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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 이야기
1. 해방신학(解放神學/Liberation Theology)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주교님 / 로메로 주교님
중남미에서 혁명의 불씨를 지핀 카스트로(Fidel Castro)와 체 게바라(Che Guevara)를 쓰면서 그와 같은 선상(線上)에 있는 남미의 해방신학(解放神學/Liberation theology)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해방신학(解放神學/Liberation theology)은 세계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와 콜롬비아 메데인(Medellin)에서 열린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메데인 회의/1968년) 이후 중․남미 대륙에서 시작된 진보적인 가톨릭 신학운동으로, 민중(民衆)이 지주(地主)들과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착취와 억압을 받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운동이다. 이 운동의 뿌리는 페루(Peru) 출신의 신학자이며 가톨릭 사제였던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érrez)가 쓴 ‘해방신학(1917)’ 이라는 책인데, 구티에레스는 이후 ‘해방신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다. 1960년대 말, 중남미(中南美) 등 제3세계를 중심으로 일어난 민중 해방운동에 바탕을 둔 가톨릭 해방신학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경제적 착취, 정치적 탄압, 제국주의의 횡포 등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어긋나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가톨릭 교인들의 임무라고 믿는 신학이다.
라틴아메리카를 중심으로 일부 혁신적인 신학자들과 가톨릭 사제들이 ‘하느님은 민중의 편에 서시는 민중의 하느님’ 이라는 슬로건으로 해방신학을 표방하자 로마 가톨릭은 전통적인 교의(敎義)의 유지를 주장하는 보수적인 입장에서 해방신학을 마르크시즘(Marxism)과 유사한 것으로 간주하여 엄격히 단속하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회정치적으로 이해하는 해방신학은 전통적인 교리를 위협하는 반 기독교적 사상으로 여겨 탄압하였던 것이다. 1978년 교황으로 선출된 고(故)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 현장에서 사목하는 진보 성향의 사제들을 대폭 보수적인 사제로 교체하였고, 브라질에서는 1980년 진보성향의 엘데르 카마라 대주교를 강제 은퇴시키고 보수적인 대주교로 교체했다. 새로 임명받은 대주교는 성직자 교육기관 폐쇄, 해방신학 성격의 신학교 교수 해고 등으로 해방신학을 탄압하였다.
해방신학을 언급하며 또 한 분 빼 놓을 수 없는 분이 엘살바도르(El Salvador)의 오스카 로메로(Óscar Arnulfo Romero/ 1917~1980) 주교님이시다. 남미 해방신학의 상징적 인물로 추앙받는 로메로 주교님은 1980년 엘살바도르 우익 군사정권에 맞서 저항하다가 미사도중 총을 맞고 사망한다.
1993년, 할리우드의 존 듀이건 감독은 이 총격사건을 영화로 만드는데 제목이 ‘로메로’로, 이 사건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암살된 로메로 주교는 로마교황청에서 복자(福者)로 추대하기로 결정하여 곧 시복식(諡福式)이 있을 예정이라고 한다.
중남미 여러 나라들은 200여 년간 스페인 및 포르투갈의 가혹한 식민정치를 겪었고, 20세기 들어 대부분 독립을 쟁취하지만 미국을 등에 업은 자본주의의 팽배로 우익정권이 들어서면서 식민시대보다 더 가혹한 경제적 착취와 억압에 시달리게 된다. 해방신학은 권력을 가진 자들의 횡포와 착취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순수한 출발이었지만 유럽의 식민정책, 식민지배로부터의 해방 이후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 충돌, 미국을 필두로 한 자본주의의 득세로 더욱 심해진 경제적 착취 등으로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민중들 속으로 파고든다.
이 자본주의의 횡포로부터 벗어나고자 혁명의 선봉에 섰던 대표적인 이가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인데 결국 중남미 반미(反美) 공산정권 수립의 빌미가 되어 중남미 대부분 나라들이 공산화로 기울게 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이상(理想)과는 달리 독재정권을 낳았고, 극심한 경제적 궁핍을 가져와 오늘날까지도 중남미의 많은 나라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다.
