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랑과 금식 (누가복음5:33~39)
지난주와 이어지는 말씀. 세무공무원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 레위가 베푼 큰 잔치에 예수님이 참석해서 먹고 마시는 장면. 참석자 면면을 보니 그 시대의 쓰레기들. 바리새인들이 봤을 때는 똥파리 잔치. 거기에 예수님이 앉아계심.
왜 죄인들과 먹고 마심? 자타공인 경건파 바리새인 율법교사 비난. 예수님 답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 아니고 죄인 부르러 왔다. 파격.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 말씀을 그대로 댄다면 예수 믿고 바르게 살고자 애쓰는 사람들 물리치고 죄인 부르러 왔다.
여기서 말하는 죄인이란 것은 워낙 착한 사람인데 실수로 몇 개 오류 저질렀다.. 그런 죄인 말하는 거 아냐. 자기 속에 선이나 의를 행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자. 그런 자들이 죄인.
그런 사람들은 반성을 못한다. 반성해봤자 아닌걸 아니까. 작심삼일 아니라 작심 삼분도 안 됨. 다윗. 모태에서부터 죄중에 잉태되었다. 근원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된 자들이 죄인.
그런데 내가 열 가지 중 대여섯개 깜박 실수했고 나머지 한 두 개 남아있다. 좀만 노력하면 교화될 수 있다. 말씀 읽고 기도봉사하면.. 그런 사람 죄인 아냐. 아직도 자기 의의 가능성 붙들고 있는 의인. 그런 사람들 아니고 죄인 불러 회개하러 왔다.
회개라는 것은 내 속에 선과 의의 가능성 조금도 없기에 모태로부터 죄인이기에 내가 받을 당연한 대가는 저주 형벌. 망해도 당연 사람들로부터 비난 멸시 당연. 하나님이 나를 지옥에 던져 마땅.
죄인이기에 받아야 할 저주 형벌 자체를 마땅하다 수용하는 사람. 그게 회개. 그 회개의 상징적 표현이 물 속에 들어가 죽는 것. 그렇게 죄인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 주님이 말씀하신다.
이어서 한 질문. 33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 기도하고 바리새인 제자들도 또한 자주 금식하고 기도하는데 왜 당신 제자들만 먹고 마시냐? 일회성 아니고 keep going 경건한 모습 없다. 매일 모이면 먹고 마시니까.
그래서 주님 말씀 혼인집 비유. 이 말씀 하시는 이유? 금식의 뿌리. 레위기16 29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십 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
7월 10일 대속죄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라. 금식이라고 일간되게 말한다. 스스로에게 음식을 주지 않음으로 자기를 괴롭힘. 30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니 너희의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ㄷ
스스로를 괴롭게 하라. 대속죄일에. 이 의식이 나중에 발전. 스가랴8 19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에 금식과 ~ 다섯째 일곱째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후반기에 갈수록 점점 금식 주기들이 늘어난다. 선지자 스가랴 예언처럼 그 금식이 변하여 기쁨 즐거움이 된다고 얘기했는데, 왜 스스로 괴롭게 하는 고통이 변화되어 기쁨 즐거움 희락이 되는지 유대인들이 이해 못했다.
단지 그들은 금식하는 자기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복을 줄 거라 생각. 선지자들은 다르게 본다. 너희를 괴롭게 하는 금식이 바뀌어 기쁨 즐거움 된다. 계시와 묵시의 관점. 계시와 묵시는 인간의 몸으로 부대끼는 시간 공간을 초월.
우리 인간은 한 공간에 하나의 존재. 둥시에 두 공간에 존재 불가. 한 시간대에 하나. 과거 미래로 갈 수 없다. 그런데 창세 전 언약의 세계는 시공 초월 세계. 선지자는 시공 초월 묵시의 세계에서 역사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묵시 반대말 역사.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해서 그 계시와 묵시의 세계에서 역사의 세계를 바라본다. 역사의 세계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제한된 시간 공간을 끌고간다. 그러니 힘들다.
반대로 역사의 세계에서는 자기가 살아온 인생이 보이기 때문에 거기서 스스로 노력하고 애쓴 결과로 자긍심을 스스로 품을 수 있다. 선지자들이 계시와 묵시의 세계에서 금식을 가만히 보니까 유대인 이스라엘인은 나 오늘 금식했어, 이걸로 하나님이 기뻐하실거야. 자기의 금식 행위에 방점을 찍고 본다.
