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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넉 달이 지나야 추수 할 때가 온다는 사람들에게
[요한복음 4:35~36]
35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넉 달이 지나야”라는 말은 성지의 보리농사가 10월 중순에 파종해서 다음 해 4월 중순부터 5월말까지에 거두니까 12월쯤에 들판을 보시고 하신 말씀이라는 견해가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이 말은 당시의 격언으로서 인간사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한 말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좌우간 좀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은 답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이미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영적인 추수는 시간적으로 계산할 문제가 아니다.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온다는 말은 농사짓는 고장에서 나온 말이지만 격언(格言)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인간 사회는 다 ‘시간이 필요하다, 기다려봐라, 아직은 추수 때가 안 되었고 넉 달이 지나야 온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10월 달에 파종해서 다음해 4.5월에 수확을 거둔다고 하니까 넉 달이 남았다는 것은 12월쯤 되었다는 말이다. 12월쯤 되면 춥고 배고픈 때이지만 그래도 넉 달은 기다려야 된다는 뜻인 것 같다. 왜 이런 격언이 생겼냐 하면 인간의 문제가 항상 답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이런 넉 달이 지나야 한다. 지금은 안 된다는 격언이 생긴 것 같다.
인간의 문제(問題)는 답(答)이 없기 때문에 늘 네 달이 지나야 한다고만 하는 것이다. 인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역사는 많은 착오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또 앞날은 아무도 예측 할 수 없다. 가면 갈수록 복잡해지고 혼란해진다. 답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아담의 역사는 같은 판에서의 반복일 뿐이다. 과거의 과오로 되돌아가지 않으려고 해도 가인의 길, 네피림의 길, 바벨의 길은 다시 반복된다. 결국 세상이란 바벨로 가는 판이다. (창11:1~9,계18:1~대조)
인류는 가기는 가는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옛날의 착오를 다시 반복하지 말자! 하면서도 계속 그 착오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날도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니까 모른다. 역사는 단순해지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복잡해지고 갈수록 혼란해지기 때문에 점점 더 해석하기 어려워져 간다. 왜냐하면 이 판이 같기 때문이다. 역사는 가고 그 속에서 개선도 하고 발전도 하지만 판이 같은 판이니까 계속 그 안에서 반복하고 있다. 가인의 길도 계속 반복되고 있고, 네피림의 길도 계속 반복되고 있고, 바벨의 길도 계속 반복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 판이 바벨로 가는 판이기 때문이다. 경기장에 가보면 그곳은 경기를 하려고 만들어놓은 판이니까 항상 경기를 하고 있다. 야구장에 가보면 항상 야구를 하고 있다. 왜냐하면 야구하려고 만들어놓은 판이니까 그렇다. 세상도 하나의 판이니까 그 판을 떠나서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판 안에서 계속 뭔가 움직이고 있다.
누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가? 많은 성현들이 이것을 해결해 보려고 세상에 왔었지만 조금도 개선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인간을 교육했지만 판을 바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판을 바꿀 것이냐? 이 문제이다.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왔었다. 성현들은 누구인가 하면 이 판을 어떻게 좋은 판을 만들어보자! 좋은 경기를 하게 해보자! 이런 뜻으로 온 사람들인데 결국은 개선해도 개선해도 안되니까 결국은 답이 없다. 넉 달이 지나야 될 것 같다. 이렇게 말하고 갔다는 것이다. 공자님도 그러고 갔고, 석가모니도 그러고 갔고, 다 그러고 갔다. 아직은 해결할 답이 없다. 해결할 답이 있었으면 벌써 뭐가 되었을 것인데 아직 안되었다. 답이 없으니까 넉 달이 지나 봐야겠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주 쉽게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이미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앞에 있던 그 여자는 답이 없던 여자였는데 방금 그 여자가 추수가 되었다. 누구도 그 여자를 구원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여자가 갑자기 구원이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것을 보시면서 아마 들판이 생각나신 것 같다. 황금빛으로 무르익은 그 준비된 하나님의 추수 판이 보이신 것 같다. 우리가 경험해보면 알 수 있는데 어떤 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보면 전 인류가 다 구원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도행전에도 보면 그런 말이 나온다. 그 때 사람이 얼마 되겠는가마는 사도들이 써놓은 것을 보면 복음이 엄청나게 확산되어서 온 세상을 덮는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그렇게 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보시면서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이미 삯을 다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는” 그런 광경을 말씀하고 계신다. 육안(肉眼)으로 보이는 광경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광경을 보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마리아 여자는 ‘방금’ 이 들판에서 추수가 되었다. 방금! 예수보다 먼저 왔던 그 어떤 사람도 (모세도 오고, 예레미아도 오고, 이사야도 오고 많이 왔는데) 어떤 방법으로도 이 여자는 추수가 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율법으로도 안 되었고 뭐로도 안 되었고 어떤 방법으로도 추수되지 않았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해왔다. 선지자들마다 다 여러 가지 말씀이 나왔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는 구원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물론 그 안에서 구원받았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지만 이 여자 같은 형편에서는 구원받을 수가 없었다. 이 여자는 어떤 방법으로도 추수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추수가 되었다. 어떻게 추수되었는가? 하나님의 필요 안으로 거두어졌다.
문제는 어떻게 추수할 것이냐? 무엇으로 추수할 것이냐? 이것이다. 사람의 필요대로 추수하려면 끝이 없는 것이다. 이래야 되고 저래야 되고 다 있어야 되는데 이 여자가 어떻게 단순하게 추수되는가 보면 아무것도 없다. 물동이를 놔두고 동네 내려가서 내가 이런 사람을 만났다. 저이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이렇게 나발 불고 다닌 것이다. 이것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필요이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을 뭔가 굉장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는 것을 천당에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답도 아니고 땅위에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것이냐? 구원받는 사람은 이래야 돼! 이래야 돼! 이래야 돼! 이렇게 꼬리표를 붙이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은 자신의 필요만을 찾고 있는 분이니까 (추수하는 방법이) 단순한 것이다.
여러분이 백화점에 가서 꼭 살 것을 머릿속에 두고 가면 금방 갔다가 나올 수 있지만 꼭 살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냥 가면 온 백화점을 다 돌아다녀야 한다. 다 돌아다녀 보면 더 헷갈려가지고 그 다음엔 무엇을 사야할지 모르게 된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그런데 돈은 없고! 요즘 사람들은 명품가지고 다닌다더라. 나도 명품하나 사야지 하고 가서 물어보면 몇백만원이고 해서 살 수가 없다. 그러면 피곤하기만 하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목표가 분명하고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추수가 쉬운 것이다. 우리도 사람을 추수할 때 한 가지 목표 안으로 추수한다고 생각해야지 그 사람을 성인군자를 만든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런 사람이 되려고 하면 나도 안 되고 여러분도 안 되고 다 안 되는 것이다.
문제는 판이다. 판만 바꿔지면 간단하게 풀릴 수가 있는 것이다. 대기 중에서 무거운 짐이 대기권 밖에서는 가벼워진다고 한다. 더하기 판에서 곱하기 판으로 넘어 오면 계산의 속도가 달라진다.
(추수하는 방법이) 아주 간단했다. 판이 바뀌면 쉬워지는 수가 있다. 우리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중력 때문에 어깨가 무거워지는데 거기다가 짐까지 진다면 얼마나 무겁겠는가! 대기권 밖으로 안 나가봐서 모르겠는데 올라가보면 무중력상태에서는 아무런 짐도 안 느껴진다고 한다. 짐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물속에만 들어가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큰 돌덩어리가 육지에서는 들기 어려운데 물속에서는 들어진다. 이렇게 판이 바꿔지면 아주 쉬워진다. 초등학교1학년에 들어가서 겨우 더하기를 배우는데 그것도 신기한 것인데 숫자가 많아지면 못한다. 9000을 9000번 더하라고 하면 아이들은 못한다. 그래서 구구단을 배우는 것이다. 9×9=81해버리면 간단하다. 더하기 하다가 곱하기가 딱 되어지면 계산의 차원이 딱 달라진다.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쉬어져버린다. 마찬가지로 뭔가 탁 판이 바꿔지면 전에 생각할 때는 아주 불가능했는데 여기 와보면 아주 쉬운 것이 생긴다. 예수님도 이 여자를 볼 때, 또 세상사람들도 이 여자를 볼 때 구원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모세가 와서 구원이 되겠는가? 안된다. 이사야 예레미야가 오면 구원이 되겠는가? 안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간단하게 어떻게 해가지고 물동이를 놔두고 동네에 내려가게 만들었다. 물을 마셔야 살 수 있기 때문에 물동이는 그 여자의 모든 것이었는데 그것을 놔두고 동네로 내려가게 만들어놨다. 그러니까 이것은 판의 문제다. 판이 바꿔지니까 아주 쉽게 보여진 것이다.
