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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브레이어(Bréhier, 1876—1952)
- 제5권. 18세기, Le XVIIIesiècle273-506
제10장, 18세기 중기(1740-1775) (연속): 자연의 이론
- Deuxième Période (1740-1775) (suite): Théorie de la nature 383-403
1절 디드로, 달랑베르, 백과전서 – Diderot, D'Alembert et l’Encyclopédie. 383
사람들이 백과전서파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일군의 철학자들 속에서, 왜냐하면 이들이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기획에 효과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든지, 이 둘과 백과전사파들의 친화성 때문이든지, 사람들은 우리가 앞에서 막 말했던 철학자들과는 아주 다른 정신을 발견한다. 일반적인 방식에서 백과전서파들은 정신의 철학에 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이 정신의 철학은 로크(1632-1704)가 이점에 관해서 마지막 단어를 말했다고 믿기에 충분히 다루어졌으며, 그리고 형이상학적 미묘함들에 깊은 오해가 있었다. 정신의 역량들보다 더 많이, 이 정신의 역량들에 관심을 갖는 자연과 사회가 있다. 디드로에게서, 특히 그의 유물론자들인 친구들, 돌바흐(1723-1789), 엘베시우스(1715-1771), 보다 이전에 라메트리(La Mettrie, 1709-1751) 등에게서 사람들은 앞으로 주장할 자연의 개념작업을 발견한다. (383) 디드로와 달랑베르에 의한 백과전서의 정초의 역사는 충분히 알려졌다.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는 1713년에 랑그르(Langres)에서 태어났고, 루이-르-그랑 고등학교에서 제이이트들에게 배웠다. 모든 학문들과 모든 예술들에 호기심 많았던 그는 우선 1743년에 스태년(Temple Stanyan, 1675–1752)의 그리스 역사(Grecian History 1707)를, 그리고 1744년에 영국 내과 의사인 제임스(Robert James, 1703–1776)의 의학 사전(A Medicinal Dictionary, 1743–45)을, 1745년에 샤프트버리(Shaftesbury, 1671–1713)의 덕목에 관한 탐구(An Inquiry Concerning Virtue, 1699)를 번역했다. 1746년에 서적상인 르 브르똥(Le Breton, 1708-1779)은 그에게 1728년에 대성공으로 나온 백과사전, 예술들과 과학들의 사전(Cyclopœdia or Dictionary of Arts and Sciences, 1728)의 번역을 권했다. 이런 종류의 저술의 관념은 이미 세상에 널리 퍼져있고, 사람들은 프리 메이슨의 유명한 연설가인 램지(Allan Ramsay, 1684-1758)의 담화를 인용한다. 그는 1737년에 “자유 학문들과 유용한 모든 과학들의 보편적 사전의 자료들을 만들기 위해 모든 메이슨 동료들에게 서로 통합할”것을 권고했다. 디드로는 첫 기획을 더 키웠고, 이 기획에 그의 친구, 수학자 달랑베르와 연합하였다.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 1717-1783)는 1717년에 태어났으며, 동역학론(Traité de dynamique, 1743)의 저자이며,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며, 프리드리히Friedrich II., 1720-1785)의 친구였다. 이들은 모든 종류의 협력자들, 문인들, 박식가들, 과학자들을 모았다. 그러나 디드로 자신이 수많은 항목들을 썼다. 1749년(서른여섯)에 뱅센느 감옥에 6개월간 갇혔는데, 그 이유는 철학적 사상들(Pensées philosophiques, 1746)과 보는 자들의 용법에서 맹인들에 관한 편지(Lettre sur les aveugles à l'usage de ceux qui voient, 1749)를 썼기 때문이다. - 이 시기에 쓰여진 작품으로 회의론자의 산보와 오솔길들(La Promenade du sceptique ou les allées)(1830년 출간)과 자연 종교의 충분함(De la suffisance de la religion naturelle)(1770년 출간)이 있다. 그는 백과사전(L’Encyclopédie, ou Dictionnaire raisonné des sciences, des arts et des métiers(1751-1772)의 편집을 시작하여, 문인들의 학회에 덕분에 1751년에 첫 권이 나왔다. 이 첫 권에는 달랑베르가 쓴 「예비적 담론(Discours préliminaire)」으로 시작된다. 트레부(Journal de Trevoux)지와 파리 주교인 크리스토프 드 보봉(Christophe de Beaumont du Repaire, 1703-1781)의 지지를 받은 신앙적 당파는 신부 프라드(Jean-Martin de Prades, 1724-1782)에 의해 소르본대학에서 주장된 주제를 구실로 삼았다. 사람들은 프라드의 주제에서 단죄 받을 만한 명제들을, 마치 감관들 속에서 관념들의 기원 또는 자연 도덕의 옹호와 같은 명제들을, 발견한다. 사람들은 추문의 책임이 백과전서에 있다고 했으며, 사람들은 1752년 초에 찰나에 백과전서를 금지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적상 사장인 말에르브(Malesherbes, 1721-1794)의 은밀한 지지와 더불어, 그리고 빨리소(Palissot, 1730-1814)와 프레롱(Fréron, 1718-1776)와 같은 철학자들의 적들의 끊임없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백과전서의 새로운 다섯 권이 1753년에서 1757년에 나왔다. “제네바” 항목에 의해 촉발된 논쟁들에 이어서, 뒤끌로(Duclos, 1704-1772)와 프레롱(Fréron, 1718-1776)처럼 볼떼르에 의해 은밀히 지지받았던 달랑베르는 저술을 포기했다. 엘베시우스의 유물론을 책임지게 된(그의 정신론(De l’Esprit)은 1758년에 나왔는데 단죄 받았다), 백과사전은 왕실의 칙령에 의해 새로이 금지되었고, 교황으로부터 단죄 받았다. 다음의 나머지 10권은 훨씬 나중에 1766년에 나올 수 있었다. 백과사전의 저자는 특히 1753년부터 모임(la société)을 만들었는데, 그 모임에는 디드로를 포함하여 루소, 그림(Grimm, 1723-1807), 돌바흐, 엘베시우스도 회합하였다. 디드로의 여러 철학적인 작품들 중에서, 자연의 해석에 관한 사상들(Pensées sur l'interprétation de la nature, 1769)(1769 출판?)과 달랑베르의 꿈(Le Rêve de D’Alembert, 1769)은 1769년에 썼으며, 부겡빌 여행의 보충(Supplément au Voyage de Bougainville, 1772)은 1772년에 썼으나, 이것들은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 그는 1784년[일흔하나]에 세상을 떴다. (385)
디드로가 자연의 해석에 관한 사상들에서쓰기를, “우리는 과학의 거대한 혁명의 찰나에 있다. 내가 보기에, 정신들이[도덕군자들] 도덕론을 가졌다는 경향에서, 문학 연구에서, 자연의 역사에서, 경험 물리학에서, 나는 감히 거의 확신한다. 100년 전에 사람들은 유럽에서 위대한 기하학자 3명을 꼽을 수 없었다.” 이런 시대에 진실한 탈-수학화가 생겨났으며, 만일 사람들이 말할 수 있다면, 자연 철학의 탈수학화가 생겨났다. 사람들은 데카르트적 이상에 등을 돌렸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물리학에서 모든 난점들은 “수학들의 이상들에 거의 닮은 것”이 되게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385)
매우 새로운 정신의 자연[본성]과 기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3가지를 지적한다. 1) 사람들이 뉴턴에서 자연의 수학적 과학을 이해하는 방법, 2) 수학자들의 이상[상징]의 변형과 수학적 인식에 대한 수학자들의 이론, 3) 생명 과학들의, 그 자체들로서 발전이다. (385)