1980년, 엘살바도르에서 로메로 주교님이 미사도중 총격으로 사망한 그 해 우리나라에서는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으니 세계사는 동서를 막론하고 유사한 흐름이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天主敎正義具現全國司祭團/Catholic Priests' Association for Justice, CPAJ)은 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들로 구성된 가톨릭 사회운동 단체로 언뜻 해방신학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되지만 전연 별개이다. 이는 한국 로마 가톨릭의 사조직(私組織)으로 천주교의 공식입장이 아니다. 이 단체는 1974년, 천주교 원주교구의 교구장이었던 지학순 주교가 군사정권에 항거하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민청학련사건/民靑學聯事件)에 연루되어 구속되자 이를 계기로 결성된 단체이다. 이 정의구현사제단(CPAJ)은 유신헌법 반대운동, 긴급조치 무효화 운동, 민주헌정 회복요구, 광주 민주화운동 지지 등 반 군사독재운동을 벌였고, 가난한 이들의 생존권 확보운동 등 사회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1987년 6월, 서울대학교 학생이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폭로하여 6월 항쟁의 계기가 되기도 했는데 종교인들이 사회문제에 너무 깊숙이 관여한다는, 또 지나친 좌경 색채를 드러낸다는 우려를 받기도 한다. 이들의 공과(功過)는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2. 격동(激動)의 세월
피델 카스트로(1,2) /라울 카스트로
2015년 8월 14일, 쿠바(Cuba)의 수도 아바나(Havana)에 미국 대사관을 재개설(再開設)한다는 기사가 신문에 났다. 1961년 미국과 국교단절이 된지 실로 55년만이다. 기사를 읽으며 중남미 격동의 60년대가 새롭게 뇌리에 떠올라 당시 상황들을 정리하여 회상해본다.
독자 생존을 부르짖으며 비동맹국의 맹주로 자처하던 카스트로(Fidel Castro/1926~)는 결국 고립을 이기지 못하고 55년 만의 화해라고 해야 하나 굴복이라 해야 하나 결국 미국과 다시 수교를 시작하는 것이다.
미국과의 대결은 쿠바의 자존심은 세워줬지만 끝없는 경제침체를 헤어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는데 이번 미국과의 화해는 49년 간 장기 집권했던 피델 카스트로가 2008년 2월 동생 라울 카스트로(Raul Castro/1931~)에게 정권을 물려주는데 형에 비하여 온건한 협상파인 동생 라울에 의해 미국과의 화해가 이루어진 것이다.
체 게바라와 ‘승리할 때까지 영원히’
쿠바의 비극은 1952년으로 거슬러 오르는데, 중남미 경제 헤게모니를 노리던 미국은 쿠바에 쿠데타를 사주하여 친미정권을 세우는데 성공한다. 그리하여 미국 기업들은 50년대 중반까지 쿠바의 모든 경제권을 장악하고 마피아 세력은 호텔업과 향락산업을 차지한다.
1958년, 쿠바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는 반미감정이 팽배했던 쿠바의 민중들을 끌어 모으고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체 게바라와 힘을 합쳐 친미정권을 몰아내는 혁명에 성공하는데 주로 미국인들의 소유였던 ‘외국인 소유기업 국유화’ 등의 정책으로 미국과 등을 돌리고 1959년 공산화를 선포한다. 미국의 코 앞(플로리다에서 145km)에서 공산정권 수립을 선언하자 크게 자존심이 상한 미국은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고자 피그스만(Bay of Pigs) 침공을 시도하는데....
1961년, 미국은 1.500명의 쿠바출신들로 구성된 게릴라 군을 훈련시켜 피그스만에 공중 투하 시켜 카스트로 정권의 붕괴를 노리지만 사전 정보누출과 기대했던 쿠바 내 동조도 일어나지 않아 3일 만에... 100명 이상 사살, 1.1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히며 실패로 끝난다. 1962년, 기고만장한 카스트로는 소련 총리 후르시쵸프와 결탁하여 쿠바에 소련의 핵미사일 기지 4곳을 건설하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데...