이와 같이 아담 안에서 인생의 문제는 언제든지 항상 넉 달이 지나야 된다. 넉 달 지나고 나면 되냐 하면 그렇지 않고 그때 가보면 또 넉 달이 필요하게 된다. 이것은 시간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말이 넉 달이지 3×4=12 120일이 아니다. 항상 넉 달이 지나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 안에서 그 판에 들어오면 희어져 추수하게 보인다. 우리는 이 판에서 놀고 이 판에서 살아야 그렇게 보이게 된다. 나도 이 판에서 살다보면 다른 사람이 볼 때 쉬워질 것이다. 내가 그러니까 너도 이 판에 와서 살면 될 것인데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는가? 이렇게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러니까 판을 바꾸는 문제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예수님은 죽을 판을 살 판으로 바꿔 놨다. 죽을 판은 무엇인가? 선악과를 먹은 것이 죽을 판이었다.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 판이 죽을 판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살 판으로 바꿔 놨다. 거기서 과일을 이야기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생명나무의 열매! 그 열매를 말한 이유는 그것이 씨이기 때문이다. 열매는 씨다. 아담은 죽을 씨를 먹은 것이다. 아담 속에 어떤 것이 들어왔는데 그것은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씨, 죽을 씨였다. 아예 씨가 죽을 씨였다.
저주의 판을 축복의 판으로 바꿔놨다. 저주의 판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같이 되려고 하는 것이 저주의 판이다. 하나님같이 되려고 하는 것은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저주의 판이다. 희랍의 신화에서 말한 대로 신이 저주를 내렸는데 어떻게 했느냐 하면 커다란 바위덩어리 하나를 주면서 이것을 산꼭대기에 올려놓으라고 한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올려놓으면 굴러 떨어져버리니까 또 내려가서 다시 끌어올려야 된다. 이것을 계속하는 것을 저주라고 한다. 안 될 일을 계속하는 것을 저주라고 한다. 하나님같이 되려고 하는 것은 저주의 일이고 그 자체가 안 될 일이다. 우리가 어디 가서든지 내가 하나님같이 되려고 하면 그때부터는 자기 적이 생기게 된다. 내가 하나님같이 되려고 해보면 꼭 반대자가 생기고 적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이 저주다. 친구가 있어야 축복인데 적이 생기니까 저주 아닌가?
축복의 판으로 바꿔놨는데 어떻게 하면 축복의 판인가? 인격의 판이다. 하나님이 지어주신 대로의 사람 그 자리,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예수 안에서 폭로된 그 인생 그것이 축복의 판이다. 그릇이 있으면 뭘 받을 것이 아닌가?
판이란 것은 결국 그릇이다. 왜 하나님의 축복을 못 받는가? 내가 그릇이 없어서 못 받는 것이다. 지금 막 쏟아져 내려오는데 물을 받으려니까 그릇이 없고 소쿠리밖에 없다면 물이 안 고이고 다 새버리고 없게 된다. 소쿠리는 진짜 좋은 명품 소쿠리 이태리에서 만들어서 정품으로 수입해 온 것인데 빗물을 받으려고 하니까 다 새버리고 만다. 예수님은 축복의 판으로 판을 바꿨다.
이스라엘의 백성 율법이라는 판이 있었다. 선택받은 백성 그리고 인간이 지켜야할 도리 이것은 인간의 의(義)를 상징한다. 율법대로 살면 우리가 의로워진다. 구약시대에는 의의 기준이 어디에 있었느냐 하면 율법에 있었다. 이 사람이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면 의로운 사람이고 율법을 잘못 지키는 사람은 불의한 사람이다. 율법을 기준으로해서 의롭다 불의하다고 결정할 수 있는 판이 있었다. 이 판에서는 이 여자는 구원이 불가능하다. 이 판에서는 어떤 사람도 구원받을 사람이 없다. 사람들은 자기는 예외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수가 많다. 자기는 그래도 어느 정도 율법을 지켜서 합격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뒤로 가보면 전혀 한 사람도 없다고 한다. 이 판(이스라엘-율법(인간의 의))을 교회 그리스도 판으로 바꿔놨다. ‘교회-그리스도 판’으로 다른 판이다.
지금 우리가 구약 성경을 보기는 본다. 보기는 보는데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율법이 판이다. 판 자체가 모든 것이 그 판으로 짜여져 있고 그 안에서 전부가 해석된다. 목적이 다 거기 가 있으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그 판을 가지고 교회가 있는 것인가? 이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가 기독교 역사를 보면 어떻게 어떻게 하나 보니까 도로 그 판이 그 판이 되어 버렸다. 도로 구약판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또 이렇게 시끄럽게 된 것이다.
지금 판을 완전히 바꿨다. 교회-그리스도 판으로 이 판의 중심은 은혜(恩惠)이다. 구약의 그 판의 중심은 자기의(自己義)다. 내가 얼마나 율법을 지킬 수 있는냐, 없느냐? 그 판이다. 그러니까 여기는 100점도 있고, 90점도 있고, 80점 50점이 있는 판이다. 그러니까 자연히 50점 이하는 불합격이라는 것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그리스도 판. 이 판은 내 의로 세워진 판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진 판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졌다는 말은 나는 의가 없다는 뜻이다. 내 은혜가 없어서 하나님 의로 세워진 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은혜로 세워진 판에서 사는 사람은 나는 내 의가 없구나. 이것을 아는 사람이다. 내 의가 없으면 자기가 의의 자랑이 없다. 자기가 정말로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자기 의가 어떻게 자랑이 되겠냐 이 말이다. 내 의로 구원을 받지 못해서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은혜라는 것은 내 의로 만약에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면 은혜는 필요하지 않다. 내가 내 힘으로 들어가는데 누가 나를 도와줄 필요가 있는가? 오히려 그러면 자존심 상한다고 돕지 말라고 한다. 내 힘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누가 도우려고 해보라!
요즘엔 요양원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힌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일이다. 요양원에 들어가려면 급수가 있어야 한다. 1급이니 2급이니 급수가 있는데 이 급수를 받아야 거기를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정부 보조를 받아서 치료를 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교육을 시킨다. 왜냐하면 보건소나 복지부에 가면 물어 보는 것이 많으니까. 귀가 안 들린다고 한다든지, 손을 잘 못 움직인다고 한다든지 물어보면 그렇게 말하라고 한다. 아침밥 먹었는지 기억이 납니까, 안 납니까? 물어보면 모른다고 해야 합격이 된다. 그런데 교육을 시켜놓으면 잘 하겠다 해놓고 막상 가서 딱 물어보면 그 시간엔 너무너무 똑똑해져 가지고 실수 안하고 대답하려고 바짝 긴장을 해버린다. 그래서 1급 받으려고 갔다가 3급 받아 버린다고 한다. 어렵다고 한다. 그러니 이게 치매다. 다른 것이 아니고 방금 분명히 교육을 받을 때는 이렇게 대답을 해야만 된다고 받았는데 거기 가서는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하면 내가 왜 병신이야 나 말짱한데 말이야 이 생각이 앞서 버리기 때문에 절대로 자기가 실수를 안 하려고 한다. 아무리 치매라도 자기가 실수 안 하려고 작정하면 하면 실수 안 한다.
신경이 둔해서 생기는 병이니까 난청이 그렇다. 노인성 난청은 그냥 가만히 있으면 무슨 말 하는지 못 알아듣는다. 그런데 알아들으려고 정신 차리면 알아듣는다. 할머니들이 심판관 앞에 가면 정신이 바짝 나 버린다. 자기 자존심 안 뺏기겠다는 것이다. 자기 의가 있으면 자기가 나오게 되어 있다. 할머니도 그래서 자기가 있는 것이다. 자기가 무시당하기 싫다는 것이다. 내가 왜 무시당해!
그런데 교회-그리스도 판에는 그게 없는 사람이 왔다는 것이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이 너에게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한다. 우리는 우리 의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우리 의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그러니까 판이 바꿔진 것이다.
