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부르심의 소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7-19).”
지난 시간에는 너희 마음눈을 밝혀 달라고 간구한 바울의 간구를 중심으로 교제를 나누었다. 하나님의 세계는 표면적인 세계가 아니고, 이면적인 세계이다. 머리가 좋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는 것도 아니고,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하나님 말씀을 알아듣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만큼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들도 없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성경을 천 몇 독한 사람도 있고, 아예 성경 한권을 다 쓴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마음눈이 밝아지는 것이 아니다. 다른 세계이다.
하나님의 세계는 이면적인 세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눈을 열어주지 않으시면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세계이다. 우리가 한마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다면 그것은 우리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
교회생활하면서 제일 답답했던 것이 말씀이 안 들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말씀이 들려 왔다. 그래서 알게 된 것은 말씀은 내가 듣는 것이 아니고, 들려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듣리는 것이 은혜다. 귀를 열어주셔야 들리고, 눈을 뜨게 하셔야 보이는 세계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원한다.
오늘은 부르심의 소망에 대한 말씀으로 나누겠다. 부르심의 소망도 이면적인 눈이 있어야 깨닫게 되는 소망이다. 옛날 교회에 다니면서 많은 소망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 소망들은 부르심의 소망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다른 소망들이었다. 부르심의 소망은 우리가 소망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소망이다. 옛날 우리가 소망했던 것은 과학문명이 발달하면서 하나님이 아니어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려고 하시는 부르심의 소망은 전혀 다른 소망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실 때 목적을 가지고 부르셨다. 창조도 그냥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다. 구속을 하신 것도 하나님의 목적과 필요 때문에 구속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 부르심의 소망을 알게 되면 우리 인생은 전혀 다른 세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교회생활을 오래 했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대하여서 밝혀 주는 분을 만나지 못했었다. 오늘도 ‘예수천당 불신지옥’ 이렇게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과 부르심의 소망은 전혀 다르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흙은 농부가 없으면 전혀 소망이 없다. 그냥 버려진 것이다. 그런데 농부로 말미암아 흙은 소망을 갖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스스로는 소망이 없는 존재이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땀을 흘리는 것은 먹고 살기위한 것이다. 먹고 사는 것을 보면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도 있고, 좀 못 먹고 못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 범주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잘 먹을까 어떻게 하면 좋은 차를 탈까? 그것뿐이다.
미국청년들의 소망은 제일 좋은 차와 제일 좋은 요트와 제일 좋은 모터사이클을 갖는 것이고 좋은 경비행기를 갖는 것을 소원한다. 후진국에서 생각할 때는 놀라운 소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것이 그것이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높이 올라가면 작은 집이나 큰 집이나 똑 같이 보인다. 다 성냥갑 같이 보인다. 이 차이를 가지고 우리는 ‘잘 살았다, 못 살았다’ 말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다 같은 것이다.
육신 안에 있는 소망은 옛 소망이다.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 있는 소망이 새 소망이다. 성경은 ‘해아래 새것이 없다’고 했다. 솔로몬은 모든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그런데도 노년에 깨달은 것이 옛날 사람들이 다 했던 것들을 했다고 하는 것이다. “해아래 새것이 없다. 헛되다.”고 말하고 있다. 옛 소망은 시간이 지나면 시들고 소멸하기 때문에 아무리 큰 소망도 결국 허무한 것이 되고 만다.
이대통령이 졸업한 상고에 처음 발령받아 근무했는데, 교장 선생님이 아주 멋쟁이셨다. 젊었을 때부터 교장을 하신 분이었는데 퇴직 후 삼년 만에 돌아가셨다. 특별한 병도 없었다. 젊었을 때부터 교장을 하셨기 때문에 자부심도 강하고 대단하신 분이셨다. 그런데 퇴직을 하고 보니 갈 곳이 없는 것이다. 그런 분이 경로당을 가겠는가, 어디를 가겠는가? 완전히 집안에만 갇혀 계셨다. 퇴직 전에는 아침부터 계속 학교를 순시하면서 왕 노릇 하셨는데 퇴직하고 나니 아무 할 일도 없고 갈 데도 없는 감옥에 갇힌 것이다. 그래서 삼년 만에 돌아가셨다. 이것이 허무하다는 것이다. 내가 갇혀서 살 사람이 아닌데 내가 어떻게 이렇게 됐는가 그렇게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하다가 시들시들해서 돌아가셨다.
