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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애경 제7권
23. 팔총지품(八總持品)
[여덟 가지 다라니]
그때 대회 가운데 사자영(師子英)이란 보살이 앉아 있다가 총교왕(總敎王)보살에게 물었다.
“족성자여, 보살이 어떤 다라니를 체득해야만 모든 부처님께서 널리 설하시는 경전의 그 다함 없는 이치를 받아 지니어 중생들을 잘 교화하고 즐겁게 해 주며, 마치 어두운 곳에서 광명을 보는 것처럼 다 환하게 할 수 있습니까?”
총교왕보살은 사자영보살에게 대답하였다.
“보살이 이 여덟 가지 다라니를 체득해야만 중생들을 즐겁게 해 주고 그 다함 없는 지혜를 열어 보이고 통달케 할 수 있나니,
이른바 그 여덟 가지 다라니란,
첫째는 정광음(淨光音),
둘째는 무진법장(無盡法藏),
셋째는 무량퇴진(無量退進),
넷째는 해인의(海印意),
다섯째는 연화엄(蓮華嚴),
여섯째는 입무애인(入無礙印),
일곱째는 입분별변(入分別辯),
여덟째는 건립불장엄(建立佛莊嚴)입니다.
보살은 이 여덟 가지를 체득해야만 가르침을 널리 설하여 중생들을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때에 사자영보살은 다시 총교왕보살에게 물었다.
“족성자께서는 이 모든 것을 가엾이 여기시어 여덟 다라니에 대하여 그 요지를 거듭 풀이하고 널리 연설해 주지 않으시렵니까?
만약 여러 보살들이 이 다라니를 듣는다면 거기에서 얻은 변재(辯才)로 반드시 부지런히 배우리라고 생각합니다.”
총교왕보살은 대답하였다.
“족성자는 들으시오. 이제 그대를 위해 여덟 다라니에 대한 이치를 널리 해설하겠습니다.
[정광음(淨光音) 다라니]
이른바 정광음(淨光音) 다라니란,
만일 보살이 이 다라니에 머문다면 그 들어가는 문(門)이 거리낌 없고 매우 깨끗하여 긴요한 이치에 귀결함으로써 그 뜻이 또한 바로 서서 경전을 설할 때에 음성이 널리 퍼져 한 불국토에까지 두루 들리되, 둘, 셋, 넷, 다섯 내지 10, 20, 30, 40, 50의 모든 불국토와 혹은 백ㆍ천 불국토에까지 그 법을 설하는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한 불국토를 비롯한 10, 20, 30, 40, 50 내지 백천억 불국토에 그 설법하는 음성이 들린 뒤에는 다시 한량없고 그지없는 모든 불국토에까지 꿰뚫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즐겨하는 뜻에 따라 설법하는 음성을 무수하게 많은 불국토에까지 다 들리게 하려면 한량없는 그 모든 불국토에 다 들리게 할 수 있으며,
또 한 사자좌(師子座)에 앉아서 마음대로 시방의 모든 중생들을 위해 경법을 강설하되 20리 밖의 뭇 사람들을 듣게 할 수도 있고 혹은 30리, 혹은 1수미(須彌), 혹은 범천(梵天)에 이르도록 중생들의 뜻에 맞추어 다 설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한 사자좌에 앉아서 그 뜻을 세워 모든 중생들에게 경법을 강설함에 있어 그 중생들의 마음을 다 즐겁게 하여 깨우침은 물론
몸은 비록 하나의 사자좌에 앉아 있을지라도 시방 부처님들의 그 몸을 나타내고 설법하시는 것을 다 들을 수 있고
또 들은 뒤에는 다라니의 힘으로 모두 기억하여 결코 잊어버리지 않으니,
이러한 법으로 그 모든 이치를 이해하고 통달하기 때문에 그의 설법은 누구나 다 받아 들을 수 있어 아무도 그를 막거나 끊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한 문자(文字)의 음향으로 모든 문자를 다 연설하게 되는 것이니,
다시 말하자면 모든 음향과 인연의 구절에 널리 들어감은 그 문자를 해달하기 때문이며,
한량없는 문(門)에 들어감은 그 모든 법의 오는 모양도 없고 머무는 처소도 없음을 연설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의 자연스러움은 반복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의 도달하는 처소가 없음은 그 법이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의 근본이 없고 어떤 처소도 없으니 생겨남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그지없으니 이루어지는 곳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이 다함 없으니 머무는 곳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나지[生] 않으니 지어감[行]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일어나지 않으니 짓는 것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존재하지 않으니 인연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어지럽지 않으니 차별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사라지지 않으니 본래 나지[生]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지어감이 없으니 소원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희롱이 없으니 생각에 응하거나 응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말이 없으니 아주 지어감이 없는 것에 들어가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가르침이 없으니 말을 말미암아 실수가 있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성냄이 없으니 원한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상(想)이 없으니 아무런 집착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염(念)이 없으니 조금도 허망함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의지함이 없으니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타이름이 없으니 허공처럼 평등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언사(言辭)가 없으니 아무런 생각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구경(究竟)이 없으니 사주(師主)가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나는[生] 것이 없으니 어떤 가르침도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다 청정하니 어디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나[我]가 아니니 그 나[我]는 자연스럽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사람이란 생각이 없으니 매우 청정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수(壽)라는 생각이 없으니 오래도록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요,
