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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박씨(順天朴氏)
순천 박씨는 우리나라 박(朴)씨의 원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후손인 고려 개국공신 박영규(朴英規)를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박영규의 후손 박난봉(朴蘭鳳)이 평양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진 후부터 순천(順天)을 본관으로 삼았다 하나 그 이후의 세계(世系)는 알 수없고, 세계를 알 수 있는 박숙정(朴淑貞)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경명왕(景明王)이 재위하고 있을 당시는 후삼국시대로서 그 중 가장 세력이 컸던 견훤(甄萱)의 사위였으며, 승주(順天)인이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있다.
순천박씨(順天朴氏)의 시조 박영규(朴英規)는 원래 순천(順天)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견훤(甄萱)의 사위 였으며 장군이 되었다. 견훤(甄萱)이 아들 신검(神劒)과의 불화로 고려 왕건(王建)에게 도피해 있게 되자 고려에 귀순할 뜻이 있었다. 후에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공략할 때 내응하여 고려의 공신이 되었다.
고려태조는 좌승(佐丞)의 벼슬과 천승(千頃)이 전토(田土)를 하사 하였다. 후에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박영규(朴英規)는 왕건(王建)과 사돈을 맺어 그의 큰 딸은 태조의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이 되었고 나머지 두딸은 정종(定宗)과 사돈을 맺어 그의 정종(定宗)의 문공왕후(文恭王后) 문성왕후(文成王后)가 되었다.
순천박씨(順天朴氏)의 세계(世系)는 중시조 박숙정(朴淑貞)에서부터 알 수 있고 그 분파(分派)는 5세조를 파조(派祖)로 하여 나누어 진다.
박석명(朴錫命)의 후손이 문숙공파(文肅公派)이며
박숙명(朴肅命)의 후손이 군수공파(郡守公派)
박안명(朴安命)의 후손이 부정공파(副正公派)
박유성(朴柳星)의 후손이 의주목사공파(義州牧使公派)
박두성(朴斗星)의 후손이 진사공파(進士公派)이며
박수년(朴壽年)의 후손이 승지공파(承旨公派)다.
박의번(朴義蕃)의 후손이 경력공파(經歷公派)
박배원(朴培源)의 후손이 생원공파(生員公派)
박증원(朴增源)의 후손이 제주목사공파(濟州牧使公派)
박벽원(朴壁源)의 후손이 판관공파(判官公派)이고
박성(朴誠)의 후손은 감사공파(監司公派)이다.
또, 충정공 박팽년(忠正公 朴彭年)의 후손이 충정공파(忠正公派)이고
박인년(朴引年)의 후손이 교리공파(校理公派)
박사년(朴耆年)의 후손이 수찬공파(修撰公派)
박대년(朴大年)의 후손이 박사공파(博士公派)
박영년(朴永年)의 후손이 검열공파(檢閱公派)이다.
박사제(朴斯梯)의 후손이 전직공파(殿直公派)
박득금(朴得琴)의 후손이 인의공파(引儀公派)
박성금(朴成琴)의 후손이 부위공파(副尉公派), 이상 모두 19분파이다.
박숙정(朴淑貞)은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의 벼슬에 올랐다. 풍류가 있어서 당시에 세상에서 중하게 여겼으며 이제현, 안축과 사귀었다 한다. 충숙왕 13년(1326년)에 국자제주(國子祭酒)로서 관동존무사(關東存撫使)가 되었는데 고성의 사선정(四仙亭) 강릉의 경호정(鏡湖亭) 울진의 취운루(翠雲樓)를 모두 그가 창건했다 한다.
박원룡(朴元龍)은 검교리부시랑(檢校吏部侍郞)을 지냈고,
박원귀(朴元龜)는 낭장(郎將),
박원린(朴元麟)은 절도사(節度使),
박원상(朴元象)은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박천상(朴天祥)은 공민왕조에 무과로 관직에 나아가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를 거쳐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에 올랐으며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에 봉해졌다. 문인으로 이름 높던 이조년(李兆年)의 손녀를 첫 부인으로 얻고, 다시 당대의 최고 권세가의 한 사람인 권겸(權謙)의 외손녀를 둘째부인으로 얻을 정도로 이름이 높았다. 공양왕 때에 이씨왕조(李氏王朝)를 건국하려는 정치세력에 의해 윤이(尹彛), 이초(李初)의 사건이 일어나 고려조의 충신들이 대거 숙청될때는 이에 연루되어 아들 박가흥(朴可興)과 함께 투옥되기도 하였다.