사람은 최후의 소망으로 어떻게 하면 안 죽고 살 수 있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영생불사’ 서양에서는 ‘영혼불멸’ 이런 사상이 옛날부터 있어왔다. 이것은 부르심의 소망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오늘날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왜 예수를 믿습니까?” 물어보면 영생불사 영혼불멸의 소망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죽고 난 다음의 세계에 너무 관심이 많다. 지금은 이렇게 살지만, 죽고 난 다음에는 정말 ‘영원히 죽지 않는 세계가 있을 것이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자살폭탄 테러리스트가 있다. 온몸에 폭탄을 짊어지고 죽음으로 뛰어든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죽고 난 다음에는 영원히 사는 세계가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아랍세계이니까 그들은 일부다처제다. 이렇게 죽으면 열 명의 마누라를 데리고 살 수 있을 그런 좋은 곳으로 간다는 믿음을 심어주고, 그렇게 행동하게 한다. 이런 생각들은 애굽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육체가 죽더라도 자기의 영혼은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미이라를 만들어서 오랫동안 보존했다. 지금 그 미이라들은 어디에 있는가? 전시장에 있다. 뉴욕에 가면 미이라 전시장이 있다. 그것이 천국인가? 영생불사인가? 이렇게 사람들은 속고 있다.
부르심의 소망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인생 안에서 주실 소망이고, 새로운 소망이다. 우리는 생각할 때 죽고 난 다음의 소망이 새 소망이라고 생각했는데 성경은 오늘, 내가, 지금 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부활도 죽고 난 다음의 부활이 아니고 나는 부활이요 했다. 이 말은 나는 지금 부활을 산다는 것이다. 지금 부활을 살지 않으면 부활은 없다. 우리에게 내일이 있는가? 내일은 없다. 내일은 생각일 뿐 우리가 사는 것은 오늘을 살 뿐이다. 과거를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해도 사는 것은 언제나 오늘을 사는 것이다. 내일은 내 것이 아니다. 오지 않으면 없는 것이다.
히브리 사람들의 생각은 현재적이다. ‘내가 죽어서 음부에 내려가면 어떻게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내가 산 자의 땅에서 여호와를 찬송하리라.’ 그렇게 노래했다. 오늘 내가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내일은 없다.오늘 밖에 없다. 오늘밖에 없어야 오늘이 소중하다.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면 오늘은 사나 마나한 것이 된다. 그런데 정말 내일이 없다고 알면 우리는 오늘 가장 질 높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내일 보자는 사람은 무섭지 않다고 한다. 전혀 무섭지 않다. 지금 봐야 한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다. 소망 없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따라서 갔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 복의 원천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사도행전에서는 아브라함을 영광의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말한다. 영광의 하나님이 부르신 것,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의 개념 안에 있는 부르심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잘 먹고 잘 살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그것을 세상에서는 영광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바벨의 시대에 그런 사람을 따라 갔는데 그 길에서 아브라함은 제일 처지는 꼴찌였다. 아무리 해도 그 영광을 쫓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뒤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갔던 방향과 정 반대의 방향으로 간 것이다. 나를 위한 방향이 아니다. ‘너는 나의 영광을 위하여 지어진 자다,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너를 부른다.’ 이 부름이 아브라함의 귀에 들린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이 부름이 들리면 우리는 가던 길을 완전히 돌아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인생은 누구의 부름을 따라가느냐가 중요하다. 그것이 인생을 결정한다. 깡패의 부름을 따라가면 깡패가 되고, 도둑놈의 부름을 따라가면 도둑놈이 된다. 유형제가 14세 때 소매치기의 부름을 받아서 그때부터 25년 동안 도둑질을 했다. 순진한 소년을 데리고 가서 남의 가방 안에 있는 것을 자기 것처럼 뒤지는 것을 보여줬다. 그 순간의 스릴과 쉽게 돈을 버는 그것이 영광으로 보여서 교회 오기 전까지 그렇게 살았다.