모든 법은 명(命)이라는 생각이 없으니, 진리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이 진실로 공하니 그 안[內]이 고요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상(相)이 없으니 그 본제(本際)란 제(際)가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원(願)이 없으니 어떤 느낌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지어감이 없으니 함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함이 없으니 장구(章句)를 말미암아 일어나는 행(行)을 초월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견고하지 않으니 의지하는 곳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집착이 없으니 습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자연스러우니 그 몸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조작이 없으니 하는 일이 다 청정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이 업을 짓지 않음은 느끼는 것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과보가 없으니 합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합함이 없으니 무너지는 것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버림이 없으니 취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눈 깜박임이 없으니 붙잡을 수 없기 때문이요,
모든 법은 얻음이 없으니 가리키는 것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감촉이 없으니 조작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치솟는 번뇌[漏]가 없으니 흐르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일정한 존재가 없으니 그 뜻의 성취가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이 청정하니 치우침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이 얽매이지 않음은 이것저것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색(色)이 없으니 4대(大)가 다 덧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느낌[受]이 없으니 부딪힘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생각[想]이 없으니 뭇 기억[念]을 초월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결합[行]이 없으니 온갖 욕심을 여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식별[識]이 없으니 그리워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계층[界]이 없으니 허공처럼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버림[捨]이 없으니 모든 계층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경계[境]가 없으니 그 유래가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탐욕이 없으니 아무런 생각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형상이 없으니 아무런 처소가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형체가 없으니 오르내리는 곳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혼탁하지 않으니 온갖 시끄러움을 제거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기억이 없으니 고집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생각[想]이 없으니 두 가지가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언덕[崖]이 없으니 그 경계와 자취를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의지함이 없으니 그 머문 곳을 여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덧없으니 연(緣)이 다투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이름이 없으니 그 소재가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번잡하지 않으니 각각 그 행(行)을 따르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머물지 않으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문드러지지 않으니 불에 타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나쁨이 없으니 온갖 악을 여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물과 같으니 온갖 더러움을 씻어 버리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재앙이 없으니 매우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매우 청정하니 이루 셀 수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헤아림[計]이 