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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3.15.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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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千鏡子)의 작품세계[1980 ~ ] Ⅱ- Chun Kyung Ja
천경자 화백의 발자취를 찾아서
나는 우리 고흥이 낳은 대표적인 예술가 천경자 화백이 어느 마을에서 태어나고 어떻게 고향에서 살았는지 궁금했다. 이미 오래전인 일제강점기 전후의 사건들을 쫓아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우리들은 우리의 긍지와 자랑이 될만한 가치를 지닌 한 여인의 작품을 오직 돈으로만 계산할 뿐,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간과하고 있다. 천경자 화백의 작품속에 숨겨있는 한 여인의 한과 삶을 통해 우리 고향의 보물을 다시 되찾고 싶었다.
점암 성주동에서 태어나고 서문밖 동촌에서 성장하다
천경자 화백. 우리 나이로 현재 80세다. 미국 뉴욕의 큰딸 이혜선(58)씨 자택에서 심한 치매와 싸우고 있지만, 한국 화단의 큰 별로 그리고 여류수필가로 우리 고흥의 자랑이자, 대표적인 예술가다. 그러나 그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한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고통과 한 인간으로서 앓아야 했던 고민은 주옥같은 작품으로 잉태되었을 뿐. 고통 없이 이루어진 성공(成功)과 명작(名作)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그런데 고향을 너무도 사랑했으면서 그토록 멀리 두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고흥인 천경자를 저 멀리 머물게 만들었던 것일까. 그의 과거 속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었는지 자못 궁금했다.
한 여성의 삶을 뒤쫓아 가는 출발점은 그가 태어나 태를 묻는 곳이었지만, 고향사람들은 아무도 이를 알지 못했다. 그의 그림 속에는 그가 사랑했던 이들과 추억들이 새겨져 있다. 한 슬픈 가족사가 있고 고향의 추억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그러나 고향 땅 그 어느 곳에도 천경자 화백의 형체 없는 숨결과 발자취만 남겨져 있을 뿐, 작품 한 점 남아 있지 않다. 그가 다시 건강을 되찾아 고흥사람 천경자로 다시 되돌아오길 소망하며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외가가 있던 팔영산 아래 성주동
천경자 화백은 1923년 10월 15일 전라남도 고흥군 점암면 성기리 성주마을 외가에서 태어났다. 호적에 1년 늦게 실려 1924년 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천경자의 원래 본명은 '옥자'였다. '경자'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 창씨 개명한 센다 교오꼬(千田鏡子)에서 비롯되었다.
아버지가 성씨 천(千) 아래에 밭 전(田)자 하나 붙였는데, 경자(鏡子)라는 이름은 센티멘털했던 소녀시절 취미로 지어 붙인 이름이다. 호적상 본적은 고흥읍 호형리로 되어 있다.
그의 아버지 천성욱(53년 사망)은 순천 낙안읍 태생으로 부친이 큰 유기상점을 하다 망했고 소년시절 고아가 되었지만 광주농업학교(현 광주농고)를 졸업하여 공무원이 되었다. 그에게는 남동생(천경자의 삼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게으르고 시간관념이 없어서 각종 시험에 낙방하고 읍내에서 대서소에 다니다가 결혼후 나로도에 이주하여 살았다.
그 삼촌은 물론, 사촌들까지 성공한 천경자를 자주 찾아와 손을 내밀어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고모가 세분 있었으나, 어려서 모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흥군청 수도작(농지관리) 관리로 고흥에 정착한 천성욱은 점암면 성주동 박헌우의 장녀 박옥자와 결혼하여 장녀 천경자 등 1남 2녀를 낳았다. 성주동 친정에서 천경자를 낳고 어머니는 몸조리가 끝난 후, 고흥읍 서문리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천성욱이 휴직하고 친구와 양말공장을 하다 망하게 되어 다시 젖도 떼지 않은 갓난아기 천경자를 안고 성주동으로 들어와 친정살이를 해야했다. 이때 어머니의 젖은 종양으로 분유를 먹다가 성주동에 와서 그의 외조모가 끝시누이, 즉 외고모 할머니에게 '우는 새끼 젖 한 모금 빨려주소' 사정해서 젖을 얻어먹기도 했다. 첫돌이 되자, 아장아장 걸어 젖 먹여 준 외고모 할머니에게 돌떡을 직접 들고 갔다고 회고하고 있다.
▲고흥읍으로 이사온 외가가 있던 고흥경찰서 주차장
외조부 박헌우의 외손녀 사랑은 끝이 없었다. 외조부는 어린 천경자를 '짜야'라고 불렀다. 어린 시절 소녀 천경자는 주로 외조부의 무릎에서 재롱을 떨며 성장했다. 외손녀를 끔찍이 아꼈던 그는 홑바지 속에 그녀를 넣고 마실을 다녔고 잠을 재우기도 했다.