어떤 영광이 내 영광으로 보이느냐가 너무 중요하다. 나는 젊었을 때에 한 사람 안에서 다른 영광을 보았다. 사람이 영광스럽구나! 사람에게 하나님이 표현되는 영광이 있구나! 그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의 길에서 완전히 돌아선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어떻게 대구로 내려 갈 수가 있느냐고 주위에서 난리가 났다. 그런데 나는 대구를 보고 간 것이 아니고, 사람을 보고 갔다. 직업을 보고 간 것이 아니고, 사람을 보고 갔다. 그 영광을 따라 왔는데 그 영광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도둑놈의 영광을 보고 가면 도둑놈 속으로 들어가서 도둑놈이 된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다. 창세기에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했다. 발원지가 있다. 한강도 발원지가 있고, 낙동강도 발원지가 있다. 발원지가 없는 강은 없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이 말은 복의 근원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복의 근원이 아니고, 영원한 복의 근원이 있다는 것이다. 복의 근원이 아브라함을 불러냈다. 불러내어서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했다. 놀라운 말씀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내어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지만 복을 줄 수는 없다. 이것이 문제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지만 스스로 복을 분배할 수가 없다. 내 마음이 있지만 마음 스스로는 여러분에게 표현할 수가 없다. 몸이 있기 때문에 지금 여러분에게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 몸은 마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마음을 분배하는 근원이 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이 되게 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형상과 모양으로써 하나님 자신의 복을 분배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옛날에 우리는 형상과 모양을 너무 시시하게 생각했다. 내가 내용이 되어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는 내용이 아니다. 영원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이 되시면, 우리는 그 생명을 분배하는 사람이 된다. 분배자가 된다. 이것이 영광스러운 소망이다. 우리가 하나님 같이 되는 것이 영광스러운 소망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이 되는 것이 영광스러운 소망이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복의 근원이 된다면 그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이 없다. 자식에게 ‘너는 나처럼 살지 말아라, 나처럼 되지 말아라.’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부모가 있다. 자기처럼 살게 하지 않기 위해서 공부도 시키고 이것저것 시킨다. 만일 우리가 자식에게 ‘너는 나처럼 되라. 나는 너의 복의 근원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
아들이 중학교 때 “아빠가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어?”하고 대들었다. 그런데 나는 담대한 마음이 생겼다. 너희 아빠 같은 사람이 어디 있나! 내가 너에게 주는 복은 다른 사람이 주는 것과는 다른 복이다. 아들이 알아듣고 굴복했다. 그 이후에 한 번도 반항하지 않았다.
복을 주는 부모여야 권세가 있다. 자식에게 늘 미안하고, 죄송한 것은 복이 없기 때문이다. 복이 없으니 무엇을 잘해주려고 한다. 그러나 하면 할수록 그것은 자식을 망하게 하는 길이 된다. 복을 줘야 한다. 선생이 제자에게 복의 근원이 된다면 그 선생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선생이겠는가!
예수님은 왜 영광스러운가? 그가 우리의 복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것이다. 이 세상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14:6).”고 했다. 자기가 길이라고 한다. 세상에 이 말을 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는 어떻게 이 말을 할 수 있었는가? 예수님은 바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자기의 생명이기 때문에 이 말을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우리도 이 말을 하게 되었다. 내가 누구에 대하여 ‘내가 너의 길이다. 내가 너의 진리다. 내가 너의 생명이다. 나를 알면 네가 복되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의 길이 주님이기 때문에, 나의 생명이 주님이기 때문이다. 나의 실재가 주님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복의 근원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도 당연하게 다른 사람에 대하여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생명은 이상하다. 나무가 자라면 그 끝에서 새로운 가지가 뻗는다. 그러면 그 가지는 새로운 가지에 대하여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생명은 그렇다. 그래서 바로 그 앞에 있는 가지가 근원이 되고 근원이 되어서 나무가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내 인생의 영원한 복이 되면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맏아들이고 우리는 아들들이라고 한다. 예수 안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복을 주는 사람이 된다.
예수 안으로 돌아간 사람을 보자. 아브라함이 언제 예수에게 돌아갔는가? 100세 때이다. 야곱의 130세, 모세의 80세, 이것은 예수에게 돌아간 나이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복의 근원 안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겉으로 볼 때는 인생이 끝난 사람들이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다. 절뚝거리며 지팡이를 짚고 가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복이 흘러 나왔다는 것이다. 이 복은 존재의 복이다. ‘인생이 저렇게 영광스럽구나.’