없으니 집착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구함이 없으니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흔들림이 없으니 진동시킬 수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함이 없으니 허공처럼 평등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허무하니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근거가 없으니 그 소행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나타냄이 없으니 환히 비춤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비춤이 없으니 온갖 광명을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견줄 데 없으니 그릇됨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치우침이 없으니 당황하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어두움이 없으니 보는 것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밝음이 없으니 편을 가르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죄 없으니 허물을 여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찬탄의 노래이니 착한 업을 짓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허무에 들어가니 속임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나아감이 없으니 그 서는 처소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견해가 없으니 유(類)가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맛보는 일이 없으니 맛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유약하지 않으니 세밀하거나 미끈거림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식별[識]이 없으니 법을 여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인연이 없으니 마음과 뜻과 식별을 여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사유(思惟)가 없으니 그 도가 평등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본래 청정하니 온갖 느낌을 없앰에 따라 다시는 그 느낌이 자라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족성자여, 보살이 정광음(淨光音) 다라니를 체득한다면 모든 인연과 문자와 문장과 구절의 이치를 다 통달함으로써 한 겁(劫) 또는 다시 한 겁을 지나도록 경전을 널리 설하더라도 그 모든 인연과 문자와 구절을 버리지 않고서 때를 따라 응하는 대로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요약하여 말하자면 모든 글에는 각각 그에 따른 글자가 있어서 그 낱낱 글로써 중생들에게 설법하되 그 문자에 다함이 없으며,
법의 눈[法眼]에 잘 머물러 이치를 연설함으로써 그 말씨가 훌륭하게 됨은 물론이요,
보살이 이 다라니에 머묾으로써 청정한 위의를 갖추고 수시로 변재(辯才)가 깨끗하여 그 마음까지 빛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인자한 마음을 닦음에 따라 보시 또한 청정하여,
법 보시나 의복ㆍ음식의 보시에 함께 인색하지 않고,
계율의 행이 청정하여 결함이 없고,
인욕이 청정하여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없고,
정진이 청정하여 안온한 업을 짓고,
선정이 청정하여 고요하며 어두움이 없고,
지혜가 청정하여 온갖 어리석음을 벗어남으로써 그 지혜의 널리 비춤에 따라 업이 또한 청정하여 어기거나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 눈이 청정하여 세 개의 더러움 없는 눈을 얻고,
그 귀가 청정하여 하늘 귀의 총명을 얻으므로 모든 여래께서 강설하시는 업을 듣고,
그 코가 청정하여 여래 계법(戒法)의 향내를 맡고,
그 혀가 청정하여 마음에 드는 맛을 떠나 도법(道法)의 맛을 구하고,
그 몸이 청정하여 어느 곳에 태어나더라도 모태의 더러움을 받지 않고,
그 마음이 청정하여 착한 방편으로 때를 따라 모든 법에 널리 들어갑니다.
그 모습이 청정하여 상호(相好)가 장엄하고,
듣는 것이 청정하여 귀에 들어오는 음성이 다 즐거운 것이나 어지러운 메아리가 없고,
그 냄새가 청정하여 냄새마다 계율과 보시의 향내가 풍기고,
그 맛이 청정하여 맛마다 다시 새로운 맛을 이룩합니다.
몸매가 청정하여 위대한 성인의 모습을 갖추는 한편 손ㆍ다리의 부드러움이 마치 어린 동자 같고,
그 법이 청정하여 법의 광명을 체득하고,
그 뜻이 청정하여 경전의 법을 들은 대로 기억하여 잊지 않고,
그 지조가 청정하여 마군이 다니는 길을 벗어나고
걸음걸이가 청정하여 깊고도 미묘한 끝없는 경전에 널리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보살이 이 다라니에 머물게 된다면 뜻대로 널리 훈계하고 가르치되 아무리 많은 불국토라도 다 광명을 비출 수 있고,
또 그러한 광명으로 모든 시방 부처님들의 연설하시는 가르침을 연출할 수 있나니,
이는 다 이 다라니를 말미암아 그 언사(言辭) 없는 빼어난 경지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족성자여, 이 정광음 다라니가 연출하는 것을 일일이 말로 설명하려면 한량이 없고 그 갈래를 분별하려면 불가사의하므로 말로써 한계를 결정할 수 없고 그 방면이 넓고도 넓어 가없고 걸림없는 경지에 들어갈 것입니다.”
[무진법장(無盡法藏) 다라니]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족성자여, 무진법장(無盡法藏) 다라니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색(色)은 다함이 없으니 색이 덧없기 때문에 다함 없이[無盡] 색은 덧없다고 말한다.
또 색은 괴로운 것이므로 괴롭다고 말하고,
색은 나 아닌 것이므로 무아라고 말하고,
색은 고요한 것이므로 고요하다고 말하고,
색은 황홀한 것이므로 황홀하다고 말하며,
또 색은 물거품 같은 것이므로 물거품 같다고 말한다.