격분한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에서 오는 모든 배를 수색하겠으며, 만약 미사일이 발견되면 즉시 격침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내며... 세계 3차 대전(핵전쟁) 발발 일촉즉발의 위기까지 갔으나 결국 소련의 양보(항복)를 받아내어 핵미사일 기지는 철수된다. 당시 쿠바 내 미사일 기지에는 핵미사일이 이미 9기나 배치되어 있었다고 하고 미국 연안에서 미국에 포위된 소련의 핵잠수함의 함장은 이미 전쟁이 시작된 것으로 착각하고 핵어뢰(核魚雷)의 발사를 명령했지만 부함장 아르키포프(Vasili Alexandrovich Arkhipov)가 발사를 조금 주저하는 바람에... 인류 멸망의 핵전쟁이 일어날 뻔했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체 게바라(Che Guevara/1928. 6. 14. ~ 1967. 10. 9.)는 본명이 에르네스토 게바라(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이다. 진정한 영웅, 용기가 무엇인지 몸소 실천으로 보여 준 사람, 전설 같은 삶, 높은 도덕성, 불꽃같은 혁명가, 끊임없는 인류애, 전 세계 젊은이들이 열망하는 아이콘..... 체 게바라를 향한 찬사(讚辭)는 끝이 없다. 불꽃같은 혁명의 길을 걸어간 체 게바라의 삶을 잠시 조명해 본다.
체 게바라는 의과대학생이던 시절, 남미대륙을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며 끊임없이 착취당하는 가난하고 병든 민중들을 보며 안정된 의사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고난의 연속인 혁명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혁명의 불길을 좇아 볼리비아로, 과테말라로, 멕시코로 달려가 혁명의 선봉에 서던 그는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비로소 쿠바혁명에 성공한다. 혁명 성공 후 쿠바의 국민은행 총재, 산업부 장관, 전권대사 등 정치활동에 잠시 몸을 담지만 자신의 체질에 맞지 않는 것을 알고는 훌훌히 던져버리고 다시 혁명전선에 뛰어든다.
콩고 혁명에 뛰어들었으나 실패로 끝나자 다시 볼리비아로 건너가 혁명전선에 뛰어드는데 체 게바라가 왔다는 사실 자체가 혁명군들에게는 엄청난 힘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체 게바라는 그곳에서 결국 체포되고 다음날인 1967년 10월 9일 처형당한다. 볼리비아 정부는 그의 사망을 확인시키려 시체에서 두 손을 잘라 쿠바에 보냈다고 한다. 진정 불꽃같은 삶을 산 혁명가의 일생이라 할 것이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혁명광장 내무부 건물 벽면에는 체 게바라의 캐리커처와 함께 그의 좌우명인 ‘승리할 때까지 영원히’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3. 쿠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Cuba Buena Vista Social Club)』
쿠바의 전설적인 재즈 그룹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이 10월 15일, 미국 백악관에서 초청 연주회를 갖는다고 한다. 쿠바 음악가들이 백악관에서 연주하는 것은 반세기 만의 일이다.
외신에 따르면 이들은 히스패닉계 미국인의 문화·유산을 기리는 ‘히스패닉 유산의 달’(9월 15일~10월 15일)을 기념해 백악관의 초청을 받았으며 ‘냉전 시대 이후 50년 만에 쿠바 밴드가 백악관에 초청된 것’이라고 한다. 행사에는 미국주재 쿠바 대사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참석한다.
