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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도론 2권
9.5. 일반적인 항목의 주석
91.
이와 같이 최고의 범천이신 [세존께서]
설하신 거룩한 마음가짐(梵住)을 알고
다시 이들의 일반적인 항목의 주석도 알아야 한다.
92. 이제 자애와 연민과 더불어 기뻐함과 평온의 뜻에 관해서 설명한다.
호의를 가지기(majjati) 때문에 자애(mettā)이다. 애정을 가진다는 뜻이다.
친구에 대한 태도이기 때문에(mitte bhavā), 혹은 이것은 친구에게 일어나기(mittassa pavatti) 때문에 자애(mettā)이다.
다른 사람이 고통스러워할 때 선한 사람의 가슴이 동요하기(kampanaṁ karoti) 때문에 연민(karuṇā)이라 한다.
혹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제거하고, 죽이고, 분쇄하기 때문에 연민이다.
혹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해 흩어져서(kiriyati) 가득 채움으로써 확장되기때문에 연민이다.
이것을 가진 자는 이것 때문에 기뻐한다. 혹은 스스로 기뻐한다. 혹은 단지 기뻐하기 때문에 더불어 기뻐함(muditā)이다.
‘원한이 없기를!’하는 등의 관심을 버리고 중립적인 상태에의지 함으로써 평정하기(uekkhati) 때문에 평온(upekkhā)이라 한다.
93. 특징 등에 관해서 설명한다.
자애는 복리(hita)의 형태로 일어나는 것이 그 특징이다.
복리를 가져오는 역할을 한다. 증오를 조복함(vinaya)으로 나타난다. 중생에 대해 사랑스러움을 보는 것이 가까운 원인이다.
악의를 가라앉힐 때 이것을 성취하고 갈애를 일으킬 때 실패한다.
94. 연민은 중생에게 일어난 고통을 완화하려는 형태로 일어나는 것이 그 특징이다.
다른 자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역할을 한다. 해코지 않음으로 나타난다. 고통에 압도된 자들에 대해 의지할 곳이 없는 상태를 보는 것이 가까운 원인이다.
잔인함을 가라앉힐 때 이것을 성취하고 근심을 일으킬 때 실패한다.
95. 더불어 기뻐함의 특징은 [다른 자의 성공을] 기뻐함이다.
질투하지 않는 역할을 한다. 따분함(arati)을 제거함으로 나타난다. 중생들의 성공을 보는 것이 가까운 원인이다.
따분함을 가라앉힐 때 이것을 성취하고 [세속적인 희열로] 왁자지껄한 웃음을 일으킬 때 실패한다.
96. 평온은 중생들에 대해 중립적인 상태로 일어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중생들에 대해 평정함을 보는 역할을 한다. 적의와 찬사를 가라앉힘으로 나타난다. 중생들은 업이 자신의 주인이다(kammassakatā).
‘[업 이외의] 다른 어던 것이 있어 중생들이 행복하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이미 얻은 영화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여,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보는 것이 가까운 원인이다.
적의와 찬사를 가라앉힐 때 이것을 성취하고, 무지(aññāṇa)에 바탕한 무관심을 일으킬 때 실패한다. 무지는 감각적 욕망에 바탕하기 때문이다.
97. 위빳사나의 행복과 [고귀한] 존재를 성취하는 것이 이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의 공통적인 목적이고, 악의 등을 물리침이 특별한 목적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자애는 악의를 물리치는 것이 목적이고,
나머지는 각각 잔인함과 따분함과 애욕을 물리치는 것이 그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설하셨다.
“도반이여, 악의로부터 벗어남이 곧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慈心解脫)이다 …
잔인함으로부터 벗어남이 곧 연민을 통한 마음의 해탈이다 …
애욕으로부터 벗어남이 곧 평온을 통한 마음의 해탈이다.(D.iii.248-49)”
98.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의 각각은 가깝고 먼 두 가지 적이 있다.
