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동학의 단위조직
연원 단위의 포조직
포(包)조직이란 무엇인가? 그동안 동학의 단위조직은 접(接)이었다. 접은 50호 내외의 조직이다. 1884년 10월 28일 대신사 탄신기념제례에 각 포 두령 82명이 참석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 연원(淵源)내에 접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세상이 불안해지자 도인수가 늘면서 한 연원 내에 여러 접이 생기게 되었다. 여기서 자연스레 접을 포괄하는 포라는 호칭이 등장하게 된다. 연원(淵源)이란 제1장에서 나왔지만 전도인과 수도인의 인맥관계를 조직화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다른 연원으로 옮기는 경우도 생겼다. 이로부터 연원은 전도와 수도의 인맥관계를 넘어서 가르침을 주고받는 교화의 수수(授受)관계로 변하였다.
3월 19일부터 20일 사이에 임명된 대접주는 40명이 넘는다. 『시천교종역사』에 따르면, 충의포 대접주 손병희, 충경포 대접주 임규호, 청의포 대접주 손천민, 문청포 대접주 임정준, 옥의포 대접주 박석규, 관동포 대접주 이원팔, 호남포 대접주 남계천, 상공포 대접주 이관영 등이다. 『동학도종역사』에는 보은포 대접주 김연국, 서호포 대접주 서장옥을 추가하고 있으며, 『천도교회사초고』에는 덕의포 대접주 박인호가 추가되었다.
2만 3천여 명 모여
장내리에 모인 인원에 대한 기록은 제각각이다. 2만 내지 8만 명까지 나온다. 보은 군수가 보낸 3월 21일자 보고에는 2만여 명이라고 했다. “어떤 이는 매1인당 돈1푼씩을 거두었더니 모두 2백30여냥이 되었다”고 했다. 일본외교문서에도 2만 3천여명으로 나온다. 이번 모임에 가장 많이 동원된 곳은 역시 전라도였다. 『동학사』의 저자 오지영은 1946년 서울 천도교대교당에서 강연을 하면서 “보은집회에 전봉준이 참석했다”고 증언했다.
인원을 동원하는데 필수적인 조건은 식량이다. 당시 전라도에서 1만여명이 올라온 것으로 추정하는데 김덕명포에서 식량을 조달했다. 공주, 삼례, 광화문 집회에서는 각자 식량을 가지고 왔다. 이번 장내리 집회에서도 각자가 식량이나 돈을 가지고 왔다. 김덕명포는 포단위로 식량을 조달하면서 운량도감에 고부접주 전봉준을 임명하였다. 1892년 11월 삼례교조신원운동 때부터 전봉준은 앞장서서 활동했다.
매천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전라도 동학도들이 올라오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때 동학인들은 서쪽으로 임피와 함열로부터 동남쪽으로 광양과 순천에 이르렀다. 모두가 소를 팔고 밭을 팔아 행장과 양식을 넉넉히 마련하고 표주박을 지고 배낭을 짊어지고 정해진 날짜에 이르고자 나서니 길이 메었다. 백성들의 마음은 산란해지고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고을 수령들은 두려워 움츠리고 진영의 장수들은 침묵할뿐 감히 명령을 내려 한 병졸도 발동시켜 길을 막고 힐문하려 하지 않는다. 보은에 모인 자는 8만이며 보루(堡壘)를 세우고 단을 쌓고 깃발을 내걸고 북을 치며 사방으로 부딪힐 기세였다.
이처럼 동학도들이 척왜양창의운동에 참여한 것은 일상생활에서 일본이나 청국, 서양으로부터 받는 경제적 민족적 자존심에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학조직은 주로 농민이었으나 나라를 걱정하는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였다. 어윤중이 올린 장계에 잘 드러나 있다.
선무사(宣撫使)재차(再次)장계(狀啓)(일부)
그들 무리에 모여들은 자는 모임을 가진 이후부터 매일 수천명씩 세찬 물이 밀려들듯 했으며, 들에 지른 불같이 타올라 막아낼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영부(靈符)와 주문(呪文)을 가지고 사람을 현혹시켰으며 참위설(讖緯說; 예컨대 진인이 나타나 새 세상을 연다는 설)을 퍼뜨려 세상을 기만했다.