박가흥(朴可興)은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검교의정부우의정(檢校議政府右議政)의 관직에 이르렀으며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졌다. 공양왕 때에는 이초(彛初)의 사건에 연루되어 아버지와 함께 투옥 유배되었으나 정몽주의 변호에 의해 풀려났다.
문숙공 박석명(文肅公 朴錫命)은 공민왕조에 문과(文科)를 거쳐 관직에 나아갔다. 어렸을 때에 태종 이방원(李芳遠)과 같이 잔 적이 있었는데 꿈에 황룡(黃龍)이 곁에 있었다 한다. 태종 즉위에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봉되었으며 지신사(知申事)를 거쳐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에 올랐다.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명상(名相)으로 이름이 있었고 세종조의 명신(名臣)황희(黃喜)를 추천한 이다.
박가실(朴可實)은 계림병마절제사(鷄林兵馬節制使) 계림윤(鷄林尹)을 거쳐 판한성윤(判漢城尹)에 이르렀다. 우왕14년 요동정벌때는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회군(回軍)에 참여 하였고 공양왕때는 사직을 안전히 한 공로로 포상되었다.
박안명(朴安命)은 박가실(朴可實)의 아들이며, 조선조에 부정(副正). 경력(經歷)을 지냈다.
박가권(朴可權)은 판개성윤(判開城尹)을 지냈고
박유성(朴柳星)은 박가권(朴可權)의 아들로 의주목사(義州牧使)를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박수년(朴壽年)은 지평(持平)을 지낸 박연림(朴挻林)의 아들이며, 단종조에 우부승지(右部承旨)를 지냈으나 세조 2년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박팽년(朴彭年)이 죽자 아버지와 함께 영월로 들어가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박원상(朴元象)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박수생(朴首生)은 지령주군사(知榮州郡事)를 지냈고, 박장생(朴長生)은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했다. 개성유수(開城留守)로 있을 때 단종이 양위하고 이어서 사육신(死六臣)사건이 일어났는데 이에 연좌하여 음성에 유배되었다가 거기서 병을 얻어 죽었다. 박안생(朴安生)은 의영고사(義盈庫使) 혹은 목사(牧使)를 지냈고, 박역생(朴易生)은 경주판관(慶州判官)을 지냈다.
박근(朴根)은 경력공 박의번(經歷公 朴義蕃)의 아버지인데 전농사소윤(典農事少尹) 혹은 정랑(正郞)을 지냈다.
박증원(朴增源)은 단종조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해에 보승장군(保勝將軍)으로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나갔는데 단종이 양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육신(六臣)의 죽음에 미쳐서는 은둔하였다.
박벽원(朴壁源)은 무과(武科)를 거쳐 판관(判官)에 이르렀다.
박성(朴誠)은 사정(司正)을 지낸 박즙(朴楫)의 아들이며 강원감사(江原監司)를 지냈다.
단종의 양위와 세조의 즉위를 둘러싼 정치 변동 속에서 가장 비극적이 된 순천박씨(順天朴氏) 후손은 박중임(朴仲林)과 박팽년(朴彭年)이하 그의 아들들이다.
박중임(朴仲林)은 세종 5년 문과에 급제하고 4년 뒤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였다. 전라 경기도관찰사(觀察使)를 거쳐 대사헌(大司憲) 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 하고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는 그의 문인이다. 세조2년에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팽년 인년 사년 대년 영년 (彭年 引年 耆年 大年 永年)의 다섯아들 및 세 손자와 함께 처형되었다. 숙종17년에 박팽년(朴彭年)이 복관(復官)된 이후 영조조에 이르러 복관(復官)되었고 정조15년에 장릉충신단(莊陵忠臣壇)에 배향(配享)되었다.