사람의 가까이 있는 적과 같은 애욕이 자애의 거룩한 마음가짐의 가까운 적이다. 덕을 보는 것이 [자애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애욕은 잽싸게 기회를 포착한다. 그러므로 그것으로부터 자애를 잘 보호해야 한다.
악의는 [자애와] 같은 성질인 애욕과는 다른 성질이기 때문에 먼 적이다.
마치 산림에 멀리 숨어있는 사람의 적처럼.
그러므로 악의의 공포로부터 벗어나서 자애를 닦아야 한다. 자애를 닦으면서 화를 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99. 재가에 의지한 슬픔이 연민의 거룩한 마음가짐의 가까운 적이다. 실패를 보는 것이 [연민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재가에 의지한 슬픔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전승되어온다.
“눈으로 인지하는 형상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매력있고, 마음을 끌며 세속적인 것과 연결되어있다.
이런 것들을 획득하지 못한 것을 획득하지 못한 것이라고 여기거나, 이미 지나갔고 소멸되었고 변해버린 이전에 획득하지 못한 것을 기억하면서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이러한 슬픔을 재가에 의지한 슬픔이라 부른다.(M.iii.218)”
잔인함은 [연민과] 같은 성질인 슬픔과는 다른 성질이기 때문에 먼 적이다.
그러므로 잔인함의 공포로부터 벗어나서 연민을 닦아야 한다.
연민을 일으키면서 살아 숨쉬는 것들을 해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00. 재가에 의지한 기쁨이 더불어 기뻐함의 거룩한 마음가짐의 가까운 적이다. 성공을 보는 것이 [더불어 기뻐함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재가에 의지한 기쁨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전승되어온다.
“눈으로 인지하는 형상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매력있고, 마음을 끌며 세속적인 것과 연결되어있다. 이런 것들을 획득한 것을 획득한 것이라고 여기거나, 이미 지나갔고 소멸되었고 변해버린 이전에 획득한 것을 기억하면서 기뻐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이러한 기쁨을 재가에 의지한 기쁨이라 부른다.(M.iii.217)
따분함은 [더불어 기뻐함과] 같은 성질인 기쁨과는 다른 성질이기 때문에 먼 적이다.
그러므로 따분함의 공포로부터 벗어나서 더불어 기뻐함을 닦아야 한다.
더불어 기뻐함을 일으키면서 외딴 거처나 혹은 지극히 유익한 법들에 대해 불만을 가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01. 재가에 의지한 무지의 평온이 평온의 거룩한 마음가짐의 가까운 적이다. 허물과 덕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 [평온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재가에 의지한 무지의 평온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전승되어온다.
“눈으로 형상을 보고 [모든 오염원의] 한계를 정복하지 못했고 업의 과보를 정복하지 못했고 위험을 보지 못한 배우지 못한 범부에게도 평온이 생긴다.
그러나 이런 평온은 형상을 초월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런 평온을 재가에 의지한 것이라고 부른다.(M.iii.217)”
애욕과 적개심은 [평온과] 같은 성질인 무지와는 다른 성질이기 때문에 먼 적이다.
그러므로 애욕과 적개심의 공포로부터 벗어나서 평온을 닦아야 한다.
평온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애욕을 가지거나 분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02. 하고자 하는 열의가 미 모든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의 시작이고,
장애 등을 억압하는 것이 중간이고,. 본삼매에 드는 것이 마지막이다.
이 거룩한 마음가짐은 한 중생이나 혹은 여러 중생을 대상으로 가지며 [중생은] 개념에 속하는 법(paññatti-dhamma)이다.
근접삼매나 본삼매에서 대상을 확장할 수 있다.
103. 이것이 확장하는 순서이다.
마치 노련한 농부가 경작할 토지를 먼저 한정한 다음 경작하듯이,
첫 번째로 하나의 거처를 한정하여 그곳의 중생들에 대해
‘이 거처에 있는 중생들이 원한이 없기를!’하는 등으로 자애를 닦아야 한다.
그것에 마음이 유연해지고 적합해지면 두 곳의 거처를 한정해야 한다.