그가 삼국지, 수호지를 읽어주다가 슬픈 대목이 나오면 무릎을 베고 있던 꼬맹이는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또 천경자에게 직접 천자문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박헌우는 밀양 박씨로 선조들은 절충장군과 정3품인 통정대부를 지냈다고 한다. 그는 한일합방 전 혼란한 시기에 의관(議官), 참봉(參奉) 벼슬을 산 것으로 추정된다. 그 시대에는 돈만 있으면 이런 벼슬정도는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만큼 재산이 많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천경자의 외조부 박헌우는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재산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풍류를 좋아했고 한학에도 밝아 천경자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러나 첫 부인이 사망하고 천경자의 외조모와 재혼를 했다.
그 후 그의 아버지 박용역은 아들이 너무 방탕한 생활만 일삼자, 믿을 수 없어 아들 박헌우를 제치고 결국 박헌우의 첫부인에게서 태어난 장손에게 남은 재산을 물려주었다. 마지막에는 절대 아들 박헌우에게 재산을 돌려주지 말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그리고 박용역이 사망하자, 그 당시 풍습대로 삼년상을 치러야 했다. 박헌우는 삼년상이 끝나자마자, 아들에게 재산을 돌려줄 것을 강요했다. 조부의 유언을 지키려던 아들은 거절하며 버티다가 아버지 박헌우의 폭력으로 귀까지 멀게 되었다.
폭력에 견디지 못한 아들은 결국 조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넘겨주고 말았다. 단지 분가해서 살았던 집 한 채만 남았을 뿐이었다. 그 후 박헌우의 아들은 후유증으로 정신이상증세까지 보이다 소록도에서 쓸쓸하게 객사했다.
이렇게 해서 박헌우에게 조상의 재산을 돌려주게 된 아들 자손들은 박헌우에게서 다시는 재산을 물려받지 못했고 오히려 외면당하며 살아야 했다. 대대로 가난을 면치 못했고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들 가족과 천경자와의 관계도 껄끄럽게 지내게 되었다.
이런 불편했던 관계에는 그 당시 재산분쟁에서 비롯된 외조부 박헌우와 천경자의 외조모 영향이 작용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외면당했던 장손들이 박씨 문중의 대를 이어가며 고향 성주동에서 천경자 외조부의 제사와 묘지를 관리하고 있다.
박헌우는 재혼 후에도 바람기를 주체할 수 없었다. 승주 송광사에 유람 가서 절간 부엌에서 일하던 어느 여인과 관계를 맺고 돌아왔다. 그 여자는 임신이 되어 출산이 가까워지자, 점암 성주동으로 찾아왔다. 어쩔 수 없이 집안으로 들여 아들을 낳았지만,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 아들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이름도 천한 '똥수'라고 지어 집안의 막일을 시키며 부려먹었다. 나중에 결혼 후 과역으로 분가하여 농사와 장사를 하며 오히려 나중에는 천경자 가족에게 도움까지 주게 될 정도였다. 천경자는 그 외숙을 '다래기 박샌'이라고 불렀다.
그 '다래기 박샌'의 큰아들 복남은 순천농업학교를 나와 보성군청, 광양군청 등에서 근무했고 작은 아들 복주는 훗날 천경자와의 도움으로 80년 광주일보로 통합되기 전의 전남일보 편집부국장과 기획국장까지 지냈다.
쫓겨난 셋째부인, 즉 박복남의 할머니는 홀로 떠돌다가 병이 들어 성주동으로 찾아왔지만, 마을 입구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어 그곳에 묻혀 있다. 이 묘지도 박헌우의 장자 후손들이 돌보아 주고 있지만, 그 친 후손들은 아직까지 거들떠보지 않고 있다.
천경자의 어머니를 낳은 외조모 박옥자는 그 당시 절세미인으로 알려져 있고 외동딸인 천경자 어머니는 아버지 박헌우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어릴 적 남장을 시켜 서당에 내보냈고 독선생을 불려 서예를 가르칠 정도였다.
그 덕택에 서예대회에서 장원까지 하여 말을 타고 순천까지 상을 받으러 다닐 정도였고 눈이 큰 미인이었다. 천성욱과는 18살에 결혼했다. 딸을 무척 아꼈던 아버지 박헌우는 딸과 가깝게 살려고 일부러 부모도 없는 천성욱을 골라 결혼시킨 것이었다. 그 사이에서 천경자와 옥희, 그리고 아들 규식을 낳았다.
여동생 옥희는 언니 천경자에게 아픔을 준 인물이었다. 광주여고보 재학시절 방학때 고향에 내려오면 식물채집 숙제를 위해 함께 봉황산과 신방골 절, 일본인 돌무덤까지 헤치고 돌아다녔다. 네 살 터울이었던 옥희는 언니를 이어 광주욱고녀(전남여고)를 졸업한 후, 잠시 고흥금융조합에서 근무했고 광주식산은행에 다녔다.
그러나 1952년 천경자가 전남여고 재직시절 그 허름한 관사에서 쓸쓸하게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천경자는 병든 동생의 약값을 대기 위해 전남여고에서 개인전시회를 갖기도 했을 정도로 동생 옥희를 아꼈다. 그 충격은 또 다른 작품으로 탄생했다.
