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림산 봉림사(지) 鳳林山鳳林寺(址)/ 구산선문 - 봉림산문
- 경남 창원시 의창구 봉림동 176번지
신라 효경왕 때 '진경 심희선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봉림산(현재 정병산) 아래 복림(福林)이라 곳에 창건하고 '봉림'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봉림사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다.
17세기 경 폐사되었다고 추정한다.
왜정시대 때 진경대사 승탑과 비가 발견되어 봉림사지임을 알 수 있었다.
삼층석탑은 일본으로 밀반출하려고 부산으로 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현재 상북초등학교(창원시 의창구 봉곡동) 교정에 있다.
진경대사보월능공탑(승탑/보물 제362호)과 그 비(보물 제363호)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절터엔 대정 8년(서기 1919년) 박물관(당시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다는 돌기둥이 있다.
창원문화재연구소(현 국립가야문화연구소)에서 1995년부터 1998년까지 4차례 조사하였다.
제1 건물지에서는 '병인년 봉림사와조丙寅年鳳林寺瓦造', '봉림사월鳳林寺月' 등이 새겨진 기와,
제2 건물지에서는 '봉림산 보제사鳳林山普齊寺'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다.
사찰을 건축하기 위한 기와터가 근방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자료는 인터넷 검색으로)
현재 지도상에 봉림사 뒤편에 작은 산을 봉림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내 생각엔 이건 정병산의 일부로 봐야할 것 같다.
정병산(精兵山, 566.7m)
낙남정맥을 이어주는 산이다.
정병, 군사를 훈련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나라의 군대를 훈련한 곳인지 모르겠다.
어떤 이는 '정병'이란 말은 '일본식 한자'라고 한다.
몽골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몽골군과 조선군을 훈련한 곳이라고 한다.
정병산이란 이름을 일본인들이 붙였다고 한다....난 모르겠다만.
정병산 이전에 <전단산(栴檀山)>이라 했다.
전단 : ① 자단, 백단 등 향나무를 통틀어서 이르는 말.
② 인도에서 나는 향나무의 하나.
마야부인이 전단으로 만든 평상 위에서 석가모니를 잉태하는 꿈을 꾸었다. 태몽.
정병산을 '봉림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는 봉림사가 있기에 산이 그 이름을 얻을 것이 아닌가 싶다.
어느 분의 주장대로 '정병산'을 버리고 '봉림산'으로 부르는 게 좋지 않을까?
밑에 마을 이름도 봉림동, 봉곡동 등이다.
창원 성주사에서 출발한다.
'봉림사지'로 네비에 입력하고 이용 수단을 '승용차'로 하면 '접근할 길이 없다'고 안내된다.
그래서 현재 존재하고 있는 '봉림산 봉림사(창원시 봉림동)'로 향했다.
이 사찰은 예전 봉림사의 법맥을 잇는다는 의미로 근래 창건되었다.
가화루(駕華樓)가 일주문, 사천왕문, 종각 등의 역할을 한다.


대웅전. 그 뒤편에 산신당이 있다.
대웅전 우측에 가건물은 공양처 겸 사무실 등으로 사용하는 것 같다.



이 뒤편으로 20여m 대나무 숲을 지나면 산신당이 있다.



봉림사에서 여신도 두 분께 봉림사지를 물어보니 듣기만 들었지 가서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사찰에서 일하는 보살께 물으니 등산로 따라서 30분 가량 가면 있다고 한다.
오후 4시 30분.
등산로를 따라 올랐다. 20분 가량 올라왔을까?
<봉림사지약수터>라고 적힌 이정표가 나온다. 약수터까지 10분 가량 내려간다.

약수터엔 물이 졸졸 나온다.
약수터엔 <태복산 정상 2.8km, 봉림산 정상 0.7km> 이정표가 있다.

그리고 봉림산 정상 방향을 가르키는 봉림사지 안내판이 있다. 50m.
화살표 방향이 잘못 되었다. 반대 방향을 가르켜야 한다.