색은 눈 흘림 같은 것이므로 눈 흘림 같다고 말하고,
색은 아지랑이 같은 것이므로 아지랑이 같다고 말하고,
색은 물 속의 달과 같은 것이므로 물 속의 달 같다고 말하며,
또 색은 꿈과 같으므로 꿈이라고 말하고,
색은 호응하는 메아리와 같으므로 메아리라고 말하고,
색은 그림자와 같으므로 그림자라고 말하고,
색은 거울에 비친 형상 같으므로 거울에 비친 형상이라 말하고,
색은 존재[有]가 없으므로 존재 없다고 말한다.
색은 배움이 없으므로 배움 없다고 말하고,
색은 구경(究竟)이 없으므로 구경 없다고 말하고,
색은 공한 것이므로 공함을 말하고,
색은 상(相)이 없는 것이므로 상 없음을 말하고,
색은 원(願)이 없는 것이므로 원 없음을 말하고,
색은 지어 가는 것이 없으므로 지어 감이 없다고 말하고,
색은 나는[生] 것이 없으므로 나는 것이 없다고 말하고,
색은 일어나는 것이 없으므로 일어남이 없다고 말하고,
색은 본래가 자연스러우므로 본래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색은 본래가 없으므로 본래 없다고 말하고,
색은 과거가 자연스러우므로 과거의 자연스러움을 말하고,
색은 미래가 자연스러우므로 미래의 자연스러움을 말하고,
색은 현재가 자연스러우므로 현재의 자연스러움을 말하고,
색은 담박(澹泊)한 것이므로 담박하다고 말하고,
색은 고요한 것이므로 고요하다고 말한다.
색은 유희(遊戱)가 없는 것이므로 유희가 없다고 말하고,
색은 불가사의한 것이므로 불가사의하다고 말하고,
색은 모습이 없으므로 모습 없다고 말하고,
색은 몸이 없으므로 몸이 없다고 말하고,
색은 사람[人]이라는 생각이 없으므로 사람의 생각 없음을 말하고,
색은 수(壽)라는 생각이 없으므로 수가 없다고 말하고,
색은 명(命)이란 생각이 없는 것이므로 명이 없다고 말하고,
색은 양육(養育)이 없는 것이므로 양육이 없다고 말하고,
색은 어리석은 것이므로 어리석다고 말한다.
색은 인자하지 않은 것이므로 인자하지 않다고 말하고,
색은 신(神)이 없는 것이므로 신이 없다고 말하고,
색은 장작더미 같은 것이므로 장작더미 같다고 말하고,
색은 초목ㆍ울타리ㆍ담이나 기와ㆍ돌의 종류와 같은 것이므로 초목ㆍ울타리ㆍ담ㆍ기와ㆍ돌의 종류라 말하며,
색은 허황한 모양과 같으므로 허황한 모양이라 말하고,
색은 바로 4대(大)로 된 것이므로 4대라 말하고, 색은 소리가 없으므로 소리 없다고 말한다.
색은 가르침이 없으므로 가르침 없다고 말하고,
색은 얻을 수 없으므로 얻을 수 없다고 말하며,
또 색은 기억이 청정하므로 기억이 청정하다고 말하고,
색은 인연에서 결과를 일으키므로 인연의 결과를 일으킨다고 말하며,
또 색은 단견(斷見)이 없으므로 단견 없다고 말하고,
색은 상견(常見)도 아니므로 상견이 아니라고 말하고,
색은 집과 같으므로 집과 같다고 말하고,
색은 고통이 없으므로 고통 없다고 말한다.
색은 죄복을 따라 생기므로 죄복을 말하고,
색은 법계의 괴로움이므로 법계를 말하고,
색은 법계에 머무르므로 법계에 머문다 말하고,
색은 법계에 본제(本際)하여 움직임이 없으므로 본제라고 말하고,
색은 나 없으므로 나 없다고 말하고,
색은 받음이 없으므로 받음 없다고 말하고,
색은 실음[載]이 없으므로 실음 없음을 말한다.
색은 기억[念]이 없으므로 기억 없다고 말하고,
색은 나약하지 않으므로 겁이 없다고 말하고,
색은 한량이 없으므로 한량없다고 말하고,
색은 가없으므로 가없다고 말한다.
또 색은 그 도(道)의 근본이 청정하므로 도의 청정함을 말하고,
색은 허공처럼 평등하므로 허공의 평등함을 말하고, 색
은 열반처럼 본래가 청정하므로 열반의 청정함을 말한다.