남동생 규식은 목포공립공업학교(현 목포상고)와 광주사범학교을 나와 육군사관학교에 11기생으로 들어갔다. 현대사에 큰 오점을 남겼던 전두환, 노태우 전대통령과 동기생이다. 유신정권시절 영부인 육영수와 절친했던 천경자도 동생의 진급부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육군 중령으로 예편했고 지난 2000년에 사망했다. 천경자의 아버지 천성욱은 성품이 무골호인이었지만, 마작 같은 노름에 빠질 정도로 유약하고 무능했다. 결혼 후, 군청 관리를 휴직하고 장인 박헌우의 논문서를 억지로 빌려 친구와 양말공장을 운영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거덜나고 남은 양말까지도 친구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결국 집마저 남의 손에 넘어가고, 어린 천경자와 부인은 점암 성주동으로 친정살이 가고 동생(천경자의 삼촌)과 읍내에서 자취생활을 했다.
얼마 후 다시 군청에 복직되자, 장인 박헌우의 도움으로 서문밖 동촌마을에 기와집을 마련하여 다시 합치게 되었고 그때 박헌우도 성주동 가산을 정리하여 옥하리 옥상마을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천성욱은 기생집까지 드나들며 부부싸움이 잦았다.
해방 전 봉황교(현 봉황1교)는 나병 환자들이 소록도로 가는 마지막 애환이 서린 다리였다. 그 주변 기생집이 많았고 기생들과 능가사에 꽃구경 갔다가 부부싸움으로 동네를 시끄럽게 만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버지는 딸 천경자를 그렇게 예뻐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대신 어머니의 사랑은 절대적이었다. 천경자의 집은 서문밖 동촌마을 영광군수를 지낸 정모씨의 대궐 같은 저택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었다. 손에 닿을 듯 봉황산이 가까이 있었고 남계천이 흘러 가장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옥상마을 외가댁이 가까워 개천을 건너 자주 드나들며 외조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박헌우는 서문리에서 정미소를 운영하기도 했지만, 당시 부유층만 가입이 가능했던 서문밖 양로당에 드나들며 호의호식했다. 생선, 육류가 빠진 밥상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여름에도 목기와 목수저로 밥을 먹을 정도로 전형적인 양반의 게으른 형태로 살았다.
보통학교 시절 그의 그림 소질을 발견해준 이는 일본인 다나까(田中)라는 총각 선생이었다. 일장기가 그려진 일본등(燈)을 그리라고 지적해서 크레용으로 그렸더니 교내에다가 돌려가며 칭찬과 격려를 해주었다. 그가 좋아했던 처녀선생이 한 분 있었는데, 뾰쪽 구두를 신고 다니던 남궁 선생이었다.
그 선생이 갑자기 학교를 떠난 후 외가댁 대청마루 흰 벽에 그 선생을 그리워하며 여인상을 그렸다가 외할머니에게 혼이 났던 적도 있다. 그 그림이 천경자가 그린 최초의 그림일 것이다. 천경자의 유명한 작품 중에 <길례언니>가 있다.
이 모델은 보통학교 선배로 학교교정에서 열린 박람회에 차양 달린 모자에 노란 원피스 차림으로 참석한 모습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길례 언니는 그 당시 소록도병원 간호사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천경자는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고흥군에서만 여섯 명이 시험을 치러서 3명이 합격했다. 그 중에 소녀 천경자도 있었다.
▲작품 길례언니.
당시 소록도병원 간호사였던 초등학교 선배언니를 대상으로 그린 그림이다.
학창시절과 불행했던 결혼생활 속의 창작의욕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에 입학한 천경자는 처음으로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여고보에서도 미술과목은 늘 최고 점수를 받았다. 이곳에서 서양화와 동양화를 구별하게 되었고 섬세한 자신의 성격상 동양화를 염두에 두게 되었다.
영화잡지에 심취하게 되었고 동경 유학 시절은 물론, 그 이후에도 미술 다음으로 심취했던 것이 영화라는 장르였다. 슬픈 영화를 보며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보기도 했고 고통스러울 때 마음의 위안을 삼기도 했다.
다른 과목은 겨우 낙제를 면할 정도였다. 물리시험에서 펌프원리를 설명하라는 문제의 답안도 그는 펌프물 깃는 여인을 그려서 제출할 정도였다. 좋지 않은 성적표를 가지고 고향에 내려가 아버지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일제의 군국주의가 날로 기승을 부려 필리핀 등 동남아 지역으로 확대되자, 보통학교와 일인소학교가 통합되었다. 광주에서도 조선인이 다니던 광주고보와 광주여고보가 각각 서중학교와 욱고녀로 교명을 변경하고 수피아여학교는 폐교되었다.
방학 때 집에 내려가 동생 옥희와 친구들를 앞세우고 식물채집 과제물을 위해 인근 봉황산과 산방골, 일본인 묘지를 쏘다니며 보냈다. 아버지의 그치지 않은 노름으로 집에 갈 때마다 논밭이 하나 둘 팔리고 가세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옥하리 외가도 결국 남의 손에 넘어가고 외사촌 오빠 박복남의 도움으로 남계리에 기와집을 구해 이사를 했다.