봉림산 정상으로 100여m 올랐지만 절터를 발견하지 못했다.
네비를 이용하여 길을 예측했지만 나의 독도법 실력이 부족하여 그런지 못 찾겠다.
봉림산 정상 넘어에 있을 것 같았지만 등산할 준비를 하고 오진 않았다.
후레쉬도 없고 그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스마트폰도 승용차에 두고 왔다.
봉림사지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하산하였다. 경남교통연수원에 주차하니 6시 30분이다.
7시부터 민주언론운동연합(민언련)의 사무처장 김언경의 강연이 있다.
<책임없는 언론과의 투쟁>의 강연 제목이다.
(2019년9월18일, 수요일)
(2019년9월20일, 금요일)
한림 명진산업에 들려서 간단히 일을 봤다. 창원으로 향했다.
상북초등학교 교정 한 모퉁이에 '봉림사지 삼층석탑'이 있다.
왜정시대, 일본으로 밀반출하려고 부산으로 옮겼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었다.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지 못하다.
삼층석탑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네비의 지도를 보고 창원시 동읍 덕산리로 향했다.
정병산터널관리사무소까지 갔으나 봉림사지 안내판을 볼 수 없었다.
정병산, 터널관리사무소 가는 길에 촬영. 보이는 저 마을이 소목마을일까?
인터넷 검색하면 창원시 동면쪽으로 나온다.

'봉림사'로 향했다. 사찰 주차장에 주차하고 간단히 점심 요기를 하였다.(비스켓과 커피)
봉림산 정상으로 향했다.
봉림산 정상으로 추정되는 곳에 운동 기구들이 있지만 정상석은 없다.
봉림산 정상 가기 전의 이정표. 약수터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600여m 될까?

정상 같은데 정상석은 없고 운동 기구만 있다.
10여m 간격으로 이정표가 있다.
소목고개로 향했다. 지도를 보면 그렇다.


네비 지도를 나름 독해하고 소목고개로 향했다.
소목고개.
예전에 사격장에 주차, 원점회귀 산행한 기억이 난다.
사격장~소목고개~정병산~우곡사삼거리~둘레길~사격장

정병산에서 하산 중인 분에게 문의를 하였다.
"약수터에서 태복산 정상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면 있습니다."
아이고~!
약수터에서 아래 방향을 봤을 때 절터가 보이지 않았다. 숲에 가려졌던 것이다.
여든여섯, 10여년 전 쉰여섯에 정년퇴직을 하고 등산으로 소일하고 있다고 한다.
고향은 거창군 위천면, 한국특수강일 때 입사하여 창원특수강으로 사명 변경(사주 변경) 후 퇴직.
현재는 세아제강인가 그렇다.
고교동기들 중 1977년 한국특수강으로 취업 나간 이들이 있었다.
퇴직 후 3여년 중소기업에서 일을 하였지만 아내가 아파서 퇴직하였다고 한다.
고향에 땅이 조금 있어서 경작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그 분이 가르쳐 준 길로 갔다.
왔던 길로 다시 가기 싫어서 둘레길을 택했다.
봉림산 정상에서 내려와 소목고개 이정표 20m 전에 있는 이정표.
둘레길인 '숲속나들이길'로 향했다.

우측으로 가면 봉림농장이 나온다.
봉림산 정상으로 10여m 오르면 사거리, 우측 소로를 택하면 된다.

소로를 따라 내려오니 제법 넓은 길이 나온다. 방향상 좌측이다.
제법 넓은 길이 끝나고 조금 지나니 사거리가 나온다.
좌측 위 방향을 택했다. 우측으로 내려가야 했다.....감각이 둔하다.
봉림산 정상 능선에서 소목고개서 만든 분을 다시 만났다. 하, 하, 하~! 왔던 길로 하산~!
그 분의 안내로 약수터까지 같이 갔다. 감사합니다.
태복산 정상 방향으로 50m쯤 내려가니 펜스가 나온다.
펜스가 나오기 전에 나무에 달린 안내판. 허접하다.


봉림산 봉림사지.
대나무병풍 넘어로 마을을 볼 수 있는 위치이다.
사찰이 있을 때를 상상하면 좋은 위치이다.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지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址

탑대정팔년삼월박물관이塔大正八年三月博物館 二 移 ㅈ (二와 ㅈ는 일본어)
대정 8년이면 서기 1927년이다. 대정 원년이 서기 1919년이다.