♣히스패닉(Hispanic)-스페인어를 쓰는 중남미 유럽 이민자 후손들을 지칭하는 말
쿠바 음악가들은 쿠바 음악의 전성기인 1930~40년대만 해도 미국에서 자주 공연을 했지만 1959년 혁명에 성공한 피델 카스트로 정권이 사회주의 노선을 걷자 쿠바와 미국의 음악 교류는 단절된다. 반세기 이상 계속된 양국의 단절은 지난 8월 외교 관계가 복원되며 정상화된 셈이다. 쿠바 음악의 상징인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의 백악관 연주는 단절됐던 양국 문화 교류의 회복을 상징한다.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은 쿠바음악이 전성기를 누렸던 1930~40년대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사교 클럽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데 ‘환영받는 사교 클럽’이라는 뜻으로 당시 유명한 연주가들은 모두 이 클럽에서 연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쿠바가 사회주의 혁명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이념이 담긴 포크송(Folk Song)이 쿠바의 전통음악 자리를 대신했고, 이는 곧 쿠바 음악의 침체기의 시작으로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에서 연주하던 음악가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이브라힘 페레, 오마라 포르투온도, 루벤 곤잘레스 /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공연모습
1994년 독일의 영화감독이자 사진작가인 빔 벤더스(Wim Wenders/1945년 생)는 우연히 오랜 친구였던 미국의 기타리스트(Guitarist)이자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Artist)인 라이쿠더(Ry Cooder/1947년 생)로 부터 믹싱(Mixing)도 되지 않은 테이프 하나를 받는다. 쿠더가 쿠바의 아바나에서 녹음해 온 그 테이프를 들은 벤더스는 ‘이봐 라이, 정말 환상적인데. 자네가 아바나에서 찾은 이 애들은 누구지?’ 하고 물었다. 쿠더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애들은 아니야’ 라며 웃었다.
벤더스가 아바나의 애들이라고 생각했던 이 환상적인 뮤지션들은 70대에서 90대에 이르는 노인들이었다. 벤더스는 쿠더로부터 루벤 곤잘레스(Ruben Gonzales), 콤파이 세군도(Compay Segundo), 이브라힘 페레(Ibrahim Ferrer)와 같은 뮤지션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은 쿠바 대중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전설적인 음악인들이었지만 혁명 이후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었다는 이야기였다. 벤더스는 이들에 관해 쿠더가 들려준 수많은 이야기 중 절반만 사실이어도 꼭 이 사람들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듬해인 1995년, 쿠더와 함께 아바나를 방문한 벤더스는 죽은 줄로만 여겼던 90세의 기타리스트 겸 가수 콤파이 세군도를 비롯하여 전설적인 피아노 연주자 루벤 곤잘레스 등을 만난다.
1950년대, 세계적인 재즈가수 이브라힘 페레는 골목의 구두닦이로, 쿠바음악의 황금기에 기타와 보컬을 담당했던 콤파이 세군도는 낮에는 이발사, 밤에는 작은 클럽에서 일하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또, 쿠바의 3대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었던 루벤 곤살레스는 정작 80세가 넘어서야 첫 솔로 음반을 낼 정도로 철저히 잊혀진 상태였다.
‘이들이 살아 있는지도 모른 채 20년 동안 그들의 음악을 들어왔다’고 고백한 라이쿠더는 젊은 시절 자신을 감동시켰던 연주자들이 생각보다 많이 생존해 있음을 확인하고 흥분했다. 그들과의 만남은 쿠더에게는 그야말로 황홀한 순간이었고, 그들 역시 쿠더에 의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쿠바의 허름한 뒷골목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노인네로, 혹은 먼 훗날 쿠바음악 서적에서나 마주쳤을 왕년의 음악인들 중 한 명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1996년, 쿠더는 이들 외에 두 명의 멤버를 더 영입하여 총 5명의 멤버로 밴드를 결성하여 밴드 이름을 옛 이름대로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으로 짓고 ‘찬찬(Chan Chan)’, ‘칸델라(Candela)’ 등의 히트곡을 녹음한다.