요약하여 말하자면 5음(陰)과 여섯 가지 쇠함[六衰]과 같은 모든 법이나 모든 이름, 그 밖의 몸이나 자취, 경로나 편(篇)ㆍ장(章)과 식별의 몸까지도 다 한 가지 음향(音響)이 비치는 곳에 들어가 다함이 없는 지혜를 말하며,
네 가지 원소의 보배 갈무리 상자[寶藏篋]를 헤아려 그 말하는 지혜 또한 다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보배 갈무리의 상자인 성인의 법 경전도 다시 다함없는 지혜에 들어가 지혜를 널리 설하나니,
이것을 무진법장의 다라니라 한다.
모든 설법과 법은 널리 펴는 데에 있어 한 겁(劫) 또는 다시 한 겁을 지나는 동안 이 공덕의 무진법장은 아무리 찬탄하여도 다할 수 없느니라.”
[무량퇴진(無量退進) 다라니]
부처님께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것이 무량퇴진(無量退進) 다라니인가?
저 12연기의 회선(廻旋)이 단(斷)과 상(常)을 되풀이하여 끝이 없이 돌아서 그 흐름에 되돌아 오는 것이니,
말하자면 12연기는 무명의 연(緣)을 따라 저절로 결합[行]을 이루고,
결합을 따라 식별[識]을 이루고,
식별을 따라 이름과 색[名色]을 이루고,
이름과 명색을 따라 6입(入)을 이루고,
6입을 따라 부딪침[觸]을 이루고,
부딪침을 따라 느낌[受]을 이루고,
느낌을 따라 애욕[愛]을 이루고,
애욕을 따라 존재[有]를 이루고,
존재를 따라 나게[生] 되고,
나게 됨을 따라 늙고 병들어 죽게[老病死] 되고,
죽음을 따라 슬픔ㆍ울음과 근심ㆍ걱정을 이루고,
그 슬픔과 근심을 따라 5온의 큰 고뇌와 환란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명과 결합과 이름과 색과 여섯 감관ㆍ애욕ㆍ느낌과 나고 늙고 병들어 죽음과 슬픔과 울음과 근심을 제거해야만 그 5온의 큰 고뇌와 환란을 아주 없앨 수 있나니,
그러한 한량없는 문(門)에 들어가 끝없는 이치를 널리 설하므로
이것을 무량퇴진 다라니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받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기 때문에 회선(廻旋)이라 하지만 이 다라니는 받음도 없고 버림도 없음을 이름이요,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기 때문에 회선이라 하지만 이 다라니는 일어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음을 이름이요,
세속의 번거로움에 얽매여 싸움을 일으키므로 회선이라 하지만 다라니는 본래의 청정에 돌아가 방일하지 않음을 이른다.
모든 법에 지어감이 있어서 응하고 응하지 않음과 기억하고 기억하지 않음을 느끼기 때문에 회선이라 하지만 이 다라니는 생각[想]과 기억이 없어서 응하거나 응하지 않음이 없음을 이름이요,
모든 견해를 인연하기 때문에 회선이라 하지만 이 다라니는 그 견해의 인연을 끊은 것을 이름이요,
이름과 색 때문에 회선이라 하지만 이 다라니는 이름도 없고 색도 없음을 이른다.
함이 있기도 하고 함이 없기도 하기 때문에 회선이라 하지만 이 다라니는 3세(世)에 다 청정함을 이름이요,
안도 있고 바깥도 있기 때문에 회선이라 하지만 이 다라니는 그러한 의식에 머물지 않음을 이름이요,
죄와 복의 보응 때문에 회선이라 하지만 이 다라니는 죄와 복의 보응조차 없음을 이름이요,
선과 악의 지어감이 있기 때문에 회선이라 하지만 이 다라니는 애당초 지어감이 없어 선악에 처하지 않음을 이른다.
누(漏)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기 때문에 회선이라 하지만 이 다라니는 그러한 두 가지 일이 없음을 이른다.
재앙과 번뇌에 휩쓸리기 때문에 회선이라 하지만 이 다라니는 본래 청정함과 자연스러움을 이름이요,
나와 나 아닌 것을 계교하기 때문에 회선이라 하지만 이 다라니는 그 즈음이 다 청정함을 이름이요,
생사와 열반 때문에 회선이라 하지만 이 다라니는 모든 법에 있어서 열반의 그 근원이 고요함을 이른다.
