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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정씨 화이팅 원문보기 글쓴이: 정철중(23세)
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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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정주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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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호 형조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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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원 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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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창 의금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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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상 하양현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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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기 통덕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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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신 증영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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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호忠敏 증좌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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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節義은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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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기 통덕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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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 증참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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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기 수동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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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창 수첨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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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득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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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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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원 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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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창 효문독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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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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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기 평시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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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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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 이후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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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창 유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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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台相 설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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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기 혁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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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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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泰相 기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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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덕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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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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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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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호 正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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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원 이조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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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창 생원참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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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상 명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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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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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호敏忠 증우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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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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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창 통덕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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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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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량시언사량시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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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창 옥포만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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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상 (泰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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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망 부호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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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창 장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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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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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호 형조참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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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 수동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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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瑜) 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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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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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 초흡, 온, 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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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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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익 무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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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 섭(무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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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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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숙,흡 윤,주,준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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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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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제,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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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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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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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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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원 통덕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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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린(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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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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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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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 부 | 성 명 | 주요 직책 ‧ 행장 |
5 | 之夏 | 정찬우(鄭纘禹)
배 동래정씨 모정(母情) | - 청도군수(淸道郡守), 증좌찬성(贈左贊成)
배 동래정씨(여류시인) 題太公釣魚圖(제목 태공조어도)
ㅇ 李濟新의 「淸江詩話」에 “夫人 能文章”이라고 함
백발을 흩날리며 낚시를 던지는 나그네, 그 초연함이 이 세상의 노인이 아니구나. 만일 주 문왕의 사양이 아니었다면, 오고 가는 저 기러기와 일생을 벗하며 지냈겠지. 鶴髮投竿客(학발투간객) 超然不世翁(초연불세옹) 若非西伯獵(약비서백렵) 長伴往來鴻(장반왕래홍)
강태공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었다 해도 자기를 알아보는 군주가 없었다면 평생 강가에서 낚시나 하는 늙은이로 살다가 일생을 마치고 말았을 것이라고 하는 이 표현은 정인인의 모친이 아들(鄭麟仁)도 상당히 똑똑하다고 생각하는데 자기 아들의 뛰어남을 아직도 못 알아주는 임금(연산군)이 못내 서운하다는 데에서 나온 표현으로 보인다. 아들도 좀 등용해서 일을 시켜 보라는 애틋한 어머니의 심정이 잘 담겨 있는 시이다
* 강태공은 문왕과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창건하는데 크나큰 공을 세운다 |
6 | 纘禹 | 정인인(鄭麟仁)
지조(志操) | 연산군4년(1498년) 무오 식년 문과 장원(壯元) 사헌부장령, 집의(司憲府掌令, 執義), 홍문관전한(弘文館 典翰),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提學), 제주목사(濟州牧使) 갑자피화형졸(甲子被禍刑卒), 증참판(贈參判) 사적(事蹟) : 남추강언행록(南秋江言行錄), 김사재척언(金思齋摭言), 동각잡기(東閣雜記) * 정인인(鄭麟仁)(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498년(연산군 4) 종부시주부로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지평에 승진, 홍문관전한이 되었다. 1500년 장령을 거쳐 1502년 집의가 되고 다음해 당상관에 승진되면서 제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사직하였다. 이 때문에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장류(杖流)하도록 논죄되었으나, 대신들의 “더운 날씨에 결장(決杖)함은 생명에 위험하니 감형하라."는 구호로 감장부처(減杖付處)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면서 전일에 홍문관·사헌부에 재직하면서 왕의 실정을 비판한 것을 비롯하여 제주목사의 부임을 기피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연산군의 혐오로 이에 연루되어 참수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의 즉위와 함께 신원되면서 관작이 복구되었고, 아들도 녹용(錄用)되었다 |
8 | 褧 (경) | 정이주(鄭以周) (1530~1583) 忠 淸白 | 선조원년(1568년) 무진 문과 갑과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한림(翰林), 사헌부장령(司憲掌令), 정주목사(定州牧使) 증예조판서 대제학(贈禮曹判書 大提學), 책훈광산부원군(策勳光山府院君), 후증순충보조공신 영의정(後贈純忠補祚功臣 領議政)
- 율곡 이이와 막역 - 장유의 계곡만필에 족적 기재(事載張維谿谷漫筆) - 명신록의 동국호보 간쟁편(見名臣錄東國號譜諫諍篇)
< 신도비명 중 발췌 >
정주목사에 부임하여 자식과 같이 백성을 사랑하고 직책을 수행함이 물 흐르듯 하였으며, 검소하고 아껴서 재정을 넉넉하게 하고 세금을 줄여 줄 것을 약속하니 관리와 백성들이 춤추며 기뻐하였다. 새해인사는 오직 오랜 친구에게만 보낼 뿐, 쓸쓸하고 가난하여 이름난 집에는 미치지 않았다. 당초 마음이 모질고 격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직을 그만두고 돌아 왔을 때에도 새로운 옷 롱이 2개가 있었는데 화를 내며 이를 불살랐다. 퇴직하여 돌아온 날에는 돈을 이웃에 빌려서야 밥을 지었다. 구업이 춘천에 있었는데 보잘 것이 없었으나 이곳에서 말년을 한가하게 보낼 생각이었다. 필마로 귀향하여 소연하게 이곳에 살게 되니 편안하였다. ~~~집에 머물며 제사일이 오면 목욕재계하고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제기와 봉물을 닦고 다듬고 찌고 몸소 행했다. 몸이 아파도 그만두지 않았다. 관직에 임하기를 한결같이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털끝만큼의 사사로운 정을 두지 않았다. 공정한 일이 아니라면 남에게 지조를 꺽는 일이 없었고, 사람들 역시 공에게 함부로 협잡하는 일이 없었다. ~~~가정 일에 대하여도 근심이 없어 집이 기울면 버팀목으로 받치고 비바람을 피하면 될 뿐이고 자손을 위해 한 뙈기의 땅도 마련함이 없었다.
