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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주사파 대부들(2)-리영희
리영희(1929~2010)는 『전환 시대의 논리』(1974), 『우상과 이성』(1977), 『8억 인과의 대화』(1977), 『분단을 넘어서』(1984) 등을 통해 한국 좌파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상적 대부라고 할 수 있다.
리영희는 1957년 1월 대한민국 육군 소령으로 예편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1957~1964년까지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 1964년에서 1971년까지 조선일보와 합동통신 외신부장을 각각 연임했다.
1960년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대학원 신문학과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하였고 1972년 이후 한양대학교 문리대학 교수 겸 중국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한양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 박정희 정권에 의해 1976년 해직되어 1980년 3월 복직됐으나 그 해 여름 전두환 정권에 의해 다시 해직되었다가 1984년에 복직, 군사정권 기간 동안 4번 해직, 5차례 구속을 당했다.
1987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의 정식 부교수로 초빙되어 '평화와 갈등' 특별강좌를 강의하였고, 1995년 한양대학교 교수직에서 정년 퇴임했다.
2000년대 후반부터 간경화로 투병, 2010년 12월 5일 사망했다. 리영희는 1972년에 한양대 교수가 되면서 담당인 신문방송학과 보다는 중국 찬양과 미국 비판, 그리고 북한 찬양과 한국 비판을 자신의 업으로 삼았다.
-마오쩌둥과 중국 찬양
1970~80년대 이후 한국 좌파에게 영향력을 끼친 리영희의 핵심사상은 마르크스∙레닌이나 스탈린주의가 아니라 중공의 마오쩌둥주의를 미화하고 전파하는 것이었다.
리영희는 마오쩌둥이 지향한 중국사회는 물질생산 보다는 인간의 평등을 소중하게 여기고, 능률향상 보다는 인간소외를 해소하고 극복하는데 중점을 둔 사회라고 극찬했다.
그러면서 그는 수천만 명을 학살하고 중국문명을 파괴하고 후퇴시켜 심지어 현대의 중국 지도자들조차 언급하기를 꺼리는 문화대혁명을 높이 평가했다.
1970년대에 등장, 1980년대에 폭발했던 한국의 좌파적 세력은 대한민국이 걸어왔던 길과 전혀 다른 길을 찼던 중 리영희의 중국 공산체계에 대한 찬양에 맞닥뜨리며 그것에 열광하며 깊이 빠져들었다.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주의 찬양과 베트남 공산화에 대한 일방적 미화를 내용으로 한『우상과 이성』은 좌파의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 좌파 운동권의 논리를 접하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고 한 것도 이러한 책의 영향이었다. 전 서울시장 박원순도 이런 영향을 받아 '미오쩌둥을 가장 존경한다"고 했다.
특히 리영희가 중국의 공산체제를 찬양하고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거부하게 만든 가장 핵심적 주장은 1976년7월 중국에서 일어난 지진사태와 1977년7월 미국에서 일어난 사태에 일어난 행동의 비교를 통해서다.
미국 뉴욕에서의 정전사태는 아비규환의 소동을 낳았지만 중국에서의 지진은 서로 돕기 의해 애쓴 모습을 비교한 것이었다.
이런 단편적이고 편파적인 비교를 통해 중국 공산주의 사회의 우수성을 내세우면서 많은 사람들을 친중국 성향으로 몰아간 것이다.
만일 이 당시에 마오쩌둥이 ‘참새잡이’란 경제실정으로 수천만 명을 굶어죽게 했으며, 이러한 경제실정을 비판한 공산주의 동역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문화대혁명이란 허울로 무자비한 반대파 숙청작업이었다는 사실을 리영희가 알았다면 친마오쩌둥, 친중공 주장을 할 수 있었을까?
리영희는 이후 덩샤오핑같은 실용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현재의 중국으로 발전한 것에 대해서는 관심도 갖지 않는다.
리영희에게 자본주의는 이기적 욕망의 산물이며 이타적인 공산주의가 이상적 사회이기 때문이다.
