 다 모양이 제각각이다. 잎이 자란 법칙을 거스르지 않지만 그 안에서 모두 자유롭게 자란다.
황새냉이는 물가를 좋아하는 풀이다. 그래서 논이나 개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마른 땅에서도 자란다. 마른 땅에서 자란 황새냉이는 다른 풀인 양 생김새가 많이 다르다. 물가에서 자란 황새냉이는 가지가 더 많이 갈라져 나오고 잎이 크고 더 녹색을 띤다. 마른 땅에서 자란 황새냉이는 가지를 많이 내지 않는다. 잎이 작고 털이 많이 났으며 붉은 색을 띤다. 옆으로 퍼지지 못하고 위로 비쩍 마른 듯 자라는 이런 황새냉이를 변종으로 다루어 '좁쌀냉이'라 부르는데 깨알처럼 작은 잎이 쪼르르 달린 이 '마른 땅 황새냉이'는 '황새'냉이보다는 확실히 '좁쌀'냉이가 어울린다. 황새냉이는 살아가는 조건이 달라지면 달라진 환경에 걸맞게 살아가는 방식이나 생김새까지 바꿔가며 잘 적응하면서 살아간다.
황새냉이는 어째서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을까? 그 유래야 제대로 알지 못하겠지만 열매가 황새 다리처럼 길쭉하게 생겨서 그렇게 불리지 않을까 짐작해 볼 따름이다.
사철 언제나 뜯어서 나물로 먹을 수 있는 황새냉이는 그 맛이 맵다. 같은 십자화과에 속하는 갓과 비슷한 맛이다. 아이들에게 잎사귀를 따서 먹어 보라고 하면 혓바닥을 내밀며 맵다고 한다. 더 어린 녀석들은 성급하게 뱉어 버리고 만다. 아직 세상을 겪어 보지 못한 아이들은 매운 맛을 잘 모르나 보다. 요즘 매운 맛이 유행이다. 모든 음식이 다 매워지는 것 같다. 살기가 어려워지면 매운 맛을 더 찾게 된다고 한다. 신자유주의 칼바람에 세상살이가 많이 고달파졌다. 비정규직으로 내몰린 삶은 팍팍하기만 하고 그 싸움은 참 힘겹다. 우리들은 어떻게 이 겨울을 견디어 낼까?
2005년12월23일 15시38분
강우근 | 노동자의 힘 회원 |제 91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