뉴턴 과학의 결과는 수학적 추론의 엄밀성과 경험적 척도들의 단순히 근사치의 특성사이에서 대조를 고발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계산과는 거리가 멀었다. 만일 사람들이 인력의 법칙 속에서, 사람들이 자연의 모든 현상들이 연역될 수 있는 원리가 있다고 믿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주의를 점점 더 많이 기우려보아도 거기에서 전기적, 화학적, 생물학적 현상들이 회피될 뿐만이 아니라, 또한 하늘의 연구 자체에서도, 마치 디드로, 브래들리(James Bradley, 1693–1762), 르 모니에(Le Monnier, 1715–1799)가 주목한 것처럼, 자연의 새로운 수학적 과학은 “하늘의 관찰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85)
그러나 정신의 이런 새로운 추이(cette tournure)에는, 척도들의 벗어남(Traité de l'aberration des mesures)을 써야만 하는 디드로에게 말하게 했던 거친[서투른] 확정과는 확실하게 다른 것이 있다. 이런 이유에서, 자연 과학이 그의 독창성을 주장하는 만큼이나, 자기의 과학으로부터 만든 관념에 의해 물리학에서 멀어진 사람이 기하학자인 것 같다. 경험론자와 논리학자는, 달랑베르에게서 기하학의 이론가를 통합하는 두 가지 특성들(양립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거기서 너무 멀어!)과 같은 것이다. 한편으로 수학들은 그것들의 대상에 의해 경험과학들이며, 심지어는 과학들의 첫째 과학이다. 왜냐하면 수학들은 물체와 도형에 속하는 가장 추상적이고 가장 일반적인 성격들을 지녔기 때문이다. “조작들과 계속적인 추상작업들에 의해서 우리는 물질에서 그것의 거의 모든 성질들을 박탈하며, 거의 환영[유령]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한다.”그리고 너비(이것은 사람들이 회상하건데 홉의 언어인데), 이것은 거의 무로 환원된 물질이며, 이것을 기하학이 연구한다. 그리고 산술학은 한 번 더 추상하여, 기하학적 물체들이 혼성[조성]되어있다고 우리들이 상상하는 부분들의 연관을 발견하는 경우에만 탄생한다. 이리하여 수학들은, 물체들이 자기들의 개별적 성질들을 박탈당한 일종의 일반적 형이상일 뿐이며, 물리학자의 경험에서 발견할 거의 모든 것을 내버린다. (386)
다른 한편 논리학자처럼, 수학자는 원리들로부터 가능한 가장 작은 수의 모든 진리들을 연역하기를 바란다. 수학자의 진행방식은, 마치 일반적으로 철학자의 진행방식처럼, 상식의 것과 반대 방향이다. “가장 추상적인 용어들은, 공통의 인간들이 마치 가장 접근할 수 없는 것처럼 바라보는 용어들은, 종종 그 용어들 자체들 속에 가장 큰 빛(lumière)을 지니고 있는 용어들이다. 원리들은 더 작은 수로 되어 있을수록 그 만큼 더 풍부해진다‥…; 원리들을 환원하면서, [수학이] 원리들을 넓혀야만 한다.”따라서 수학자의 솜씨(la virtuosité)는 가장 가능한 한 구체적 용어들 없이 지내는 데 있다. 예로서 그러한 것은 동력학에서 달랑베르의 작품이다. 사람들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달랑베르의 작품은 정확하게 라이프니츠가 시도 했던 작품과 반대이다.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 역학에서 운동 원인의 용어를, 즉 힘의 용어를 다시 도입했었다. 달랑베르는 운동만을 필요로 했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분명한 방식으로 생각된 운동의 고려만으로”, 그는 세 가지 원리들을 연역했다.이 원리에서부터 추론은 경험의 원리들과 일치하는 결과들을 도출한다. 따라서 동력학의 진리들은 필연적이며 우연적이 아닌 라이프니츠의 사유에 반대이다. (386)
이렇게 이해된 수학들은, 수학들이 데카르트에서 자졌던 탁월한 지위를 상실한다. 수학들은 여러 과학들 중의 한 과학일 뿐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과학을 달랑베르의 과학처럼 생각한다면, 우리는 과학이 다른 과학들과 동일한 전형이라는 것을 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18세기에서는 경험적이고 연역적이다. 사람들 각자는 각 과학에서, 나머지 모든 것이 연역될 수 있을 것이라는 근본적 사실을 찾는다. 예를 들어, 적어도 각자의 야망들에 의해서, 정신에 대한 꽁디약의 이론이 수학들에 관한 달랑베르의 관념들에게 닮지 않았듯이 아무 것도 더 이상 닮지 않았다. 달랑베르가 섰다. “사람들은 「백사전서 서설(Discours sur l’Encyclopédie, 1751)」에서 서로 서로 연역되는 일련의 기하학적 명제들을 검토하면, 사람들은 명제들이 전부 제1명제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첫째 명제가 계속적으로 풀어 해체되어, 한 귀결에서 다음 귀결로 이행 안에 있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연쇄에 의해 실재적으로 다양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그리고 다른 형식들을 받아들이기만 할 뿐이다.” 이것은 유추적용(mutatis mutandis)이, 즉 꽁디약이 감각작용과 정신의 역량에 대해 말했던 것이 아닌가?우리가 자연의 철학에서 다른 형식 하에서도 발견할 것이고, 또 우리가 사회 철학에서도 재발견할 사유의 동일한 전형이다. (387)
이런 사유의 전형의 가장 특징적인 국면들 중의 하나는, 린네(Linné, 1707-1778)의 생명 존재들의 분류작업에 관한 토론들에서 보인다. 디드로는, “방법론자들”이라 불리는 자들에 반대하는 가장 일반적인 비판을 이렇게 정식화한다. “존재들에 관한 그것[분류]의 용어들 개조하는 대신에, 사람들은 그것의 용어들에 관하여 존재들을 모델로 만드는데 힘써야 할 것 같다.”린네의 집단들은 정신에 의해 임의적으로 제작된 범주들이다. 그 범주 속에 사람들은 한 집단을 정의하는 성격들을 소개하는[드러내는] 모든 생명체를 다시 들어가게 한다. 이 경우에 그 집단이 소개할 수 있는 다른 특성들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고서 말이다. 그리고 그 특성들은 아마도 매우 먼 집단에 위치할 존재들과 함께 그 집단을 같은 부류에 속하게 한다. 로크(Locke, 1632-1704)에 의해 제시된 규칙에 반대하여, 린네는 실체들의 원형적인(archétypes) 관념들을 사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387)
디드로는 본능적으로 존재들을 고정하고 한계지우는 모든 사상에 적대적이었다. “자연 속에는 정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개별적 존재의 본질이라는 것도 없다. 그리고 당신들, 빈약한 철학자들은 본질에 대해 말한다.” 그의 작품은 자연에 관한 직관으로 넘쳐나며, 자연을 마치 개별 존재들로 해소되는 전체로서 생각했다. 그는 샤프트버리(1671–1713)와 더불어 이신론자가 된 이후에, 일종의 자연주의에 이르렀으며,달랑베르의 꿈(1769)은 자연주의에 대한 가장 생생한 표현이다. 그는 몽펠리에 학파의 생기론파 의사인 보르되(Théophile de Bordeu, 1722-1776)를 통해, 동물의 주제, 즉 소생물군체(agrégat d'animacules)를 제시하게 했다. 소생물군체란, 이들이 서로서로 결합하여 전체로서 기관들이 되는 것을 뜻한다. 개체[불가분]에게서는 결집체(agrégation)의 통일성[단위] 이외에 다른 통일성은 없다. 이 결집체는 끊임없이 변하고, 변형하는데, 진실한 죽음이 없다고도 하지 않고 또한 모든 것은 죽음에 불안해한다고도 하지 않고서 말이다.그가 말하기를, 하루의 형식들을 영원한 지속으로 믿는 “하루살이의 궤변에 대해 당신 스스로를 보호하시오.” 전체에서 전체로, 한 행성에서 다른 행성으로,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종들을 변하게 하는 일반적 흐름(un flux)이 있다. 디드로는 라마르크(Lamarck, 1744-1829)의 변형론[진화론]의 예감을 가졌다. “기관들은 필요들을 생산하고, 필요들은 기관들을 생산한다.” 자아의 이행하는 동일성은 전체에 의해서만 현존한다. “전체를 변화시켜보시라, 당신은 필연적으로 나를 변하게 한다.” 그러나 또한 (거기에는 르네상스의 옛 연금술도 있는데), 마치 하나의 이미지 같은 각 존재들 속에는 다른 모든 존재들이 있다. “모든 동물은 다소간 인간과 같다. 모든 무기물은 다소간 식물과 같다. 모든 식물을 다소간 동물과 같다.”