-김일성 주체사상 찬양
리영희는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주의를 찬양하다가 중국이 '중국식 사회주의'를 통해 자본주의형으로 변하자 이제는 북한의 주체사상을 물게 된다.
파괴와 살륙, 폐쇄와 인권유린으로 이어졌던 마오쩌둥의 사상은 1970년대에 종결되었지만 마오쩌둥의 적자이자 또 다른 문명 파괴자인 북한 김일성과 김정일 체제는 주체 사상과 자주의 이름으로 마오쩌둥주의와 스탈린주의의 한반도판을 더욱 강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영희에게 한국이 나가야 할 방향과 모델은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이름을 북한식인 '리'영희로 표기하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북한은 이상적인 사회요 자기가 애착을 가진 김일성과 김정일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는 대한민국이 사회주의적 정당과 사회주의적 원리, 가치관, 행동양식 등에서 상당 부분 북한의 덕을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북한의 공산주의 체제가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평가하며 ‘사회주의가 지향하고 인류 모두가 제기했던 많은 이념과 가치, 인간다운 사회와 공존 양식이란 가치는 병든 자본주의를 치유하는 불변한 처방의 효과로 남을 것’이라고 찬양한다.
리영희는 '김일성 체제는 김일성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식 즉 송두율 식의 '내재적 접근법'을 택하여 북한의 입장에서 봐야 한다며 김정일의 자기보존의 논리를 평가하고 이해하자고 강조한다. 북한으로서는 다른 길이 없는 데 어쩌겠냐(?)는 것이다.
오히려 북한 핵 무기 개발은 미국 때문이라며 북한의 핵 무기 개발을 정당화하고 있다.
리영희 논리 대로라면 왜 미국이 대만이나 필리핀과는 적대적 관계가 아닌가?
왜 미국이 대만과 필리핀은 자극하여 핵 무기 개발을 부추기지 않는가? 대만과 필리핀이 미국에 대해 도발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리영희는 북한 인민들의 김일성에 대한 광적인 충성이 교육과 훈련에 의해 길들여진 부분도 있지만, ‘북한 김일성 주석의 인간성과 인민에 대한 사랑, 인민이 김일성 주석을 경애하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김정일 지도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며 그것은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리영희는 마오쩌둥의 중국 찬양에 이어 북한체제에 대해 '우리처럼 잘 먹진 못하지만 한결 맑고 깨끗하고 뺏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그런 것이 있는 사회이며 풍족하진 않지만 이상적 사회'라고 호도한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사회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사회가 북한이라는 사실을 그려왔고 그런 그를 좌파들이 추앙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개인 숭배적 독재체제를 강요하기 위해 고안된 주체사상도 리영희의 작업을 거치면 ‘민족관, 국가관에 있어서 본 받을 만한 주권의식을 내포한 사상’으로 둔갑된다.
리영희는 자신은 종교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는 공산주의와 체제를 종교적 수준으로 맹신하며, 한국의 언론인이자 사상가라기 보다는 북한의 선전 선동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는 북한 노동당 비서를 지내다 탈북한 주체사상의 대가인 황장엽과 한국의 보수세력을 비판하면서 그들은 단지 수구반동세력에 아부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랬던 그도1989년 취재 차원에서「한겨레신문」 기자로 북한을 방문했고 1998년에도 일주일에 걸쳐 북한을 방문했지만 형과 누나가 살고있는 북한에 남지 않고 남한으로 돌아왔다.
사상적 미아들의 전형적 행보다. 사상적 이론적으로는 옳은 같은데 왜 살고 싶지는 않은 것일까? 아니면 북한의 미인계에 걸려서 남한에 살면서 북한 대변인하라는 밀명을 받아서 일까?
-한국과 한국정권 비판
그는 한국의 역대정권은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서는 창녀적인 존재이며 이승만이나 장면 정권 모두 대미 종속성과 매판성을 보였다고 대한민국을 깎아내린다.