그러니 자기의 인간의 의를 기준으로 해서 짜여진 판하고, 하나님의 의를 기준으로 해서 된 판하고 이 두 판이 있는 데 모세는 인간의 의를 중심으로 한 판을 짰단 말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은혜를 중심으로 한 판을 짠 것이다. 그러니까 모세 안에서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도 예수 안에 오면 구원 받는 다는 것이다. 판이 달라졌으니까 하나는 율법의 판이고 하나는 은혜의 판이니까 이것은 참 중요한 말이다. 교리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말이다. 기독교 교리 중에서 아주 중요한 교리이다. 내 의냐? 하나님의 의냐? 율법의 의냐? 하나님의 은혜냐?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주님은 새판을 새로운 판을 내신 것 이다. 지금까지 없던 판을 열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것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다. 지금까지 있는 판은 이스라엘 율법 이 판이다. 그리고 그 판은 인간의 의를 중심으로 한 판이다. 그래서 거기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 판에서 내로라하는 사람이 생겼다. 거기다가 그 것을 무시하고 그리스도-교회라는 판을 만들어 놓으면 자기가 뭐가 되는 겁니까! 내가 거기서 내로라한 사람은 뭐가 되는 겁니까! 나는 거기서 그래도 1, 2, 3등 중에서 1등은 못해도 2,3등은 하는 사람인데 그럼 저런 것이 구원을 받으면 나는 무엇이 되느냐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자 저 것은 혼혈종이고 다섯 번이나 결혼한 여자고 저런 여자가 만일에 천국에 들어온다면 나는 안 가겠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여론조사를 했는데 남부에 가면 좀 더 보수적이고, 북부에 가면 좀 더 자유롭다. 남부지방에서 앙케이트를 했는데 신학교학생들 가운데서 앙케이트를 했는데 흑인하고 함께 예배를 보면 좋겠냐 나쁘겠냐 하니까 45%가 반대를 했다. 신학생들이! 그런데다가 어떤 조사에서는 흑인이 가는 천국이라면 안 가겠다는 백인이 있다. 60%, 70%가 된다.
그러니까 인간의 의를 가지고 내가 선 사람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내 의가 무시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내 의가 무시되어 져야 한다. 놔두고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래도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그래도 70점 80점 받았는데 어떤 사람이 전혀 노력하지 않은 것을 거둔다는 것이다. 그러면 속이 터져서 못 견딘다.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참 좋은 사람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점수가 좋으니까 근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공부 못하는 사람이 합격을 하면 그때는 못 견딘다. 똑같은 이치다. 참 이상한 이치다. 그렇다고 다 못하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가? 그것도 아니다. 참 이상한 일이다. 그러면 다 바보면 되는가? 이것도 아니다.
하나님 의냐? 인간의 의냐? 이문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의 판에 들어왔다. 이 새로운 판을 열어놨기 때문에 이 여자가 갑자가 그냥 사람이 바꿔 진 것이다. 인간의 필요와 하나님의 필요는 다르다. 그러니까 인간의 판과 하나님의 판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필요가 다르니까! 달리기 하는 경기장이 다르고, 승마하는 경기장이 다르고 경기장이 다 다르다. 필요가 다르니까 다 다르게 만들게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하나님이 필요한 판을 만들 것이다. 사탄은 사탄이 필요한 판을 만들 것이다.
사탄은 어떤 판을 만드는가? 인간은 절대로 안 된다는 판을 만들었다. 될 듯 될 듯 하면서도 안 되는 판! 그래야 인간이 거기서 인간자체를 소모하고 끝날 것이다. 전혀 안 되면 안 간다. 야바위(교묘한 수법으로 남을 속여 돈을 따먹는 노름) 판에도 전혀 안 되면 아무도 안 들어간다. 그런데 하나씩 된다. 복권을 사 보면 열장을 사면 하나쯤은 된다. 그런데 본전치기는 안 된다. 어떤 경우에는 본전하는 경우가 있다. 본전치기도 안 되면 그 다음에는 안 하기 쉬운데 본전을 했다. 그러고 나면 또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어차피 본전을 건졌으니까 또 한번하지! 이런 생각이 든다.
판이 아주 중요하다. 아담은 이상한 판을 만들어 놨다. 사탄은 아담에게 네가 하나님같이 될 것이다. 어쩌면 될 것 같거든! 어쩌면 될 것 같으니까 하지! 전혀 안 될 것 같으면 안 한다. 아무리 멍청한 사람이라도 전혀 안될 것은 안 한다. 그런데 뭔가 좀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한다. 그러니까 사탄의 말을 전혀 안될 말을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럴듯하게 얘기해서 일생을 거기에 소모 하도록 만들어 놨다. 그러니까 사탄이 만들어 놓은 판하고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판하고는 다르다. 서로 필요가 다르니까!
세상은 자신의 논리(論理)로 천국의 판을 가리고 있다. 유대주의의 판에서 본 구원은 요원하고 세상 판에서 본 천국은 허황하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본 구원은 지금이고 교회 판에서 본 천국은 현실(現實)이다.
세상은 자기 논리로 이 판을 가리고 있다. 그 논리의 마술에 걸리면 안 된다. 논리학과 그 기술은 어느 판에나 다 적용할 수 있다.
우리가 유대주의 판에서 구원을 본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겠냐? 어떤 민족이 구원을 받겠냐? 하고 보면 어찌되겠습니까? 요원(아득히 먼)한 일이다. 유태주의 입장에서 유태 민족이 온 인류를 통치하는 그런 새로운 제국이 건설된다. 하나님의 신정의 통치가 이 땅 전체를 지배하는 그리고 유태인이 그 중심에 서 있는 예루살렘이 그 중심에 서 있는 그런 세계가 온다. 이런 판에서 만일 인류의 구원을 생각해 본다면 이것은 요원한 문제다. 세상 판에서 천국에 대해서 우리가 본다면 허황하다. 모두 앉아서 천국을 누린다고 하면 좀 잘나가는 사람들이 보면 이 사람들 어디가 좀 모자라서 왔겠지! 하고 생각한다. 올만한 사람들이 왔겠지! 제대로 된 사람이 여기 와서 저러고 있겠냐?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면 그 사람 생각에는 천국은 허황하다.
그런데 예수 안에서 본 구원은 지금이다. 교회에서 본 천국은 현실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름 뒤에 있는 천국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누리는 천국을!
어제 저녁에 청년부에서 집회하는 것을 보니까 내가 놀랐다. 너무 너무 행복했다. 말씀을 하는 것을 보는데 별것 아니었다. 나는 약간 좀 불만이 있었다. 왜냐하면 주제를 가지고 했다. 책을 가지고 주제에 충실했으면 좋겠는데 어떤 사람은 주제에 충실하게 말했다. 어떤 사람은 주제와 전혀 상관없이 말을 한다. 저것 아닌데! 아닌데! 그런데 뒤로 들어 보니까 다 행복했다고 한다. 자매들이 나와서 다 행복했다고 하니까 이것 순서고 뭐고 다 소용없고 문제는 행복한 것이 문제다. 책대로 하고 안하고 이것이 문제가 아니다.
교회 안에서 본 천국은 허황하게 보일 것 같지만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너무 행복했다. 승목이가 나와서 승목이가 원래 감정이 풍부하다. 현식이가 말씀하고 나왔을 때 은정이가 허그를 했는가 보다. 자기에게 너무 감동이 왔다고 두 번 세 번 얘기하는 것을 보니까 진짜 가슴이 저리게 감동이 왔는가 보다. 저래 행복하면 되지! 교리에 맞냐, 안 맞냐? 이런 것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본 천국은 현실이다. 그것이 천국이지 다른 것 있겠습니까!
필요가 다르면 판이 다르고 판이 다르면 다른 결과를 가지고 온다. 논이라는 들판에서는 벼가 나온다. 밭이라는 들판에서는 보리가 나온다. 판이 다르니까 농사의 원리는 같고 농사의 노력은 다 같다. 밭에서 일하나 논에서 일하나 일은 똑같이 해야 되고 농약 칠때 농약 쳐야 되고 비가 와야 되고 바람 불어야 되고 다 똑같다. 다 똑같은데 이삭은 다른 것이 나온다. 판이 다르니까 육상 경기장에서는 육상 선수가 나오고 축구 경기장에서는 축구 선수가 나오고 경기장마다 선수가 다 다르게 나온다. 그러니까 금메달이 여러 개다. 올림픽가면 금메달이 많다. 판이 여러 판이라 그렇다.