이런 자연주의는 자연 회귀의 도덕론에 연결되어 있다. 부겡빌 여행의 보충(1796)는 환상의 오타이티(Otaïti de fantaisie)에서, 본능들이 법률들과 종교에 의해 변형되기에 앞서서, 완전히 원초적이고 순수한 본능들로 된 인간적 삶이란 무엇이었을까를 묘사한다. 그는 루소의 자연주의와 전적으로 대조를 형성한다. 루소는 의식[양심]과 의무에 대한 자연적이고 자발적인 성격을 주장했다. 그런데 디드로에게서 자연으로 회귀는 본능으로 회귀이다. (388)
2절, 라 메트리, 돌바흐, 엘베시우스, 보뻬르뛰 - La Mettrie, d’Holbach, Helvétius, Maupertuis 388.
스타일 상으로 경이로운 도약을 제외하면, 디드로의 관념들과 돌바흐와 엘베시우스와 같은 그의 친구들의 관념들 사이에는 뉘앙스들만이 있다. 이들에 앞서서 라메트리(Julien Offray de La Mettrie, 1709-1751)를 인용해야만 한다. 그는 의사이며, 영혼의 자연사(L’Histoire naturelle de l’âme, 1745)의 출간이후,1746년에 프랑스에서, 1748년에 홀란드에서 출판이 금지되어서, 그는 프레데릭 2세(Frédéric, 1720-1785) 가까이에 은신처를 찾았다. 프레데릭 2세는 그에게 연금을 지급하고, 왕의 강독자의 자격을 부여했다. 그는 철학자들의 모임에서 항상 거의 해롭지 않은 어떤 것으로 판단되었다. 돌바흐(Paul Thiry, baron d’Holbach, deu. Paul Heinrich Dietrich von Holbach, 1723-1789)는 팔라티나트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생애 전부를 파리에서 보냈다. 그는 철학자들의 친구이며, 생-로쉬 거리의 호텔의 모임에서 주인이었다. 백과사전의 공동협력자로서 화학에 관하여, 그리고 다른 과학적 항목들의 저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1766년에 반 종교적인 긴 저술들을 출판했다. 엘베시우스(Claude Adrien Helvétius, 1715-1771)는 독일 출신의 의사 가계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때 처음으로 프랑스에 안착했다. 엘베시우스는 일반 농부가 되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에 정신에 대하여(De l’Esprit, 1758)를 출판했으며, 그 책은 단죄 받았다. 인간에 대하여(De l’Homme, 1772)는 1772년에 나왔다. (389)
랑게(Lange, 1828-1875)는 유물론의 역사(Geschichte des Materialismus, 1866)에서 오랫동안에 걸쳐서, 라메트리와 돌바흐의 유물론을 인식의 감각론적 주제에 의지하게 했던 피상적 주제를 반박했다. 우리는 마치 꽁디약처럼 굳센 정신주의자이기를 결심했던 감각론자들을 보았다. 그리고 시대는 프랑스 유물론자들 중의 첫째인 라메트리가 꽁디약의 작업들을 이용했던 것을 자제하였다. 게다가 오래 동안에 영국의 유물론이 현존하였다. 사람들은 17세기에 도덕론자들의 분파가 무엇이었는지를 보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영혼의 정신성을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로크의 고백을, 톨랜드(Toland, 1670–1722)의 책들을, 콜린스(Anthony Collins, 1676–1729)의 논쟁을 상기 하였다. (389)
유물론은 관할할 수 있는 모든 현상들에 대한, 물리적, 생명적, 도덕적, 사회적, 인간적이건 또는 동물적인 현상들에 대한, 전형의 통일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유물론은 자연이라 불리는 이런 본징(cette entité)에 연관 있는 이 현상들의 공통적인 연결을 탐구하였다. 라메트리가 말하기를 “자연의 젖사금 자체에서 길어 올리지 않은 모든 것, 현상들, 원인들, 효과들, 한마디로 사물들의 과학이 아닌 모든 것은, 아무것에서도 철학을 고려하지 않으며, 철학에 낯선 기원으로부터 온다.”여기서 또한 이 현상들의 실재적 발생을 묘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치 현상들의 깊은 친족성의 직관처럼 인상을 생산하는 것이 중요하다. (389)
유물론자들의 주제는 상당히 단순하다. 그들이 이 주제를 주장하는 정신의 상태는 보다 복잡하다. 그들의 주제는 데카르트의 기계주의와 달리, 엄밀하게 결정론이다. 예를 들어 기계 인간(L’Homme Machine, 1747) 속에서 라 메트리는, 그가 기계-동물론의 데카르트주의의 주제를 참조했을 지라도, 신체의 각 부분은, 각각이 행동하게 하고 또한 전체 없이도 기능하게 하는 그 나름의 고유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의사인 그는 당시에 알려진 예들, 즉 유기체의 분리 이후에도 기관들의 생존(개구리 심장의 연속적인 박동, 작은 조각들의 하나에서 전체 폴립의 재생산)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전체로서 유기체의 모든 작용들은 각 부분의 작용들의 조합에 기인하였기에, 마치 보깡송(Jacques Vaucanson, 1709-1782)이 그 당시 제작했던 자동장치들에서처럼, 각각 자기의 구조와 자기의 고유한 힘을 가지고 작용한다. 그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단지 합의하는 것, 유기화된 물질이 운동의 원리를 부여받은 것, - 그런데 이 운동의 원리는 유기화된 물질을 그렇지 않은 물질과 차이 나게 한다. - 그리고 모든 것은 동물들 속에서 다양한 유기체화 작업에 의존한다는 것, 이러한 것은 실체들의 에너지와 인간의 에너지를 점치기에[알아맞히기에] 충분하다.(p. 69)” (390)
돌바흐의 자연의 체계(Système de la nature, 1770)에서 이 주제가 가장 잘 나타난다. 주제는 이오니아학파의 고대 사유 속에 집중되어 있다. 이런 사유에 반대하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만큼이나 투쟁하였다. 그리고 돌바흐는 이렇게 표현한다. “운동은 물질의 본질로부터 필연적으로 흐르는 하나의 존재 방식이다.”그리고 그는 물리학자들을 질책하였다: 즉 그들은 데카르트처럼 물체들을 관성체들[타성체]처럼 보았고, 그리고 물체들의 낙하에 상상적 외적 원인이 있다고 가정하기를 (예를 들어 무게있는 물체들의 경우에서) 더 많이 좋아했다. 그들은 물체들에게 내적 원인을 부여하는 관념만을, 즉 그 상상적 외부 원인의 관념만을 가졌다. 돌바흐 자신은 물질의 본질로부터 뉴턴의 중력 작용을 연역할 수 있다고 자부하였다. 내속하는 운동에 의하여, 돌바흐는 고려했던 물질에 따라서, 질적으로 다른 어떤 것을 이해했다. 왜냐하면, “각 존재는 개별적인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고 또 움직일 수 있다‥… 각 존재는, 적어도 더 강한 원인이 그의 작용을 중단하지 않을 경우에, 자기에게 고유하고, 또 법칙에 따라서 항상적으로 작용하는, 운동의 법칙들을 갖는다.(p. 17)” 돌바흐는 무엇보다 먼저 물질의 동질성에 대한 데카르트의 오류룰 강조하였다. 이런 물질의 동질성에 반대하여, 그는 분간불가능성들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원리를 매우 크게 찬탄하여 인용한다. 그는 이 원리의 정식을 빌핑거(Georg Bernhard Bilfinger, 1693–1750)에게서 빌려왔다. 일단, 질적으로 다른 성질들을 부여받은 물질들이 제기되면, 돌바흐는 각 존재가 단순한 존재들의 혼합체이라고 생각한다. 그 존재들의 본질 전체는 존재들의 혼합 속에 있다. (391)