특히 이승만, 박정희 정권 모두 정권의 토대를 민족과 민중에 두지 않고 외세에 둔 정부라 비판하고, 이승만 정권의 반공주의 때문에 한반도가 분단되었으며, 그 분단 체제는 박정희 정권 때 더욱 더 강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찬양과 미화,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리영희의 존경에는 반드시 대한민국과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분노가 깔려있다.
그의 인식은 곧 그의 사상적 제자라 할 수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당시 '대한민국은 정의가 패배한 역사이고 기회주의가 득세했던 역사’라고 한 언급에서 나타났다.
그러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600만 달러(약 780억원) 뇌물 혐의로 수사를 받던 중 자살했다. 노무현은 그토록 비판했던 ‘불법과 반칙’을 정작 자신이 저지르다가 양심에 가책을 느껴 자살한 것 아닌가?
리영희는 1948년 신생 독립국이던 대한민국을 ‘모든 분야의 권력은 과거 친일파, 민족 반역자, 구 지주계층의 수중에 장악된 나라’로 그려냈다.
반일운동의 상징이자 임시정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을 리영희는 ‘친일파의 우두머리’라는 허위사실로 묘사했고, 이승만을 통해 설립된 자유민주주의적 대한민국을 폭력과 공포와 포악성이 존재하는 나라라고 비난했다.
리영희는 민족주의자 이승만을 반민족주의자로 몰고 자유민주주의자 이승만을 공포적 통치자로 묘사했다.
물론 리영희의 대한민국에 대한 비판은 대한민국이 사회주의 국가로 가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이다. 이러한 인식은 전형적인 공산주의자의 인식이다.
해방 후 남로당 설립자인 박헌영은 이승만을 남로당 대표로 여러 번 추대하려 했지만 이승만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그때부터 이승만을 친일파로 매섭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승만 때문에 남한에 단독정부가 세워지면서 반공정책이 확고해지고, 이어서 박정희를 통해 반공정책이 더욱 강화되자 북한은 통일선전선동부를 통해 어떻게 하든지 남한의 사상적 뒤통수를 치기 시작한 것이 한반도 합법정부의 정통성 문제다.
리영희는 공산주의의 붕괴와 변화를 누구 보다 가슴 아파했다.
그는 공산주의를 이상향으로 그리면서, 공산주의 체제를 영웅적이고 낭만적이고 이상적이었고 선량했으며 인간 자질에 있어서 훌륭했던 사람들이 지향했던 행동’이었다고 규정 지으며, 그 체제가 자유 민주적 체제로 변하는 것은 이기주의와 경쟁주의에 대한 패배라고 평가한다.
만일 리영희가『공산주의 잔혹사』에서처럼 전시가 아닌 상태에서 백성들을 굶겨 죽이고 때려 죽이고 쏘아 죽인 사람 숫자가 1억 명에 달했다는 사실을 알았어도 그들의 행동이 ‘영웅적, 낭만적, 이상적이었고 선량했으며 인간 자질에 있어서 훌륭했던 사람들이 지향했던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리영희에게 그가 누렸던 자본주의를 지향한 대한민국은 '악'의 체제고 반문명적 공산주의 체제는 '선'이었다.
-반미사상
대한민국에 대한 비난과 공산혁명의 찬양에 대한 기저에는 미국에 대한 저주가 함께 간다.
리영희에게 미국은 ‘자국 내의 모순이 골수까지 미친 상태’의 악의 제국일 뿐이다. 미국의 대북한 정책도 ‘모험주의적이고 패권주의적’이라고 격렬하게 비난한다.
북한 체제를 찬양하고 옹호해 온 그는 북한 핵 문제도 미국 때문에 생긴 일이며, 한반도는 단지 ‘미국 전쟁의 훈련장’이고, 한국은 ‘미국의 51번째 주’나 다름없이 변질된 체제라고 규정 지으며 반미 투쟁을 선동해 왔다.