이들은 단지 6일 동안 연습하고 녹음하여 음반을 발매하는데 ‘손(Son), 맘보(Mambo), 볼레로(Bolero), 단손(Danzon)’과 같은 쿠바음악의 원류와 함께 아프로-쿠반 재즈(Afro-Cuban Jazz)와 라틴 재즈(Latin Jazz)의 진수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7년 음반이 발매되자 클래식, 팝, 재즈계로부터 열광적인 환호와 찬사를 받으며 빌보드 차트와 월드뮤직 차트를 강타했다.
이 음반은 미국과 일본 등 세계 10여 개국에서만 한정 발매됐음에도 불구하고 700만 장 이상의 판매실적을 올리며 전 세계에 쿠바 음악 돌풍을 다시 일으켰고 1997년에는 그래미상을 받았다. 하지만 뮤지션들에겐 음반의 선풍적인 인기와 그래미상보다 수십 년 만에 관객들의 환호를 받으며 암스테르담(Amsterdam) 무대에 섰던 첫 공연이 더 감동적이었다고 평가한다.
독일의 빔 벤더스 감독은 1999년 이들의 이야기를 ‘쿠바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이라는 제목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여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들의 프로필을 살펴본다.
이브라힘 페레 / 콤파이 세군도 / 루벤 곤잘레스
<1> 이브라힘 페레(Ibrahim Ferrer) -2005년 78세로 사망
라이쿠더는『일생에 단 한 번 만날 수 있는 쿠바의 ‘냇 킹 콜(Nat KingCole)’』이라고 이브라힘 페레를 극찬했는데 그는 열두 살 때 부모를 잃고 구두닦이와 복권팔이로, 쓰레기통까지 뒤지면서 생계를 연명했다.
커피 열매를 빻는 소리를 듣고 ‘필론’ 리듬을 처음으로 유행시켰으며, 오마라 포르투온도와 부른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Quizas Quizas Quizas)’는 ‘냇 킹 콜’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았고, 2000년 라틴 그래미상 최우수 신인 예술가상을 수상했다.
<2> 콤파이 세군도(Compay Segundo) -2003년 95세로 사망
콤파이 세군도는 탄광열차 수리공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탄광촌에서 자란 그는 낮에는 담배농장의 일꾼이나 이발사로, 밤에는 근처 바에서 연주를 했는데 15세에 첫 자작곡을 내기도 하였다.
기타와 트레스의 장점만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악기 ‘아르모니코’를 발명하기도 한 그는 동지(친구)라는 뜻의 콤파이, 그의 유난히 낮은 목소리를 가리키는 세군도를 합쳐 ‘콤파이 세군도’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이름이 되었다.
오마라 포르투온도 / 엘리아데스 오초아 / 피오 레이바
<3> 루벤 곤잘레스(Ruben Gonzales) -2003년 84세로 사망
의학도였던 그는 쿠바음악에 매료되어 피 속에서 요동치는 쿠바 리듬을 주체하지 못해 도중에 학업을 포기했다.
절뚝거리는 걸음걸이와 수줍은 미소는 그를 더욱 왜소해 보이게 하지만 피아노 앞에서만은 거장이 되는 루벤 곤잘레스는 루이스, 페루친과 함께 모던 재즈와 맘보를 결합시킨 장본인이며, 40년대 쿠바 음악계를 주름잡았던 3대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다. 전 세계에는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있지만 그 어느 누구도 영혼을 연주하는 루벤 곤잘레스를 뛰어넘지는 못할 것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4> 오마라 포르투온도(Omara Portuondo) -생존, 1930년 생
‘쿠바의 에디트 피아프’라고 불리는 그녀는 이 멤버의 홍일점이다. 1996년 그녀는 우연히 스튜디오에 들렀는데 잠시 쉬는 틈을 타 이브라힘과 별 뜻 없이 노래를 불렀고, 라이쿠더는 서정적인 멜로디가 듣는 이의 슬픔을 끌어내는 그녀의 목소리에 단번에 매혹되었다. 어릴 적부터 흥얼거린 ‘베인트 아노스’라는 노래로 1997년 마침내 그래미상(Grammy Award)을 받은 쿠바 최고의 볼레로(Bolero) 가수이다.