그 다음에 서서히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한 거리, 마을의 반, 마을, 지역, 왕국, 한 방위,
이와 같이 하나의 우주까지, 혹은 다시 더 나아가 거기 있는 각각의 중생들에 대해 자애를 닦아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연민 등을 닦아야 한다.
이것이 여기서 대상을 확장하는 순서이다.
104.
마치 무색계가 까시나의 결과이고,
비상비비상처가 삼매의 결과이고,
과의 증득이 위빳사나의 결과이고,
멸진정(nirodha-samā-patti)이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결과이듯이,
평온의 거룩한 마음가짐(梵住)은 앞의 세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의 결과이다.
마치 먼저 기둥을 세우고 서까레를 얹지 않고서는 동중에 대들보를 얹을 수 없듯이,
앞의 것에 대해서 제3선을 얻지 않고서는 닦을 수 없다.
105. 이와 같이 물을지도 모른다.
‘왜 자애, 연민, 더불어 기뻐함, 평온을 거룩한 마음가짐(梵住)이라 부르는가?
왜 오직 넷뿐인가?
무엇이 그들의 순서인가?
왜 아비담마에서는 무량(無量)이라 부르는가?’라고.
106. 답한다.
가장 수승하다(seṭṭha)는 뜻과 흠없는(niddosa) 상태로 거룩한 마음가짐의 상태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중생들에 대한 바른 마음가짐으로 가장 수승하기 때문이다.
마치 범천들이 흠없는 마음으로 살듯이 이런 거룩한 마음가짐들과 함께하는 수행자들도 범천들과 동등하게 되어 머물기 때문에 가장 수승하다는 뜻과 흠없는 상태를 통해서 거룩한 마음가짐이라 부른다.
107. ‘왜 오직 넷 뿐인가’하는 등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① 청정으로 인도하는 도 등에 따라 넷이고
② 복리 등의 형태에 따라 그들의 순서가 있고
③ 무량한 영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무량이라 부른다.
108. 이 가운데서
① 자애는 악의가 많은 자를 청정으로 인도하는 도고,
연민은 잔인함이 많은 자를,
더불어 기뻐함은 따분함이 많은 자를,
평온은 애욕이 많은 자를 청정으로 인도하는 도다.
중생들을 마음에 잡도리함은 네 가지가 있으니,
복리를 가져옴, 불리를 제거함, 성공을 기뻐함, [중립적인] 무관심이다.
마치 어머니가 어린아들과 병든 아들과 사춘기에 접어 든 아들과 자기의 일에 몰두 한 네 아들에 대해,
어린아들에게는 얼른 자라기를 바라고,
병든아들에게는 쾌차하기를 바라고,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에게는 젊음의 행복을 오래 즐기기를 바라고,
자기의 일에 몰두한 아들에게는 조금의 관심도 갖지 않는 것처럼,
무량에 머무는 자도 모든 중생에 대해 자애 등을 닦아야 한다.
그러므로 청정으로 인도하는 도 등에 따라 무량은 넷이다.
109.
② 이 넷을 닦고자하는 자는 제일 먼저 중생들에 대해 복리증진을 바람으로 닦아야 한다.
자애는 복리증진을 바라는 특징을 가진다.
그 다음에 복리를 바랬던 중생들이 고통에 압도된 것을 보거나 듣거나 추측하여 그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바람으로 닦아야 한다. 연민은 고통의 완화를 바라는 특징을 가진다.
그 다음에 이와 같이 복리를 바랬고, 고통이 제거되기를 바랬던 그들의 성공을 보면서 성공에 대해 더불어 기뻐함을 통해서 그들을 닦아야 한다. 더불어 기뻐함은 기뻐하는 특징을 가진다.
그 다음에는 해야 할 일이 없기 때문에 무심한 상태라 불리는 중립적인 상태를 바라는 특징을 가진다.
그러므로 복리 등의 형태로 제일 먼저 자애를 설했고, 그 다음에 연민, 더불어 기뻐함, 평온의 순서를 알아야 한다.
110.
③ 이 모든 것은 무량한 영역에서 일어난다.