많은 그의 동시대인들처럼, 돌바흐가 파악하려고 애쓴 것은 물질로부터 일련의 본질들의 계열이다. 그러나 그는 얼마나 그것의 주제가 자연 종교를 소용없게 하는지를 제시하기 위해서 이외에는, 소위 말하는 자연 철학에 관하여 전혀 강조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그는 신의 현존을 증명하기 위하여 철학자들에 의해 사용된, 그 당시에 거의 유일한 논증을, 즉 최종 원인들에 대한 논증을 허물어버린다. 자연 속에서 질서는 엄격하게 필연적인 자연의 부분들의 배치[배열]일, 즉 사물들의 본질에 근거한 배치일 뿐이다. 예를 들어 계절들의 아름다운 정돈[배열]은 신적인 계획의 효과[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중력작용의 결과이다. (391)
그러나 돌바흐는 특히 이런 관념들을 도덕적 세계에 적용하기를 바라면서, 어떻게 관념들이 실증 종교 전체로부터 전적으로 분리된 새로운 도덕을 세워야 하는지를 제기하고자 한다. 그 자신을 포함한 인간은 물질의 혼합이며, “그것[혼합]의 배열이 유기체화라고 이름 붙여지고, 그리고 그것[혼합]의 본질은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다.(p. 12)” 각 인간의 정신은, 체질(tempérament)에 의존하면서, 자기의 자연적 감성을 따라간다. 자기 활동성의 유일한 법칙은 쾌락을 즐기고 고통을 두려워한다. 인간은 자기와 다르고, 또한 그들과 불평등한 감성적 존재들로 둘러싸여 있다. 인간들이 서로 서로 요구하는 필요에 의해, 사회를 지탱하게 하는 것은 이런 불평등이다. 그러나 물론 “인간들은, 자기들에게 제공되는 쾌락에 의해 자신들을 안녕을 규정할 때만 자기들과 비슷한 안녕에 기여 한다. 인간들은 자신들에게 잘못을 행하는 때에는 안녕에 기여하기를 거부한다. 이러한 것이 원리들이며, 이 원리들 위에서 사람들은 인간 종의 모든 개체들에게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도덕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따라서 도덕은 타인의 안녕을 원하는데 있다.그런데 돌바흐에게서 이런 장점은 사회적 기능작용의 자연적 귀결이 전혀 아니다. 반대로 “땅[토지]의 잠재력들은 도덕에 보상들과 수고들의 지원을 할 차비가 있음이 틀림없다. 토지의 잠재력들은 이런 지원의 수탁자인 셈이다(p. xix).” 따라서 도덕적 문제는 법제정의 문제이다. 즐거움이 고결하고 또한 다른 이들에게 유용한 작동을 완수하도록 인간에게 추진했던 것처럼 그러한 상벌의 입법체계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그는 정치적 재조직화를 가정하며, 그 재조직화에서 그 당시까지 종교적이었던 교육의 힘은 세속의 힘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 계명되고 편견 없는 세속적 힘은 인간들의 행동 동기들과 더불어 사회적 유용성을 인식한다. (392)
사회적 규제 없는 도덕은 없다. 이것은 겉보기들에도 불구하고 돌바흐의 관점들과 사회와 매우 깊이 떨어져 있는 에피쿠로스학자들의 지혜의 종족들의 관점 사이를 완전하게 분리하는 한 관점이다. 돌바흐는 그 종교와 마찬가지로 순응주의[영국의 국교주의]를, 가장 확실하고 가장 추론적인 수단들을 가지고 얻기를 바랐다.그리고 그의 책들은 사회적 유용성의 관념으로 가득 차 있다.이런 점에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선언하는 라 메트리와 아주 다르다. 도덕적으로 “본의 아니게 다른 자들과 닮아야하고, 살아가야 하며, 그들과 거의 같이 생각해야 한다. 얼마나 희극인가?” (392)
이로부터 종교에 반대하는 악착같은 전투가 나온다. 그 종교의 철학이 제 자리를 잡아야만 한다. 이 전투에서 돌바흐는 그와 동시대 철학자들과 공통하는 무기들을, 즉 신학적 논쟁들의 부조리, 비관용과 그것의 위험, 크리스트교의 반자연주의 등을 틀림없이 이용했다. 그 종교는 금욕주의를 설교한다. 또한 그 종교는, 인간이 자기의 자연 속에 있는 욕망하는 그 무엇을, 욕망하지 않기를 원한다. 그러한 원리들은 “어떠한 효과도 생산하지 않는다. 또는 연속적인 전투에 의해 인간을 절망으로 단지 환원할 뿐이다. 그런 원리들은 인간의 심장, 그의 악덕들, 그의 습관들의 정념들 과미신이 인간을 짓누르게 한 공상적 불안들 사이에서 연속적 전투를 자극해 왔다.” 그러한 것은 완전히 임의적인 원리들인데, 왜냐하면 그 원리들은 “초자연적 존재의 공상적 의지들 위에 기초 지워져 있다.(p. 145)” 그리고 마치 새로운 도덕의 원리들처럼, “사회 속에 살아있는 인간적 존재들 사이에 존속하는 변할 수 없는 영원한 연관들 위에 기초 지워져 있지는” 않다. 사람들은, 영혼의 용어들, 미래적 삶의 용어들, 보상하고 벌주는 신의 용어들과 같은 용어들을 벼리는[단련하는] 만큼, 원리들 그 자체에서는 그 만큼 비효과적인 원리들에게 힘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또한 인간을 행위하게 하는 것은 즐거움의 매력이며, 그러나 순수하게 상상적인 즐거움의 매력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디로 데리고 가길 바라는지를 발명품들을 통해서 인간을 인도하는 이런 자들이 아니라면, 즉 성직자들이 아니라면, 누가 이러한 발명품들을 단련하고 유지할 수 있겠는가? 종교가 사제직의 발명품이라는 것이며, [게다가] 사제직은 종교에 의해, 즉 종교가 부여한 예식들과 실행들에 의해, 종교의 힘 속에 인간들을 유지하기로 결정되어 있는 것인데, 그러한 것은 톨랜드(1670–1722)의 주제였으며, 돌바흐에게 이행되었다. (398)
엘베시우스의 정신에 대하여(De l’Esprit, 1758)란 책은 본질적으로 다른 학설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 책은 지적인 소재에서 올바흐가 도덕에서 지지했던 주제들의 적용[응용] 방식이다. 그가 제기한 문제는 다음과 같다. 정신 속에서 모든 것은 자연적[신체적] 감성으로 제공된다. 그런데 한편으로 신체적 감성은 모든 인간들에게서 동일하며, 심지어는 많은 동물에게서도 동일하다. 다른 한편, 어떤 거대한 다양성의 정령들(d’esprits)이 있는데, 이 정령들은 자기들의 자연과 자기들의 가치에 의해 차이가 있다. 어떻게 그러한 다양성이 동일한 출발점에서 생겨날 수 있는가?이런 차이는 이런 저런 대상을 뽑아 올리는 주의와 그 주의의 방향잡기의, 다소 큰, 용량(la capacité)으로부터 무매개적으로 유래한다. 그런데 이런 용량과 방향설정은 오직 정념을 근거(raison, 이치)로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정념적으로 되기를 그만두자마자 어리석게 된다.” 결국 정념 그 자체는 즐거움을 추구하고 고통으로 달아나기로 이끈다. 말하자면 다양한 정령들의 기원으로 되어 있는 신체적 감성에로 이끈다. 정신의 가치에 관한한, 그 가치는 정신에 내속하는 어떠한 것에 있지 않고, 오히려 단지 다른 인간들이 가치를 만드는 평가 속에만 있다. 이런 평가는 사람들이 일부를 이루는 사회 구성원들의 일반적 관심에 따라 측정된다. 구두쇠는, 승리한 군대의 지휘자만큼이나 많은 지성과 정신을 아마도 자신의 조합들 속에 두고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평가에서는] 후자[지휘자]가 전자[구두쇠]보다 훨씬 우월하다. 