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상의 유래
♡삭녕최씨(朔寧崔氏) ♤
유래
시조 최천로는 고려 때 평장사를 지냈다. 그의 아들 최유가(崔兪嘉)가 고려 명종 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내고 삭녕에서 대대로 살았으므로 본관을 삭녕으로 하였다. 삭녕최씨는 주로 경남지방에 많이 살고
있는데, 특히 사천군 사천면(泗川面), 정동면(正東面), 사남면(泗南面) 일대에 특색 있는 동족부락을
이루고 있다.
대표적 인물
- 최항(恒) :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영의정을 두 차례나 역임하였다.
- 최흥원(興源) : 최항의 증손으로 선조 때 유성룡(柳成龍)의 뒤를 이어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 최한기(漢綺) : 최항의 15세손이며 조선 실학의 거두로 영조,정조 때에 융성했던 실학이 학문으로서
이론적, 사상적으로 미숙하던 것을 철저한 경험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무실사상(務實思想)을 전개하여
실학의 체계를 확립한 학자이다. 역사학자들이 그를 가리켜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가교자(架橋者)'라
평할 만큼 그는 한국 사상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항렬표
19세----우(遇) 26세----신(新)
20세----구(九) 27세---- 성(聖)
21세---- 병(炳) 28세----규(揆)
22세---- 우(宇)
23세----성(成)
24세---- 범(範)
25세---- 강(康
기타
- 37,872명이 있다.(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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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조 : 최천로[崔天老]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삭녕(朔寧)은 경기도 연천군과 강원도 철원군 일부지역을
차지했던 지명으로, 원래 고구려 소읍두현인데 통일신라 경덕왕이 삭읍으로 고쳤고, 1106년에 승령현
감무를 겸하여 삭령으로 고쳤다.
조선 1414년(태종 14)에 안협현을 합쳐서다시 안삭군이 되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해 군이 폐지되어 내문면,인목면, 마장면은 강원도 철원군에 속하고, 나머지는 연천군에
병합되었다. 삭녕최씨(朔寧崔氏)는 고려때 평장사를 지낸 최천로(崔天老)를 시조로 하고, 어모장군으로
낭장을 지낸 최선보(崔善甫)와 경전부사를 역임했던 최연을 각각 1세조로 하여 세계을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낭장 선보(善甫)의 아들 충(忠)이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충의 아들
윤문(潤文)은 우찬성을 역임하였으며, 윤문의 셋째 아들 사유(士柔)가 춘추관 기사관을 역임한 후 장흥
고사(長興庫使)를 거쳐 노인직(老人職)으로 지승문원사에 올랐다. 그의 아들 항(恒)은 삭녕최씨 가문을
명문의 반석위에 올려 놓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조선
초기 훈구파의 대학자로서 세조를 도와 문물제도 정비에 큰 역할을 했다.
집현전 부수찬으로 정인지, 박팽년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으며, 집현전 교리(校理)로 오례(五禮)
를 찬진했고, 집현전 응교(應敎)로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창제에 참여,이어 [동국정운(東國正韻)],
[훈민정음해례], [용비어천가보수] 등을 찬진했다. 역사, 언어, 문장에 능통하여 당대의팔문장의 한 사람
으로 명나라에 보내는 표전문(表箋文)은 거의 그가 담당하여 썼다.
또한 항(恒)은 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에 공을세워 정난일등공신으로 책록되어 도승지에 올랐고,
형조,공조판서,
예문관 대제학, 이조 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우의정 및 좌의정을 거쳐 두 차례나 영의정에 올랐다.
근면 성실하고 겸손을 바탕으로 한 그의 성품으로 40년 동안 벼슬길에 있으면서 한 번도 탄핵을 받거나
외직으로 물러난 적이 없었으며, 저서로는 [태허정집(太虛亭集)],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를 남겼다.
광해군때 어우당 류몽인이 지은[어우야담(於于野談)]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항(恒)이 알성 문과에 장원급제 할 무렵 세종이 꿈을 꾸었다.
꿈 속에 한 마리의 큰 용이 성균관 서편 잣나무에 서리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깨어나 사람을 시켜
가보게 했더니 한 선비가 그 잣나무 아래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윽고 과거를 보고 장원급제한
사람을 찾아보니다름아닌 바로 그 선비였으며 훗날 명신이며 대학자가 된 태허정(太虛亭) 최 항(崔
恒)이었다. 그로부터 그 잣나무를 장원백(壯元柏)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조선조에 예조참의를 지낸 영린(永潾)과 좌찬성을 지낸 영호(永灝)는 항의 아들로 가문을 더욱더 빛냈다.
항의 증손이자 전첨을 지낸 수진(秀珍)의 아들인 흥원(興原)은 1555년 진사가 되어 1568년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장령, 정언, 집의, 사간,동래부사를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순찰사가 되었고, 이어 우의정, 좌의정에 승진하여 영의정에 기용되었다.
영평부원군에 봉해졌고 죽은뒤 호성공신 2등에 추록되었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상중(尙重)의 아들인 연은 예조좌랑, 장령, 응교, 집의, 사간 등을 역임하고 가선대부에 올라 한성부
좌윤을 지냈고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연의 동생 온은 1609년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
하고 은퇴하여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다가 1653년 동부승지에 이르렀다
.
행(荇)의 손자이며 휘지(徽之)의 아들인 계옹(啓翁)과 시옹(是翁) 형제는 삭녕최씨 가문을 문(文)의
가문으로 더욱 빛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학자로서 실학파의 거두이며 한국 사상사에 중요한 업적을
이룩한 한기(漢綺)는 항의 14세손이다. 1825년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의 연구에
전심하였고, 철저한 경험주의 철학을 기반으로 무실사상(務實思想)을 전개하여 실학의 철학적 기반을
확립했고, 교육사상에 있어서 직업교육을 제창했다.성리학의 배타적이고 고루한 입장에서 벗어나 자유
분방한 이론을 전개한 점에 있어서 한국 사상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고, 또한 삭녕 최씨 가문을 빛내
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삭녕최씨(朔寧崔氏)는
남한에 총 9,027가구, 37,87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