우리는 무엇을 가져야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하나님을 표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목회자 모임에서 목사님이 말씀하시길 나는 성경 한 권을 통독을 못했다 하셨다. 깜짝 놀랐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을 읽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성경 지식이 가득차야 복의 근원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사님은 우리가 한 말씀이라도 확실히 깨달으면 다 깨닫는 것이라고 하셨다. 많이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말씀이라도 확실히 알면 다 알게 된다는 것이다.
생명은 이상하다. 세포 하나를 떼어서 DNA검사를 하면 그 세포 안에 몸의 모든 것이 다 있다. 생명은 그런 것이다. 많이 아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속았던 것이다. 근본 안으로 돌아가면, 그 존재 안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 앞에 서 있는 아들의 자리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 위치로 돌아가면 그 자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리가 된다. 불평하는 사람에게는 복이 안 나온다. 인생이 감사한 그 자리에서 복이 줄줄 흘러오는 것이다.
시편 8편에 “사람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권고 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우리는 천사처럼 되려고 했다. 능력에 있어서는 천사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자리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는 자리라는 것이다. 천사처럼 되어야 영광과 존귀가 있는 것이 아니고 천사 같은 능력은 없지만, 비록 숨이 코에 붙은 인생이지만 그 자리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는 자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비밀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누가 복이 있다 하겠는가? 그런데 그 자리가 바로 에덴이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라고 했다. 우리는 에덴에서 흘러나온 그 물로 먹고 산다. 그 자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리가 되면 우리는 복을 분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원래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 하셨을 때, 만유에 대하여 복의 근원이 되도록 창조 하셨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그렇게 만드신 것은 만물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서양 사람들은 이 말씀을 오해했다. 그들은 힘을 가지고 정복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의 자연관은 정복 지향적이다. 여기서 무자비한 식민 정책이 나왔고 자연은 파괴 되었다.
여기서 지배하고 다스리라 한 말은 다른 말이다. 복을 주라는 말이다. 한 가정의 가장이 집에서 힘으로 지배하고 정복하고 다스린다면 아내가 말을 듣겠는가, 자식이 말을 듣겠는가? 절대 듣지 않는다. 복을 주어야 아내는 남편의 말을 듣고 자식은 부모의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복이 흘러야 한다.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을 동산에 두신 후에 동산을 경작하게 하셨다. 동산이라고 하면 우리는 우리대로 동산의 그림을 그린다. 동산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행복을 누리는 곳이 동산이다. 파라다이스란 말은 원래 No where, 거기에는 없다는 뜻이다. 파라다이스란 말이 원래 그런 뜻이다. 에덴동산이 어딜까 찾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리 찾아 봐야 없다.
우리는 에덴을 찾았다. 어디가 에덴인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거하시기 위하여 사람을 지으셨다.
우리는 그 자리를 잃어 버렸다. 그런데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거하시는 에덴이 어디인지 알게 되었다. 이것이 인격이다. 우리가 연마해서 되는 인격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래 당신의 거처로 만드신 그것이 인격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이 인격을 경작해야 한다. 과학의 세계는 2천년 동안 눈부시게 발전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100년 전에는 상상 할 수도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한다. 왜 그런가? 계속 경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경작해야하는가? 인격을 경작해야 한다. 만약 2천년 동안 이 인격이 경작 되어 왔더라면 지구는 이미 천국이 되었을 것이다. 목사님은 우리에게 이 이 인격의 씨로 오셔서 우리를 경작하셨다. 끊임없이 경작하셨다.
오늘 아침 누구와 이야기를 하는데 목사님이 대구에서 이 씨를 뿌려서 성공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는 것이다. 대구 사람들은 자기들끼리의 응집력이 대단하다. 신입이라도 학연으로 연결되면 바로 술 한 잔하고 친해지는 것이다. 그런 곳이 대구다. 나는 서울 출신이기 때문에 오랜 동안을 함께 근무 했지만 발붙이기가 어려웠다. 그런 척박한 대구에 씨가 뿌려져서 지금 하나님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 이 말은 어디든지 된다는 말이다. 경작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작은 인격의 경작이다. 인생의 위치를 점점 밝혀내는 것이다.