끝내는 경륜과 재기를 가졌으나 막혀서 뜻을 얻지 못하는 이가 따랐으며, 탐관ㅁ오리의 횡포에 격분하여 백성들을 위해 막아보려고 목숨을 걸었던 이가 따랐으며, 오랑캐들이 우리나라 이권을 빼앗는데 통분하여 무턱대고 큰소리 치던 이가 따랐으며, 탐학스러운 장수(將帥)와 권력을 휘둘으는 관리들의 침탈행위와 학대를 어디에도 신원하고 호소할 길이 없는 이들이 따랐으며, 경향각지에서 무력으로 위협하고 억누름에서 스스로 보전할 길이 없는 이가 따랐으며, 서울 이외의 곳에서 죄를 짓고 도망다니는 이가 따랐으며, 감영과 고을에 속한 벼슬아치들이 의지할 데 없어 각처에 흩어져 있는 이가 따랐으며, 양곡이 떨어진 농민과 손해본 장사꾼들이 따랐으며, 어리석은 이들이 풍문에 따라 들어가면 살 수 있다고 하여 따랐으며, 빚 독촉을 참을 수 없는 이가 따랐으며, 상민과 천민으로서 신분을 벗어나려고 하는 이가 따랐다.
어윤중의 장계를 보면 매우 다양한 계층이 보은 장내리로 모여든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 해체기에 접어들어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는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동학이 새세상을 열어가는 길잡이가 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모여든 것이다.
원평에도 1만여 명 모여
『영상일기 嶺上日記』에는 보은집회 때 금구 원평과 경상도 밀양에서도 수 만명씩 모였다고 하였다. “3월 15일 전해들으니 삼남(三南)의 동학배들은 각도에서 모임을 가졌다. 충청도 보은, 영남 밀양, 전라도 금구 등에서 각각 수만 명에 이르렀다. 그들의 복색은 소매가 길지 않은 청색 주의(周衣)를 입었고 소매뿌리는 붉은 치장을 했다.” 『동경조일신문』에도 “참판 어윤중씨는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지난 4월 3일(음력 3월 18일)에 충청, 전라, 경상 3도를 향해 출발했다.”고 나온다.
이기록들에 의하면 밀양에도 일시나마 모였던 것으로 짐작되나 어윤중의 장계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보은으로 올라가던 경상도 도인들이 밀양에 들러서 2~3일 머물러 있지 않았을까 싶다.
처음 전라도에서는 삼례와 금구 원평 두 곳에서 모였다. 삼례에 모인 도인은 식량을 마련하지 못해 남아있던 사람들이다. 『동도문변』에는 “감사가 해산을 명하자, 죽창을 버리고 귀가했다”고 나온다. 이들은 삼례를 떠나 원평에 다시 모인 것으로 보인다. 『일성록』에는 “임금께서 이르기를...호남에서도 금구에 동학이 가장 많다고 한다. 전주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먼저 그 소굴을 부수고 초멸시킬 방책을 세우라고 했다. 김문현(전라감사)은 30리 가량 떨어져 있으며 금구 원평에 과연 무리들이 모여 있다”
척왜양창의 깃발을 내걸다
정부의 독촉을 받은 지방장관들은 동학도들에게 해산하라고 압박을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23일에는 보은 관리들이 장내리로 내려가 즉각 퇴산하라고 하였다. 동학도들은 척왜양창의를 행할뿐이니 중단할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동학지도부는 취지를 밝히는 방을 붙였다. “왜양을 물리치자는 선비들은 죄인으로 잡아가두고 왜양과 화합하려는 매국자는 국왕이 상을 주어야 하는가?”라고 정부정책을 힐난했다. 이 방은 장내리뿐만 아니라 각도 중요처에 내다 붙이도록 하였다.
