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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마태복음 23강
말씀 / 마태복음 15:1-20절
요절 / 마태복음 15:19,20절
손보다 마음을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수요일 갑자기 찾아온 요통으로 주말까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 이러다가 못 걸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두려움과 함께 한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음껏 걸어다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오늘을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하나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사실입니다. 감사 대신 염려하는 마음으로 살아온 시간들을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요통을 통해 마음을 씻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을 돌아보고 씻을 수 있는가? 신앙생활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와서 문제제기합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습니다.” ‘아니, 어떻게 손도 안 씻고 밥 먹어요?’, 저도 가끔씩 집에서 당하는 비난입니다. 손 씻는 것은 위생적으로 무조건 좋은 것이기에 책망을 받아도 마땅합니다. 아마 저 뿐 아니라 ‘대충과 혹은 게으름과’들은 그런 추궁을 많이 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사회의 손 씻는 전통은 ‘위생적인 유익’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영적 유익’을 위해 출발했습니다. 이는 출애굽기 30장 17-21절,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성소 앞에 있는 물두멍에서 손을 떠서 씻도록 한 예식에서 유래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성막으로 출근하기 전에서 집에서 목욕하고 옷까지 빨아 입었습니다. 그런데도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제사장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다,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예식입니다. 장로들이 영적으로 유익하다 판단하여 논의를 거쳐 일반 백성에게로 확대시킵니다. “손을 씻으면서 외부세계에 오염되기 쉬운 자기를 돌아보자”, 근묵자흑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검은 묵을 가까이 하면 검게 된다. 환경의 영향을 잘 받으니까 사람 가려서 사귀어야 한다’는 격언입니다. 요즘 표현으로 ‘노는 물이 중요하다’입니다. 주변 상황에 영향받지 않는 인간은 거의 없습니다. 저는 권투시합에 비교합니다. 한 대도 맞지 않고 경기를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선수는 거의 없는 것처럼, 나는 외부세계에, 외부세계는 나에게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검은 묵 같은 악한 사람과 함께 하면, 나의 선함은 그의 악함을 정죄하고 그의 악함은 나의 선함을 비웃습니다. 한쪽의 세력이 워낙 강력하면, 핵펀치처럼 상대방의 가치관을 붕괴시킵니다. 어떤 기독청년이 회식에서 음주를 강요하는 분위기를 거부하고 신앙 양심을 따라 회식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상사들에게 은근히 갈굼 당했습니다. 불편한 마음으로 회식을 보낸 것도 힘들었는데, 다음날까지 어려움이 연결되자, 전날의 행동이 ‘지조가 아니라 고집이었나?’ 재해석되어 괴로웠습니다. 어떻게 보고 무엇을 받아들이는지 부지런히 살펴야 합니다. 그 점에서 손 씻는 전통은 좋은 의도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제자들을 책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 절제하지 못했느냐, 바리새인들보다 수준이 떨어지면 되겠느냐’,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십니다. 3절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전통 지킴과 계명 지킴은 별개이며, 서로 충돌할 수 있음을 전제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통 지킴이 본래 목적을 잃어버리면 계명을 범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음을 복음서에서 자주 봅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한 손 마른 자를 고쳤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모습이 그러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전통을 만든 것은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전통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까지 정당화시켰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회에서도 문제시했던 고르반 전통을 예시로 듭니다. 4-6절을 보십시오. 고르반은 본래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지키자’는 정신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요구를 많이 받습니다. 형제들은 가정을 이루면 더 이상 ‘주머니 돈’을 자기 돈처럼 쓸 수 없습니다. 아내 눈치, 집안 눈치 봐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까지도 그와 같이 압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고르반! 선언하면 아내나 부모도 심지어 채권자도 압류하지 못하는 전통을 만들었습니다.(5) 시간이 흐르면서 ‘고르반’을 악용하는 자들이 생겨납니다. 빚을 빌린 후에 ‘고르반’을 이용하여 빚 갚기를 거부했습니다. 부모 공양을 거부하는 도구로 이용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고르반’이라는 전통을 지키는 것으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불순종하는 죄를 정당화시켰습니다. 외식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시대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 시대에도 있었던 문제였습니다.(7) 8,9절을 보십시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8,9) 이사야서 1장을 보면, 성전에는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제사로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발 그만하라고 막습니다. 이스라엘이 성전의 마당만 밟았기 때문입니다.