赴定州牧使至則 愛民如子居官如水 以約取足悉捐征入 吏民歌舞之 歲時問餽唯於親舊 孤寒不逮要顯家 初非矯激以然及其解組歸也 親裝有新衣籠二 奴而立焚之 到家之日 稱貸於隣邦 始擧火 舊業在春川薄甚然 有優遊卒歲之計 匹馬東歸 環堵蕭然居之晏如也 ~~~家居遇祭日沐浴齋戒必盡誠敬 洗滌割熟必躬莅雖有病恙不廢 爲官無小大一意奉公 不間雜以一毫私情 非惟公不以關節及人 人亦不敢以關節浼公 ~~~ 不以家事累心屋傾則撑僅庇風雨 不爲子孫營立一畝之庄 |
9 | 以周 | 정사호(鄭賜湖) (禾谷) (1553~1616)
忠孝 名臣 贈諡忠敏 | 선조10년(1577년) 정축 문과 이조참의 (吏曹參議),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 황해·경상·평안·경기관찰사(黃海慶尙平安京畿 四道觀察使), 이조판서(吏曹判書), 형조판서(刑曹判書) 임진왜란 중 금성현령으로 현민을 구제하고, 정유재란 중 안동부사로서 명나라 장수 양호와 토적에 성공하여 광성군에 책훈되고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壬亂中 以錦城縣令救濟縣民 丁酉再亂中 安東府使 與明將楊鎬 討賊成功 策勳光城君 贈左贊成
영조 임오년(1762년)에 시호 “충민(忠敏)”을 내렸다. 나라걱정에 가사를 잊으니 “충”이요, 사변에 대응하여 공을 세우니 “민”이다
英祖壬午 贈諡忠敏 廬國忘家曰忠 事變有功曰敏
< 영의정 유척기(兪拓基) 찬 신도비명 중 발췌 > 안동부사(1597년, 정유재란)가 되니 이 때 명장 양호가 두 번째로 왜인들을 섬과 산으로 몰아 압박하던 시기인데 여기에 들어가는 군량미가 거의 안동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달아나 운량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공은 지방토호를 잡아가두고 도망친 자들을 잡아들여 이 일을 강행함으로써 군량조달을 할 수 있었다. 이에 토호들이 원망하니 체찰사가 공을 파직시켰다. ~~ 얼마 후 호조참의(1599년 2월)가 되어 경성의 군량을 관장하기를 능숙 탁월하게 처리하니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올랐다. ~~ 공은 아름다운 수염에 과묵한 성품을 타고나 함부로 시시덕대는 일이 없고 효우 또한 돈독하였으며 입조 40년간 “애군우국(愛君憂國)”함은 한결같으니 이는 순수하고 정성스러운 “성(誠)”에서 나온 바였다
安東府使是時 天將 梁經理鎬復大擧蹙倭于島山兵糧之出安東幾半之 而民散無以運 公乃嚴拘土豪之爲捕逃走者 括其丁輸之得不乏軍餉 土豪恚愬 體使罷之~~俄入爲戶曹參議 管京餉益以能著 稱陞嘉善戶曹參判~~公美紫髥自持簡黙 不妄笑語敦孝友 立朝四十年愛君憂國一出於誠
<선조실록(선조 31년(1598년) 11월 16일) >
ㅇ 사간원이 유성룡을 탄핵하다 ~~안동(安東)의 구제(舊第)는 기름진 땅을 많이 점령하였는데도 부역을 하지 않으므로 부사(府使) 정사호(鄭賜湖)가 그 가호에 부역을 시키려고 하자 남몰래 친한 자를 시켜 남쪽 지방으로 좌천시키니, 식자들은 모두 침 뱉고 욕 하였습니다 ~
< 황명어사 손원화 찬 정자 정공 신도비명 중 발췌 >
- 조카(동생 명호의 5살 아들 두원)를 양육하다