선지자는 계시의 세계에서 바라보니 저 금식이라는 것의 실상이 다른데. 어떻게 달라짐? 이사야58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진정한 금식의 효과
선지자가 보니까 이런 효과를 유발하는 참된 금식을 하는 자가 따로 있다. 예수님. 마4 예수님이 사십일 금식 이후 광야로 가셔서 마귀와 대결. 그 시험 통해 비로소 마귀가 온 인류를 덮고있던 흉악의 결박을 걷어내신다.
돌로 떡을 만들어먹어라. 역사 속 인간은 먹고 마시는 문제 외에 다른 진리가 없다. 그 문제 압박하면 싸우게 되어있다. 김정은 회담하러 왔다. 정말 핵 포기하고 평화 사랑해서? 통장 잔고가 없어서 나온 것. 돈 달라는 웃음. 사람 안 바뀐다.
아무튼 먹고 사는 문제 앞 인간은 양심이고 뭐고 없다. 먹고 사는 게 진리라는 하나의 거짓 진리로 온 인류를 묶어 왔다. 흉악의 결박. 그걸 주님께서 떡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바꿔말해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에 떡이 주어진다. 말씀이 끊어지면 떡이 있어도 죽음.
어떻게 ‘먹고’ 사십니까? 평생 먹어도 결국 죽는데. 이건희가 양식 없어 죽음? 진시황. 언약 흐름 가운데서 인생의 사이클이 끝나면 죽는 것. 먹고 사는 것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말씀이 있으면 그 말씀에 따라 우리가 먹기도 마시기도 굶기도 하고 살아간다.
우리 의지, 먹고자 하는 우리 의지로 사는 것 아니고 이미 창세 전 언약된 말씀의 스케줄에 따라 우리 인생이 진행된다. 부자가 되었다 가난하게 되었다 돈을 벌었다 잃었다... 부자들 좋게 말하면 타이밍. 소 뒷걸음 치다가 뱀 잡은 격. 운칠기삼.
돌아보면 나사로를 거지로 살게 하시고 극적으로 그 앞에 부잣집 살게 하심. 너는 평생 부자 되어 열락하고 자색 옷 입고 잔치. 너는 그 앞에서 빌어먹고. 그렇게 짜놓으신 분이 주님. 무엇 때문에? 역사 속에 드러나는 우리 모습 아무것도 아냐.
역사를 뚫고 드러나는 계시 속에 작정된 주님 뜻 드러내기 위해. 떡이 있다고 사는 것 아니고.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 그 말씀이 있기 때문에 떡이 주어진다. 그런 식으로 마귀가 씌워준 모든 결박 멍에 꺾으셨다. 금식하심으로.
따라서 성경에 나온 모든 금식 성취하신 분은 주님 뿐. 인간이 하는 모든 금식은 다 이기적인 자기 욕망이 배어있다. 목사님들이 왜 금식함? 건축할 때. 교회 어려울 때 잘 되보려고.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복 주시려고 이렇게 하시나. 금식 이후 상황 악화.
쪽팔리지 않는 인생 위해 금식. 고상한 목적도 마찬가지. 금식을 통해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하나님께 복 받으려고. 지금 인간이 하는 금식 다 엉터리. 왜 대속죄일에 자기를 괴롭게? 금식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림자기 때문
너희들의 금식으로 희락 평안 기쁨 오는 것 아니고. 이 금식을 하나님 기뻐하시는 금식대로 이루시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의 금식으로 말미암아 모든 흉악의결박 풀어지고 멍에 끌러지며 너희에게 희락 기쁨 평안 온다. 선지자들은 본 것.
사람들이 금식한다고 머리 풀어헤치고 그게 같잖은 것. 네 금식으로 뭘 할 수 있음. 금식의 주인공은 따로 계시는데. 본문 바리새인들 금식하는 자기 삶에 자부심 품고 예수께 물어본다. 우리는 금식함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을 경건 쌓고 있는데 니들 제자들은 왜 먹고 마시냐.
눅5 34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결혼이라는 것은 사전에 무수한 갈등 만남 헤어짐 싸움 폐백 꾸밈비 예단 신경전...... 부잣집 몸만 오라. 성경에서 말하는 혼인이라는 것은 그것. 신랑 되신 예수님이 다 준비하셨기 때문에 또 다시 네가 뭘 주고 할 게 없다. 처갓집 체면 세우려고 얼마 주고받고 할 필요 없다.