이 절터는 재단법인 정토회의 사유지이다.
예전엔 논농사를 지은 것 같다. 지금은 유적지이기에 개발을 할 수 없다.
유적지 발굴이 끝나면 이곳에 간결한 절집을 지으면 좋겠다.



저 보이는 문이 절터로 들어오는 정문이겠다. 저기서 100m쯤 내려가면 봉림농원이 나오겠다.


밀양에 사는 어느 양반가에서 봉림사터가 명당이라 부친의 묘자리로 사용하려고 했다.
당연 승려들이 반대하였다.
양반의 부친이 사망하자 그 후손들이 가짜 상여 3개를 만들어 봉림사 승려들을 유인하였다.
그리고 그 부친을 봉림사터에 묻었다.
이후 봉림사는 폐허가 되었다. 물론 밀양에 사는 어느 양반가도 몰락하였다.
입구 안내판엔 '어느 양반'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인터넷검색을 하니 '여주 이씨' 후손이라고 한다.
여주 이씨의 종조는 조선시대 사림파 회재 이언적의 아들이다.
이언적은 경주 옥산서원에 주배향된 인물이며 동방8현 중 한분이다.
간월사지 안내판의 내용이 생각이 난다.
폐허된 간월사지. 그곳에 밭을 일구던 농부가 부처의 머리를 발견하였다.
그걸 부산에 부자에게 팔려고 보관하다가 집안에 흉사가 발생하여 제자리에 돌려놓았지만
결국 집안이 망했다고 한다.
또 몇 년전에 보았던 영화 '명당'이 생각이 났다.
명당, 부질없는 인간의 욕심일 뿐이다.
봉림사지를 보고 봉림사로 내려왔다.
귀가길을 창원터널로 잡지 않고 동읍, 진영방향으로 잡았다.
신호등 삼거리에 '봉림사지' 안내판이 있다. 봉림동주민센타 근처이다.
아파트 주위와 보현선원, 한들초등학교 뒤편쪽에서 또 '봉림사지' 안내판을 봤다.
걸어가거나 승용차로 갈 수 있을 것 같다. 1.1km.
1km에 봉림농장이 있다. 그 농장까지 승용차가 들어 갈 수 있겠다. 가보지 않았다.
이렇게 쉽게 찾을 봉림사지를 그렇게 헤매이다니~!
봉림사지에서 하산 방향 펜스 문이 있는 곳에서 100m 떨어진 곳에 봉림농장이 있다는 것 같다.
봉림사지에서 1km 떨어진 '부처고개'에 마애불이 있다고 안내되어 있다.
'부처고개'를 검색하니 마산쪽으로 1km 떨어진 곳이 아니다. 훨씬 멀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이리저리 검색을 하니 근처 '창원CC'에 있다고 나온다.
한들초등학교(봉림동) 건물 뒤편으로 오면 이런 안내판이 있다.

A지점에서 봉림사지로 가면 된다.
C지점이 봉림산 정상일 것 같다. 내 헤맨 경험 상.
B지점은 봉림사에서 정상으로 향하다 정상 가기 전의 이정표가 있던 자리 같다.
B지점 아래 삼거리가 봉림사지약수터 이정표가 있던 곳 같다.
즉 아래 지도상 표기된 봉림산 위치는 뭔가 문제가 잇다고 생각이 든다.

* 심희審希 / 855~923년
속성은 김씨, 9세 때 출가, 873년 구족계를 받음.
원감화상 현욱의 제자.
시호는 진경眞鏡대사, 탑호는 보월능공, 신라 경명왕이 내린 존호는 법응法膺대사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 /보물 제362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봉림산문의 개산조로 '원감대사 현욱'으로 기록되어 있다.
(희양산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의 기록/최치원의 글)
봉림사의 창건주는 진경대사 심희이다.
적조탑비의 기록은 심희가 아닌 현욱으로 했을까?
비록 심희가 현욱의 법제자였다고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