족성자여, 이 무량진퇴 다라니를 말하자면 끝이 없나니, 그러므로 보살이 이 무량진퇴 다라니에 머문다면 생사 없는 법을 통달하여 무수한 백천 겁에 걸쳐 경전을 강설하더라도 다할 수 없으리라.
다라니의 지혜가 이같이 미묘하므로 이 무량진퇴 다라니의 지혜에 들어가 널리 펼친다면 곧 청정한 도문(道門)을 깨달아 광명을 비추어서 모든 어두움을 다 환히 밝힌 것이다.”
[해인의(海印意) 다라니]
부처님께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해인의(海印意) 다라니란 어떤 것인가?
사방 세계 안에 있는 모든 형색(形色)ㆍ상모(像貌)의 산곡(山谷)ㆍ수목ㆍ양초의 종류와 해ㆍ달ㆍ구슬ㆍ번개의 광명과 그 밖의 도시ㆍ성읍을 비롯한 모든 가옥과 공원ㆍ누각ㆍ욕지(浴池)ㆍ원천(源泉) 등의 생활에 필요한 처소와 그 형태의 좋고 더럽고 선하고 악한 상ㆍ중ㆍ하의 모든 물질이 다 함께 큰 바다에 의지하되 차별이 없으니 이를 큰 바다라 이름한다.
이처럼, 보살이 만약 이 해인의(海印意) 다라니에 머물러 모든 중생들의 몸을 평등히 인(印)하고 또 문자(文字)의 가르침을 평등히 인(印)하여 그 평등한 마음의 인(印)으로써 중생을 인(印)한다면 시방 부처님들께서 연설하시는 끝없는 큰 법의 경전이 다 그 보살의 입으로부터 펼쳐 나오게 되며, 부처님의 인(印)에 따라 인(印)을 보므로 설법하는 자도 기뻐서 뉘우침이 없으리라.
그리고 모든 법의 인(印)을 강설하는 지혜라면 이는 다 여래의 인(印)으로서 뭇 진리를 분별함이니,
이른바 그 무(無)의 인(印)이란 아무런 행(行)이 없어서 마음이 저절로 고요함이요,
그 이(離)의 인(印)이란 욕심 여의는 법의 청정한 행을 얻음이요,
그 도(度)의 인(印)이란 끝까지 널리 설하여 미치지 않음이 없는 것이요,
그 호(號)의 인(印)이란 모든 명호와 물질을 각각 다 선창(宣暢)함이요,
그 낙(樂)의 인(印)이란 탐욕과 방일과 은애(恩愛)를 다 제거하는 것이다.
그 십(十)의 인(印)이란 열 가지 힘을 구족함이요,
그 피공(被恐)의 인(印)이란 모든 의식[意]을 깨끗이 제거함이요,
그 소택(燒宅)의 인(印)이란 소열(燒熱)을 다 버림이요,
그 육(六)의 인(引)이란 여섯 신통을 성취함이요,
그 좌피(左披)의 인(引)이란 좌도(左道)를 버림이요,
그 심(審)의 인(引)이란 진리를 선설함이요,
그 여(如)의 인(引)이란 행하는 바가 진실한 것이요,
그 치(哆)의 인(引)이란 모든 것의 근본을 깨끗이 제거함이요,
그 가(迦)의 인(引)이란 업을 짓지 않는 것이다.
그 사(娑)의 인(引)이란 지극한 정성을 널리 펼침이니 그 세력을 나타내기 때문이요,
그 생(生)의 인(引)이란 나고 늙고 죽음을 제도하기 때문이요,
그 지(志)의 인(引)이란 뜻이 청정하기 때문이요,
그 계(界)의 인(引)이란 법계를 헐지 않기 때문이요,
그 적(寂)의 인(引)이란 담박(澹泊)을 구족하기 때문이요,
그 허(虛)의 인(引)이란 허무하고도 공적하여 다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요,
그 진(盡)의 인(引)이란 모든 생각을 다 소화함으로써 지혜를 일으킴이 없기 때문이요,
그 입(立)의 인(引)이란 깨달음의 뜻이 진리에 머물기 때문이요,
그 지(知)의 인(引)이란 모든 중생들의 종류를 분별하여 알기 때문이다.