왜냐하면 무량한 중생이 그들의 영역이고, 한 중생이나 이만큼의 지역에 자애 등을 닦아야 한다고 분량을 정하지 않고 전체를 가득 채움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하셨다.
청정으로 인도하는 도 등에 따라 넷이고
복리 등의 형태에 따라 그들의 순서가 있고
무량한 영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무량이라 부른다.(§107)
111. 이와 같이 무량한 영역을 가진다는 점에서 이들은 동일한 특징을 갖지만 앞의 셋은 [4종선과 5종선에서 각각] 세 가지 禪과 네 가지 禪만을 가진다.
무슨 이유인가?
기쁨(samanassa)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그들이 기쁨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가?
슬픔(domanassa)에서 생긴 악의 등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인 [평온]은 나머지 한가지 禪도 가진다.
무슨 이유인가?
평온한 느낌(upekkhā-vedanā)과 관련되어있기 때문이다.
중생들에 대해 중립적인 상태로 일어나는 평온의 거룩한 마음가짐은 평온한 느낌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112. 이와 같이 말할 지도 모른다.
‘세존께서 『증지부』의 『여덟의 모음』에서 네 가지 무량(四無量)에 대해 일반적으로 설하셨다.
“비구여, 그 다음에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함께한 삼매를 닦아야 한다.
일으킨 생각은 없고 지속적인 고찰만 있는 삼매를 닦아야 한다.
일으킨 생각도 없고 지속적인 고찰도 없는 삼매를 닦아야 한다.
희열이 있는 삼매를 닦아야 한다. 희열이 없는 삼매를 닦아야 한다.
행복이 함께한 삼매를 닦아야 한다. 평온이 함께한 삼매를 닦아야 한다.(A.iv.300)”
그러므로 네 가지 무량은 모두 사종선과 오종선을 다 가진다’라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답해야 한다.
113. 만약 그렇다면 [세존께서 그 경에서 설하신] 몸의 관찰(身隨 觀) 등도 사종선과 오종선을 다 가지게 되고 말 것이다.
느낌의 관찰 등에는 초선도 없는데 하물며 제2선 등을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러므로 문자에만 매달려서 세존을 비방하지 말라.
부처님의 말씀은 심오하다. 스승께 다가가서 뜻하는 것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114. 이것이 [그 경이] 뜻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제게 간략하게 법을 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세존으로부터 법을 듣고 혼자 은둔하여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독려하며 머물고자 합니다.(A.iv.299)”라고,
한 비구가 세존께 법을 청했다.
그러나 그 비구는 그 전에도 법을 들었지만 그곳에서만 살았을 뿐 사문이 해야 할 일을 하러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그에게
“그런데 여기 이처럼 어떤 쓸모 없는 인간들은 나에게 법을 설해주기를 청한다.
법을 설하면 [사문이 해야 할 일을 하러 떠나지 않고] 나를 따르리라고만 생각한다.(A.iv.2990’라고 꾸짖으셨다.
그러나 그가 아라한과를 얻기 위한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을 가졌기 때문에,
그를 경책하시면서 설하셨다.
“그러므로 비구여, 그대는이와 같이 공부지어야 한다.
나의 마음은 안의 것인 [명상주제에] 안정된 것이고, 아주 잘 안정될 것이며, 이미 일어난 삿되고 해로운 법들이 마음을 사로잡아 머물지 못할 것이다.
비구여, 이와 같이 공부지어야 한다.(A.IV299)”
이 경책으로 내적으로 단지 마음의 하나됨(心一境性)인 근본삼매(mūla-samādhi)를 설하신 것이다.
115. 그 다음에 이 정도로 만족하지 말고 이와 같이 삼매를 증장시켜야 한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해서
“비구여, 그대의 마음이 안의 것인 명상주제에] 안정되고, 아주 잘 안정되고, 이미 일어난 삿되고 해로운 법들이 마음을 사로잡아 머물지 않으면, 그 다음에 그대는 이와 같이 공부지어야 한다.