박팽년(朴彭年)을 비롯한 사육신(死六臣)등 단종애사에 관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는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었던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육신전(六臣傳)’과 ‘장릉지(莊陵誌)’가 있다. 장릉지(莊陵誌)는 윤순거(尹舜擧)가 영월군수로 재직하면서 편찬한 노릉지(魯陵誌)에 숙종24년 단종복위 후 박팽년(朴彭年)의 9대손 박기정(朴基正)과 안동인 권화(權和)가 약간의 사실을 증보하여 간행한 책이다. 단종의 사실 분묘 제축(事實 墳墓 祭祝) 및 육신전(六臣傳) 단종복위(復位) 6신복관(6臣復官)등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박팽년(朴彭年)은 사육신(死六臣)의 한사람으로 이름이 높다. 세종16년 알성문과(謁聖文科)를 거쳐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집현전부제학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으며 청백리(淸白吏)로 뽑혔다. 아버지 및 인년(引年) 이하 동생과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이개(李塏) 유응부(兪應孚)등과 상왕(上王,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헌(憲), 순(珣) 두 아들까지도 함께 처형되었다. 숙종17년에 복관(復官)되고 다시 충정(忠正)의 시호를 받았다. 정조15년에 왕명(王命)으로 아버지 및 6신(臣)과 함께 장릉충신단(莊陵忠臣壇)에 배향(配享)되었다.
세조가 즉위하기 전 수양대군으로서 영의정이었을 때 부중(俯中)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 때 박팽년(朴彭年)이 지은 시가 장릉지(莊陵誌)에 실려있다. “. 세상만사가 오늘과묘당(廟堂)깊은 곡에 거문고소리 구슬프구나 같을지 모두 알지 못하였네(하략)”라고 하였으니 앞날을 예견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옥중에 있을 때 세조가 회유 하고자 사신을 보내 ‘하여가’를 부르게 하였는데 이 때 그는 “(전략)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한들 임마다 좇을 손가?”라는 단가(短歌)로 답하였다. 시세에 영합하지 않고 유학자적 절의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굳게 표현하였던 것이다.
박팽년(朴彭年)에게는 헌(憲), 순(珣)의 두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함께 처형되었으므로 후 손이 끊어질 뻔하였다. 둘째 며느리 였던 성주이씨(星州李氏)가 임신 중이었고 정부에서는 남아(男兒)를 낳으면 죽이라고 명하였다. 이씨(李氏)는 남아(男兒)를 낳자 여종의 딸과 바꾸어 지선을 보존 하였다. 이 유복자로 태어난 아들이 박일산(朴一珊), 박비(朴婢)이었으니 박팽년(朴彭年)가의 후손이 이에서 끊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성종 즉위후 박비(朴婢 )는 상경하여 자신의 신분을 고 하였고, 성종은 특사령을 내리고 이름을 일산(一珊)으로 고쳐 주엇다.
박인년(朴引年)은 문종2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동생 사년(耆年)과 함께 급제하였고 집현전 교리를 지냈다. 정조15년에 장릉조사단(莊陵朝士壇)에 배향(配享)되었다. 그의 아들 박진(朴璡)도 함께 처형되었다. 박인년(朴引年)의 동생 박사년(朴耆年)은 과거에 급제한 후 호당(湖當)에 들어갔고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을 지냈다. 박대년(朴大年)은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를 지냈으며 박영년(朴永年)은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를 지냈다.
박사제(朴斯梯)는 전직(殿直)을 지냈으며 사육신(死六臣)사건 때 기장현에 안치 되었다. 박득잠(朴得琴)은 통예원인의(通禮院引儀)를 지냈으며 동생인 박성금(朴成琴)은 효력부위(效力副尉)를 지냈다.
박팽년(朴彭年)을 중심으로 한 순천박씨(順天朴氏)일문이 세조의 즉위에 반대하여 처형되거나 유배 관직에서 떨어지게 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박석명(朴錫命)의 후손들은 부조의 음덕(陰德)을 발판으로 세조조 이후로도 계속 현달하였으니 정치사의 변동을 둘러싸고 서로 멀지 않은 인척간에 영욕이 겹쳐졌다고 하겠다.
문숙공(文肅公)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박거비(朴去非)는 총제(摠制)를 지냈고 박거완(朴去頑)은 부정(副正)을 지냈으며 그 아들 박호선(朴好善)은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박거소(朴去疎)는 부지돈녕부사(副知敦寧俯事)를 지냈는데 그 아들 대에서 고관에 나아갔다.
박중선(朴仲善)은 세조조에 무과(武科)에 장원하고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병조참판(兵曹參判) 등을 지내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이 되어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진 뒤 병조판서에 승진했다.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재공신(翊載功臣) 3등이 되었고 성종2년에 재리공신(在理功臣) 3등이 되었다. 그 후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판돈녕부사(判敦寧俯事)에 이르렀다.