각 사회는 – 그 사회의 자연에 따라, 세상, 궁정, 문인들과 같은 사회는 – 정신에게 우월성을 부여한다. 그 정신은 그 환경을 변화시키면서, 자기의 가치를 상실할 것이다. 그리고 마치 자기가 사는 사회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 각각의 개인적 가치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이 사회는 사회가 좋게 평가하는 정신들(les esprits)을 생산하는 정념들의 선동자(l’inspiratrice)이다. 이로부터 엘베시우스는 철학자의 사회적 역할을 연역한다. 철학자 또는 과학자는 개별사회의 관심[이익]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익]들을, 진실로 보편적 관심들을 목표로 하는 유일한 자이다. “야생의 상태로부터, 지금 도래된 사회들을 완전한 점에까지 끌어올리는 자들이 철학자들이다.” 야생인의 “편견들”은 (따라서 엘베시우스는, 조상들에게 희생제의 또는 맏물[첫수확물]들의 봉헌과 같은 예식들을, 마치 19세기의 사회학이 사회 연결의 상징처럼 생각했던 것과 같이 이해했다) 성직자들 계급의 개별적 이익에 의해 보과되었다. (394)
사람들은 정신의 내재적이고 기본적인 성질들의 평가절하에서 엘베시우스보다 더 멀리 갈 수 없다. 천재 그 자체는 사회를 위해서 그가 갖는 가치 덕분에서 그러한 것은 아니다. 국가적 인물들을 명망 있게 하는 것은 상황들이다. 과학자들 또는 철학자들의 발명의 선물들에 관하여, 앞선 선구자들 없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해야만 한다. 이들은 연속자[계승자]들일 뿐이다. 보브나르그의 주제들에 반대는 정당하다. (394)
정신은 이점에서 전적으로 바깥에 있으며, 외부적 조건들에 완전히 의존적이라 할지라도, 교육은 자기[교육] 앞에 어떠한 저항도 발견하지 못하고, 또한 교육은 정신들을 자기 방식대로 형성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하여(De l’Homme)(1772 출판)란 논제는 (부분적으로 루소의 에밀(1762)에 반대하여) 교육형성의 능력을 제시하기 위하여 전적으로 쓰여졌다. 그는 찰나를 의심하지 않는다. 인간의 정념이 (그리고 귀결로서 정신 전체가) 생리학적인 자연과 조직화[유기체화]를 어떤 방식으로든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교육의 상황들에, 말하자면 사람들이 그에게 적용했던 상벌들의 체계에 기인한다. 사람들은 교육의 우상숭배를, 정신들의 인위적 제작 작업의 우상숭배를 더 멀리 밀고 갈 수 없다.돌바흐 그 자신은 [인간들에게] “날아가거나 또는 굳어지는 반항적인 기질들(des naturels)”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엘베시우스를 비판한다. 그 기질들을 아무것도 개선할 수 없다. (394)
가끔 유물론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에 대한 실천적 귀결들의 책임을 피하고자 애쓴다.아마도 엘베시우스는,무지는(그는 종교적 편견을 이해한다) 주제들에 대한 충실성을 전혀 보장하지 못한다고, 그리고 진리의 계시는 그것을 말하는 자에게만은 불운이라고, 진리의 인식은 항상 유용하다고, 그것의 계시는 결코 국가들을 혼란하게 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거꾸로 라메트리에게서는 유물론이 마치 순수 사변적의 학설처럼 소개되었는데, 그 학설이, 진리에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품행의 규칙들에 관한 어떠한 영향도 있을 수 없고 원하지도 않는다. “유물론자들은, 인간이 기계일 뿐이라고 증거 해봐도 소용없으며, 인민은 거기에 대해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인간이 그걸 믿었을 때, 얼마나 큰 잘못인가? 법칙들의 근엄함을 덕분에, 인간은, 사회가 이 무모한 체계를 이끌 것 같은 [종교의식의] 제단들에 대한 파괴를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더라도, 스피노자주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좀 더 멀리가면, 그가 모든 인간적 작동들의 기계적 필연성으로부터 얻었다고 생각하는 증거들에 대해 말하면서, 그가 말하기를 “모든 문제들은, 기하학자들의 머리 속에서만 현존하는, 수학적 관념들의 분류 속에 놓을 있다.”고 한다. 기계-인간의 이론은 실천으로 거의 역전할 수 없어서, 사람들은 가장 높은 기하학의 형이상학적 모든 진리들에 대해서만 그것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품행은 사회적 굴레를 필요로 한다. 진리는 사변을 필요로 한다. 돌바흐가 폭로된 크리스트교(Le christianisme dévoilé, 1766)의 앞부분에서 자기에게 반대했던 자들에게 행한 대답의 의미이다. 이 자들은 “종교가 인민에게 좋든 나쁘든 필요하다고 한다. 또한 종교는 단순하고 조잡한 정신들에게는 필연적인 굴레이다”고 한다. 그가 말하기를 “인민은 추론하지도 읽지 않는다… 만일 인민들 가운데 철학적 저술을 읽는 상태에 있는 인간이 한 인간이 있다면, 그 인간은 …을 두려워하는 사악한 자가 더 이상 아닐 것이다: 혁명을 행하는 열광자들이다…. 식견있고, 이익을 떠난 분별있는 인격들은 편안(le repos)의 친구들이다.” 사람들은, 매우 밝은 것으로 나타나는 이런 사상 속에 어떤 우유부단이 지배하는 것을 본다. 거기에는 마치 낭패(un désarroi)와 같은 불화의 감정이 있고. 사람들은 사변과 실천의 요구들 사이에 이 불화를 어떻게 극복할지를 알지 못한다. 이법에 따라 발견되는 대로, 세계는 우리 행동을 규제하는 어떤 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대략 그려져서, 우리는 이런 역사의 나머지 속에 거대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 (395)
이 책들은 가열찬 논쟁들을 블러 일으켰다. 이 논쟁의 마찰들은 학설들의 역사에 관심을 일으키지 못했다. 게다가 이런 마찰들은 재빨리 망각 속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마찰들은 특히 메마르고 지겨운 것 같았다. 괴테(Goethe, 1749-1832)가 말하기를 “우리는, [돌바흐의] 자연의 체계(Système de la nature, 1770)에 대해 말하면서도, 이러한 책이 위험할 수 있었다고는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에게 매우 흐릿하고, 매우 킴메르인같으며, 송장같이 나타나기에, 우리는 그런 관점을 유지하기 어렵다.” 비평가들은 유물론적 자연주의가 정부, 종교, 사회, 교육과 같은 전통적 옛 사물[사실]들을 추론적 구축에 의해 대체할 것을 목표로 하였다고 매우 일찍이 보았다. 베르지에(Nicolas Bergier, 1567-1623)가 주목하기를, “백번이나 철학자들이 정치와 정부의 계획들은 그렸는데, 매 번이 그들은 계획에 좌초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그것들을 상상했던 대로, 인간들을 위해서 계획들을 세웠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이 있는 그대로도 아니고, 아제[미래]에 있을 것 인대로도 아닌 인간을 위해서 계획들을 세웠기 때문이다.”