십자가를 경작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다. 오늘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사는 세계의 경작권이 맡겨져 있다. 우리가 땅을 소유하게 되면 그 땅은 내 땅이니까 내 원대로 사용할 수가 있다. 우리에게는 이 세계를 경작할 권리가 주어졌다. 경작하라! 경작만 잘하면 악조건도 좋은 조건이 될 수가 있다.
저런 곳에서 찬양이 나오겠는가? 그런데 그런 곳에서 더욱 찬양이 나온다. 어제 청년부 한 자매가 말씀 섬김이를 했다. 이 자매는 대구에서 박*석형제의 말씀과 그 사람이 딱 꽂혔다고 했다. 어떻게 저런 자리에서 하나님 말씀이 나오는가? 인생이 다 차단되고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는 거기에서 하나님이 표현 되는 것을 보고 딱 꽂혔다는 것이다. 이 자매는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말씀이 꽂히고 난 다음에 옛날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 생명에 꽂혀서 지금은 교회 생활을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무엇을 경작해야 하는가? 인격을 경작해야 한다. LA는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 모른다. 사람들이 LA로 몰려간다. 옛날에 그 땅은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이었다. LA의 Dead Vlei라는 곳에 갔는데 옛날 강물이 흘렀던 흔적만 남아 있다. 사막을 지나다가 호수가 보여서 막 달려갔지만 거기는 물이 없는 소금 호수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데드벨리라 한다. 물이 없는 곳이다.
지금은 LA가 얼마나 좋은 곳인지 모른다. 물을 끌어와서 경작을 했기 때문이다. LA는 너무 살기 좋은 곳이 되었다. 캘리포니아 쌀은 병충해가 없다. 우리는 습기로 병충해를 감당할 수 없어 농약을 뿌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캘리포니아는 햇볕이 쨍쨍 내리 쬐니까 물만 공급 되면 농사가 너무 잘되는 곳이다. 일 년에 몇 번이라도 농사지을 수 있는 곳이다. 분명 악조건인데 오히려 좋은 조건이 되었다.
우리 생각에 이 조건에서 하나님이 찬양 되겠는가 하는데 아니다. 그 조건이 바로 하나님을 찬양 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환경을 경작하지 못하므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지으셨습니까? 나는 왜 이렇습니까?’ 한탄만 하다가 죽는다.
아담에게 모든 생물에게 이름을 주라고 하셨다. 사람은 만물에게 이름을 줄 자다. 이름을 준다는 것은 흙이다, 나무다 그냥 명명하는 것이 아니다. 만물의 목적과 용도를 정해 주는 것이다. 우리가 왜 방황 했는가? 인생의 목적과 용도가 없기 때문에 방황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는 사람이 억만금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 돈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 사람이 목적이 없으면 돈이 많은 것이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차라리 돈이 없었더라면 건전하게 살았을 사람인데 돈이 많기 때문에 엉망진창으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이 쾌락에 젖으면 쾌락을 위해서 쾌락을 개발하는 것이다. 아무 가치가 없는, 인생이 저렇게 될 수도 있는가 하는 데까지 간다. 하나님의 목적과 용도가 없으면 인생은 소망이 없다.
내가 하나님의 목적과 용도에 부름을 받은 사람이면 나도 다른 사람에게 목적을 주고 용도를 결정해 주는 사람이 되게 된다. 내가 하나님에게 제한되면 다른 사람도 이 목적과 용도 안으로 제한을 시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이름을 주느냐에 따라서 만물이 저주가 되기도 하고 복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시간이 너무 많아서 힘들어 하는 사람도 있다. 퇴직하면 좋겠다, 일에서 벗어나면 좋겠다고 했지만 한 달을 못가서 지치게 된다. 왜 그런가? 시간의 이름을 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의 목적과 용도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한 번도 지루해 본적이 없다. 오히려 시간이 부족하다. 내 인생에, 나의 모든 시간에, 용도와 목적을 정해 주신 분이 있기 때문이다. 주님으로 인해서 사는 인생은 소망 있는 인생이다.
목사님은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육체의 보존을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 안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계시가 계속해서 흐르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는 늙음이 없다. 늙지 않는다. 늙는다는 것은 이제 시간이 널널해졌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