~~ 정자공(정명호)이 일찍 아들을 두어 5살이 되었는데 형조판서공(정사호)이 조카를 양육하였다. (두원은) 문과에서 장원이 되어 10년 만에 경에 이르니 덕을 쌓고 능력을 인정받아 이조판서로 귀하게 되었다. 명성을 날리고 행의를 세우니 새삼 정자공의 요절함을 추도하게 되니 어찌할 수 없다. 고아 되어 아버지 없음을 가슴아파할 것이나 아버지 있어도 아버지가 없고, 아버지 없어도 아버지 있으니, 다시 조카를 기른 아버지인 형조판서 공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
~~當正字公早作一子甫五歲 刑書公撫猶子 擧鮮元會魁爲文科 高第十年之間爲躋於卿 得有造有德以成吏書旣貴 明楊行立追悼正字公之夭 不竟厥施 又自痛其孤失怙 有父無父 無父有父 乃更痛其撫已猶子之猶父刑書公矣~~~~ |
9 | 以周 | 정명호(鄭明湖) (1559~1585) 孝
配 江陵金氏 ( - ) 烈婦 | 선조(宣祖) 13년(1580) 경진(庚辰) 문과 승문원 정자(承文院 正字)
아버지 상*을 당하여 몸이 상하도록 애통해 하며 장례를 마치고 3년 상을 마치기 전인 선조 을유년(1585년)에 졸하니 나이 겨우 27세였다. 좌찬성 양관대제학에 증직되었다 贈 左贊成 兩館大提學 * 정이주(鄭以周, 1530 ~ 1583.12.20.)
< 백사 이항복 찬 묘갈문 중 발췌 >
을유년 봄에 내가 이조랑(吏曹郞)으로 있으면서 인사 행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한 여노(女奴)가 와서 그 주부(主婦:어머니 동래정씨, 성재공 배)의 명을 전해 왔는데, 그 주부의 말에, “윤자(胤子:맡아들 사호) 아무가 평상시에 모든 하는 일이 있을 적에는 반드시 ‘이모(李某:이항복을 지칭)가 무어라고 할지 물어봐야겠다.’ 하고는, 한 마디 가부(可否)를 얻을 때마다 이를 굳게 지켜 엄숙한 자세로 시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불행히 부친상을 당하여 근심 속에 있는데, 삼년상을 1개월쯤 남겨둔 이때에 예에 지나치게 슬퍼한 관계로 몸이 파리해져서 병이 날로 깊어져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망인(어머니 동래정씨)이 삼가 초목의 맛있는 음식을 먹이려고 해도 안 된다고 굳이 거절합니다. 그러니 만일 하늘의 영험을 힘입어 이 홀어미(동래정씨) 집에 뜻밖의 복이 내려진다면, 군자(이항복)의 말씀 한 마디로 거의 스스로 깨닫게 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들은 즉시 달려가 문병을 하고 포수(脯脩)의 중동을 구부려서 왼쪽에 놓고는 온갖 방도로 자세하게 비유하여 그를 달래보았다. 그런데도 그는 마음을 돌리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미혹되어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대명(大命)이 이미 다하여 수일 밖에 남지 않았으니, 지금은 예를 따르건 어기건 간에 죽는 것은 똑같을 뿐입니다.” 하므로, 나는 차마 여기에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그 문을 나와 버렸는데, 그로부터 6일 뒤에 그 집 노인이 부고(訃告)를 전해 왔으니, 이 때 나이 27세였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괴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이 사람이 앞일을 미리 알아서 처리하는 것이 어찌 그리도 신기하단 말인가?” 고 하였었다