무열공 박원종(武烈公 朴元宗)은 박중선(朴仲善)의 아들로서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함경북도병마절도사를 지낸 후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져 도총부도총관(都摠俯都摠管)을 겸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주동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으로 우의정에 봉해지고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좌의정을 거쳐 이과(李顆)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이 되었다. 사은사(謝恩使)로 명(明)에 다녀온 후 영의정에 올랐다. 중종묘정(中宗廟廷)에 배향되었다.
박숙선(朴叔善)은 지돈녕부사 이조참판(知敦寧府使 吏曹參判)에 이르렀고 이들인 박이온(朴而溫)은 중종조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철원부사를 지낸 뒤 승평군(昇平君)에 봉해졌다. 박이량(朴而良)은 호조참의(戶曹參議) 양주목사를 지냈다.
박이공(朴而恭)은 성균생원(成均生員)이고 창신교위(彰信校尉)며 박이검(朴而儉)은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었으며 청도군수를 지냈는데 완성군(頑城君)에 봉해졌고 양평(襄平)이라 시호(諡號)되었다. 박이장(朴而章)은 선조조에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한 후 지평(持平),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이조정랑(吏曹正郞), 대사헌, 부제학, 대사간, 대사성을 역임했다.
순천박씨(順天朴氏)의 후손 중에서 박성춘(朴成春) 박경립(朴敬立) 박이량(朴而良) 박이현(朴而絢) 박응현(朴應賢)은 임진왜란때 순절했다. 박춘무(朴春茂)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사가 되어 조헌과 함께 호서(湖西)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뒤에 인천부사를 지냈다. 박동명(朴東命)은 태안군수, 제주목사를 지내고 병자호란때 왕을 호송하다가 청군(淸軍)을 만나순절하였다. 뒤에 기문(旗門)이 세워졌다.
박광일(朴光一)은 숙종때 천거로 왕자사부(王子師傅)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으며 후에 숙종묘정(肅宗廟廷)에 배향되었다. 박광석(朴光錫)은 한성부윤을 지냈고 박기굉(朴基宏)은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박기정(朴基正)은 정조8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고 교리(校理) 승지(承旨)를 거쳐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다.
후에 왕명으로 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장릉지(莊陵誌)’를 교정 ‘장릉사보(莊陵史補)’를 완성했다. 박해구(朴海龜)는 거제부사(巨濟府使)를 지냈고 박문현(朴文鉉)은 이조참의 박해철(朴海哲)은 부윤(府尹) 박종현(朴宗鉉)은 승지(承旨)를 지냈다.
* 세거지
4세 박가흥(朴可興)의 큰아들 박석명(朴錫命)의 손자들인 문숙공파(文肅公派)는 박석명의 큰손자 박중선(朴仲善)의 아들 박원종(朴元宗)의 후손들은 남양주(南楊州) 도산(陶山) 창녕(昌寧) 정읍(井邑) 순천(順天)등지에 박석명의 둘째손자 박숙선(朴叔善)이 나주(羅州)로 퇴거(退去)한 이래 나주(羅州) 광주(光州) 구례(求禮) 보성(寶城) 고읍(古邑) 화순(和順) 전주(全州) 순창(淳昌) 고창(高敞) 부산(釜山) 청주(淸州) 공주(公州)등지에 세거해 왔다.
박석명(朴錫命)의 셋째손자 박계선(朴季善)의 자손들이 경북 금릉(金陵)의 지례(知禮)와 강원도 영월(寧越)등지에 살았던 사실이 병자보(丙子譜)에 나타나 있고, 부정공파(副正公派)는 7세 박윤강(朴允康)의 후계(後系)가 경북 달성(達成)의 현풍(玄風)에 박운공(朴允恭)의 후계(後系)가 아들박린(朴璘)의 대부터 상주(尙州)에 자리잡은 것을 비롯하여 울진(蔚珍) 단양(丹陽) 등지에서 살았다.
5세 박유성(朴柳星)의 후계(後系)인 목사공파(牧使公派)는 성주(星州)에 세거의 터를 잡았고 박유성(朴柳星)의 동생 박두성(朴斗星)의 후계(後系)는 고령(高靈)에 살았던 것이 병자보(丙子譜)에 보인다.