아담은 하나님 같이 되기 위한 판을 짰다. 죽을 판을 짠 것이다. 하나님같이 되려고 했으니 지가 지 무덤을 판 것이다. 이것이 우리 일이다.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크면서 은연중에 무엇인가가 들어와서 자기가 하나님같이 되기 위한 판을 짰다. 이것은 무덤을 파고 있는 길이다. 그래서 고상해 보이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어려워진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니까 얼마나 고상한가!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니까 모든 세상이 다 개똥처럼 보일 것이고... 안 그런가? 하나님 같이 되려니까. 그러니까 참 고상하다. 그리고 고상한 곳에만 찾아다니게 되고, 고상한 척 하려고 노력하게 되려고 한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어려워지는 것이다.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어려워지는 것처럼 고상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더 어려워진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짚신 신고 다니면 쉬운데 고상하려고 하면 어렵단 말이다.
아담은 노력할수록 어려워지는 세계에 들어갔다. 가인의 제사, 잘 하려고 제사를 지려고 했지 사람을 죽이려고 제사를 지내려고 했겠는가? 하나님께 잘 보이고 최고의 선이 제사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제사다. 그것을 하러 갔는데 사람을 죽였다. 사람을 죽이러 간 게 아니다. 최선을 다 하려고 갔던 것이다.
네피림의 폭력, 폭력을 하고 싶어서 했겠는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아름다움을 보고 결합을 해서 결혼을 했는데 그것이 네피림이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 속에는 하나님과 사람이, 천사와 인간이 결합하기만 하면 더 이상이 없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폭력으로 변한다. 내가 완전한 사람이 되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완전한 사람이 될 수록 폭력으로 변한다. 더 완전한 지배를 해야 되기 때문이다. 완전한 군주가 되면 더욱 완전한 지배를 요구한다. 선생도 완전한 선생이 되면 제자들을 더 완전한 제자들을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 제자들이 죽을 판이 되는 것이다. 적당한 선생은 괜찮은데 너무 해서 머리가 번쩍번쩍 빛나는 사람이 있다면 밑에 있는 아이들은 죽어난다. 물론 한 두 명은 괜찮을 것이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거기서 죽어나는 것이다. 네피림의 폭력이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바벨의 혼란, 바벨은 혼잡이다. ‘힘을 모으자.’ 하면 뭐가 생기는가? 분열이 생긴다. 이 모든 것들이 다 그 판에서 나오는 것인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판이 그 판이니까 계속해서 나오는 것이다.
국수 뽑는 기계에서는 빵이 나올 수 없다. 그러니까 아담 판에 있는 인간문제는 답이 없다. 그래서 다음으로 넘어간다. 풀지 못한 숙제는 모두 사후세계(死後世界)로 미루어지는 것이다. 국수 뽑는 기계에서는 계속해서 국수만 나온다. 빵 만드는 공장에서는 빵만 계속해서 나온다.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국수 만드는 기계에서 빵이 나오는 법은 없다. 그러니까 아담 시대에 국수가 나오던 것이 지금 와서 빵 나오는 법은 없다. 기계가 그 기계다. 여러분들도 기계를 사다 놓고 오랫동안 안 쓰던 기계가 있을 것이다. 꺼내서 다시 돌려보라, 다시 그것이 된다.
요즘은 그런 기계가 없지만 옛날에 수동식으로 된 국수 뽑는 기계를 하나 샀다. 밀대로 밀어서 넣어서 손으로 돌리면 국수가 나온다. 충주에 있을 땐데 그 때는 좋은 것이라고 하나 샀다. 내가 해 보니까 힘이 들어서 도저히 안 되었다. 손으로 돌리니까 너무 힘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한두 번 해 먹고 말았다. 오랫동안 두었다가 다시 꺼내 봤는데 그 기계는 그 기계였다. 그때 써 먹고 이사 올 때 버리고 왔다.
아담 판에서는 답이 없다. 모두 네 탓이다. 내 탓이 아니고 네 탓이다. 선생님은 제자 탓이다. 제자는 선생 탓이다. 이렇게 되어 버린다. 자기는 괜찮은 데 남이 그렇다. 모두가 다 남 때문에 잘못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참 이상한 일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자기만 고치면 되겠는데 꼭 그런 사람이 모든 사람을 고치려고 대든다. 그게 참 이상한 일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 고치면 되겠다고 하는데, 그 사람은 모든 사람을 다 고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50억 인구를 언제 다 고치겠냐? 네가 고치는 게 쉽지. 하나만 고치는 게 안 쉽겠냐? 해도 남부터 고치라고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는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발전이 안 되는 것이다. 네 탓이다. 그러니까 해결이 안 된다. 그래도 최소한 내 탓이다. 이래야 변화가 생기고 발전이 생길게 아닌가?
그런데 그러다가 우울증에 빠지면 안 된다. 네 탓이라고 하는 사람은 우울증은 안 생긴다. 다 남에게 미뤄버리니까 그런데 내 탓이라고 하는 사람은 잘못하면 우울증에 걸린다. 그래서 내가 이것을 두고 이러난 말도 못하고 저러란 말도 못한다. 그래서 제일 좋은 도피처가 뭔가 하면 죽으면 천당 간다. 이것이 가장 좋은 도피처다. 그러면 네 탓이다, 내 탓이다 할 것도 없고 죽으면 천당에 갈 것이니까 하고 사후세계로 미루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가 사후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판에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길, 하나님께로 수확 되는 길,
영생의 길이 추수를 기다리고 있는 들판 같았다.
그러나 예수님 판에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길, 하나님께로 수확되는 길, 영생의 길, 이것이 추수하는 들판처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있는 열매를 모은다.”고 했다.(36)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 판에서는 수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수확이 되기 쉬운가? 하나님께로만 수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를 다 하려면 예수님도 안 된다. 안 그렇겠는가? 예수님 이라고 별 재주가 있겠는가? 예수님은 특별한 능력이나 재주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예수님은 한 가지, 하나님께로만 수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다는 그 말이다. 사람의 기준으로 수확을 거두려고 하면 불가능하고 역시 어렵다.
종교에 들어가면 정성을 요구한다. 종교적일수록 더욱 더 정성을 요구하게 된다. 어느 종교든지 정성이 없으면 종교가 안 된다. 우리나라에는 불교가 원래 종교다, 민족 종교라 할 수 있다. 물론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지만 신라, 백제, 고구려, 고려가 전부 불교와 불교문화가 똑 같이 되어 있었던 세상이었다. 그러다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주자학이 들어오면서부터 유교 문화가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불교는 알고 보면 뿌리 깊은 것이다.
불교 안에 들어가면 중요한 것이 정성이다. 정성을 드리는 것이다. 나는 교회는 정말 어리석다고 가만히 생각하면서 속으로 웃는다. 절에서는 절을 지어놓고 불상만 만들어 놓으면 오는 사람 중에 그냥 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다 돈을 들고 온다. 절에 가면서 그냥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부 정성을 드리러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성을 드리려면 표시가 있어야 될 게 아닌가? 맨 입으로 가서 어떻게 정성을 드리는가? 그러니까 절에 가는 사람은 전부 다 뭘 싸 가지고 간다. 어지간해서 다 가지고 간다. 그래서 들어보니까 절에 돈이 엄청나게 많다고 한다. 교회에서는 헌금하라고 강조하고 부흥회도 하고... 답답한 일이다. 그러니까 정성을 요구하면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놈의 정성이 끝이 없다. 어디까지가 정성이 되는지 모른다.
율법은 열심을 요구한다. 양심은 깨끗하기를 요구한다. 계속해서 깨끗하기를 요구한다. 그런데 그것이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다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열심이고, 어디까지가 깨끗한 것인지 모른다. 기도를 하는 데 어디까지만 하면 잘 하는 지 확실하게 응답받을 수 있을 만큼 하는 것인지 해 보니까 그것을 모르겠다. 깊게 해 보지는 못했지만 기도를 했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아주 기가 막힌 일이 많다. 관절염이 걸린 사람은 보통이다. 추운 겨울에 바위 위에 담요 한 장 깔고 앉아서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한 번 생각해 보라, 이게 보통일인가? 그리고 철야기도 하지, 잠 안자지, 금식기도하지, 40일, 40일 기도하면 거의 죽을 판에 가깝다. 그것을 계속한다. 이런 것 속에서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잘 모른다. 40일 기도하면 기독교에서는 제일 오래 한 것으로 기록에 남는데 어느 절에서 스님이 70일을 금식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코가 납작해졌다. 그러니 이것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사마리아 여자는 누가 봐도 문제투성이고 자신이 봐도 한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새 판에서는 간단하게 구원을 얻었다.