나는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을 닦고, 많이 [공부] 짓고, 수레로 삼고 기초로 삼고, 확립하고, 굳건히 하고, 부지런히 닦을 것이다.
비구여, 이와 같이 그대는 공부지어야 한다(A.iv.299-300)”라고 그에게 자애수행을 설하셨다.
그리고 다시 설하셨다.
“비구여, 그대가 이 삼매를 이와 같이 닦고 많이 [공부]지었다면 그 다음에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함께한 근본삼매를 닦아야 한다.
일으킨 생각은 없고 지속적인 고찰만 있는 삼매를 닦아야 한다 …
평온이 함께한 삼매를 닦아야 한다.(A.iv.300)”라고.
116. 이것은
‘비구여, 이와 같이 자애로 이런 근본삼매를 닦았으면 이제 이 정도로 만족하지 말고,
사종선과 오정선을 얻도록 이 근본삼매를 다른 대상에 대해서도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함께한’ 등의 방법으로 닦아야 한다’라는 뜻이다.
117. 이와 같이 설하시고 다시 연민 등 나머지 거룩한 마음가짐을 선도(先導)로 삼아,
다른 대상에 대해서 4종선과 5종선으로 더 싶은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을 설하시면서
“비구여, 그대가 이 삼매를 이와 같이 닦고 많이 [공부]이었다면 그 다음에는
‘나는 연민을 통한 마음의 해탈을 [닦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공부지어야 한다(A.iv.300)”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18. 이와 같이 자애 등을 선도로 삼아 사종선과 오종선으로 더 깊은 수행을 설하시고,
다시 몸의 관찰(身隨觀) 등을 선도로 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해서
“비구여, 그대가 이 삼매를 이와 같이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그 다음에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머물리라’라고,
이와 같이 공부 지어야 한다.”라는 등으로 설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아라한이 됨을 정점으로 하여 가르침을 종결지으셨다.
“비구여, 그대가 이 삼매를 이와 같이 닦고. 아주 잘 닦으면,
그대가 어디를 가든지 편안하게 갈 것이고,
어느 곳에 머물던지 편안하게 머물 것이고,
어느 곳에 앉던지 편안하게 앉을 것이고,
어느 곳에서 잠자든지 편안하게 잠잘 것이다.(A.iv.301)”
그러므로 자애 등은 앞의 세 가지 禪 혹은 네 가지 禪을 가지며 평온을 나머지 한 가지 禪도 가진다고 알아야 한다.
논장(아비담마)에서도 이 처럼 분석한다.
119. 이와 같이 세 가지 禪 혹은 네 가지 禪과 나머지 하나의 禪으로 두 가지가 되지만,
이들은 깨끗함(subha)을 정점으로하는 것 등으로 서로 다른 특별한 위력을 가진다고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할릿다와사나 경」(Haliddavasana Sutta)에서 이들을 깨끗함을 정점으로 하는 것 등으로 구별하여 설하셨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慈心解脫)은 깨끗함이 정점이라고 나는 설한다 …
비구들이여, 연민을 통한 마음의 해탈은 공무변처가 정점이라고 나는 설한다 …
비구들이여, 더불어 기뻐함을 통한 마음의 해탈은 식무변처가 정점이라고 나는 설한다 …
비구들이여, 평온을 통한 마음의 해탈은 무소유처가 장점이라고 나는 설한다.(S.v.119-21)”
120. 왜 이와 같이 설하셨는가?
[자애를 통한 해탈 등] 각각의 [해탈을 위한] 강하게 의지하는 [존건이] 되기 때문이다.
자애에 머무는 자에게는 중생들이 혐오스럽지 않다. 그때 혐오감이 없는 것에 친숙해져있기 때문에 혐오감이 없는 청정한 푸른 색깔 등에 대해 마음을 가져갈 때 어려움 없이 마음이 그곳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자애는 깨끗함을 통한 해탈을 위한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해탈의 조건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깨끗함이 정점이라고 설하셨다.
121. 연민에 머무는 자가 몽둥이로 때리는 등 물질로 인한 중생의 고통을 관찰할 때 연민이 일어나기 때문에 물질에 대한 위험을 잘 알게 된다.