그는 ‘미국은 전쟁 없이는 유지할 수 없는 나라이고, 전쟁으로만 먹고 살 수 있는 세력이 군부와 결탁해 미국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한국은 미국의 대중국 침략의 전초기지일 뿐이다.
-리영희와 이동호의 만남
전(前) 전대협(전국대학생협의회) 연대사업국장였다가 전향하여 현재 북한민주화 포럼 간사인 이동호는 ‘나의 사상적 스승 리영희를 비판한다’(「조선일보」, 2005.9.9)에서 ‘리영희가 본 것은 사회주의 나라의 실재가 아니라 선전 문구였다’고 말한다.
레닌의 표현대로 리영희는 ‘쓸모있는 바보’(Useful Idiot)였다. 사실과 선전을 구분하지 못하고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속아 자신이 속한 사회를 저주했던 어리석은 남자였다.
그것이 오늘 이동호의 눈에 비친 리영희의 모습이다고 비판한다.
이동호는 리영희와의 첫만남을 이렇게 기억한다.
"리영희 교수의 글을 처음 만난 건 1970년대 후반이었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통치에 반감을 지니고 있던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의 ‘반공교육’에 저항감을 갖고 있었다. 기성권위에 대한 도전과 문제의식이 주된 이유였으리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 너무 짧았고, 사상을 얘기할 만큼 그의 공부가 깊지도 않았다.
다만 ‘공산주의는 악이고 자본주의는 선이다’는 식의 천편일률적인 주장에 식상해 있었다."
그런 이동호에게 리영희 교수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은 충격이었다.
이승만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건국세력은 일제의 앞잡이였고, 일제에 저항하였던 세력은 우리가 빨갱이라고 저주했던 좌파라고 주장했다.
식민지 해방운동의 주역은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이 아니라 북한을 건설한 김일성 세력이었고, 그(이동호)가 대한민국의 은인이라고 여겼던 미국은 흉악한 음모를 지닌 대한민국 건국의 배후 조종자였다.
대한민국은 자주 독립국이 아니라 미국의 식민지라고 주장했다. 이제까지 그가 옳다고 믿었던 것은 다 허물어졌다. 그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알고 있었던 지적 저능아였다고 고백한다.
이어서 이동호는 "리영희의 책에서 알게 된 공산주의자들은 높은 도덕성과 숭고한 인간애를 지닌 이 시대 최고의 우상이자 영웅들이었다"고 말한다.
이동호는 이렇게 계속한다.
"나(이)와 리영희의 만남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나의 스승 리영희는 내 인생의 좌표였고 길잡이였다.
그(리)는 나의 삶의 행로를 바꾸었다. 태어나서는 안 될 사생아 대한민국을 지금이라도 바로잡기 위해서는 사회혁명이 필요해 보였다."
공산주의 사상만이 유일한 대안이었고, 다른 사상들은 인간을 교묘하게 속이는 위선의 허접스러운 사상이었다.
이동호의 사회주의자의 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청년시절 나의 이런 신념은 한 번도 도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동호의 사고에 전환이 일어난다. 바로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다.
이동호는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한다.
"1990년대 초반 소련의 붕괴와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 이은 붕괴는 내게 리영희와의 만남만큼 충격이었다.
탈북자들과 언론을 통해서 알려지기 시작한 북한의 참혹한 실상은 사회주의와 주체의 나라 북한에 대한 동경을 깨부셨다."
이동호는 자신을 사회주의로 이끌었던 리영희의 저작들을 다시 한 번 정독했다.
한 시대를 진지하게 고민했던 개인으로서 누구에게 책임을 묻고자 하려는 게 아니다. 이건 진지하지 못했던 그(이)의 어리석음에 대한 반성이다.
리영희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이루고 있다. 한편에서는 좌경 의식화의 원조로 다른 한편에서는 386의 ‘사상적 은사’로 불린다.
대한민국의 좌경화를 걱정하는 사람에게 리영희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갖게 한 인물이다. 그가 386에 끼쳤던 영향을 감안하면 그런 평가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 적의 적은 동지?