이런 요구 안에서 사마리아 여자는 안 된다. 이런 요구가 있는 판에 가서 사마리아 여자가 명함을 내 놓겠는가? 청소나 하겠는가? 못한다. 그런 세계 안에서 이 사람은 문제투성이다. 자신이 봐도 한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새 판 안에서 하나님께 필요한 사람으로 간단하게 수확되었다. 여러 가지를 수확한 것이 아니고 딱 한 가지를 수확했다. 이것은 새 판이다. 이것은 예수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판은 생명의 판이다. 이것은 기술로 만들 수 있는 판이 아니다.
이 판은 생명이 만들어낸 생명의 판이다. 기술로 만든 것이 아니다. 새는 새 판을, 소는 소 판을 만든다. 이와 같이 아담은 아담 판을, 예수는 예수 판을 만든 것이다. 그 생명이 있는 곳에 그 판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새 사람이 있는 곳에 새 판이 만들어진다. 새는 새판을 만들고 소는 소판을 만든다.
이와 같이 아담은 아담판을 만들고 예수는 예수판을 만든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있는 곳에 그 판이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의 판에 들어가면 무섭고, 어떤 사람의 판에 들어가면 내가 편안하고 하는 것이 그 사람의 판 때문에 그렇다.
검찰에 들어가면 뭔가 좀 이상하다. 죄 지은 것이 없어도 공연히 이상하다. 판이 그런 판이기 때문이다. 한 번은 검찰에서 출두하라고 카드가 날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검찰에 갈 일이 없는데 경찰에 출두하라는 것이다.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군위 검찰에 갔다. 효령에 있는 산에 언덕을 파서 축대를 했다고 옆에 있는 사람이 고발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그래도 쫄아서 갔다. 경찰에 가니까 안 쫄아 보려고 해도 도저히 안 되었다. 아무리 없어도 혹시 내가 부재중에 한 일이 있는지 모르지 않는가? 검찰 서기가 하는 말이 산을 훼손시켰네요. 그래서 마음을 좀 놓였다. 내가 무슨 큰 죄를 지은 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구나. 거기는 판이 그러니까 사람이 들어가면 그냥 쫀다. 누가 들어가도 별 수 없다. 그런데 대구교회 들어온 사람들이 말하기를 들어가니까 편안하더라고 한다. 그것은 판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검찰청에 들어가면 그냥 쫀다. 으스스하다.
새 판이 만들어진 곳에서 새 인류가 나온다. 새 사람이 있으면 새 판이 만들어지고 새판이 만들어지면 새 일이 일어난다. 어떤 사람에게 가면 편안하고, 어떤 사람에게 가면 편안치 못하다 하는 것은 판 때문에 그렇다.
예수님이 그 여자에게 무슨 심오한 말을 했겠는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이 아니다. 거기서 무슨 심오한 말을 했을 리도 없다. 예수님도 공부를 안 한 분이고 그 여자도 공부를 했을 리가 없다. 어쩌면 당연하게 일상적인 말씀을 하셨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연하게 일상적인 말씀을 했지만 이 여자에게는 새로운 것이었다. 판이 새로우니까 아주 새롭다. 우리가 먼 나라에서, 우리가 전혀 보지 못한 나라에서 온 사람이 한 말은 다 새롭다. 꼭 문명국가에서만 와서 그런 게 아니고 저기 멀리 남양 군도의 조그마한 섬에서 온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을 들어보면 다 신기하다. 판이 달라서 그렇다.
예수님은 당연한 말을 했겠지만 이 여자가 들을 때는 전혀 새로운 말이었다. 지금까지 못 들었던 말이었다. 모세 이스라엘 판에서 시달리고 있다가 전혀 새로운 판을 만났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
우리가 쉽고 당연하게 한 말이 상대방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일 수 있다. 우리 모두가 다 이렇게 되기를 바란다. 새 사람으로서, 새 나라의 사람으로서, 새 판에서 온 사람으로서 세상을 깨우는 빛이 되기를 원한다.
우리도 우리가 볼 때는 쉽고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상대방에게는 전혀 새로운 말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회라고 하는 이 판에서 젖어서 살다가 세상에 나가서 세상 사람에게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냥 일상적인 말일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말일 수가 있다. 아주 새로운 말일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 교회 형제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다. 교회서 살다가 바깥에 나가서 총각 처녀로 만났다. 만나보니까 이 형제도 별게 아닌데 자기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랬는데 그 처녀가 볼 때는 너무나도 신기한 사람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결혼을 했다. 누군지 잘 모르겠지요? 그런 사람이 있다. 자기가 전혀 모르는 세계니까 그렇다. 이 사람은 보통으로 이야기했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아주 신기한 세계였다.
우리가 새 사람으로서, 새 나라의 사람으로서, 새 판에서 온 사람으로서 세상에 빛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가 일부러 빛을 발하라! 이렇게 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가서 빛을 발하려고 해 보라. 전부 가짜라고 할 것이다. 너 가짜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냥 교회 안에서만 살았어도 충실하게만 살았으면 바깥에 나가면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전혀 새로운 것을 듣게 된다.
예수님이 계시면 새 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새 판이다. 세상과 다른 판이다.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되어 보겠다는 판이 아니라 구속 받은 새 생명으로 짜여진 은혜 아래 있는 판이다. 그렇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 받았고 예수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았다. 잃었던 인격을 다시 받았다. 모두가 은혜다. 교회는 은혜의 판이다.
교회는 새사람이니까 새판이다. 알고 보면 세상과 다른 판이다. 인간이 하나님 같이 돼 보겠다는 이 판이 아니고 구속받은 새 생명으로 짜여진 은혜의 판이다. 판이 완전히 다르다. 한 쪽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작든지 크든지 간에 다 하나님같이 돼 보겠다는 그 판이 세상이다. 어디가든지 다 그렇다. 그런 판에 가서 살려면 출세하려면 쉽다. 전부 다 하나님같이 되려는 판이니까 가서 여러분은 사람 노릇만 해주면 된다. 그러면 다 좋아한다. 다 하나님 노릇 하려는 판에 가서 자기도 하나님 노릇하려고 하면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거기 가서 그냥 사람노릇 해주려고 하면 좋아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있어야 자기가 하나님 노릇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 되게 해주면 되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 되게 하려면 내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 그러면 살기가 쉽다.
거기 가서 되도 안하게 자기도 하나님 되려고 하니까, 교회 좀 다녔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되려고 하니까 더 안 된다. 교회를 다녔으면 사람같이 되어야 한다. 전부 하나님 같이 되려는 것이니까 나는 사람같이 되어야 그래야 서로 짝이 맞는다. 그러니까 하나님 같이 되어보겠다는 판, 이 판에 들어가서 우리는 구속받은 판 이 판을 본 사람으로, 내 의가 없어서 하나님의 의로 구원받은 사람으로 거기에 가야지, 나는 그래도 너보다 낫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 같이 되려는 사람에게 내가 너보다 낫다고 하면 말을 듣겠는가? 듣지 않는다.
우리가 전도하다가 실패한 것이 그것이다. 나는 너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그 사람에게 가면 그 사람은 하나님 같이 되려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 앞에서 그러면 안 된다. 그러니까 은혜의 판에서 온 사람으로 말을 해야 한다.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가 창조 받았다. 예수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았다. 그래서 잃었던 인격을 찾은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우리가 자랑할 것이 없다. 모두가 은혜다. 그러니까 교회는 은혜의 판이다. 은혜의 판인데 자기는 거기서 은혜를 모르고 또 자기 의를 내세우려고 하면 교회 생활이 안 된다.
세상은 은혜를 거부하고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한 경쟁 판이다. 그러니까 각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모든 영광은 땀의 대가다. 땀은 곧 부패하고 악취가 난다. 이것이 아담이 만든 세상의 특성이다.
세상은 은혜를 거부하고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서 경쟁하는 판이다. 그러니까 각박할 수밖에 없다. 땀이 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땀은 나오면 금방 부패한다. 그래서 냄새가 나고 악취가 나는 것이다. 땀이 원래부터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니다. 여러분이 처음 땀이 날 때 맡아보면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땀이 나와서 세상 바람을 맞으면 부패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악취가 나는 것이다. 이것이 아담이 만든 세상의 특성이다.