그가 물질에 대한 위험을 잘 알기 때문에 땅의 까시나 등 가운데서 [그가 명상했던] 어떤 까시나를 제거하여 물질로부터 벗어남인 허공에 마음을 가져갈 때 어려움 없이 마음이 그곳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연민은 공무변처를 위한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해탈의 조건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무변처가 정점이라고 설하셨다.
122. 더불어 기뻐함에 머무는 자가 갖가지 기쁨을 가져올 원인으로 인해 기쁨이 일어난 중생의 알음알이를 관찰할 때 더불어 기뻐함이 일어나기 때문에 더불어 기뻐함에 머무는 자의 마음은 알음알이(識)를 이해하는데 친숙해져있다.
그가 순서에 따라 얻은 공무변처를 초월한 뒤 허공의 표상을 자기의 영역으로 삼는 알음알이로 마음을 가져갈 때 어려움 없이 마음이 그곳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더불어 기뻐함은 식무변처를 위한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해탈의 조건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식무변처가 정점이라고 설하셨다.
123. 평온에 머무는 자는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이미 얻은 행복으로부터 벗어나지 말기를.’ 하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행복(즐거움)과 괴로움 등 구경[법](paramattha)을 취하는 것으로부터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에,
평온에 머무는 자의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 [중생이라는 개념을] 취하는데 고통스럽다.
그때 그의 마음은 구경법을 취함으로부터 방향을 바꾼 상태에 친숙해져 있고, 그의 마음이 궁극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을 취하는데 고통스러워한다.
순서에 따라 얻은 식무변처를 초월한 뒤 구경법인 알음알이의 부재(abhava) – 이 부재에는 고유성질이 없다-에 마음을 가져갈 때 어려움 없이 마음이 그곳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이 평온은 무소유처를 위한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해탈의 조건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소유처가 정점이라고 설하셨다.
124. 이와 같이 깨끗함이 정점이라는 등으로 이들의 위력을 알고 난 뒤에,
다시 이 모든 것은 보시 [바라밀] 등 모든 선한 법들을 완성한다고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마하살(mahāsatta)들은 중생들의 복리를 소원하고, 중생들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이미 얻은 특별한 성공이 오래 지속되기를 원하고,
모든 중생들에 대해 편견이 없기 때문에 평등한 마음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사람에게는 주어야 한다. 이 사람에게는 주지 말아야 한다’라는 분별을 짓지 않고,
모든 중생들에게 행복의 원인인 ① 보시(dāna)를 행한다.
그들에게 해로움을 끼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② 계(sīla)를 지킨다.
그 계율을 원만히 하기 위해 ③ 출가(nek-khamma, 出離)를 한다.
중생들의 복리와 불리에 대해 미혹하지 않기 위해 ④ 통찰지(paññā)를 청정히 한다.
중생들의 복리와 행복을 위해 항상 ⑤ 정진(viriya)한다.
최상의 정진으로 용맹스러움을 얻었지만 중생들이 저지르는 여러 가지 과실을 ⑥ 인욕(khanti)한다.
‘이것을 주겠다. 이것을 하겠다’라고 한 ⑦ 서원(paṭiññ=sacca)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들의 복리와 행복을 위해 ⑧ 굳은 결심(adhiṭṭhāna)을 가진다.
그들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⑨ 자애(mettā)로 [그들을 우선으로 여긴다.
⑩ 평온(upekkhā)하기 때문에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이와 같이 이들 [마하살들]은 바라밀을 완성한 뒤,
열 가지 힘(十力)과 네 가지 담대함(四無畏)과, 6가지 함께하지 않는 지혜(大不共智)와, 18가지 부처님의 법(buddhadamma)으로 분류되는 모든 선한 법들을 완성한다.
이와 같이 이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은 보시[바라밀] 등 모든 선한 법들을 완성한다.
어진 이를 기쁘게 하기 위해 지은 청정도론의
삼매수행의 표제에서
거룩한 마음가짐에 관한 해설이라 불리는
제9장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