금식이라는 자체를 다 완성하신 신랑 되신 예수님이 금식의 효과 자체를 몽땅 다 가지고 오신 것. 니들은 준비할 것 없어 몸만 와. 죄인 된 몸만. 다 신랑이 준비한 것. 기쁨 즐거움 희락의 절기
내가 금식함으로 내가 성취하고 말씀 지킴으로 얻어낸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축복. 마지막은 영생. 그 모든 축복을 준다. 몸만 오라. 그런데 저도 준비해서... 주제파악 못하고 있다. 너의 의로움을 가지고 하나님앞에 내세우려 깝치는데 아무것도 아니다. 냄새나는 것.
아이가 아빠 도와주겠다고 어린이 지폐. 마트 가서 뭐 살 수 없다. 우리가 내놓는 의가 그렇다. 신호등 지켰고 미투에 안 걸렸고... 그 모든 것들이 주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들끼리 모여사니까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래서 혼인집 말할 때에는 이미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모든 것 구비해놓고 그 기쁨 즐거움 평안 모든 혜택 품에 안고 내게로 오라. 그래서 함께 먹고 마시는 것.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아무런 부담 주지 않는다. 단순히 예수님과 동거 동행. 물론 그들이 다 버렸다.
주님께서는 그들 마음의 탐욕도 이용. 그들이 따라오면서 알게 된다. 예수님이 걸어오신 그 길이 어떤 길인지. 대속죄일에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의식처럼 제자들은 예수 따라가며 예수 십자가 아픔을 알게 된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 혼인집 신랑 말씀과 동시에 36 새 옷과 낡은 옷 비유. 새 옷? 해 아래 새것이 없다. 솔로몬이 발견한 진리. 언제까지 유효?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끝난다. 주님 말씀하시기를-사도바울이 간파했듯-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
해 아래 새 것이 없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새 것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다 새로운 피조물, 새 옷. 그리스도 예수로 옷 입는 자들이 다 새로운 피조물. 그리스도 예수로 옷 입는 것- 자기 자신의 행함으로 옷 입는 자들이 있다. 말씀 지키고 구제하고.
그렇게 구제 금식 계명 지키는 것으로 자기 의의 옷을 차려입은 자들이 바리새인. 그건 회칠한 무덤. 속은 썩고 있는데 겉은 계속 옷을 갈아입는 것. 금식의 옷 계명 준수의 옷 구제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것.
새 옷에서 한 조각을 북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다. 새 옷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지는 영생 평안함 말씀성취의 효력을 말한다. 다시말해 이 말씀을 사도바울식으로 갖다붙이면 갈5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된 자 – 성도가 또 다시 하나님 율법 몇 개 지킴으로 자기 의로움 찾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 다시 말해 장칭 예수 믿고 거듭났다는 자들이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말한다면 구원된 자 아니다.
그 사람은 그냥 그리스도 예수라는 이름으로 자기 의의 옷을 갖다 입었을 뿐 – 유대인들. 정말 그 사람이 구원받은 자라면 어떤 율법도 그걸 지킴으로 내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부정한다.
자신을 경건하게 꾸미고 단장할수록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거라는 믿음은 마귀로부터 온 것. 여러분이 신부라면 단장하세요 – 거짓말. 몸만 와. 어떤 몸? 더러워진 몸. .가난뱅이 몸. 배운 것 없고 돈 모은 것 없고 백수.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왔기 때문에 단장되고 꾸며지고 금식하고 구제하는 자들 부르러 온 것 아냐. 의인 아니고 죄인 부르러 옴. 마귀 속삭임. 생각해봐라 말씀 안지키고 멋대로 살고. 사람도 기뻐하겠니? 사람이니까 안 기뻐하는 것.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 왜? 죄인을 불러 구원하셔야 죄인의 죄를 깨끗이 씻기시는 예수 십자가 가치가 드러나기 때문. 몸만 가 줘야 그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 사랑 부요함 넉넉함 드러나. 여자가 뭘 챙겨가면 말이 많다. 챙겨간게 아무것도 없으면 남편 자랑하는 것뿐.