비판적 검토에서 가장 깊이 있는 것은 홀란트(Georg Jonathan Von Holland, 1742-1784)의 것인데, 그의 저술 철학적 반성들(Philosophische Anmerkungen, 1773)(Réflexions philosophiques, 1772)에서이다. 홀란트는 무신론에 반대하는 손쉬운 웅변조를 젖혀두고서, 그는 특히 유물론적 독단주의를 제시하는데, 이 독단주의가 그 뿌리에서도 또는 로크(1632-1704)와 흄(1711-1776)으로부터 나온 비판적 운동에서도 대립 된다(다른 증거로서, 만일 그 증거가 필요하다면, 유물론을 고려해서 경험론의 독립의 증거로서). 돌바흐는 자연을 마치 서로서로 무한히 연역되는 사실들의 필연적 연쇄처럼 표상[재현] 한다. 그런데 흄이 원인성은 필연성이 아니라 [습관의] 일관된 연결만을 함축한다는 것을 주목하게 했다. 그리고 돌바흐가 가정한 것을, 즉 운동의 법칙들의 기하학적 연역을 어느 누구도 실현할 수 없었다. 현실적인 무한 계열에 관한 한, 이 계열은 “모순을 함축한다. 왜냐하면 계열의 항들 의 수는 가능한 가장 많은 것일 것이기 때문이고, 가능한 가장 많은 수는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p. 21)”더욱이 현실적 결과의 충분 이유는 무한히 더욱 멀어질 것이며, 이는 어떠한 몫[항]도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사람들은 칸트의 안티노미에 대한 유한한 주제들의 선들(les lineaments)을 본다. 홀란트는 그래도 역시 인력을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형이상학적 존재로, 즉 물체들 속에 남아 있으면서도 변형이 일어나지 않는 장소 속에서 작용하는 존재로” 변형 작용하는데 관용 없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뉴턴의 예상 참여된 항의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그리고 결국 홀란트는 특히 경험주의가 도덕적으로 이기주의로, 또한 영혼 정신성과 자유에 대한 부정으로 귀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지 않는다. 반면에 반대되는 주제들은 태생적 관념들에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허치슨(1694–1746)은 경험주의자로서 친절(la bienveillance, 자비)을 마치 도덕 원리처럼 주장한다. 단지 돌바흐는 운동의 혼성[조성]이 사유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했다. 철학과 종교 사이에 적대적 관계에 관한 한, 홀란트는 종교가 인간 정신의 한 국면이라는 것을, 그리고 종교가 정신 전체와 더불어 진보하거나 또는 몰락하는 것이라는 것을 주목하게 했다(II, p. 202). 그러나 종교는 진보를 막지 못하고, 종교가 진보를 생산하지도 않는다. “과학들의 진보는 종교에 의해서가 지체된 것이 아니라 야만족들의 침공에 의해서이다… 정치적 사건으로서 콘스탄티노플의 몰락을 일으킨 것은 그것(elle 야만족의 침공)이 아니며, 우리는 그 정치적 사건에 힘입어서 과학들과 예술들의 르네상스를 이루었지만 말이다. 그가 덧붙여서 말하기를, 종교의 상태는 깊이 있게 인간 정신의 혁명들을 따라간다.이번에는 그 혁명들의 차례에 따라 인간 정신은 자신에게 전반적으로 낯선 수천 상황의 조합들에 의존한다.” (397)
모페르뛰(Pierre Louis Moreau de Maupertuis, 1698-1759)는 1740년 베를린 아카데미 의장이 되었고, 유물론자들의 여백에 거의 조금만 남아있었다. 그의 활동의 일부는 순수 과학, 수학들, 천문학, 지리학에(그는 지구의 모양을 규정할 임무를 띤 원정대를 이끌었다) 헌신하였다. 데카르트에 반대하여 뉴턴의 옹호자인 그는 체계를 구성하는 것과 “우주의 모든 부분에 대해 질서와 의존을 따르는 것이 인간 지성의 그 위에 있다”고 믿었다. 거꾸로 그는 라이프니츠의 방식에 따라, 보편 작용과 보편 인력보다는 덜한, 자연의 일방적인 법칙들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목적성의 원리를 사용했다. 우선 바우만 박사라는 익명으로 라틴어로 출판된 작품 속에서(Dissertatio inauguralis metaphysica, de universali naturæ systemate, 1756), 그는 디드로가 자연의 해석(1753)에서 우호적으로 제시하고 그리고 루소가 「신앙의 고백」에서 마땅찮게 여긴, 유물론을 지지하였다. 모뻬르뛰가 말하는 사유와 너비는 결코 본질들을 지칭하지 않으나, 모순 없이 주체에 속할 수 있는 성질들을 지칭한다. 게다가 주체의 본질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가 사유와 물질을 합의해야 하는 혐오는, 사유가 마치 우리들 자신의 지성과 비슷한 지성처럼 우리들에 의해 생각되었던 사실에서 온다. 진실로 (그리고 여기서 또 다시 라이프니츠의 영향을 배반한다), 사유 속에는 명석한 예지에서 가장 모호한 감각작용에 까지 무한한 정도 차이들이 있다. 모뻬르뛰의 유물론은 일종의 물활론(hylozoïsme)이다. 그 물활론은 생명과 감성을 각 물질적 분자에게 부여하고, 그리고 그것은 사유 전체 또는 상위 생명은 요소적 분자들의 교감(consensus)으로부터 온다고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가장 최근의 해석가인 브뤼네(Pierre Brunet, 1893-1950)에 따르면,이런 학설은 여러 측면에서 버클리의 비물질주의와 이웃한다. 왜냐하면 모뻬르뛰는 너비를 실체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너비는 성질들과 동일한 자격으로 단순한 표상이다. 거기에 일종의 비결심(l’indécision, 우유부단)이, 즉 모뻬르뛰 사유의 특성이 있다. (397) (57OLC)
3절 뷔퐁과 자연주의자들 – Buffon et les naturalistes 398.
뷔퐁이란 인물이 영향을 미치는 자연주의자들의 작업들 속에서 동일한 정신의 현존을 간단하게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뷔퐁(Georges-Louis Leclerc, comte de Buffon, 1707-1788)은 1738년 이래로 왕립식물원(Au Jardin royal des plantes)의 관장이었으며, 1749년에서 1788년에 이르기까지 자연사: 일반사와 개별사와 더불어 왕의 전시실의 묘사자연사: 일반사와 개별사와 더불어 왕의 전시실의 묘사(L’Histoire naturelle, générale et particulière avec la description du Cabinet du Roi)을 출판했다. 자연주의자들은 그를 과학자로서라기보다 작가와 철학자로서 간주했다. 어느 선량한 판사가 말하기를 “그의 작품은 린네(1707-1778)의 작품과는 반대 명제로 되어 있다”고 한다.