반정부 노선을 걷다가 해직과 복직을 거듭 경험한 리영희는 '적의 적은 동지'라는 속 좁은 생각에서 선전과 선동에 뛰어난 공산주의가 던져 넣은 미끼를 시험도 해보지 않고 덥석 물어버린 것이다.
이게 바로 단순한 지식인들의 약점이다. 단순한 지식인들은 현실은 보지 않고 이론이 그럴듯하면 덥썩 물어버린다.
유럽의 수많은 지식인들도 평등을 내세운 공산주의의 이론을 덥썩 물었다가 나중에 공산주의 실상을 경험한 후 공산주의를 멀리한 사례가 많다.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도 한때 공산주의를 지지했는데 구소련에 사는 친구의 병 문안을 갔다가 사람들의 삶이 한결같이 궁핍하고 피폐한 것을 본 후 공산주의를 멀리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좌파들이 득세하기 시작한 1920년대에 구소련을 방문한 이승만은 사람들의 삶이 피폐한 것을 목격한 후, '평등도 좋지만 이건 아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나중에 언급할 「강철서신」을 통해 한국에 주체사상을 전파한 '김영환"도 북한을 리영희가 그리는 이상적 나라로 동경하다가 실제로 평양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몇 가지를 경험한 후,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어 사상 전환을 했다고 한다.
일본에도 좌파가 있지만 한국처럼 급진적 좌파가 드문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에게 여행을 많이 보낸다고 한다.
여행을 통해 여러 나라를 잠시만 경험해 보면 책이나 소개문을 많이 읽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리영희는 자신에게 불이익을 준 한국정부에 대한 분노가 한국과 미국에 대한 혐오와 북한과 공산주의에 대한 짝사랑으로 변질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부가 지식인들을 설 건드리면 이런 일이 생긴다. 소련의 레닌도 비슷한 이유로 혁명을 했다.
레닌의 형과 누나가 반정부 혐의로 처발을 받았지만 레닌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던 중 레닌이 대학교에 다니면서 학교의 사소한 불의에 대해 데모를 하다가 정부 당국에 체포됐다. 정부 당국은 레닌 형제 자매의 반정부 혐의를 조회한 후 레닌을 퇴학시켜 버렸다.
사소한 일로 끔찍한 처벌을 당한 레닌은 분기충천하여 국가 전복을 위한 결심을 한다.
마침내 레닌은 1917년에 볼쉐비키(다수당) 혁명에 성공하여 소련 공산주의 국가를 세운다.
한국의 독재정부도 결과적으로는 리영희 같은 반골 지식인을 키운 셈이다. 문재인, 박원순 등도 군사정부를 대항하다가 대학 재적을 당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이 경찰에 잡혀가고 수갑이 채워지고 불이익이나 고문을 당하면 회개(후회)할까, 복수심을 키울까?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분노를 더 키운다.
지금 유튜브에서 반 문재인 언성을 높이는 대부분의 우파들은 사법적으로 불이익을 받은 사람들이다. 분노의 악순환은 계속되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역사다.
물론 모든 사람이 리영희처럼 '적의 적'을 동지로 여기는 것은 아니다. 이런 자들은 겉으로는 대의를 위한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옹졸하고 편협한 자기애를 버리지 못하고 포용과 용납 보다는 복수의 칼을 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작고한 김동길 교수는 유신정권에 반대하여 옥살이도 했지만 좌경화되지 않고 끝까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했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공과도 구분했다.
남아공의 만델라 전 대통령은 인종차별 반대운동에 가담했다가 20여 년의 옥살이를 했지만 대통령이 된 후 인종차별자들이 죄과를 공개하고 사과하면 용서하고 포용하여 남아공의 고질적 인종차별을 철폐했다.
한국에서도 우파든 좌파든 권력을 잡았을 때 적폐 청산이란 명목으로 보복하면 악순환은 끊어지지 않는다. 용서와 포용으로 나갈 때 악순환은 끊어지고 선순환이 이루어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