학교에서는 조선인들이 일본 유학을 가는 것을 꺼려했다.
노골적으로 교사가 되는 경성사 범학교의 진학을 권유할 정도였다. 오직 김임년 선생만 그의 일본유학을 지지했고 입시지 원서를 쓸 때에는 한동안 교내가 시끄러웠다. 그러나 일본 유학을 마음속에 굳히고 있었다.
동생 옥희는 경성공립심상상업학교에 응시했지만, 낙방하고 그가 다니던 광주욱고녀에 진학하게 되었다. 졸업이 가까워 오자, 집에서는 혼사가 추진되고 있었다. 읍내 남문 밖 장승상댁 대학생, 소학교 교사, 군청 직원 등 구체적인 상대가 정해졌지만, 외조모의 학벌이 약하다는 등의 이유로 다행히 성사되지는 못했다.
일본유학을 가겠다고 하자, 아버지의 반대가 극심했다. 기울어진 집안형편에 사실상 무리였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때 읍내에 약간 정신이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청년이 있었다. 실없이 웃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하루는 저녁도 안 먹은 채, 울다가 또 웃다가 정신 나간 흉내를 냈다.
이때 어머니는 놀라 울고불고 난리였다. 다음날 아버지의 승낙을 받게 되어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드디어 입학식 날이 가까워지자, 부모와 함께 여수에서 연락선을 타고 출발했다. 동경에서는 동네 친구 언니와 연애사건으로 구설수에 올랐던 순사출신 김갑식이 고리대금업으로 돈을 벌어 정착하고 있었고 아버지와는 호형호제하는 사이라서 입학할 때 부보증인까지 돼 주었다.
기숙사에 들어가서도 그 부보증인의 역할을 충실히 실행하기 위해 주말마다 면회를 와주곤 했다. 서양화과와 일본화가 있었지만, 일본화과를 선택했고 중학교 교사자격증을 주는 사범과가 아닌 실습위주의 교육을 시키는 고등과를 택했다.
그 무렵 야수파, 입체파가 유행하던 일본의 서양화가 체질에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좀더 곱고 미세한 일본화를 전공을 택했던 것이다.
재학생 중에 조선인들도 더러 있었지만, 그렇게 친하게 지낼 수가 없었다. 대부분 부유층 자제들이었던 그들과 비교되는 것도 싫어서 자연스럽게 멀리 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 1년 선배 중에 우향(雨鄕) 박래현이 있었다. 박래현은 천경자와 같은 일본화과 고등과였다.
그녀를 통해 선전(宣傳)을 알게 되었지만, 역시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다. 박래현은 선전 21회에 입선하였고 선전 마지막인 23회때 조선총독상을 받았다. 훗날 천경자와 함께 여류화단의 쌍벽을 이루었고 운보 김기창 화백과 결혼하여 12차례나 부부전을 갖는 등 활동했다.
천경자는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적 환상의 세계를 형상화함으로써, 반면 박래현은 입체파 조형과 추상 실험을 통해 여성미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그러나 박래현은 판화에 주력하다가 97년 일찍 사망했다.
▲외조부를 모델로 그린 작품 조부상
1학년 여름방학때 귀국하여 고향에 가니 외조부는 고혈압으로 반신불수 상태였다. 외사촌 오빠 박복남이 광양군청으로 발령 나면서 남계리 집을 사줘서 외조모가 병시중하고 하고 있었다. 이때 아버지에게 갓을 씌우고 옆에 동생 규식을 앉혀 데생한 작품 <노점>은 선전에서 탈락했고 반신불수의 외조부의 모습을 데생, 이듬해인 42년 22회 조선전람회에 출품, <조부상>이라는 작품으로 입선을 하게 되었다.
가정형편이 좋았던 유학생들은 실력 있는 스승을 찾아가 사사를 받기도 했지만, 그는 생활비를 아껴서 고바야가와 기요시 선생에게 인물화 수업을 받았다. 오늘날 천경자가 인물화 중심의 한국 채색화를 완성시키기까지 그 스승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고바야가와 선생은 일본 제국전람회 무감사 화가였고 조선인이 일본인을 그리려고 하면 제대로 표현하기 힘들다며 조선 인은 조선인을 그려야 한다고 충고해주었던 최고의 스승이었다.
1학년 겨울방학때 귀향을 했다. 어릴 적 그토록 아껴 주었던 외조부는 다시 풍남에 살던 외삼촌 일명'다래기박샌'(셋째 부인 아들)집으로 갔다가 며느리 구박으로 다시 성주동 큰며느리 집으로 들것에 실려 쫓겨났다. 그리고 3일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재산을 돌려주지 않던 큰아들을 폭행해서 귀를 멀게 했고 결국 객사까지 해버린 그 큰 아들집으로 명이 다 돼서 들어간 것이었다. 그래도 마지막은 큰 아들집에서 보낸 셈이었다. 당시 형편이 넉넉했던 '다래기 박샌'이 장례를 치르다시피 했다.