위계적인 분류작업에 대해, 뷔퐁은 계열(la série) 또는 사슬(la chaîne, 연쇄 고리)라는 용어를 대립시켰다. 이 용어는 종들을(마치 짝짓기에 의해 무한정한 재생산에 대해 허용할 수 있고 신체적으로 동일한 동물들의 그룹처럼) 마치 실재적 유일한 단위들인 것처럼 간주하면서, 종들을 유일하고 연속적인 하나의 실로서 배열하기를 제안한다. 그 실에서는 각각의 종은 멀리 떨어져 있는 종들보다 자기의 이웃하는 종들에 더 많이 닮는다. 질적인 연속성의 또는 “충만한 형상들”의 라이프니츠 공리는 마치 규칙들처럼 고려되었다. 그 규칙들은 자연은 자기의 재생산에서 따랐고, 그리고 그 규칙들을 인간 정신이 재발견해야만 했다. 뷔퐁이 진술했던 대로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은 있다고 가정해야만 한다.” 뷔퐁 자신은 살아있는 종들의 고정성에 찬성자이지만, 그는 자연의 세기들(Époques de la nature, 1779)에서 종들이, 지구의 냉각기가 원했던 주거지의 조건들을 제시했던 경우들에 따라서, 하나하나 창조되었다고 표상했으며, 그럼에도 그는 살아있는 전형의 단위(통일성)을 믿었다. 이 전형은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변화되었으며 또한 자연적 계획의 통일성과 다른 것이 아닌 종들의 연속성에 의해 표출되었다. 사람들이 알다시피, 계열의 관념은 18세기에 거의 급하게 꺼져가는 종들의 후손의 관념과 아무 연관이 없다. 계열의 관념은 오히려 자연적 또는 신적인 계획의 찰나들에서 이상적 의존을 주장하는데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도댕(Henri Daudin, 1881-1947)과 더불어말해야 한다: 즉 이런 이론의 요청은, 생명계의 현실적 상태가 자기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생명계를 그 상태로 이끈 과정들의 규정된 상황들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 상태 그 자체에 내속하는 어떤 연관들 속에서”이다. (398)
게다가 정신의 관점은 도방똥(Louis Jean-Marie Daubenton, 1716-1799)의 비교해부학의 탐구들 속에서 그 당시 실증적 토대를 갖추었다. 이 탐구들이 다른 그룹들에서 파악된 기관들 사이에서 아주 본질적 연관들을 제시하여, 이 기관들은 차이들로서 확립해 놓은 “방법들”에서 그 작은 차이들을 지울 수 있을 정도이다. 디드로가 “모든 존재들의 원형”인 첫 존재는 아마도 있을 것이라는 관념을 추겨 세웠던 것은, 뷔퐁의 자연사의 4권에 삽입되어 있는 도방똥의 작업들을 인용한 후이다. 생명있는 종들은 이 존재의 계속적인 변신들이다. (399)
다른 발견은 계열의 용어에, 라이프니츠에게서 발견했던 국면과는 충분히 다른 국면을 보태주러 온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모든 것은 모든 것 속에 있고, 모든 것은 무한히 조직화된다고 한다. 그는 형태들의 올라가는 계열에서 단지 혼합에서 구별에로 이행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팔을 가진 폴립(Polype)종에서 동질적 구조를 가진 존재들 발견하면서, 보네(Charles Bonnet, 1720–1793)는 이질적인 부부들 없이도 살아있는 존재들이 있었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올라가는 항들의 계열을, 구별하면서 연속적 진보의 내속적 특성에 의해,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임의적이라 할지라도, 가장 완전한 것[형태]라고 간주하는 계열의 한 항을 참조함에 의해서 정의할 수 있었다. 보네에게서 이런 존재는 인간이다. 계열 속에서 동물들을 자리 매김하는 것은 인간적 조직화와 더불어 닮은 점이 가장 많은지 또는 가장 적은지에 있다. (399)
이런 개념작업은 또한 로비네(Jean-Baptiste-René Robinet, 1733-1820)의 개념작업이다. 그의 저작인 존재의 형태들의 등급에 대한 철학적 고찰들, 즉 인간 만들기를 가르쳐주는 자연에 대한 시론들(Considérations philosophiques de la gradation des formes de l'être, ou les essais de la nature qui apprend à faire l'homme, 1768)에서 로비네는 훨씬 더 많은 야망을 가졌는데, 왜냐하면 그는 문제 중인 계열이 자연의 모든 존재들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로비네(게다가 마치 뷔퐁처럼)는 르네상스의 반(反)기계론의 옛 관념들을 발견하면서, 살아있지 않는 어떠한 물질도 없다고, 말하자면 영양물질일 수도 있고 재생산과 성장의 물질일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디드로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연금술사들의 관념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자연이 스스로 제기한 문제는 세 가지 기능들을 가능한 한 가장 완전함과 더불어 실현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 문제의 보다 우아하고 보다 복잡한 해결책이다. 로비네에 따르면, 인간으로 향한 진보는 일종의 해방이며, 활동성의 점진적인 자유화이다. 이 활동성은 실체이며 또한 자기 에너지를 펼치기 위해 물질을 이용한다. 무기물에서활동성은, 이런 모든 활동성의 조작이 물질적 주체에 연관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물질에 예속되어 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은 생명체에서 자발적인 운동을 주목하였다. “사람들은 말할 것인데, 활동적 권능은 너비있고 단단하고 불가침투적인 덩어리(la masse)그 위로 스스로 높이기 위하여 노력한다. 활동성은 이 덩어리에 연쇄되어 있으나, 활동성은 그것의 멍에를 종종 감당해야만 했다.” 인간에게서 물질은 활동성의 기관일 뿐이다.그리고 사람들은 인간에게 도달한 진보만을, 물론 유한하지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활동성이 더 이상 기관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위상, 즉 순수 지성이 된, 전적으로 탈물질화된, 위상을 가정해야만 한다. 따라서 볼수 있는 세계는 볼 수 없는 세계와 이중적으로 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런 계열의 관념 덕분에 어떻게 우리가 고대 이래로 이미 알고 있었던 자연 철학의 전형이 재도입되었는지를 보게 된다.자연 철학은 생명체를 중심으로 놓으면서, 이 속에서 확장되고 그리고 물질을 넘어서 순수 정신으로 펼쳐진다. (400)
게다가 계열의 주제는 경험들의 증가에서 오는 다른 종류의 난점들에 부딪히게 된다. 존재의 계열은, 만일 모든 것이 인간을 향하는 경향이 진실이라면, 가지치기함이 없이 선으로 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경험은 보네 자신을 “자연의 계단은 단순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고, 하부[다음] 가지들로 밀고 나갈 수 있을 중요한 가지들 중에서 한편의 가지 또는 다른 한편의 가지로 뻗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로 이끌었다. 이러한 것이 또한 자연주의자 팔라스(Peter Simon Pallas, 1741-1811)의 견해였다. 그의 견해로는 선(線)의 계열이 나무의 가지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물과 식물이라는 두 기둥줄기들은 식충류(le zoophyte)로부터 분리된다. 그리고 곤충류와 조류의 두 가지들은 동물의 두 가지로부터 분리된다. 뷔퐁은 약간 더 복잡한 이미지, 즉 그물망의 이미지를 채택한다. 이런 이유로, “자연은 모든 방향으로 향하지 않는 한 발걸음도 행하지 않는다.” 그리고 주어진 전형으로부터 자연은 다른 모든 전형들의 종들에게 연결하는 종들을 투사한다. 예를 들어 4족 동물은 조류들과 비슷한 종들을 허용한다. 마치 박쥐가 파충류와 비슷한 종들을 허용하듯이,마치 개미핥기가… 등등.