(사1:11,12) 제사라는 전통에 담아야 할 마음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본래 제사는 기르던 짐승 -송아지나 양이나 염소-를 잡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기르던 짐승의 목에 칼을 꽂고 피를 뿌리고 가죽을 벗겨 태우면서 죄에 대한 애통함과 죄사함의 감격을 알도록 하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통만 남은 제사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버립니다. 짐승을 잡기만 하면 용서받을 수 있으니, 돈만 있으면 용서받을 수 있으니, 죄를 둔감하게 만드는, 계명을 범하는 전통이 되어 버립니다. 악한 행실을 합리화하고 피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전통으로 계명을 범하는 것, 바리새인들만의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마음을 씻기보다 마음을 포장하고 자기의를 삼는 길을 좋아합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예송논쟁이 있었습니다. 효종왕이 죽었을 때, ‘왕의 계모가 1년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3년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입니다. 고결하신 선비님들이 예를 담은 전통으로 많은 사람들의 피 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는 이교도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십자군 전쟁이 그 대표입니다. 십자가는 타인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인데, 십자가를 앞세워 무자비한 살육전쟁을 펼쳤습니다. 종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20세기 공산주의는 ‘함께 생산하고 같이 만족하는 사회’라는 이상적인 슬로건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수천만 명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았습니다. 물론 공산주의만의 모습은 아닙니다. 지난 주 미국 미시간 상원의원 민주당 후보로 무슬림 출신 엘사예드가 뽑혔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우려스러운 징조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더 우려스러운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평가입니다. “아메리칸 드림을 파괴하는 공산주의 물결”로 정의했습니다. 기독교 주류의 전통을 흔드는 두려움을 정치적 적개심으로 이용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뼈아픈 자기반성이 없습니다.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전통만을 고집하면 더 큰 위기, 더 큰 비극으로 문제를 키워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듣고 깨달으라고 말씀하십니다.(10) 전통을 지킨 것만으로 자기의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11절을 읽겠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우리들 대부분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에 민감합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깨끗하지 않으면 감염을 일으킬 수 있고 정신적인 충격까지 줄 수 있습니다. 윤선 사모가 가끔 강아지들에게 먹을 것을 준 손으로 제게 음식을 건넬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맛있는 것을 건네더라도 먹기를 거부합니다. 건네준 것을 먹으면 웬지 강아지 입과 내 입이 연결되는 그런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는 그렇지 않음을 알겠는데, 마음이 그렇습니다. 아마 고대 사람들이 우상 제사에 바쳐진 음식을 우상과 연결시키는 것도 그와 비슷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우상의 제사에 사자, 호랑이, 독수리나 코브라같은 강한 동물의 피가 뿌려졌습니다. 그런 피를 마시면 그런 형상을 가진 우상으로부터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느낌입니다. 레위기 11장에서 부정한 동물을 분류한 중요한 기준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사방으로 이방문화에 둘러싸인 문화적 약자 시절에는 필요한 전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오히려 정결한 것, 부정한 것이 너무 명확해져 문제입니다. 너무 명확해졌다는 것은 부정한 것을 먹지 않으면 깨끗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고 선언하신 이유입니다. ‘무엇을 먹든지 자유다!’, 자유에 포커스가 맞추어진 것이 아닙니다.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집, 다 쓸 데 없다, 의식주의 중요성을 부정하신 평가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에만 주목하다가 입에서 나오는 그것을 놓쳐버리는, 외식을 물리치는 데 포커스를 맞추신 것입니다. 균형을 잡아주신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 말씀은 바리새인들에게 영적으로 보약이 되어야 하는데, 영혼의 걸림이 되었습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더 분노하고 더 큰 적개심을 키웠습니다. 그럴지라도 예수님은 전혀 염려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들은 뽑혀져나갈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13) 지금 유대사회의 주류를 차지하는 전통과 바리새인들의 지위가 강력하고 영원할 것처럼 보이지만, 힘을 잃고 사라지는 것은 순간입니다. 때가 되면 싸그리 뽑히고 사라지고 맙니다. 이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가 됩니다. 본질을 놓치지 않도록, 형식화되지 않도록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약속을 받고 율법을 받고 아들까지 받았는데도 무너지고 뽑혀져나간 유대인들처럼 되지 않고자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의 전통을 지킨 것으로 자족하는 사람은 맹인과 같습니다.(14)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돌아보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데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추가적인 설명을 요청합니다. 그만큼 유다이즘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하늘에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세 번이나 말씀했는데, 베드로는 세번이나 반복해서 거절합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자기의를 고집하기보다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기가 그만큼 어렵습니다. 베드로의 요청을 칭찬하기보다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책망하신 이유입니다.