3년간의 동경 유학생활도 무사히 마쳤다. 졸업작품인 <노부>는 43년 제 23회 선전에서도 입선해서 힘들었던 유학생활의 보람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작품은 두 쪽에 병풍에다 그려 지금도 건재하고 있고, <조부상>은 취급부주의로 엉망이 되었다. 또 낙선한 <노점>은 본적지 주소를 적지 않아 경복궁 창고에서 썩어서 이제는 찾을 길이 없다.
이들 두 작품의 입선으로 화가로서 당당한 교두보를 마련한 것이다. 이들 작품은 안정된 구성. 탁월한 묘사력과 깔끔한 세밀화풍의 채색으로, 젊은 시절 그녀의 작가적 역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발발된 태평양전쟁도 이제 막바지에 들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총력전으로 인해 모든 물자가 귀했다. 졸업을 하고도 쉽게 귀국할 수가 없었다. 여수까지 운항하던 연락선도 중단되어 부관연락선이 다니는 항구까지 갈 열차표조차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
이때 역에 표를 구하러 갔다가 만난 이가 바로 첫 남편이었던 이철식 이었다. 광주 송정리 출신으로 송정공업학교를 나와 일본대 경제학과를 다니고 있던 두 살 많은 학생이었다. 이철식의 도움으로 어렵게 표를 구해 부산을 거쳐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역시 물자가 귀해 생활이 어려웠다. 아버지는 김갑식의 꼬임에 빠져 전답문서를 담보로 노름 밑천을 빌려 다 날리고 봉황산 밑 초라한 초가집으로 이사를 했고 남동생 규식은 목포공립공업학교(현 목포상고)에 합격해서 목포에서 하숙하고 있었다. 또 여동생 옥희는 욱고녀를 졸업하고 고흥금융조합에 정말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고 다니고 있었다.
고향에 돌아와 동경의전에 다니는 유광휘와 선을 보았지만, 꼭 연락하겠다고 떠나고는 소식이 없었다. 귀국할 때 표를 구해주었던 이철식의 편지가 계속 집으로 날아왔고 서서히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운명처럼 느끼지가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이 첫 실수였다.
집안끼리 인사를 나누고 초라한 초가집에서 혼례식을 올리게 되었다. 시누이가 결혼 전 같은 해에 사망하여 신행은 다음해로 미루어지고 신혼 초부터 별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임신까지 되었지만, 신랑은 연락조차 없었고 집안의 눈치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해방이 되자, 생활은 조금 나아졌지만 주위의 따가운 눈총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모교인 전남여고에 미술교사 자리를 구하고 광주에 셋방을 구해 이사를 했다.
첫딸을 낳고 몸조리도 제대로 못한 상태에서 모교 전남여고에 미술교사로 나가게 되었다. 이철식은 직업도 없이 친구집, 친척집을 전전하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해방 후 이념대립이 심각해지면서 그쪽에만 신경을 쓰고 돈 한 푼 벌어다 주지 않았다.
광주 서중을 나왔다는 것도 거짓이었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이혼을 청하자, 학교까지 찾아와 협박을 하고 괴롭혔다. 자신의 친구들을 동원해서 협박을 하고 폭력까지 할 정도였다. 아이를 빼앗아 가겠다는 말에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피신하기도 했다.
23살이 되던 46년에 처음으로 모교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때 전시회에 지방지 기자들이 초대되었는데, 두 번째 남편이었던 호남신문 김남중 기자도 끼여 있었다. 원래 해방 전 광주지역 최초의 일간지였던 전남신보는 일본인이 운영하였으나, 해방직후 유일한 조선인출신 기자였던 김남중이 남은 사원들과 함께 접수해 계속 발행했다.
일어 전용 이었던 전남신보에 최초로 한글로 표기했던 이도 김남중 기자였다. 그러나 미군정청으로부터 마산출신 시조시인 이은상이 관리권을 얻어 건준 전남도위원장 박준규를 사장으로 세워 운영하다 46년 이은상이 사장이 되면서 호남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어 발행했다.
또 김남중은 임병주(호남신문 문화부장)에 의해 48년 창간되었던 문예종합지 <호남문화>를 인수하여 <호남공론>으로 제호를 바꾸어 운영하다가 6.25로 중단되고 말았다.
셋방살이에 친정부모까지 책임지고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사택을 준다는 말에 다시 광주사범학교로 직장을 옮겼다. 목포여고 교사로 나가던 이철식은 직장을 관두고 광주로 올라와 다시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연락이 끊겼고 6.25 때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만 들렸다.
무걸호인이었던 아버지는 그런 이철식을 상대도 안했다. 아니 집에 찾아와 난리를 피워도 그저 담배만 피울 뿐이었다. 돈만 생기면 노름판에서 다 잃을 때까지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광주식산은행에 다니던 동생 옥희는 결핵성복막염으로 결국 도립병원에 입원한 상태였다. 그래서 동생의 비싼 약(스트렙토마이신)을 구하기 위해 개인전시회 준비했다. 다시 원치도 않던 임신이 되어 아들 남훈을 낳았다.