보은군수 이중익은 23일 장내리로 달려가 동학도를 만나 정부의 명령을 받아들이라고 추궁했다. 그러나 동학도들은 자신들의 척왜양창의는 나라를 위하고 임금님을 위한 길이라며 정당성을 내세우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 각처의 도인들은 하나같은 심지(心志)로 충성을 다하고자 죽기로 맹세하였다. 감영에서 감결이 있거나 주관이 타이른다고 어찌 중지하겠는가. 지금에 이르러 생령[민중]들은 깊은 구렁에 빠지기에 이르렀다. 방백수령들의 탐학무도하고 세력있는 부호들의 힘으로 억압하니 도탄의 경지에 이르렀다. 만일 지금 쓸어버리지 않으면 어느 때에 국태민안이 되게 하겠는가.” 하였다.
양호도어사 어윤중은 아직 보은에 당도하지 않았다. 23일 동학대도소에 한 통의 효유문을 보내어, 몰지각한 이는 해산시켜 돌려보내고 두목 가운데 사리를 좀 아는 이를 뽑아서 면담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어윤중은 수습책으로 강온 양면을 구사하려했으나 청주병영과 전라감영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고작 1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중앙 정부가 병력을 동원하지 않는 한 별 다른 길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동학지도부와 대화를 통하여 정치적으로 해결해 보기로 했다.
또한 동학도들의 교조신원운동과정을 알아본 결과, 이들은 쇠붙이나 몽둥이도 지니지 않았으며 질서와 기율이 엄격하다는 사실도 파악하였다. 어윤중은 군대를 동원하여 위협하는 것보다 대화를 통해 회유책을 쓰는 것이 상책이라고 확신하였다.
고종, 청군을 불러들이려
3월 24일에는 엄청난 비가 쏟아졌다. 개울가의 돌담까지 물이 넘쳤다. 이날 이상한 소문이 들려왔다. 내일 읍으로부터 군대를 끌고 올 것이라는 것이다. 도인들은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이때 대도소에서는 무섭고 겁이 나면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돌아가는 이가 없었다. 어떤 접에서 몽둥이를 준비해두었으나 도소는 엄중히 문책하고 몽둥이를 내다버리게 했다. 보은군수는 이런 사실을 탐지해 보고했다.
조정에서는 초조한 나머지 3월 25일에 정승과 원임 대신을 불러 대책회의를 열었다. 고종은 보은에 모여있는 동학도들이 대거 서울로 올라오면 왕실은 위기에 빠질 거라고 걱정하면서 외국군을 끌어들여 동학도들을 초멸시키자는 제안을 했다. 이에 대해 영의정 심순택과 좌의정 조병세, 우의정 정범조는 강력히 반대하였다.
대신들의 반대로 고종은 중단하는 척하였다. 그리나 얼마후 호조참판 박제순을 불러 중국의 총리교섭통상사의 원세개에게 차병(借兵)을 협의하여 보라고 밀령을 내렸다. 원세개는 “경군(京軍;서울병력)과 강화병 1천명을 충청도에 파견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며 차병은 반대하였다. 다만 이홍장에게 “북양제독 정여창으로 하여금 해군함정을 출동시켜 동학당을 억지할 필요가 있다”고 전하였다. 청국은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유지하려고 정여창으로 하여금 ‘내원(來遠)’과 ‘정원(靖遠)’ 두 함선을 이끌고 인천으로 급히 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고종의 요청대로 대포 8문과 소총 500정, 많은 탄약을 보내게 하였다.
첫댓글 동학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어서 좋은 공부가 됩니다.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셔서 크게 감사드립니다. 재미 있게 읽고 있습니다. 3정승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몰래 청국군대를 끌어들이려는 고종의 모습을 보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눈만 뜨면 억조창생이니 자기 자식이니 하는 사람들을 외국 군대라도 끌어들여 진압하겠다고 나서는 겁먹은 국왕의 모습이 선합니다. 이렇게 하여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한반도는 외세의 각죽장으로 변해버리고 국가의 주권은 내 주고 마니... 여기서 고종은 동학교도들의 교조신원의 요구를 들어주면 되지 않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