歲乙酉春。余以天曹郞。政罷歸家。有女奴來致其主婦之命曰。胤子某平居。凡有所爲。必曰李某云何。得一可否。輒服膺而色洒如也。今不幸斬焉。在憂恤之中。去再期未一月。越禮爲瘠。病日臻幾滅性矣。未亡人謹致草木之滋。而持不可。如賴天之靈。惠徼福於寡家。得君子一言。庶有以自解。余聞卽馳省。執脯修左胊而曲譬之萬方。猶不回曰。吾豈敢迷不悟也。大命已窮。亶在數日。今從禮與違。死等耳。余不忍於是也。悒悒出門去。越六日。室老以訃告。盖得年二十七。余私恠曰。是先處其前事。一何神耶。
배 강릉김씨(配 江陵金氏)
< 황명어사 손원화(孫元化) 찬 신도비명 중 >
남편 여의고 삼년상 기간에 피눈물 흘리며 슬퍼하고 6년간 소식하고 30년을 소복입고 지내니 규방이 숙연하였다
泣血三年 蔬食六年 素衣三十年 中壼肅然 |
9 | 以周 | 정운호(鄭雲湖) (臥濱) (1563~1639)
忠孝 | 광해군3년(1611년) 신해 문과 대사간, 대사성, 형조참판, 한성좌윤(漢城左尹), 증좌찬성 양관대제학(贈左贊成兩館大提學)
예관을 보내 제사를 올렸으며, 현곡 조위한이 묘지명을 짓고 종후손 송남 규종이 신도비명을 썼다
丁外艱哀毁逾禮 終喪前 宣祖乙酉 2月5日卒 年僅二十七 贈 左贊成 兩館大提學 遣禮官 李惟達 致祭 玄谷 趙緯韓 撰 墓誌銘 從後孫 松南 圭宗 撰 神道碑銘
< 종손 규종 찬 신도비명 중 발췌 >
천성이 효성스러워 부모님 섬김에 마음과 물을 다하였다. 여름날에는 침소에 부채를 들고 겨울밤 이면 군불 때며 온돌을 살피었다. 나이 20살에 조부이신 성재공이 병환에 있을 때 혁 띠를 풀지 않고 눈 붙이지 않고 변을 맛보며 하늘에 대신 죽게 해 달라고 비니 그 정성이 미치지 않는 바가 없었다. 끝내 돌아가시니 가슴을 두드리며 몸부림쳐 우니 혼절하고 깨어나길 반복했다. 죽을 먹으며 생선 고기를 먹지 아니하므로 거의 몸을 상하게 되었다.
큰 형님 화곡 선생을 섬기는 것을 부친과 같이 하여 조석으로 문안하고 모든 일을 반드시 고하였다. 둘째 형 찬성공(명호)이 일찍 돌아가심에 눈물이 잠자리에서 마를 날이 없었다. 임진왜란이 나던 해, 어머니를 모시고 왜병을 피하여 충청도의 누이동생 동서인 온양 정회의 집으로 갔다. 갑오년 여름에 모친상을 당하여 통곡하다 여러 번 정신을 잃었다. 청주 오구대에 안장하고 밤낮으로 남쪽을 바라보며 곡을 하고 살고자 하는 욕망을 잃을 지경이었다.
난이 끝나고 출사지 마다 직분을 다하였다. 때는 당시가 혼조의 시대로 간흉이 정국을 주도하고 인륜이 끊어지니 물러나 귀향하여 세상을 멀리하고 유유자적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어두움이 걷히고 밝은 세상을 보니 중앙 지방의 여러 관직을 맡아 성망이 올연하였다. 다시 병자호란을 치룬 후 출사의 뜻을 접고 전원으로 귀향하였다. 임금이 부르시면 알현 사은하고 돌아왔다. 근심과 분한 마음이 병이 되어 아쉬움을 품고 세상을 뜨니 오호 통재로다!