49년 6월 서울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처음 이화여대에 미술과가 생겨 학생들의 단체관람을 하는 등 성황을 이루었다. 이때 김흥수, 이응로, 김영주 화백을 만났고 이들이 각 신문에 잊지 않고 서평을 기고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연이어 김은호 화백의 유일한 애제자 배정례(선전 20회 입선)를 비롯, 청전 화숙 출신의 이현옥(선전 21회 입선)과 정온녀, 박래현 등 함께 <여류화가 5인전>을 동화 화랑에서 가졌다. 이렇게 40년대는 바로 천경자와 박래현이 등장하여 한국 여류화단의 거목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림이 다 팔리자, 광주로 내려와 사동에 셋집을 구하고 조선대에 강사로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정신적인 고통이나 경제적 고통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팔촌 외조카를 데리고 뱀장사 집을 찾아다니며 본격적인 뱀을 소재로 하는 그림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지난 모교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 기자들에 대한 답례로 초라한 셋방으로 초대해서 식사대접을 했고 그후 김남중과의 인연이 계속 되었다.
드디어 6.25 전쟁이 터졌다. 이미 임신이 되었던 천경자는 피난을 가지 못하고 광주에 남았다. 두 번의 개인전으로 명성이 나있던 천경자는 주둔한 인민군의 취조를 받았지만 별다른 피해는 입지 않았다. 순천 가는 철도 변에 있었던 김남중의 집으로 찾아가 보았지만,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인민군이 물러나자, 김남중은 정훈공작대장이 되어 돌아왔다는 소식만 들렸고 찾아주지도 않았다. 정훈공작대가 있던 사무실로 찾아갔지만, 만날 수가 없었고 임신소식을 전해주자, 그때서야 집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그렇게 반기는 기색도 아니었고 다시 발걸음도 뜸해졌다. 임신한 몸으로 중단했던 뱀 스케치를 위해 유리상자를 만들어 넣고 관찰했다.
다시 동생 옥희의 병세가 심해졌다. 누가 몸에 고양이고기가 좋다고 해서 어렵게 구해 꿩고기라고 속이고 먹여 주기도 했지만 차도는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밤마다 뱀 그림의 구도만 생각했다. 한 마리가 아닌 수십 마리의 뱀을 넣어 이 괴로움과 슬픔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옥희는 폐결핵으로 전이되어 병을 이기지 못하고 아버지의 무릎에서 숨을 거두었다. 너무도 원통해서 붉은 명주에 <화가천가옥희지관(畵家千玉姬之棺)>이라고 직접 써주었다. 호남신문 임병주 문화부장에게 부탁해 돈을 빌려 장례를 지냈다.
광주 수복 후 의용경찰로 자원하여 지방에 가있던 동생 규식이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화장해서 극락강에 뿌리며 목이 터져라 울었다. 밤마다 옥희는 초췌한 얼굴로 나타났고 왜 다시 왔냐고 울부짖다 깨어나기도 했다. 동생 규식은 들어온 조의금으로 다시 광주사범학교에 복학했다.
어느 지인이 시청앞 적산(敵産) 건물을 사용하라고 해서 처음으로 작업실을 꾸며 그곳에서 25호가량의 <생태(生態)>을 완성했다. 이 제목은 광주로 피난온 연극연출가 이원량이 작명해 준 것이다. 이 그림 속의 서른다섯 마리의 뱀은 당시의 김남중 나이였다.
이 그림으로 온갖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심지어는 뱀으로 신세타령 했다는 치욕스런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6.25이후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그림을 들고 지방으로 돌아다니며 팔아 생계를 꾸려야 했다. 그러나 두 번 다시 찾아갈 용기가 없었다.
53년 부산에서 전시회를 열기로 했다.
서울이 수복되었지만, 부산은 아직 임시수도였고 피난 온 작가들도 대부분 그곳에 남아 있었다. 우선 개인전을 열기 전, 대한미협전에 <개구리><닭><생태> 3점 출품시켰다. <생태>는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전시회가 열린 부산 칠성다방의 주방에 숨겨두고 있었다.
그러나 공초 오상순 시인이 주방에 들어가 그 그림을 보고 소문내고 다녀 알려지게 되었다. 운크라(외국재단)에서 <개구리> 작품을 사주었고 그 덕에 극장에서 상영되던 리버티뉴스에 까지 나갔다. 다시 그 해 6월에 부산외교구락부에서 개인전 열렸다.
이 무렵 초기의 사실적인 계열의 인물화 소재에서 벗어나, 서서히 자기 나름의 작품세계를 모색하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조락>, <내가 죽은 뒤>, <개구리> 뿐만 아니라 밑도 끝도 없이 서로 얽혀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뱀을 소재로 한 <생태(1951)> 등의 작품을 통해 그녀는 고통과 슬픔, 분노 등의 내면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예술개념에 다가섰다고 할 수 있다.