승지공파(承旨公派)는 5세 박수년(朴壽年)이 세조조 병자년(丙子年)에 강원도 영월(寧越)로 유입(流入)하여 다시 나아가지 않았으므로 자손들이 영월(寧越)과 충북 제천(堤川)에 나뉘어 정착하였으며, 경력공파(經歷公派)는 4세 박근(朴根)의 대를 전후하여 충북 보은(報恩)의 회인(懷仁)등지에 자리잡고 살다가 12세 박진명(朴晋明)의 자손들이 괴산(槐山)으로 이거하였다.
한편 3세 박장생(朴長生)의 자손들은 박장생(朴長生)이 세조조 병자년(丙子年)의 육신(六臣)의 참화(慘禍)에 연좌(連坐)되어 충북 음성(陰城)으로 옮겨간 이래 그곳에 많이 살았는데 그 중에서 생원공파(生員公派)의 일부자손들이 7세 박광전(朴光前)의 대부터 2대에 걸쳐 청원(淸原)의 문의(文義) 괴산(槐山)의 정풍(廷豊) 청안(淸安) 청주(淸州)등지로 옮겨 갔고 제주목사공파(濟州牧使公派)에서는 9세 박신영(朴信榮)이래로 일부가 진천(鎭川)에 판관공파(判官公派)에서는 9세 박문빈(朴文彬)이래로 강원도 지방에 산거해갔다고 믿어진다.
감사공파(監司公派)는 진천(鎭川)에 많이 살았던 것 같고, 충정공파(忠正公派)는 5세 박팽년(朴彭年)의 손자인 박일산(朴一珊)의 대이래로 지금의 경북 달성군(達成郡) 하빈(河濱), 청도(淸道), 성주(星州), 칠곡(漆谷), 노곡(盧谷) 등지에서 살았고 16세 박성함(朴聖涵)의 후계(後系)가 상주(尙州)에서 살았다.
또한 교리공파(校理公派)는 9세 박의륜(朴宜倫)의 대에 청주(淸州)에 살기 시작했고 일부는 15세 박세복(朴世復)이래로 충남 연기(燕岐)로 옮겨 갔던 것같다. 수찬공파(修撰公派)는 익산(益山과 15세 박사후(朴師厚) 이래로 경남 거제(巨濟)에 나뉘어 자리 잡았다.
5세 박대년(朴大年)의 후계(後系)인 박사공파(博士公派)가 충남 공주(公州)와 연기(燕岐)에 정착했고 검열공파(檢閱公派)의 경우 6세 박신(朴薪)의 대에 충북 청원(淸原)의 문의(文義)에 정착하여 10세 박응춘(朴應春) 박응시(朴應時)의 대에 이르러 청주(淸州)와 충남 공주(公州)로 13세 박세기(朴世杞) 이후에 괴산(槐山)으로 일부가 이거(移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 4세 박영림(朴榮林)의 자손들인 인의공파(引儀公派)와 부위공파(副尉公派)는 충남 대덕군(大德郡)에 속해있는 회덕(懷德)에 주로 세거 했던 것같다.
1930년 경에 이르러 순천박씨(順天朴氏)의 자손들이 번창하여 전국에 산거 하게 되며 특히 충북 청주시 청주군(淸州市 淸原郡)일원과 충남 공주군 공주읍 계룡면(公州郡 公州邑 鷄龍面) 대전시(大田市)일원 전북 정읍군 쟁우면(井邑郡 淨雨面) 전남 보성군 벌교읍(寶城郡 筏橋邑) 화순군 도곡면(和順郡 道谷面) 광산군 하산면(光山郡 河南面) 경북 달성군 하빈면 (達成郡, 河濱面), 군위군(軍威郡), 의성군 봉양면(義城郡, 鳳陽面) 성주군 성주면(星州郡 星州面) 칠곡군 지천면(漆谷郡 枝天面) 금릉군 조마면(金陵郡 助馬面) 경남 산청군 신등면(山淸郡 新等面)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 파명록:
원파(原派) 문숙공파(文肅公派), 군수공파(郡守公派), 부정공파(副正公派), 의주목사공파(義州牧使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승지공파(承旨公派), 경력공파(經歷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제주목사공파(濟州牧使公派), 판관공파(判官公派), 감사공파(監司公派), 충정공파(忠正公派), 교리공파(校理公派), 수찬공파(修撰公派), 박사공파(博士公派), 검열공파(檢閱公派), 전직공파(殿直公派), 인의공파(引儀公派), 부위공파(副尉公派),
* 항렬표(行列表)
세(世) 19 20 21 22 23 24 25 26 27
자(字) ○현鉉 해海○ ○동東 노魯○ ○규圭 종鍾○ ○순淳 상相○ ○환煥
세(世) 28 29 30 31 32 33 34 35
자(字) 재在○ ○선善 승承○ ○식植 병炳○ 균均○ 정正○ ○원源
박팽년선생유허(朴彭年先生遺墟)
종 목 : 시도기념물 1호
명 칭 : 박팽년선생유허 (朴
분 류 : 유지
수 량 : 1,720㎡
지정일 : 1989.03.18
소재지 : 대전 동구 가양동 161-1
소유자 : 박 경
관리자 : 박 경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1417∼1456)이 살던 곳이다. 박팽년은 세종 16년(1434)에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집현전의 관원이 되었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단종 복위 운동을 꾸미다 세조 2년(1456)에 처형되었다. 죽은 후에 유림의 학자들이 선생의 집터가 없어지는 것을 염려하여, 현종 9년(1668)에 주춧돌을 모아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써서 비문을 세웠다. 현종 13년(1672)에는 비각(碑閣)을 지어 장절정이라 하였다.