誠孝根天 事父母盡志物 夏日扇枕 冬夜燃突 年잠勝冠醒齋先生有疾 不解帶不交睫 嘗糞驗症 禱天願代靡誠不逮 竟遭艱 擗踊號哭累絶而甦 啜粥行素幾乎傷生 事伯氏禾谷先生如事父 晨夕侯問 凡事必稟而行 仲氏贊成公夭逝 淚不乾於枕席之間 壬辰奉母夫人避倭于湖西溫陽娣壻鄭晦家 而甲午夏丁母夫人憂號屢絶 襄奉淸州梧邱臺 日夜望南而哭如不欲生 亂已出仕所在盡職 而時當昏朝 奸凶用事彛倫斁絶 退歸鄕第 與世不關悠悠自適 仁廟改玉托契昭瀜 歷踐中外聲望藹蔚 丙丁亂後 無意仕進歸臥田園 召命屢至 詣闕謝恩旋卽歸來 憂憤成病 含寃而終世鳴乎痛哉 |
10 | 사호 (賜湖) | 정현원(鄭玄源) (苕蘔堂) (1609~1673) 志操 隱士 | 일찍 과거공부를 그만두었다. 병자·정묘호란 이후 명청 교체 애기만 나오면 통곡하였다. 10세에 외가집 형 정동명으로부터 두시를 배웠다. 외형은 증시를 받고 “아우의 문장을 내가 쫓아 두시를 배워야겠다” 했다
早廢擧業 自丙丁亂後 語及崇禎間事 至於痛哭 十歲學杜詩於外兄鄭東溟* 贈詩曰鄭弟文章氣從余學杜詩 遺稿 現存
* 정두경(鄭斗卿, 1597년 ~ 1673년)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군평(君平), 호는 동명(東溟). 아버지는 호조좌랑을 지낸 회(晦)이며, 어머니는 광주정씨(光州鄭氏)로 사헌부장령 이주(以周)의 딸이다.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이다. 1629년 별시문과에 장원, 부수찬·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북방의 호족(胡族)인 청나라가 강성하여지자 「완급론(緩急論)」을 지어 무비(武備)의 급함을 강조하였다. 병자호란 때 척화·강화의 양론이 분분하자, 그는 10조(條)의 소를 올려 대책을 강조하고, 또 「어적10난(禦敵十難)」이라는 글을 지어 올렸으나 조정에서 채택하지 않았다. 효종이 즉위하자 임금이 하여야 할 절실한 도리를 27편의 풍시로 지어 올려 효종으로부터 호피(虎皮)를 하사받았다. 그 뒤 1656년(효종 7)에 「칠조소(七條疏)」와 「원이설(原理說)」을 지어 올렸다. 이조판서·대제학을 추증하였다. 저서로는 『동명집』 26권이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
10 | 사호 (賜湖) | 정성원(鄭星源) (自然亭) (1612 ~ 1675) 志操 隱士 | 병자·정묘호란 이후 대의를 쫓아 청주의 화곡촌에 집을 짓고 은둔하여 조용히 금서를 벗 삼아 살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이러한 때에 벼슬 한자리 얻으면 어찌 스스로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하고 유연자적하였다. 유고가 있다
丙丁亂後 秉執大義就 淸州山東禾谷村卜築 杜門靜居琴書自娛 嘗曰 “此時 得一官 寧不自愧於心” 悠然自適 有遺稿 |
10 | 명호 (明湖) | 정두원(鄭斗源) (壺亭) (1581 ~ 1642) 忠 名臣 贈諡敏忠 | 생진구중(生進俱中), 광해군8년(1616년) 병진 문과 강원감사(江原監司), 개성유수(開城留守), 이조판서(吏曹判書), 호조판서(戶曹判書)
명나라 원숭환과 모문룡이 후금(청)을 방어하기 위해 가도에 머무를 때 접반 및 관향사로 활동하였다. 진위사로 다시 조경에 들어가 서양사절인 육약한을 만나 홍이대포, 천리경, 자명종과 치력연기천문약남북극도 등을 가져와 조정에 바쳤다
皇朝 袁崇煥毛文龍 寄據椵島 防禦胡虜之時 差接伴兼館餉使 以陣慰使再度朝京 見西洋使者陸若漢 得紅夷大砲 千里鏡 自鳴鍾 及治歷緣起天文略南北極圖 等 納于朝 事載 「王朝實錄」
이괄의 난을 호종한 공로로 “갑자원종훈”에 책정되고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순조 임술년(1802년)에 시호 “민충(敏忠)”를 내리다. 사변에 공을 세우니 “민” 이요, 몸을 위태로이 하여 임군을 모시니 “충”이다.
