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가아발다라보경 제3권
40. 열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열반이란]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말씀하신 열반이란 어떤 법을 열반이라 한 것입니까?
모든 외도들이 각기 망상을 일으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너희를 위해 말하겠다.
모든 외도들은 망상을 열반이라 하는데, 그런 망상은 열반을 수순하는 길이 되지 못한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예,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외도의 열반]
“혹 어떤 외도는 음(陰)ㆍ계(界)ㆍ입(入)을 없애고, 경계에 대한 욕심을 벗어나 법이 무상(無常)한 것을 보며,
마음[心]과 마음 법[心法]들이 생기지 않고, 오가는 현재의 경계를 생각하지 않으며,
등불이 꺼지듯 모든 수음(受陰)이 없어지는 것, 썩은 씨앗처럼 망상이 생기지 않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해 열반이라는 생각을 낸다.
대혜야, 견해가 무너지는 것[見壞]을 열반이라 하는 것이 아니다.
대혜야, 혹자는 어느 곳에 이르는 것을 해탈이라 하기도 하고,
바람이 그치듯 경계라는 생각이 없어지거나 혹은 깨달음과 깨닫는 대상이 있다는 견해가 무너지는 것을 해탈이라 하기도 하며,
혹은 상(常)이나 무상(無常)을 보고 해탈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혹자는 온갖 모습[相]을 보고는 고통을 초래하는 인(因)이라 생각하고,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는 이것이 자심(自心)의 현량(現量)임을 깨닫지 못하고서 모습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모습이 없음을 보면 깊이 즐거워하며 열반이라고 생각한다.
혹 어떤 사람은 안팎의 모든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깨달아 알고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허물어지지 않는 성품이 있다고 여겨 열반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아(我)ㆍ인(人)ㆍ중생(衆生)ㆍ수명(壽命) 등 일체법이 무너지는 것을 열반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외도가 악소지혜(惡燒智慧)로 자성(自性)과 장부[士夫] 둘 사이에 틈이 있어 장부가 나오는 곳이 있다고 보고 그것을 자성이라고 한다.
명초(冥初)와 비교되는 구나(求那)의 변화와 같다 하고는 구나를 곧 짓는 자[作者]라 여겨 열반이라는 생각을 한다.
혹은 복과 복 아닌 것이 다한 것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모든 번뇌가 다한 것이라 하기도 하며, 혹은 지혜라고 하기도 한다.
혹은 자재(自在)가 진실로 생사(生死)를 짓는 자라고 보고 이를 열반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번갈아 서로 생길 뿐 생사에는 다시 다른 인(因)이 없다고 하는데, 이와 같다면 곧 이것이 인에 계착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 어리석은 범부는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까닭에 열반이라고 생각한다.
혹 어떤 외도는 진제(眞諦)의 도(道)를 얻는 것이 열반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공덕과 공덕으로 일어난 것이 화합하여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며, 함께하기도 하고 함께하지 않기도 하는 것을 보고 열반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자성(自性)이 일으킨, 공작(孔雀)의 갖가지 색깔과 여러 가지 보배와 날카로운 가시 등의 성품을 보고 난 후 이를 열반이라고 생각한다.
대혜야, 혹 어떤 사람은 스물다섯 가지의 진실을 깨닫거나 혹은 왕이 나라를 수호하며 6덕론(德論)을 받아들이는 것을 열반이라고 생각하고,
혹은 시간[時]이 곧 짓는 자[作者]여서 시절(時節)과 세상을 만든다고 보고는 이와 같이 깨닫는 것을 열반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성품이라고도 하고 혹은 성품이 아니라고도 하며, 혹은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아는 것이라고도 하며, 혹은 깨달음과 열반에 차이가 있는 것을 보고 열반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갖가지 망상이 있어 외도들의 말은 이루어야 할 것을 이루지 못하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버리는 것이다.
대혜야, 이와 같은 모든 것은 다 두 극단에 떨어져 열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외도의 열반에 대한 망상 가운데에는 생김이건 없어짐이건 무엇도 없다.
대혜야, 낱낱의 외도들의 열반은 그들 스스로의 논리일 뿐, 지혜로 관찰하면 도무지 세울 것이 없다.
망상ㆍ심ㆍ의가 오가고 떠돌고 달리고 유동(流動)하는 저와 같은 자들은 어느 누구도 열반을 얻을 수 없다.
[부처님의 열반]
대혜야, 내가 말하는 열반이란 자심의 현량(現量)을 잘 깨닫는 것이며
[양(量)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현전에 보는 것≺現見≻이고, 둘째는 추측해서 아는 것≺比知≻이며, 셋째는 비유(譬喩)이고, 넷째는 과거의 훌륭한 분이 서로 전하는 것≺先勝相傳≻이다. 저 외도는 네 가지 양 모두 성취하지 못한다.]
바깥 경계의 성품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며,
4구(句)를 벗어나는 것이며, 여실한 경지를 보는 것이며,
자기 마음이 나타낸 망상의 경계인 두 극단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며,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여지는 것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모든 헤아림[度量]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않는 것이며,
진실에 어두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이러한 것을 버리고 나서 스스로 깨달은 성인의 법을 얻는 것이며,
두 가지 무아(無我)를 아는 것이며,
두 가지 번뇌를 여의는 것이며,
두 가지 장애를 깨끗이 없애는 것이며,
영원히 두 가지 죽음을 벗어나는 것이며,
가장 높은 지위인 여래지(如來地)조차 그림자 같고 꿈과 같은 줄 아는 것이며,
모든 깊은 삼매에 들어 심ㆍ의ㆍ의식을 벗어나는 것이니,
이를 열반이라고 한다.
대혜야, 너를 비롯한 나머지 보살마하살은 반드시 배우고 닦아서, 속히 모든 외도들의 열반에 대한 온갖 견해를 멀리 벗어나야 한다.”
이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외도의 열반에 대한 견해는
제각기 망상을 일으킨 것이며
이것은 심상(心想)에서 생긴 것이니
해탈의 방편이 없다.
어리석어 속박에 얽매인 자는
훌륭한 방편을 멀리하니
외도가 해탈이라고 생각하나
해탈은 끝내 생기지 않는다.
여러 지혜가 각각 취향[趣]을 달리하나
외도의 소견(所見)은 공통되어
거기에 모두 해탈 없으니
어리석은 망상이기 때문이다.
모든 어리석은 외도는
헛되이 짓고 지어지는 것을 보아
있다거나 없다는 견해를 논하니
그곳에는 모두 해탈이 없다.
어리석은 범부가 망상을 좋아하여
진실한 지혜를 듣지 않고
세 가지 괴로움의 근본을 말하나
진실만이 괴로움을 없애는 인(因)이다.
비유하면 거울에 비친 모습은
비록 나타나지만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망상이라는 마음의 거울로
어리석은 범부는 두 극단을 본다.
마음과 연(緣)을 알지 못하여
두 가지 망상이 일어나니
마음과 경계를 명료히 알면
망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은 갖가지이나
보고 보이는 대상 멀리 벗어난 것이며
사물은 나타나지만 나타남이 없으니
저 어리석은 범부의 망상과 같다.
3유(有)란 오직 망상뿐이어서
정의[義] 밖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온갖 것이 망상으로 나타나거늘
어리석은 범부는 알 수가 없다.
경(經)마다 망상을 이야기하나
결국 이름[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만일 언어의 명칭을 벗어난다면
또한 말할 것도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