-어렵사리 혈통 이어온 박팽년 선생 후손들 흔적
과거 언제인가 줄기차게 충효를 강조하던 때가 있었다. 권력가진 사람들의 그 무슨 곡절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야 천만번 강조해도 모자람이 있겠는가. 뿌리 없이 흔들리는 요즈음 세태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우리 고장에는 충효정신을 기릴만한 문화유산이 곳곳에 널려 있다. 그 중에서도 박팽년 선생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묘골은 빼 놓을 수 없는 충절문화의 본향이다. 그곳에는 만고의 충신으로 표상되는 사육신을 모신 육신사가 있기 때문이다. 어디 그 뿐인가? 그 곳에는 천고만신 끝에 혈통을 이어 온 박팽년 선생 후손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묘골은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에 있다. 대구에서 성주방면으로 가다가 동곡에서 왜관으로 향하다 보면 묘골로 들어가는 이정표를 만난다. 이정표가 안내하는 대로 완만한 곡선 길을 돌아 들어가면 어렵사리 은둔할 곳을 찾았을 법한 마을 하나가 나지막한 산줄기에 안겨 있다. 이곳이 묘골이다.
박팽년 선생의 후손들이 묘골에 정착하여 세상에 다시 이름을 알리기까지는 기막힌 사연이 숨어 있다. 박평년 선생은 쿠테타로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 세조를 상대로 단종복위를 꽤하다가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등의 다른 충신들과 함께 멸족을 당하는 화를 입었다. 그러니 사육신에게는 후손이 있을 리 없다.
당시 죽임을 당한 박팽년 선생 일가에 얽힌 효성스런 이야기가 전해 온다. 박팽년 선생의 형제들은 아버지 박중림 선생과 죽음을 맞으면서 아버지에게 울며 고하기를 “임금에게 충성하려 하매 효에 어긋납니다”하니, 아버지 박중림 선생은 “임금을 섬기는 데 충성하지 못하면 효가 아니다”라고 태연히 웃으면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진정한 충과 효는 별개가 아님을 일깨워 주는 일화이다.
박평년 선생의 혈통이 이어진 데는 일가가 멸족될 당시, 선생의 둘째 아들 순(珣)의 아내 이씨 부인이 임신 중이었기 때문이다. 조정에서는 뱃속에 든 아이까지도 아들일 경우 죽이라고 엄명하였다. 이씨 부인은 친정인 이곳 묘골에 내려와 살다가 아이를 낳으니 아들이었다.