그 보(普)의 인(引)이란 모든 흥쇠(興衰)를 다 널리 펼치는 것이요,
그 유(有)의 인(引)이란 모든 있고 없음을 깨달아 분별함이요,
그 탐(貪)의 인(引)이란 탐심과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제거함이요,
그 기(己)의 인(引)이란 자기 몸을 통달하여 바른 깨달음을 이룩함이요,
그 자(自)의 인(引)이란 몸소 스스로 해탈하기 때문이요,
그 단(旦)의 인(引)이란 모든 치우치는 모양을 버림이요,
그 수(數)의 인(引)이란 모든 근원을 소멸하는 것이다.
그 처(處)의 인(引)이란 모든 처소를 사실대로 다 앎이요,
그 무(無)의 인(引)이란 이것저것이 없음이요,
그 과(果)의 인(引)이란 과증(果證)을 체득함이요,
그 음(陰)의 인(引)이란 쌓임과 덮개를 다 제거함이요,
그 질(疾)의 인(引)이란 모든 그릇된 질병을 여의기 때문이요,
그 시(施)의 인(引)이란 보시ㆍ지계의 향기를 쐬는 것이요,
그 견(堅)의 인(引)이란 굳고 억센 성품을 끊을 것이요,
그 구(究)의 인(引)이란 문자를 끝까지 살펴 그 근원을 터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족성자여, 보살이 설법할 때 갖가지 문자를 연출하지만 그 모든 문자의 인(引)을 다 아나니,
이것을 곧 해인의입(海印意入) 다라니문이라 하는 것이다.”
[연화엄(蓮華嚴) 다라니]
부처님께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연화엄(蓮華嚴) 다라니란 어떤 것인가?
보살 대사가 대중의 모임에 들어가거나 어떤 머무는 처소에서 경전을 널리 설할 때에 거기에 곧 그 빛깔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난다.
또 보살이 그 연꽃에 앉으면 허공에서 연꽃의 비가 내리는 한편, 그 연꽃에서 각각 여러 가지 음성이 펼쳐지는데 경법(經法)의 깊은 이치만을 강설하고 잡된 글귀나 꾸미는 말씨가 없으며, 바른 경전 중에도 가장 중요한 것을 인용하여 그 이치의 갈래를 분별하니, 이른바 12부(部) 경전이다.
첫째는 문경(聞經),
둘째는 득경(得經),
셋째는 청경(聽經),
넷째는 분별경(分別經),
다섯째는 현경(現經),
여섯째는 응시경(應時經),
일곱째는 생경(生經),
여덟째는 방등경(方等經),
아홉째는 미증유경(未曾有經),
열째는 비유경(譬喩經),
열한째는 주해경(注解經),
열 두째는 행경(行經)이다.
그리고 그 연설하는 법을 듣는 자는 곧 온갖 괴로움을 다 벗어나며, 보살은 그와 같이 자연스레 정진하되 항상 선정을 버리지 않으니, 이때 연꽃이 연출하는 경전의 힘을 말미암아 뭇 괴로움을 끊고 불사를 행하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보살은 또 모든 털구멍에서 빛을 내비치고 그 빛은 다 연꽃으로 변하며, 연꽃 위에는 각각 보살이 변화로 나타나서 시방의 끝없고 셀 수 없는 불토로 나아가서 모든 부처님을 받들게 되니,
족성자여, 이것을 바로 연화엄입 다라니의 문이라 한다.”
[입무애(入無礙) 다라니]
부처님께서는 다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것이 입무애(入無礙) 다라니문인가?
한 가지 언사(言辭)라도 버리지 않으며, 둘, 셋, 넷 내지 백천 세의 태어난 곳을 항상 잊지 않고,
혹 억백천의 갖가지 말을 다 기억하여 중생을 위해 널리 설법하되 대대로 잊지 않으며,
그 모든 감각 기관이 온화하고 얼굴빛이 빼어난 것이 대중보다 뛰어나 뭇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아무런 고뇌와 혼란이 없다.