甲子原從勳 贈右議政 純祖壬戌 贈諡敏忠 應事有功曰敏, 危身奉上曰忠
군수 조중진이 행장을 쓰고, 판서 이병정이 시장(시호 내리는 글)을 썼다. 종후손 송남 규종이 신도비명을 지었다. 문집이 1권 있는데 종후손 규종이 서문을 쓰고 영석이 발문을 지었다
郡守 趙重鎭撰行狀 判書 李秉鼎撰 諡狀 後從孫 松南 圭宗撰 神道碑銘 有文集 一券 後從孫圭宗序 永錫拔 |
10 | 운호 (雲湖) | 정정원(鄭井源) (1607 ~ ? ) 老典 | 수승 동지중추부사(壽陞 同知中樞府事)
* 장인 우찬성 이덕형(右贊成 李德炯) |
11 | 현원 (玄源) | 정전창(鄭展昌) (栗灘) (1631 ~ 1685) 관직 節義은거 | 현종 임인(1662년) 진사 1665년 광릉참봉(光陵參奉), 1668년 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 1682년 돈녕부봉사(敦寧府奉事) 1685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우암 송시열 선생께서 바다 건너 귀양가시기에 공께서 시를 지어 올렸다 상담천리 귀양길 고난에 눈물짓고 도의 꺾어짐에 하늘도 슬퍼하고 의로운 길은 폐허가 되었구나! 옛 성은 입은 향기가 아직도 흩어지지 않아 지절의 호소 십언이 태양처럼 빛나네! 외로운 충정 의심하니 천주를 거스르네 모든 일 상처되니 언월당이로구나! 한가지 남은 일은 금년 대의를 결의하고 조정이 밝아지면 원앙처럼 노니세나!!” 언월당 세 글자로서 시정잡배가 크게 어지럽히니 은거하여 벼슬에 나기지 아니했다
尤庵宋先生 謫遷海上 公呈詩曰 “湘潭*千里泣風霜 道屈堪悲義路荒 貂拜舊恩香未末 志言新什日爭光 孤忠自擬警天柱 萬事從傷偃月堂* 最是當年結大義 明廷整笏摠鴛行” 以偃月堂三字大忤時輩屛跡不仕
손자 임기가 노전으로 귀하게 되어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以孫任基壽貴贈左承旨
* 상담(湘潭) : 중국(中國) 호남성(湖南省) 북동부(北東部) 상강(湘江) 하류(下流)의 상공업(商工業) 도시(都市). 그만큼 먼 곳
* 이임보의 서재 언월당(偃月堂) : 이임보는 당 현종 때의 재상으로 간신(奸臣)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자신의 서재인 언월당(偃月堂)에서 깊게 생각을 하면 누군가가 주살(誅殺)되거나 감옥에 갇히는 일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
11 | 성원 (星源) | 정의창(鄭儀昌) (1633 ~ 1708) 隱士
配 仁川蔡氏 孝婦 정려(旌閭) | 의를 행하며 은거하여 경사를 익히며 시와 예로서 유연자적하며 집안을 이끌어 향리에서 이를 칭송하였다
秉義遯跡經史自娛詩禮治家一鄕稱之
배 인천채씨(配 仁川蔡氏)
시어머니가 늙어 젖을 짜드려 봉양함이 당부인 고사와 같았다. 이러한 효도에 호남유림들이 공론하여 이준백 등 20여인이 글을 보내고 진사 변희적 등 3백여 인이 조정에 천거하니 영조 기유년(1729년)에 정려를 내렸다. 기해년에 8세손 화용이 중수하고 외손 도사 송병대가 묘갈문을 짓고 9세손 장환이 행록을 편집했다.
姑老乳養 如唐夫人故事* 以孝湖儒公儀 齊發 李俊白等 二十餘人 發文 卞進士熙績等 三百餘人 薦于朝 英祖己酉(1729년) 命旌閭後 己亥 八世孫 和用重修 外孫 宋都事秉大撰記 九世孫 章煥 編行錄
* 이십사효 : 중국의 유명한 효자 24인이 있는데 이중 당부인(唐夫人) 이야기가 있다 |
11 | 성원 (星源) | 정우창(鄭佑昌) (1651 ~ 1698) 儒林 | 성리주자학에 일찍 성취하여 문묘의 집례를 맡았으며 위엄있고 엄숙하여 유림들이 칭송하고 존앙하였다
道學夙就 文廟集禮 威儀表著 儒林稱仰 |
11 | 장원 (長源) | 정동창(鄭仝昌) 관직 | 찰방(察訪) * 조선시대 각 도의 역(驛)의 말에 관계(關係)되는 일을 맡아보던 외직(外職) 문관(文官) 벼슬, 종6품(從六品) 관(官) |
11 | 두원 (斗源) | 정기창(鄭祈昌) (1616 ~ ?) 관직 | 인조22년 갑신(1644년) 별시 무과 1656년 옥포만호(玉浦萬戶) |
12 | 전창 (展昌) | 정치상(鄭致相) (虛舟) (1658 ~ 1722) 관직 | 1706년 장흥고주부(長興庫主簿) 1706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1716년 군자주부(軍資主簿), 1717년 하양현감(河陽縣監)
문장이 뛰어나고 덕행이 높아 세간에서 칭송하였다 文章德行著稱於世 |
12 | 전창 (展昌) | 정수상(鄭遂相) | 자식 임기가 수 동지로 귀하게 되어 동지중추부사에 증직되었다 以子林基貴 贈戶曹參判 |