유일한 이 혈손을 보존하기 위해 고심하던 중 마침 데리고 있던 노비가 딸을 낳자 서로 바꾸어 그 이름을 박씨 성을 가진 노비라는 뜻으로 박비(朴婢)라고 지었다. 아들을 노비로 둔갑시켜 혈통을 보존한 것이다. 박비가 장성한 후인 조선 성종임금 때, 아버지와 동서지간이던 이극균이 경상감사로 내려와 울면서 자수를 권유하자 임금을 찾아가 박팽년 선생의 자손임을 이실직고하였다. 성종은 크게 기뻐하면서 특사령을 내리는 동시에 이름도 일산(壹珊)으로 고쳐 주었다. 이리하여 은둔의 세월은 막을 내리고 묘골이 충절의 본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 성종때 손자 박일산 유일하게 살아남아 제사
다른 충신들 함께 배향...1974년 現 육신사 건립
태고정.도곡재 등 아기자기한 공간구성수법 묘미
사육신의 혼령을 모시는 육신사가 묘골에 자리 잡은 데도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묘골에는 박팽년선생의 손자인 박일산이 할아버지의 절의를 기리며 제사를 지내던 절의묘(節義廟)라는 사당이 있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 박팽년 선생의 현손인 박계창이 고조부 제사를 모신 후 잠을 자는데, 꿈에 고조부와 함께 죽음을 당한 다른 다섯 분의 충신들이 굶주린 배를 안고 사당 밖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보았다. 깜짝 놀라 일어나 다섯 분의 제물도 함께 차려 다시 제사를 지냈다. 다른 충신들은 제사지내 줄 자손이 없으니 대신 제사를 지내준 것이다. 그 후부터는 하빈사라는 사당을 지어 사육신을 함께 배향하게 되었다. 하빈사는 나중에 낙빈서원으로 승격되었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문을 닫았다가 나중에 재건하여 다시 사육신을 봉안하게 되었다.
1974년에 그 자리에 지금의 육신사가 건립되었고, 1981년에 나머지 건물을 보완하였다. 그런데 육신사에 가면 출입구인 외삼문에는 육신사라는 현판이 붙었지만 정작 사당에는 숭정사(崇正祠)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는 사당에 사육신 외에 박팽년 선생의 아버지 박중림 선생의 위패도 함께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육신사야 50년이 채 안된 건물이지만 묘골에는 박팽년 선생 후손들의 손길을 읽을 수 있는 오랜 건축문화유산들도 많다. 그 대표적인 것이 태고정과 도곡재이다.
이 두 건물은 보면 볼수록 아기자기한 공간구성 수법이 묘미를 준다. 보물로 지정된 태고정은 조선 성종 10년(1479)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 선생이 99칸 집을 짓고 살 때 세운 정자건물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서 일부만 남았던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지은 것이다. 네모진 기단 위에 앞면 4칸·옆면 2칸 크기로 세웠다. 동쪽 2칸은 대청마루이고, 서쪽 2칸은 방으로 꾸몄다. 서쪽 방에는 아궁이만 설치한 것이 아니라 정자건물에서는 보기 드물게 뒤쪽 구석에 자그마한 부엌을 꾸며놓아 아기자기함을 더해 준다.
이 건물의 또 다른 묘미는 지붕에 있다. 지붕을 살펴보면 동쪽은 팔작지붕이요 서쪽은 맞배지붕에 부섭지붕을 달아내어 마감하였다. 부섭지붕이란 서까래의 윗머리를 다른 벽에 고정시켜 퇴를 달아낸 지붕을 말한다. 태고정은 맞배지붕의 합각에 서까래의 윗머리를 고정시키고 지붕을 달아내었는데, 지붕 아래에는 방과 부엌을 꾸며 농았다. 전체적으로는 단조로우면서도 뜯어보면 아기자기함을 엿보게 하는 건축방법을 사용하였다.
도곡재는 태고정의 건축수법을 흉내 내려고 노력한 건물이다. 도곡재는 정조 2년(1778) 대사성을 지낸 박문현의 살림집으로 건립되었다. 1800년대에 와서 유학자 박종우(朴宗佑)의 재실로 사용되면서 그의 호를 따서 도곡재라 불렀다.
이 건물은 본래 일반 민가와 비슷하였다. 집을 짓고 난 뒤 개축하면서 태고정처럼 안채와 사랑채에 부섭지붕을 달아내었다. 사랑채 부섭지붕 아래에는 대청을 연이어 높은 다락집처럼 꾸며 놓았다. 안채 부섭지붕은 초가이다. 한옥은 퇴를 빼고 칸을 달아내어 변화를 주어도 또 다른 아름다움을 안겨주는 미완성의 건축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묘골은 미리 알고 찾으면 마음이 숙연해지는 마을이다. 진정 숙연한 마음을 가지면 사육신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묘골이다. 묘골에 가면 충절의 영혼들로부터 이 시대의 진정한 충효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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