자기 의를 세우려 하니까 싸움을 일으키고 자멸의 길로 가는 것이다. 세상일은 하나 같이 의를 세우자고 시작하지만 불의로 끝을 맺는다. 정의를 세우겠다는 사람은 많은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롬3;10)고 하였다.
아담으로부터 나온 것은 처음에는 좋은 것 같이 나왔는데 나오면 부패한다.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니까 싸움이 생긴다. 내 의를 세우려고 하니까 내가 옳은 사람이 되려고 하면 상대방하고 나하고 겨루게 된다. 그래서 자멸의 길로 가게 된다. 이것이 가인의 길이다. 자기의 제물이 열납 되지 않았다. 그러면 자기는 의가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자기 제물이 열납이 되지 않았으니까 자기 의가 없는 사람이 돼 버렸다. 자기 의가 없는 사람으로 알고 갔으면 좋았을 것인데 거기서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니까 동생하고 싸우고 죽이게 된 것이다. 동생이 있으면 자기가 의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동생이 있으면 자기는 불의한 사람이 된다. 세상의 일은 하나같이 의를 세우려고 시작을 하지만 결과는 불의로 드러나게 생겼다. 그래서 세상에 가보면 정의를 세우겠다는 사람이 너무 많다. 우리나라에 특별히 더 많다.
왜 이것이 더 많으냐면 우리나라의 민족사상에 깔고 있는 것이 정의감이다. 고려 말에 들어온 주자학은 성리학으로 이기이원론이다. 그러니까 성경하고 비슷한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옵소서. 했는데 이것이 주자학이나 마찬가지다. 주자학에서는 하늘이라고 하지 않지만 하늘의 뜻이, 이(理)라는 것이 사람에게 와서 실현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실현되면 완벽하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주옵소서. 그러니까 내게서 이루어지면 완벽한 것이다. 그 완벽을 추구했던 것이 주자학이다. 그러니까 이조 500년 동안 그렇게 싸운 것이다. 그 완벽을 추구하기 때문에 계속 싸운 것이다.
고려 때까지는 불교문화권이니까 거기서는 완벽을 그렇게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싸움이 없다. 그런데 주자학이 들어오면서부터 싸우기 시작한다. 그것이 우리 민족성 속에 박혀 있다가 그것이 기독교하고 만났다. 기독교의 선악 개념하고 만나니까 아주 흡사하다. 그래서 우리 한국에서 유독이 정의를 세우겠다는 기독교인들이 많다. 우리나라에서 정의 운동의 발원지가 기독교 안에서 일어났다. 기독교도 좌파우파, 보수파 자유파가 있는데 자유주의 파에서는 인본주의적인 사상이기 때문에 정의를 주장한다. 그러다보니까 70년대부터 일어난 데모의 핵심 속에는 기독교사상이 들어가 있다. 그러니까 불의를 못 참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구약을 주로 인용을 한다. 구약을 읽어보면 다 그런 얘기다. 왕들이 불의한 왕들이 많이 나오니까 그 왕들에 대해서 하는 말이 나오고 불의한 세상에 대해서 나오는데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니까 만날 불의한 문제를 가지고 싸운다. 정의를 세우겠다는 사람이 너무너무 많다.
내가 생각할 때 우리나라 같이 정의를 세우겠다는 나라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얘기를 들어보니까 중국 사람들은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단다. 그래서 위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것에 대해 이의도 없이 그것을 인정하고 그대로 따른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반장선거만 하려고 하더라도 다 개입을 하고 반장선거만 하더라도 중앙에서 당대표가 내려올 정도니까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니까 전부 정의를 세우겠다고 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하시는 말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이것은 한 놈도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많은데 너무 좀 심한 말인가? 아마도 유대인들이 그랬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를 세우겠다는 사람은 그렇게 많은데 하나님이 원하는 의를 세우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롬3:10) 이것은 아주 중요한 구절이다.
여담인데 공산주의를 말하면 Karl Max인데 처음 가입한 곳이 의인동맹이다.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의로운 사람이 동맹이 되는 것이니까 이것을 의인결사대라고 한다. 물론 그 시대가 이런 사람을 만들어낸 그 시대이겠지만, 봉건사회에서 브루조아로 넘어와서 오는 시대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산업혁명이 되었다는 것은 모든 것이 분업화되었다. 그리고 분업화된 것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대량생산을 가져왔다. 대량생산을 하기 위해서는 기계가 나왔다. 그것이다. 그러면 기계가 나오게 되니까 자본가가 생기게 되었다. 그전에는 각자 집에서 하니까 자본이 있고 없고가 큰 문제가 없었다. 내 집에서 고추도 심고 배추도 심고 다 하고 살았고 다 가내공업이었는데 대량생산을 하려니까 큰 기계가 필요하다. 큰 기계, 큰 공장이 필요하게 되었다. 큰 기계, 큰 공장을 사오려면 가정에서 될 수가 없고 자본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자본의 독점이라는 것이 생겼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유명한 사람이 되었는데 이 사람이 처음부터 공산당이라고 한 것이 아니고 1847년에 의인동맹에 가입을 했다. 그래서 거기서 공산당 선언문이 낭독이 된다. 공산당 선언문을 의인동맹에서 채택을 해서 의인동맹이 공산당 동맹으로 바꿔진 것이다. 의인 동맹의 표어는 우리는 다 형제다 이것이다. 이것을 보고 놀랐다. 우리는 다 형제다.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런데 공산당 선언문이 발표될 때는 노동자여 단결하라 이렇게 구호가 바꿔졌다. 이것이 레닌에 가서 러시아 혁명이 성공을 하게 된다. 그리고 스탈린으로 권력이 넘어가서는 반동분자는 처결하라 이렇게 된다. 그래서 러시아 혁명에서 죽은 사람이 이 천 만 명이 넘는다. 그러니까 의롭게 시작을 하고 의를 세운다고 시작을 했는데 마지막에 가면 불의가 된다.
기독교도 생각을 해보면 우리는 형제다. 같은 말이다. 그러면 어째서 둘이 똑같이 우리는 형제라고 했는데 하나는 이쪽으로 가고 하나는 그쪽으로 갈수 있는가? 거기서 우리는 형제다 하는 말은 압박받은 사람들, 노동자들, 우리는 압박받은 사람들로 형제다. 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 속에 원한이 들어있는 것이다. 노동은 내가 하는데 돈은 다른 놈이 가져간다는 데서 불만이 생겨서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안에서 우리는 형제다 하는 말은 그 말이 아니다. 구속받은 사람으로서 형제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의가 없는 형제다. 공산주의는 의가 있다. 일은 내가 하는데 돈은 왜 다른 놈이 가져 가냐는 것이다. 내가 일을 하니까 내가 그 돈을 가져가야하는데 일하는 사람보다 자본가가 돈을 더 많이 가져가니까 억울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뭉치자 이런 말이다. 우리끼리 뭉치자 그래서 두 번째 나온 말이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의가 없었다. 주님의 의로 하나님의 의로 구속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가 형제가 되었다. 그러니까 가는 길이 점점 달라진다. 그래서 사람들이 의로 시작해서 불의로 끝나는구나.
가인과 아벨이 분명히 의로 시작을 했다. 제물을 드리러 갈 때 의로 시작을 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불의로 끝나고 말았다. 그래서 막스에서 레닌으로 레닌에서 스탈린으로 스탈린에서 우리 쪽으로 오면 김일성으로 거기서 김정은으로 이렇게 내려가고 있다. 조금도 좋아지는 것이 없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 이것이 아담의 세계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 외에 (인간의 의 대신에) 자신의 한 의를 나타내셨다.(롬3;21) 이것은 율법과 상관없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고 하신 것이다. 여기엔 차별이 없다. (롬3;21~24참) 믿으면 된다.(롬3;26참)
그러니까 하나님은 율법이외의, 즉 인간의 의와 관계없는 자신의 한 의를 나타냈다. 그러니까 인간의 의를 가지면 이렇게 싸운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는 결국 아주 좋은 마음으로 시작을 해도 결국은 칼 막스는 노동자가 아니고 노동자가 불쌍하고 억울하게 생각되었던 사람이어서 그 편을 들어서 이런 사상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것은 막스의 의, 인간의 의고 노동자들도 자기가 일했으니까 자기 의가 있으니까 주장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는 안 되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의를 제외하고, 그 의외에 한 의를 나타냈다는 것이다. 로마서 3장 21절에 보면 하나님의 한 의를 나타냈다는 것이다. 사람의 의 대신에 한 의를 나타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와야 우리가 평화가 되지 인간의 의가 오면 평화가 될 것 같지만 평화가 되지 않고 싸운다. 우리는 세상이 다 의로워지면 될 것 같지만, 불의한 자가 없고 다 의로운 자가 되면 될 것 같지만 이것은 아담 판이다. 판이 아담 판이기 때문에 아담 판에서 의를 주장하면 주장할수록 어디로 가냐면 계속 싸움으로 간다. 참 이상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의외에, 인간의 의외에 다른 한, 율법의 의외에 다른 한 의를 나타냈다. 그러니까 이것은 율법과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신 그것이다. 그 의를 나타냈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
율법의 의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한다. 성적을 요구하는 것이 율법의 의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우리에게 성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서 우리가 그 안에 포함되어서 우리의 모든 죄가 청산되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100%로 일하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다.