12 | 수창 (壽昌) | 정익상(鄭翼相) (1631 ~ 1710) 명사 | 풍모가 훌륭하고 뜻과 생각이 매우 깊어 사람들이 모두 나라를 경영할 재목이라고 칭송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저서 수편이 있는데 이름은 「견사록」에 있다 狀貌魁偉志慮淵深 人皆許以經濟器 不肯仕宦 著書數篇 名曰 見思錄 * 견사록(見思錄) : 정휘량(鄭翬良, 1706 ~ 1762)의 저서, 정희량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대제학이 되고, 호조 · 공조 · 이조 · 병조의 판서를 역임,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 또 우의정이 되고, 좌의정에 올라 왕의 탕평책을 반대하고, 소론의 제거를 주장하고 사직, 중추부영사로 전직하였다. |
12 | 치상 (致相) | 정화기(鄭華基) (無何堂) (1693 ~ 1770) 孝 | 통덕랑(通德郞)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었다. 문장이 뛰어나 명망이 높아 선비와 벗들이 받들어 귀하게 여겼다
孝友純至文章華邵聲望蔚然士友推重 |
12 | 기(琦) | 정천익(鄭天翼) (1650 ~ 1713) 급제 | 무과(武科) |
13 | 수상 (遂相) | 정임기(鄭林基) (1668 ~ 1775) 孝 老典 | 성품과 도량이 곧아 대쪽 같았고 효성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었다. 노전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증직되었다 性度簡亢孝友純至 以壽陞同知中樞府事 |
13 | 태상 (泰相) | 정준망(鄭俊望) (1654 ~ ?) 관직 | 무과(武科), 부사과(副司果),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 9세 명호 - 10세 두원 - 11세 기창 - 12세 태상 |
13 | 천익 (天翼) | 정섭(鄭涉) (1654 ~ ?) 급제 | 무과(武科) - 9세 운호 - 10세 정원 - 11세 기 - 12세 천익 |
14 | 임기 (林基) | 정헌주(鄭憲柱) (1711 ~ 1766) 孝 | 천성이 순수하고 올바르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 병환에 손가락을 깨물어 진혈하여 생명을 연장했다. 문장 또한 일찍 성취하였으나 불행이 일찍 세상을 뜨니 사우들이 이를 애석해 하였다
賦性純正誠孝根天 丁憂斷指延縷 文章夙就 不幸早世 士友嗟惜 |
14 | 광서 (光緖)
| 정곤(鄭㫻) (1693 ~ 1766) 관직 老典 | 생부 정랑공파 익량(翊亮)
영조4년(1728) 을묘 지차생원 정곤(之次生員鄭㫻) 직부회시(直赴會試) 진사(進士) 1746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1749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1750년 문의현령(文義縣令) 1763년 성수 추은가자 오위장(因聖壽 推恩加資 五衛將) 1765년 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
14 | 광소 (光紹) | 정복천(鄭復天) (剛齋) (1689 ~ 1745) 명사 | 생부 양촌공파 필수문 계광(啓光)
경서에 밝고 행의가 드높아 재상 송인명과 재상 김재로가 연이어 천거하였으나 등용되지 못하여 세간에서 모두 탄식하고 아쉬워하였다
以經明行高 宋相國寅明 金相國在魯 相繼薦剡 而未及登庸 世皆歎惜 |
14 | 위 (緯) | 정휘행(鄭彙行) (1708 ~ 1790) 老典 | 수승 첨지중추부사(壽陞 僉知中樞府事) - 9세 운호 - 10세 규원 - 11세 린 - 12세 세익 - 13세 위 |
15 | 임기 (林基) | 정덕휘(鄭德輝) (1731 ~ 1779) | 통덕랑(通德郞)
증 사복시정(贈 司僕寺正) |
15 | 헌주 (憲柱) | 정일휘(鄭一輝) (1763 ~ 1822) | 손자가 귀하게 되어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以孫錫仁貴 贈左承旨 |
15 | 하주 (河柱) | 정산휘(鄭山輝) (錦川) (1763 ~ 1810) | 문장과 학문이 탁월하고 행실이 올바르므로 세간에서 받들고 귀하게 여겼다 文學行誼爲世推重 |
15 | 곤(㫻) | 정언휘(鄭彦輝) (1722 ~ 1761) 관직 | 영조32년(1756)병자(丙子) 정시(庭試) 문과 1957년 만녕전별검(萬寧殿別檢), 1957년 기린찰방(麒麟察訪) 1959년 전적(典籍), 1960년 예조정랑(禮曹正郞) 1960년 병조좌랑(兵曹佐郞), 무안현감(務安縣監) |
17 | 재곤 (載坤) | 정석조(鄭錫祚) (1793 ~ 1869) 伯永 孝 | 타고나기를 효도가 지극하고 어버이 병환에 한겨울에 두꺼비 고양이 물고기를 잡아 봉양하였다. 향도에서 모두 효행을 천거하였다. 차남 면수가 시종이 되어 첨지중추부사에 오르고 후일 장남 인수가 수 동추에 올라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天性至孝 親疾致雪蟾猫魚之異 鄕道俱薦 以次男勉洙侍從例陞僉知中樞府事 長男麟洙貴贈戶曹參判 |
21 | 백환 (伯煥) | 정재우(鄭在禹) (1925 ~ ) 忠 | 화랑무공훈장(花郞武功勳章) |