이 전시회를 위해 김흥수 화백이 직접 나서서 포스터 붙여 주는 등 도와주었고 전시회는 <생태>가 큰 인기를 끌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전시회가 무사히 끝나고 그림도 모두 팔렸다. 끝나고 축하연을 하는데, 군복차림의 한 청년이 테이블 위에 올라가 탭댄스를 추면서 소란을 피웠다.
그 청년이 바로 한국화단의 이단아 이중섭이었다. 이때 재취감을 고르고 있던 극작가 한노단의 후취물망에 오르기도 했지만 아무런 일도 없었다.
백발청년 박기원 시인이 글을 써보라고 권했다. 사양하고 싶었지만, 그림이 아닌 다른 어떤 표출구가 필요했고 결혼 후 시댁에 신행 갔던 이야기를 수필로 써서 <문예>지에 처음으로 실리기도 했다. 부산에서 그렇게 작가들과 지내고 있을 때 김남중이 찾아와 함께 광주로 돌아왔다.
광주로 돌아와 그림 판 돈 25만환과 김남중의 도움으로 5만환을 보태, 30만환을 주고 사동의 집을 샀다. 5만환을 빌린 이유 때문에 집문서를 김남중에게 맡겼으나, 나중에 서울로 이사와 지내다가 집을 팔려고 내려갔지만, 이미 다른 이에게 팔리고 없었다. 그 해 그 집에서 아버지가 사망했고 인근 교회공원묘지에 묻혔다.
50년에 홍익대학에 미술과가 생겼고 미술학부장이던 조각가 윤효중 교수와 김환기 화백의 요청으로 상경하게 되었다. 그 당시 동양화과에는 청전 이상범 화백과 단둘뿐이었다. 배가 불러와 들통 나게 되어 할 수 없이 뱃속의 아이 때문에 광주에서 재혼식 올렸다고 둘러댔고 서울에서 피로연까지 치렀다.
김남중이 올라와 참석했지만, 끝까지 자리를 지키지 않고 도중에 나가버려 혼자 마치고 배웅까지 해야 했다. 청파동에 셋방을 얻어서 그 해 9월에 차녀 정희를 낳았다. 그리고 같은 해에 외조모는 외사촌 오빠 복남이 집에서 쓸쓸하게 사망했다.
9월에 딸을 낳고 나자, 광주에서 김남중이 득남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리고 발길조차 뚝 끊어졌다. 이제 정리를 해야겠다고 맘먹고 어머니가 광주로 내려가 광주 사동집을 팔려하자, 이미 명의변경이 돼 있었다.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청파동 집주인은 세가 밀렸다고 집을 비우라고 요구하니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그런 속 에서도 시든 해바라기 밑에 검은 고양이를 안고 홀로 앉아 있는 계집아이를 울면서 그렸다.
이 작품이 바로 <정(靜)>이고 55년 대한미협전에 출품,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이로 인해 젊은 나이에 교수와 작가로서 확고한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 해에 첫 수필집 <여인소묘>을 발간하기도 했다.
*.취재후기-이 글의 자료는 아래의 참고문헌과 천경자 화백의 친인척, 생존해 계신 점암 성주동 마을 주민들의 취재를 통해 집필한 것이다.
참고자료-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1978,문학사상사)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1984,자유문학사)
조대미대 박사과정 논문-천경자(백미서 저)
광주전남 언론사(1991,광주언론동우회)
光州日報 四十年史(광주일보출판국 발간)
-이 자료는 2005년 고흥문화원에서 발간하는 <고흥문화>지에 실렸습니다.
낭만과 해학성 담은 채색화가 천경자
천경자는 척박한 채색화의 큰 한줄기를 이루어낸 화가다. 한 마디로 그녀는 스스로의 재능을 다양하게 시험하며, 채색화 화가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그녀는 채색화뿐 아니라 드로잉 등 그 어떤 표현 방법 및 표현 양식으로도 자신을 세울 수 있음을 확인했다.
그녀는 한국에서 고등학교 졸업 후 곧 일본으로 미술 유학을 떠났다. 그녀의 초기 작품은 일본 회화의 영향을 받아 사실적이고 장식적인 채색 기법을 구사했다. 이후 환상적인 색채 사용과 초현실적 화풍으로 자전적 요소를 짙게 보여주는 시기로 전환됐다. 그러다가 1969년 시작되는 그녀의 해외여행에서 내면에 잠재된 욕구의 정체를 확인하고 색채에 대한 이때까지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났다.
해외여행 풍물화(그림1)에서는 시각적인 쾌감이 넘친다. 그리고 감성의 자유로운 발설을 본능적이면서도 감각적인 묘사로 받아쓰는 즐거움을 누린다. 생명감 넘치는 선의 유희로 정평이 나있는 그녀의 작품은 여행지에서 순간적으로 돌발하는 미적 감흥을 가감 없이 그대로 옮겼다.
그랬기에 여행에서 돌아오면 거기에 채색만 덧붙이는 것으로써 하나의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해외여행에서 얻은 이국적 특색을 주관적으로 재해석한 화면을 보여주며, 서구적인 소재에 더욱 관심을 나타냈다. 또 그 속에 낭만과 해학성을 담아 삶의 재미를 맛볼 수 있는 여유를 보여준다.