예수 믿었기 때문에 바르게 삽시다 –아직 예수 믿는 사람 아냐. 예수 믿는 믿음 조차 율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믿으려는 사람이지 믿음이 그 속에 심어진 사람 아냐. 그래서 새 옷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자가 그걸 찢어서 낡은 옷 – 금식도 해야 되고... 율법에 갖다 붙이는 자 없다.
진짜 거듭난 사람이라면 그런 짓 안 한다. 설령 내가 금식했다, 구제했다. 그게 주님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닌 장난감 화폐라는 사실을 본인이 안다. 바울이 말했듯 내가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했지만 내가 한 것 아니라 주의 은혜다. 아무것도 아니다.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 없다. 새 포도주가 팽창할 때 부대를 터뜨려. 이렇게 말하지만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라. 역사 속 인간은 관습에 젖어있기 때문에 옛 것이 좋다. 새 것 경계심 품어.
금식 교회생활 헌금 구제 전도 익숙하기 때문에 새로운 게 오면 낯설다. 그래서 예수가 가지고 오신 새로운 복음을 거부하다 못해 예수를 죽여 버린다. 옛 것이 좋다- 자기 몸 위주로 의를 행하면 하나님 기뻐하신다는 믿음.
내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상대하려는 믿음. 그게 옛 것. 거기에 익숙한 사람들은 절대 안 바뀐다. 예수 믿는다 말하지만 믿음 조차도 율법회되어있기 때문에 믿지 못한다. 오늘날 믿음 자체가 율법으로 바뀌어있다.
신랑이라는 것, 다시 말해 신랑이 가지고 오신 기쁨. 신랑이 가지고 온 말씀 성취의 효력 그 앞에서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모든 일생 업적들이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 알게되는 순간 그 사람들만이 비로소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듯 새로운 삶의 형태에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이 이야기, 드라마에 빠지는 이유. 그 이야기라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나라고 하는 자아를 확인시켜주는 하나의 수단이기 때문. 모든 이야기는 하나의 거울. 우리는 그 이야기를 통해 나를 비춰본다.
바꿔말해 인간은 대상 없이는, 타인 없이는 나를 정립할 수 없다. 누군가 타인이 있어야 그 타인에 비추어 나를 정립한다. 쟤는 나쁜놈. 나는 괜찮아. 못생긴 놈. 나는 괜찮아. 성경에서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은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나를 정립하는 자들. 성도.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나를 비춰봤을 때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는 자들 성도. 그러나 뭘 해라 하지 마라 계명 앞에 나를 비추게 되면 끝없이 계명 가지고 나를 형상화시키려. 나는 금식기도 계명 지키고 바람 안피고 음란하지 않고.. 이 말씀 가지고 자기 자신 형상화
그 나온 형상이 회칠한 무덤. 주님 보시기에 지옥에 던져질 마귀 형상. 자기가 지키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자기 형상 정립하는 자들. 계명 지켰는데 왜? 계명 지킨 자들은 지켰다는 자기 의로 옷을 삼게 되어있다. 바르게 살아온 자들은 바르게 살아왔다는 깐깐함이 배어있다. 나이드신 분들 돈 많이 번 사람 완고함. 그 치열한 자기 삶의 결과물.
말씀대로 살아가는 분들이 보통 사람 아니고서는 유대사회에서 존경받는 경건한 인생의 터 닦을 자 없다. 어마하게 노력한 사람들. 대형교회 가진 사람들. 아프리카 병원 세우는 교회. 다 보통사람 아니다.
하나님 말씀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과 상대하려는 자들은 마귀의 형상. 자기 중심의 견고한 세계 만든 것.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아무것도 없는 자, 죄인,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된 자를 부르러 오신 것. 그냥 부스러기 먹고 사는 나사로처럼 주의 은혜로 먹고 사는 자들. 자기 자신 내세울 게 없다.
신랑과 금식. 우리는 홀로 금식함으로 그 모든 금식 효과 다 받아내신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효과 누리는 사람들. 신랑 안에서 그 화평 기쁨 즐거움이 우리 것 될 수 있기
우리 스스로 애씀 노력으로 세워가는 인생 아니라 오직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 은총으로 말미암아 세워지는 인생으로서 우리 삶 살도록 늘 새롭게 우리를 이끌어 주옵소서 낡은 옷 찢어버리시고 주님 새옷 새 포도주를 우리 가운데 담아내시는 새로운 부대로 우리 인생 삼아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