그 말씀이 한량없는 항하사의 모든 불찰에 들리기도 하고, 미세한 티끌 수와 같은 모든 불국토에 두루 들리기도 하는데, 연설하는 법문이 때와 방편을 따라서는 한꺼번에 모든 불국토에 가득한 티끌 수와 같은 세계에 두루 퍼지고, 혹은 둘, 셋, 넷, 다섯 내지 백천억의 한량없는 설법이 다 그 음성에 어울려 집착도 없고 머묾도 없이 부드럽고 온화하게 뭇 사람의 마음에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말씨가 수시로 그 미묘한 이치를 나타내되 절차를 잃지 않으므로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입무애 다라니문이다.”
[입분별(入分別) 다라니]
부처님께서는 다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것이 입분별(入分別) 다라니문인가?
그 이치를 요달하여 선설하는 근본 지혜가 다함이 없고,
법을 분별하여 선설하는 참된 지혜도 다함이 없고,
수시로 분별하여 선설하는 밝은 지혜도 다함이 없고,
변재로 분별하여 선설하는 바른 지혜도 끝이 없는 것이다.
보살이 이러한 지혜를 얻는다면 그 동방의 모든 중생들이 한 곳에 다 모여 와서 제각기 다른 말씨와 다른 음성으로 자신들의 온갖 생각을 말하며 질문하여도 보살이 그 이치를 환히 꿰뚫어 다 대답한다.
이와 같이 남방ㆍ서방ㆍ북방과 네 간방ㆍ상하로부터 모든 보살이 와서 각각 그 이치를 묻더라도 그들 음성의 청탁과 말씨의 종류에 따라 다 대답하는 한편 또 그들을 깨우쳐 각각 본심대로 도에 들어가게 하고,
나아가서는 그 언어와 음성을 각각 듣고서도 뒤바뀌거나 어지러운 생각을 일으키지 않을 뿐 아니라 곧 한 가지 음성으로 무수한 음성에 들기도 하고 무수한 음성으로 한 가지 음성에 들기도 하니,
이것이 이른바 분별장엄 다라니이다.”
[건립불장엄(建立佛莊嚴) 다라니]
부처님께서는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건립불장엄(建立佛莊嚴) 다라니문이란 어떤 것인가?
만약 어떤 보살이 이 다라니를 얻어서 큰 법좌(法座)를 베풀어 대중 가운데 거처하되 항상 자신의 이마 위를 중심으로 허공에 휘장을 드리고서 화신한 부처님[化佛]을 그 위에 모시고 부처님 몸에 자마금(紫磨金) 빛깔의 서른두 가지 상호(相好)를 장엄한 뒤에 스스로 그 덕(德)을 받들어 화신한 부처님의 오른손 있는 곳에 가까이 면 그 부처님께서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신다.
그러면 즉시 보살의 몸은 상호가 장엄한 부처님의 형상으로 변하고 입은 부처님의 입처럼 언사(言辭)가 뛰어나고 뜻도 부처님의 뜻에 따르게 되며,
이러한 법을 성취함으로써 곧 모든 중생들의 심념(心念)에 들어가 그 본행(本行)에 따라 설법하되, 하루, 이틀에서 내지 닷새, 보름, 한 달, 반 해, 한 해, 5백천 세의 그 끝없고 헤아릴 수 없는 세월에 걸쳐 자유롭게 설법하게 된다.
그리고 설법을 할 때에도 밥 먹는 때를 잊어버리고 오직 중생을 위해 한없이 경전을 강설하되 몸과 마음을 게을리 하지 않나니, 이는 다 장엄한 화신불의 감화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 보살은 또 네 가지 큰 지혜를 성취하게 되리니, 이른바 네 가지란,
첫째는 모든 중생들의 뜻을 아는 지혜요,
둘째는 문장과 구절을 분별하여 두루 끝까지 널리 펼치는 지혜요,
셋째는 끝없는 이치를 선설하는 성스러운 지혜요,
넷째는 그 사람들의 본래 배운 승(乘)을 따라 그들의 뜻을 알고서 설법하는 지혜가 그것이다.
족성자여, 이 건립불장엄 다라니문에 들어가는 자가 선설하는 그 이치는 이루 일컬을 수 없나니, 이 다라니야말로 끝이 없어 부처님의 경계에 두루 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