우리 모두가 이 안에 와야 평화가 되는 이유는 이 안에 와야 자랑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전에는 1등과 10등의 차이가 하늘과 땅 같은 차이였는데 내 힘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기에 여기서는 차별이 없어진다. 차별이 없으니까 싸울 일도 없다. 여기는 차별이 없고 믿기만 하면 된다. 로마서 3장을 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의를 제정해놓았으니까 이제는 그것을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이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 이 기회에 하나님도 의로우시고 또 예수 믿는 사람도 의롭게 하려고 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서 우리에게 주신 예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종교적 특권층과 율법주의자들이 본 예수는 한 말로 이단자, 혹세무민하는 자, 참람한 자로서 민족과 유대교를 위해 제거해야 할 사람이었고, 반대로 그를 따르던 광범위한 의미의 제자들과, 특별한 제자들이 만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하나님과 같은 사람으로서 심지어는 십자가에 못을 박고 장대에 매어 달아도 죽지 않을 수 있는 사람으로 믿어졌던 사람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써 우리에게 주신 예수는 어떤 사람인가? 종교적인 특권층과 율법주의자들이 본 예수는 한마디로 이단자고 혹세무민 하는 자고 참람한 자로써 민족과 유태교를 위해서 제거해야 될 사람이었다. 반대로 그를 따르던 광범위한 의미의 제자들, 그리고 특별한 제자들이 만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고 하나님과 같은 사람으로서 심지어는 십자가에 못을 박아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이다. 그러니까 두 편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그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죽었다가 다시 사신 것이다. 유대인의 예상은 그가 죽으면 끝날 줄 알았고, 제자들의 믿음은 그는 죽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를 죽음에 내어 주시고 다시 살리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이 두 편 모두의 예상을 다 뒤엎고 죽었다가 다시 사신 것이다. 어느 편에도 해당이 되지를 않았다. 유대인의 예상은 그가 죽으면 끝날 것이라고 알았고 제자들은 그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를 우리 범죄 함을 위해 죽음에 내어 주시고 우리의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려주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이것은 전혀 사람으로서 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당연히 생각한다. 유태인이라면 죽으면 끝나겠지. 지가 인간인데 별수가 있나? 이렇게 생각한다. 제자들은 그 사람은 물위로 걸어갔던 사람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십자가에 못 박아도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야.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예상을 뒤엎고 예수를 내어 준 것이다. 우리의 범죄 함 때문에 내어 준 것이다. 내어주기만 한 것이 아니고 우리를 다시 의롭다하시려고 그를 살리셨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예수는 하나님 같았는데 십자가에 못 박히니 죽었고, 죽은 자로 알았는데 다시 살아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생각이나 믿음을 다 무효 처리하시고 한 새 사람을 세우신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같았는데 십자가에 못 박히니 죽었다. 우리가 볼 때는 하나님 같았는데 십자가에 못 박히니 죽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자로 알았는데 또다시 살아났다. 이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에 우리로서는 정말 알 수가 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생각이나 믿음을 다 무효 처리 해버리셨다. 그리고는 한 새로운 사람을 세우신 것이다. 우리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 의로운 사람도 아니고 어떤 사람도 아닌 전혀 새로운 다른 사람을 세우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 전혀 다른 사람의 판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와서도 세상의 눈으로 자기 의니 남의 의니 하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남의 다리 긁는 격으로 아무리 교회 다녀도 소용이 없다. 이것을 못 알아들으면..... 이것은 판이 전혀 다른 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 한 새사람의 판에 들어왔다.
그는 사람이기에 복종하고 죽으셨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사람을 의롭다하시고 그를 인류의 주로 세우셨다. 사람이기에 복종하고 죽으면 뭐하냐? 죽으면 그만인데. 그럴 것 같으면 메시아를 뭐하려고 기다리는가? 메시아 있으나 마나지. 그런 메시아 있어서 뭐 하는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의롭다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야 이 사람을 알게 되지 우리의 생각을 가지고서는 이 사람을 알 수가 없다. 우리를 구원할 자 같으면 십자가에 메달아도 안 죽을 사람이어야 우리를 구원하지, 더군다나 이스라엘이 나라를 잃어버리고 있는 상태인데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람이 십자가에 메달아 놓으면 우리처럼 똑같이 죽을 사람 같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안 죽을 사람을 기다린 것이다. 유태인들은 안 죽을 사람을 기다렸던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이니까 복종하고 죽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죽었다. 우리는 ‘왜 죽습니까?’ 하는데 그는 너무나 당연하게 죽었다. 아마 우리가 예수님에게 ‘왜 죽습니까?’ 하고 십자가에 가서 물었으면 이 사람아, 내가 어떻게 안 죽겠는가? 이렇게 대답하지 않겠는가? 내가 사람인데 어떻게 안 죽겠는가? 이렇게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그 말을 이해를 못했을 것이다. 아니, 사람이면 죽지만 당신이 어찌 죽습니까? 당신이 죽으면 어떻게 메시아가 됩니까? 당신이 죽는다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구원을 받겠습니까? 이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이 이 사람을 의롭다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을 참사람이라고 인정하시고 참 의인이라고 인정하셨다.
그러면 조건 없이(율법적 조건)의롭다고 하심으로써 이 참에 자신도 의로우시고 예수를 믿는 자들도 의롭다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판이다.(롬3;21~31참)
그러므로 하나님 같이 되려는 생각(이것을 죄, 원죄라고 함)을 버리고 이 사람(예수)이 참 사람이며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고 각자가 다 그의 운명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믿으라는 것이다. 하나님 같이 되려는 생각을 버리고 이 사람을 믿으라는 것이다. 사람이니까 복종하고 죽은 이 사람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조건(율법적인 조건) 없이 의롭다고 하심으로써 자신도 이 기회에 의로워지시고 예수 믿는 자들도 의롭다고 하시겠다는 것이 로마서 3장에 있는 말씀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판, 즉 예수 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서 아무나 차별이 없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례나 무할례나, 선이나 악이나, 의나 불의나,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무효화 되고 하나님의 의(예수)로 구원 받은 사람들뿐이다
그는 사람으로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시고 아들로서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 이것은 우리 세계에 없는 일이니까 죽음에 내어주시고 다시 살렸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지 사람으로는 죽음에 내어주면 끝나버리기에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우리의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 때문이다. 그래서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로 된 것이 아니니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헬라인이나 무할례자나 선이나 악이나 의나 불의나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무효가 되었다. 하나님의 의로 구원받은 사람들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의인은 없다. 단지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만 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의인이 있어선 안 된다. 의인은 없으니까! 오로지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만 여기 있을 뿐이다.
이 사람들이 바로 교회로서 새 판이다. 옛 판이 인간의 의와 율법의 의와 선악의 의로 짜여진 것이라면 새 판은 오직 하나님의 의(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주심)로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 판 안으로 사람을 부른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함께 있는 이 판에서 우리도 그들과 함께 양식을 먹자.