17절을 읽겠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뱃속에서 흡수되어 살이 되고 피가 되며, 그 나머지는 뒤로 배출됩니다.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건강도 좋아지고 피부도 고와집니다. 삶의 활력도 생깁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다 생략하고 뒤로 버려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양학적인 말씀이 아니라 영적인 말씀입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이 내 존재, 내 영혼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좋은 음식을 먹었다고 해서 좋은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 산다고 해서 명품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재차 설명을 요청했던 것처럼, 자주 헷갈리는 진리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주목하는 우리 본성 때문입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것에 더 주목해야 합니다.(18) 입에서 나오는 것이야말로 우리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입에서 비방하는 말이 나오고 있다면, 분노와 미움으로 채워져 있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에 주목하지 않으면 때로는 우리의 삶, 우리 존재가 정말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19절을 읽겠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사람 마음속에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악한 생각입니다. 이해하고 섬겨주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죽도록 패버리고 참교육 시키고 싶은 분노도 있습니다. 간음에 빠지고 싶은 욕망, 음란을 즐기고 남의 것을 훔쳐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거짓증언으로 유익을 구하고 시기와 비방으로 나를 높이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씀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렘17:9) 내 안에 거룩한 소원과 함께 악하고 더러운 욕망이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사람의 피부가 아름다움과 매력만을 뿜어내는 것이 아니라 악취를 풍기는 분비물을 내보내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어찌하란 말입니까! 전통 자체로 자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마음을 씻고 정결케 하기에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B형 간염을 보균자인 형이 있습니다. 식사나 생활 스케줄, 마인드 컨트롤까지 조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절대 밤늦게까지 일하지 않습니다. 술, 회식은 물론 음식까지 조심합니다. 한번 컨디션이 무너지고 나면 다시 바로잡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약함을 알고 조심하는 것입니다. 우리안에 더러움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도 그와 비슷합니다. 영적으로 강건하기 위해, 무너지지 않기 위해 몸에 좋은 것을 먹어야 합니다. 인간에게 전통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전통은 우리의 거룩함을 인증하는 표시가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말하는 표시입니다. 내가 거룩하니까 전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죄인이기에 전통이라는 도구를 통해 마음을 씻기에 힘쓰는 것입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와 찬양이 필요한 이유도 그러합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없어도 경건하게 살 수 있는 존재였다면, 안식일을 만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먹고 예배를 드리고 말씀과 기도를 앞세워야 하는 것, 내 의지만으로, 나 혼자의 힘만으로 믿음으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말씀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저는 빛보다 어둠으로 흐르는 경향성을 가졌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한번 어둡고 추한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하면 가속도를 내는 경향까지 있습니다. 더 완악해지고 더 큰 죄의 세계를 탐합니다. 그러므로 위로부터 은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서 28절입니다. 읽겠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성령께서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인도하십니다. 자기의를 고집하고 말씀을 거부하는 바리새인들처럼 되지 않고자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의 인도하심과 음성을 거부하는 자들은 어둠으로 빨려들어가게 됩니다. 성령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과 함께 하며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부족함 혹은 자기의를 고집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의지하여 성령님과 동행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항상 좋은 것을 예비하십니다.
무엇을 먹느냐, 무엇을 걸치느냐, 어디에서 사느냐, 바깥의 모습에만 주목하는 시대입니다. 외식의 시대입니다. 마음을 씻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당장의 결과, 사람들의 평가만 생각하면, 마음에 주목하는 것이 때로는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인생 전체를 봐야 하고 하나님을 의식해야 붙들 수 있는 진리입니다. 무엇을 먹느냐가 순간은 대단하게 보이지만, 인생 전체를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난 몇 주 동안 무시무시한 폭염을 만났는데, 현관 어항의 큰 물고기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추위를 대비한 히터는 있지만, 그 정도 더위가 올 줄로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끝 날도 그렇게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세상 끝 날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끝 날도 그렇게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시간과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너무나 자주 잊는 진리이지만, 가장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 날이 있기에 입에서 나오는 것, 곧 내 존재, 내 영혼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집중하는 마음을 지키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이 지혜 있는 사람, 복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믿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