그녀는 산다는 의미가 예술이라는 용광로에 활활 타올라 새로운 작품이 쏟아져 나오는 그 생활에 있고, 아프리카의 자극과 풍물은 그녀 마음의 용광로에 불붙게 하는 원동력이 돼 주리라 믿었다. 따라서 그녀의 예술에 대한 태도는 고독의 철학과 슬픔의 미학이 작품 속에서 한층 승화된 것이었다.
그녀의 채색화, <황금의 비>(그림2)는 그리스 신화의 문학적이면서 신화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내용인 즉, 바람둥이 제우스는 다양한 변용(變容, metamorphose)으로 모습을 바꿔, 아내 헤라의 눈을 피해 여러 여신들, 여인들과 사랑을 나눈다.
예를 들어 하얀 백조가 돼 레다에게 다가가고, 황소가 돼 에우로페에게 접근하며, 검은 구름이 돼 이오와 사랑을 나눈다. ‘황금의 비’는 제우스의 또 다른 변용이며 제우스는 ‘황금의 비’가 돼 다나에에게 접근하여 사랑을 호소한다. 천경자의 그림 <황금의 비>는 ‘황금의 비’로 변용해 다가온 제우스와 다나에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황금의 비>는 여인의 머리 위에 비처럼 쏟아지는 노란 꽃잎과 하얀 나비가 어울려 환상을 자아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다나에는 아름답지만 강력하면서도 불길한 이미지, 원시적인 이미지로 보인다. 이는 천경자 회화의 주제가 문학적 사유의 세계, 생명의 신비, 자연의 아름다움 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제는 그녀 삶의 궤적과 일치하는 것으로, 실제 생활의 경험에서 우러나와 형식적 소재인 동시에 문학적 암시와 상상에 의해 윤색되고 변형된 것이다. 더욱이 화려하면서도 미묘한 채색기법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색채는 소재를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런 소재의 그림은 서양의 회화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중 한 예로 클림트(G. Klimt)의 <다나에>(그림3)를 들 수 있다. 작품의 제목은 다르지만, ‘황금의 비’로 변용한 제우스가 다나에에게 다가가 사랑을 나눈다는 주제는 천경자의 <황금의 비>와 똑같다.
인간의 성(性) 표현은 휴머니즘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사랑하는 감정과 연결될 때 진정한 에로티시즘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다. 환언하면 성이란 육체적 쾌락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합일을 통해 삶의 새로운 국면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육체의 내밀한 접촉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신이 부재한 포르노그라피적 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소개 클림트(Gustav Klimt)
클림트는 19세기 말의 과도기적 화가였다. 그는 오스트리아 분리파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현란한 색채로 관능성과 악마적 요소 그리고 끊임없는 긴장이 뒤섞인 회화로 관객에게 언제나 강한 인상을 준다.
그의 작품 <요부>의 이미지는 성에 대한 공격적 사디즘(sadism)적 요소와 동물적 모티브에 나타난 힘과 공포 그리고 관음적이고 동성애적인 성적 표현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러한 성적 표현은 단순한 본능적 성에 대한 갈망이나 충족이 아닌 의식과 비판이 담긴 예술작품으로의 승화로 해석될 수 있다.
장미와 여인, 1981
하와쓰, 1981
폭풍의 언덕, 1981
하와쓰의 블랙 불 호텔, 1981
폭풍의 언덕, 1981
뉴욕 센트럴 파크, 1981
타에스 푸에블로 촌, 1981
꽃다발을 든 여인 , 1981.
꽃을 든 여인 , 36 X 32cm
황금의 비, 1982
우리나라 채색화의 대표작가 천경자(1924-현) 선생의 '황금의 비'. 1982년에 그려진 이 그림은 황금비가 꽃비처럼 쏟아지는 봄날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우수에 젖은 여인의 눈빛과 긴 목은 보는 이로 하여금 하염없는 그리움을 자극한다. 가슴깊이 묻어두었던 옛 전설속의 여인처럼 추억을 반추하게 한다.
천경자 선생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숱한 화가들을 배출했고 동시에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우뚝 서있다. 특히 채색화를 왜색풍이라고 무조건 치부했던 60년대까지의 질긴 암흑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채색화의 봄을 맞은 이즈음 그의 작가정신이 더욱 돋보이고 있다.
푸에블로족들의 설날, 1982
모자를 쓴 여인, 43 X 36 cm / 종이에 채색, 1982
두상, 1982
노오란 산책길, 1983, 94 x 74 cm/ 종이에 채색
테네시 윌리엄스의 집, 1983
괌도에서, 1983, 45.5 x 37.9 / 종이에 채색
괌도, 1983
북해도 鈴蘭, 1983
어느 여인의 時, 1984, 60 x 44cm / 종이에 채색
켓츠, 1984
어느 여인의 時, 1985
아라만다의 그늘, 1985
나비 소녀, 1985, 60 x 44cm / 종이에 채색
막간, 1986, 40 x 31 cm/ 종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