이 사람들이 바로 교회다. 그러므로 판이 다른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들 판이기 때문에 판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옛 판이 인간의 의와 율법의 의와 선악의 의로 짜여진 것이라면 새 판은 오직 하나님의 의로 세워진 것이다. 이 판 안으로 사람을 부른 것이다. 우리가 전도하는 것은 이 판으로 부른 것이다. 하나님이 이 판 안으로 사람을 부르셨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율법의 판에는 누구라도 올 수가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선택한 사람마저도 안 됐다. 하나님이 심사숙고해서 선택한 사람까지라도 율법 안에서는 안 됐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략이 바꿔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말로 한다면 결국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새로운 판을 만드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과 사라미아 여인이 한 판에 함께 있는 이 판에서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기는 모르지만 자우지간 여기서 새로운 일이 일어난 이판이지 않는가? 이 판에서 우리도 양식을 먹어야 된다는 말이다. 이 양식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면 잘 못하면 다른 판 양식을 먹기 쉽다. 성경 때문에 얼마나 사람들이 문제가 많은 줄 아는가? 왜냐하면 다른 판 양식을 먹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우리는 이 판의 양식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 즉 자기양심의 의, 율법의 의 이것을 먹어선 안 되지 않겠는가? 이것이 무엇인가? 자기자랑, 교만, 판단, 정죄 이런 것들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자기 의가 있기 때문에 안 할 수가 없다. 공부 잘 하는 사람을 못 하는 사람을 무시 할 수밖에 없다. 못 하는 사람은 무시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런데 당연하게 생각할 수 가없다. 그래서 또 그것이 문제가 된다. 잘 하는 사람이 어떻게 무시를 안 하겠는가? 생각해 봐라! 하나님의 의에는 감사와 찬양과 예수 자랑할 것 밖에 없다. 그래서 “자랑하는 자들은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하였다. 그 말인 것이다. 자랑한다면 이제 나를 구속하신 이를 자랑하라는 것 밖에는 없다.
이 새판에서는 하나님에게 필요한 사람을 추수 하는 것이다. 우리가 추수의 범위를 알아야 되겠고 성질을 알아야 되지 않겠는가? 이 판에서 하나님에게 필요한 사람을 추수해야 한다. 이성이나 철학이나 양심이나 도덕이나 율법이나 종교에 필요한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 같아질 수 없는 사람 그대로 십자가에 달려있는 예수 같은 그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을 추수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고 보면 너무너무 쉬운 것이다. 원래 우리가 다 그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너무 쉬운데 우리가 잘 못 돼서 무엇이 잘 못 됐는가?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다 보니까 자기의가 생겼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것이 은혜를 은혜로 여기기가 어려운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람을 다른 조건 없이 추수하는 곳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 하면 어떤 사람인가? 우리가 잘 못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사람을 굉장한 사람이라고 생각 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사람은 아무 조건 없이 추수된 사람이다. 사마리아 여자를 누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말이다. 지금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지 않는가? 물동이를 놔두고 나가서 와 보라 이가 그리스도가 아니야! 내 모든 것을 말 한 사람을 와 보라! 하지 않는가? 이것이 하나님 일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잘 났어도 이 말을 안 하면 하나님 일을 못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추수 하러 왔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여자를 추수하고 만족했던 것이다. 그 한 사람이 추수된 것을 보고 만족했다. 그래서 이것을 보면서 온 인류가 다 추수하는 들판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 한 사람을 보면서 우리가 싹을 보면 잎을 아는 것과 마찬 가지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것처럼 이렇게 추수가 되면 다 되겠구나! 이 여자가 추수 되는데 누가 못 되겠는가! 예수 안에서는 누구나 쉽게 추수될 수 있다.
하나님 같이 되려고만 하지 않으면 다 추수가 된다. 아주 제일 간단하게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는 것만 없어지면 하나님이 다 쓸 수 있다. 그 것만 없어지면 그것도 못가겠는가? 그것이 어려운가? 어려우면 어렵다고 하라. 하나님 같이만 되려고 안 하면 하나님이 언제든지 쓰실 수 있다. 그것만 아니면! 그런데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아담이 왜 죄를 졌는가? 하나님 같이 되려고 이것만 없어지면 하나님이 자기가 쓰려고 지어 났는데 왜 안 쓰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다 구원 받을 수 있다. 그러면 다 하나님이 추수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모든 기준이 싹없어지고 오직 이 한 가지 기준만 가지고 보면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한 가지 기준만 가지고 봐야 되고 남을 볼 때도 이 한 가지 기준만 가지고 봐야 된다. 여러 기준으로 보는 것은 교회가 아니다. 그건 다시 이스라엘 율법판이다. 바로 그 판이 그 판이 되는 것이다. 옛 판을 버리고 새 판으로 들어와서 새 판 안에서 오직 하나만 찾으시는 그 분을 우리가 알아야 되고 거기서 모든 사람이 추수 될 수 있는 황금 들판이 보여야 누구를 보더라도 쉽지 않겠는가?
전도하러 갔는데 보니까 너무너무 지식도 많고 교양도 많고 해서 말 못 붙이겠더라. 이러고 올 필요도 없고 그 집에 가니까 집이 삐까 번쩍해서 도저히 발 들어놓을 데가 없더라하고 고개 쳐박고 돌아오지 말고. 안 그런가? 딱 한 가지 거두러 가자는 것이다.
붕어낚시만 하는 사람이 있다. 낚시꾼들이 붕어만 낚는 사람들이 있다. 밥이 틀린다. 붕어를 낚으려면 붕어밥이 있어야하고 잉어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이 하는 얘기를 들으니까 낚시터에 가면 인심이 각박하단다. 이상한데 등산(산행)가면 사람들이 참 좋단다. 다 밥 내놓고 먹어 보라 하고 하는데 낚시판에 가면 먹어 보란 소리도 없고 아주 냉랭하고 쌀쌀맞고 고약하단다. 이상하다. 다 놀러온 사람들인데 기왕이면 그러겠는데 낚시판에는 시끄럽게 떠들면 안 되니 옆에 사람 말 못하지 나만 낚시해서 딱 건져야하는데 옆에 사람이 줄 걸어놓으면 내가 불편하고 방해가 된다. 이것이 서로 경쟁 관계가 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데 낚시판 가면 인심이 고약하다고 한다. 추수판에 따라서 인심이 고약한데도 있고 좋은데도 있구나. 산에 가면 다 친구가 된다. 모르는 사람도 금방 친구가 된다. 그런데 낚시판에 가면 안 그렇다. 이 사람들이 밤새고 앉아 있다. 서리 맞아 가면서 앉아 있다. 그곳은 얘기하러 간 것이 아니니 살벌하다. 살생하는 마음이 있어 가지고 살벌하다.
산판하고 낚시판이 이렇게 다른데 우리가 아담판에 살다가 예수판에 들어오면은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모든 것을 다 무효화 시키고 딱 한판만 잡는 이것은 쉬운 일 같지만 이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성경도 다 알려고 하다가 딱 한 가지만 알면 된다. 눈에 얼른 안 보여서 그런 것이지 딱 한 가지만 알면 된다. 나도 안 가르쳐 준다. 하도 오랫동안 있다 봐 가지고 여러분이 스스로 보길 바란다. 내가 날마다 얘기 했으니까 안 해도 된다. 추수를 쉽게 하는 추수판 한 가지만 추수하면 쉽다.
부모들이 자녀들한테도 그렇다. 한 가지만 보면 쉬운데 여러 가지를 봐서 그렇다. 한 가지만 보면 다 귀엽다. 다 귀여운데 크면 기대가 생긴다. 이런 것을 했으면 좋겠고 등 기대가 생기면 그대로 못하면 불만이 생긴다. 인간관계 복잡해지고 이렇게 된다. 부모가 단순한 사람들 아무데고 보낼 생각이 없는 사람 밥만 잘 먹으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런 집 아이들은 문제가 없다. 밥 잘 먹는 걸로도 행복한 부모는 문제가 없다. 그런데 밥도 잘 먹어야 되지 공부도 잘 해야지 뛰놀기도 잘해야지 다 잘해야 되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하나님은 딱 한 가지만 우리한테 찾으신다. 우리가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나한테 딱 한 가지만 찾고 있구나!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많은 조건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다 없애 주시고, 예수 안에서 새 길 새 판을 열어 주셔서 하나님 사람으로 만들어 추수하려고 이렇게 작정하신 아버지께 영원히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 그리고 우리가 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 그리고 우리의 가능성을 엿보고 있던 모든 것, 다 무효화 시킨 것을 감사합니다. 완전한 새 사람, 다른 데서 온 사람, 그 사람을 우리에게 역역하게 보여 주시기를 원하고, 우리가 그 길을 따르고 그 길 안에서 우리가 단순화 되기를 원합니다. 내 스스로가 단순해져서 또 다른 사람을 단순하게 볼 수 있도록 주께서 인도하여 주시고 축복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교회생활이 이 단순성 안에서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