이런 이미지의 각각, 즉 연쇄[사슬], 가지 친 나무, 그물망 등은 아주 다른 철학적 기호작용(un signification)을 갖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슬은 최고 전형의 약화방식, 즉 하부등급에 의해 얻어진 형태들의 계열이다. 이것은 신플라톤주의의 옛 이미지이다. 나무는 상위 전형을 실현하려는 경향성, 즉 가끔은 미래 없이 이탈하는 형성 작용으로 방향을 잃은 경향성이다. 그물은 마치 뷔퐁이 여러 번 이것을 이해하게 했던 것처럼, 가능한 모든 전형들의 각 등급 정도에 맞게, 그물이 그 정도를 허락하는 한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이런 분화들의 가운데서, 문제의 제기 속에서 나타나는 공통 성격이 있다는 것이다. 형태들 또는 존재들의 전형들을 고려하면서. 이것들 사이에는 쉽고 편안한 연결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연결은 형태들의 이상적 의존성을 정신에 표출한다. 사람들은 자연에게 또는 신에게 모호하게 부여했던 이 형태들의 실재적이고 효과적인 생성[창조]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았으나, 오히려 한 형태로부터 다른 형태로 형태들의 분출을, 즉 한 형태 안에 다른 형태들의 혼융을 두려워했다. (401)
4절 보스코비치의 동력학 Le Dynamisme de Boscovich 401
보스코비치(Rouder Yossif Boscovich, 1711–1787)는 1711년에 [크로아티아]의 라구사(Raguse it. Ragusa)에서 태어나, 1725년에 로마의 제수이트에서 수련기를 보냈다. 그는 지리학, 광학, 천문학에 전념하였다. 그는 또한 기술자이며 고고학자이기도 하였으며, 나중에는 시들을 썼다. 그의 작품 자연 철학 이론: 자연에서 현존하는 힘들의 정당화를 위한 작성(Philosophiae naturalis theoria redacta ad unicam legem virium in natura existentium)은 자연의 역동론적 이론에 대한 진술이며, 그 이론의 일반적 영감은 우리가 막 진술했던 이론들과 이웃하는 것이다. 로크(1632-1704)의 제자 계열로서 보스코비치는, 우리가 실체들을 인식하지도, 심지어는 사물들의 활동적 권능들도 인식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권능으로부터 힘을 구별한ㄴ다. 그리고 그는 뉴턴(1642-1726) 덕분에, 힘을 운동에 대한 규정작업에 의해서만 정의하기에 이른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이 적어도 두 물질적 점들을 고려할 때만, 사람들은 힘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즉 두 점은, 이것들의 거리에 따라 서로 가까워지든지 서로 멀어지든지, 규정된다. 그리고 “규정작업 자체를 사람들은 힘이라 부른다. 따라서 이것은 힘의 양태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규정작업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규정작업자체로]부터 힘이 유래하며, 그 힘의 크기는 거리들의 변화와 더불어 변한다.”
이 힘은 당기는[인력] 힘인데, 두 점의 거리가 규정된 한계를 넘을 때, 그 힘은 이 한계 아래에서 밀치는[측력] 힘이 된다. 우주는 상호 당기고 밀치는 점들의 집합이다. 이 점들의 각각은 힘의 중심이며, 점 그 자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한 점과 다른 점들의 연관들 속에 있다. 각점은, 다른 점들에 의해 당겨지고 밀쳐지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다른 점들을 당기고 밀친다. 이런 개념 작업은 칸트의 물리학적 모나드론(Monadologia Physica, 1746)의 개념작업과 어떤 유비가 되나, 이것과 구별된다. 왜냐하면 보스코비치의 힘의 중심은 말하자면 어떠한 내부도 없고, 자발성도 없기 때문이며, 그리고 중심이 부분이 되는 전체 바깥에서 그 중심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막 연구했던 자연의 개념작업들에서처럼 아주 다른 방식일지라도, 각 존재의 자연[본성]은, 전체[일체] 속에서 차지하는 자리의 요구에 의해 규정된다. (402) (16:27, 57O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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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Bibliographie 402-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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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 뷔퐁(Georges-Louis Leclerc, comte de Buffon, 1707-1788), 프랑스 자연학자, 수학자, 생물학자, 우주론자, 철학자, 작가.
1713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 프랑스 빛의 세기에 백과전서파 대표자. 철학자, 작가.
1717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 «Jean le Rond D'Alembert», 1717-1783) 프랑스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백과전서파. ou « Dalembert1 », voire « Dalambert2 », est un mathématicien, physicien, philosophe et encyclopédiste français, né le 16 novembre 1717 à Paris où il est mort le 29 octobre 1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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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 르누비에(Charles Bernard Renouvier, 1815-1903) 프랑스 철학자. « uchronie » 용어 창안, 신-비판주의를 기초하다.
1818 뒤 브와-레이몽(Emil Heinrich du Bois-Reymond, 1818-1896) 독일 생리학자, 전기생리학의 창설자. Rede über Diderot (dans Reden, Bd I, Berlin, 1875).
1828 랑게(Friedrich Albert Lange, 1828-1875), 독일 철학자(신칸트학파). 교육학자, 경제학자, 사회주의자. 라메트리의 사상을 복원하였다.
1831 브와-레이몽(Paul du Bois-Reymond, 1831-1889), 의학과 수리 물리학을 공부했다. 프러시아 수학자.
1835 에블랭(François Evellin, 1835-1910) ENS, 프랑스 철학자. Quid de rebus corporeis vel incorporeis senserit Boscowich(La Nature et les propriétés des objets physiques et métaphysiques dans la théorie de Boscovich), Paris, Lutetiae Parisiorum, G. Baillière, 1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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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 꼴리뇽(Albert Collignon, 1839-1922) 프랑스 작가, 기자, 변호사 Diderot: sa vie, ses œuvres, sa correspondance, 1895
1845 케빠(Nérée Quépat, Henri René Rémi Paquet d'Hauteroche, 1845-1927), 프랑스 조류학자, 역사가.
1846 뒤끄로(Louis Ducros, 1846-1935), 프랑스 작가. Diderot, 1894.
1856 플레하노프(Gueorgui Plekhanov, 1856–1918) 러시아 제국 철학자. 정치가, 기자. 작가. 역사가, 사회학자.
1867 케임(Albert Keim, 1876–1947), 프랑스 작가. 문학박사, 톨스토이 전문가.
1869 모보(Julien Mauveaux, 1869-1925) 프랑스 작가, 시인. 법원 사무국 직원(greffe du tribunal de Montbéliard (Doubs), 프랑마송.
1881 도댕(Henri Daudin, 1881-1947), 철학교수자격 통과, 생물학 탐구, 보르도 대학 철학사교수
1882 베르트랑(Joseph (Louis François) Bertrand, 1822-1900) 프랑스 수학자, 경제학자, 과학사가. D’Alembert, 1889.
1885 위베르(René Hubert, 1885–1954), 프랑스 철학사가, 교육이론가. Les Sciences sociales dans l'Encyclopédie. La philosophie de l'histoire et le probleme des origines sociales, 1923.
1886 커슁(Max Pearson Cushing, 1886-?) 미국철학자?, Baron d’Holbach, 1914.(New York).
1891 브와시에(Raymond Boissier, 1891-?) La Mettrie, médecin, pamphlétaire et philosophe, 1931.
1892 에르망(Pierre Hermand, 1892-1916)[스물넷], Les idées morales de Diderot, 1923(유고?, 사후출판)
1893 브뤼네(Pierre Brunet, 1893-1950), 프랑스 과학사가, 18세기 전문가. Maupertuis, 1929(2권)
1899 네델코비치(Dusàn Nedeljkovi, Dušan Nedeljković, Nedelkovitch,1899-1984) 유고슬라비아 철학자, 사회학자.
1900 쿤츠(Ludwig Kunz, 1900–1976) 독일 작가, 가지, 편집자. Die Erkenntnisstheorie d’Alembert’s, Archiv für Geschichte der Philosophie, XX, 1907.
1900 메나르(Pierre Mesnard, 1900-1969) ENS, 프랑스 대학교수, 철학사가, 성격학자(caractérologue).
1904 나빌(Pierre Naville, 1904-1993), 스위스 프로테스탄트 출신, 프랑스 작가, 정치가, 사회학자, 공산당에서 트로츠키파로.
1904 깡길렘(Georges Canguilhem, 1904-1995) 프랑스 철학자, 의학박사, 레지스탕스,
1908 블라발(Yvon Belaval, 1908-1988) 프랑스 철학자, 문헌학자. 라이프니츠와 18세기 전문가.
1913 가로디(Roger Garaudy, 1913-2012) 프랑스 정치가, 철학자, 작가, 협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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