<5> 피오 레이바(Pio Leyva) -2006년 88세로 사망
1917년 쿠바 중부 모론에서 태어난 레이바는 여섯 살 때 봉고 콘테스트에서 우승한 뒤 1932년 데뷔했으며, 50년대 쿠바 음악의 산실인 ‘베보 발데즈’의 밴드에서 노래하면서 유명해졌다.
<6> 엘리아데스 오초아(Eliades Ochoa) -생존, 1946년 생
이 멤버 중 막내인 오초아는 쿠바의 전설적 그룹 ‘콰르테토 파트리아(Cuarteto Patria)’의 리드 싱어였으며 뛰어난 기타리스트이자 보컬로 약간 고음인 그는 저음인 세군도와 기막힌 하모니를 만들어 낸다는 찬사를 받는다.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의 히트곡은 Chan Chan(찬찬), Amor de Loca Juventud(젊음, 그 미칠 듯한 사랑), Dos Gardenias(치자 꽃 두 송이)등 수없이 많다. 라틴음악은 주로 정열적인 댄스음악이 주류인데 중남미 고유의 리듬에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전해준 스페인 음악, 노예로 끌려온 아프리카 흑인들의 리듬이 가미되고 거기에 다시 미국 뉴올리언즈에서 발생된 재즈음악까지 곁들여져 복잡다양한 양상을 띈다.
춤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감히 이들 댄스음악을 이해한다고는 못하지만 소개해 보면....
차차차(Cha-cha-cha), 맘보(Mambo), 룸바(Rumba), 비긴(Beguine), 볼레로(Bolero), 삼바(Samba)/브라질), 레게(Reggae)/자메이카), 탱고(Tango)/아르헨티나) 그리고 살사(Salsa) 등이 그것이다.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의 백악관 연주 모습(2015년 10월 15일)
노래하는 85세의 오마라 포르투온도(Omara Portuondo)
어제 ‘부에노비스타 소셜클럽’의 백악관 공연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마쳤다고 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여러분을 모시게 돼 기쁘다.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나온 1999년에 나도 CD를 샀었다’ 며 참석자들에게 큰 박수를 부탁하기도 했다고 한다.
빔 벤더스 감독은 1999년, ‘부에노비스타 소셜클럽’이라는 제목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 난 후 ‘나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내내 춤출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여기서 춤은 댄스음악이라서 맞추어 춤추었다는 것이 아니라 심장으로 전달된 감동이 무의식적인 몸동작으로 나타난 흥겨운 상태를 가리킨다.
콩가(Conga), 봉고(Bongo), 드럼(Drum) 그리고 마라카스(Maracas)가 빚어내는 생소하고 묘한 쿠바음악의 타악기 리듬은 정말로 사람을 ‘무의식적인 광란의 흥분’으로 몰아간다. 특히 미국과 영국의 팝(Pop)에 젖은 사람들한테는 미지의 신비와 신선함이다.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이 들려주는 음악은 단존(Danzon), 구아지라(Guajira), 크리올라(Criolla), 미국 재즈(Jazz)에 영향 받은 음악 등 다채롭지만 기본적으로 19세기에 형성된 쿠바의 전통음악 손(Son)과 쓰디쓴 사랑의 노래 볼레로(Bolero)가 그 바탕이다.
중간 템포의 손(Son)은 룸바(Rumba)에서 나왔고, 둘은 다시 아프리카음악이 그 뿌리이다. 즉 ‘아프로-쿠반(Afro-Cuban)’으로, 쿠바음악 크리올라는 아프리카 흑인노예의 리듬과 스페인 노예주인의 기타와 피아노가 ‘동등하게’ 결합된 소리로 완벽한 자연의 음악, 인간심장의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중남미 음악은 스페인 정복자들과 흑인노예들이 빚어 낸 슬픈 역사의 산물이라 할 것이다. (2015.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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