22 | 용관 (用寬) | 정태호(鄭泰鎬) (1928 ~ 1950) 忠 | 1950년 11월 12일 황해도 남천(南川) 지구 전투에서 전사(戰死) |
* 李林甫(? ~ 752)
중국 당(唐) 현종(玄宗) 때의 재상(宰相)으로 아첨을 일삼고 유능한 관리들을 배척하여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는 말을 낳았으며, 당(唐)을 쇠퇴의 길로 이끈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아명(兒名)은 가노(哥奴)이며, 호(號)는 월당(月堂)이다. 산시[陝西] 출신이며 당(唐) 황실(皇室)의 종친(宗親)으로 당(唐)을 건국한 고조(高祖, 재위 618~626) 이연(李淵)의 할아버지인 태조(太祖) 이호(李虎)의 5세손(五世孫)이다. 당(唐) 현종(玄宗, 재위 712~756) 때인 734년(開元 22년)부터 752년(天寶 11년)까지 재상(宰相)을 지내며 커다란 권세(權勢)를 행사하였다. 죽은 뒤 태위(太尉)와 양주대도독(揚州大都督)으로 봉(封)해졌지만, 양국충(楊國忠, ?~756)에 의해 관직(官職)을 박탈당하고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형(刑)을 받았으며, 자손(子孫)들도 모두 유배되었다. 이임보(李林甫)는 재상(宰相)으로 있으면서 법전(法典)을 정비하여 <당률소의(唐律疏議)>를 편판하는 등의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지만, 황제의 신임을 배경으로 전권(專權)을 휘두르며 조정(朝廷)의 기강을 크게 문란케하였다. 때문에 그는 당(唐)의 쇠퇴를 가져온 인물로 평가를 받는다. 그는 감언(甘言)으로 황제의 비위를 맞추면서 신료(臣僚)나 백성들의 충언(忠言)이나 간언(諫言)이 전달되지 못하도록 언로(言路)를 막았다. 그리고 자신에 반대하는 대신들을 모함하여 죽이거나 내쫓았으며, 조정(朝廷)의 인사(人事)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하며 유능한 인재들은 배척하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들만 발탁하여 등용하였다. 이로써 현종이 즉위한 뒤 요숭(姚崇, 650~721), 송경(宋璟, 663~737) 등에 의해 이른바 ‘개원(開元)의 치(治)’라 불리는 성세(盛世)를 누렸던 당(唐)은 급격히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특히 그는 749년(天寶 8년) 변경에서 군공(軍功)을 세운 인물이 조정(朝廷)으로 돌아와 자신의 반대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문사(文士)들이 담당했던 변경의 절도사(節度使)를 이민족(異民族) 출신의 번장(番將)들도 대체하도록 하였다. 그는 현종에게 문사(文士)들을 장수(將帥)로 삼으면 화살과 돌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전장에서 무서워 군대를 지휘하지 못하므로 용맹한 한족(寒族)이나 번인(蕃人)을 장수(將帥)로 삼는 것이 낫다고 상주(上奏)하였고, 현종은 이를 받아들여 안녹산(安祿山, 703~757), 고선지(高仙芝, ?~755), 가서한(哥舒翰, ?~757) 등을 절도사(節度使)와 장군(將軍)으로 임명해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이는 결국 뒷날 안사(安史)의 난(亂)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이임보는 성격이 음험(陰險)하고 정치적 수완과 모함에 능해 간신(奸臣)의 전형(典型)처럼 여겨진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이나 <십팔사략(十八史略)> 등에는 그가 현명한 사람을 미워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질투하여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배척하고 억누르는 음험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가 밤에 자신의 서재인 언월당(偃月堂)에서 깊게 생각을 하면 누군가가 주살(誅殺)되거나 감옥에 갇히는 일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겉으로는 감언(甘言)을 일삼으며 절친한 척하지만 뒤에서는 음해(陰害)와 모함(謀陷)을 일삼아 세인(世人)들이 그를 “입에는 꿀이 있고, 뱃속에는 칼이 있다(口有蜜 腹有劒)”고 평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여기에서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는 말이 생겼다. (두산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