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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9:1-7) 존재의 가벼움을 왜 참으려 하나?
오늘 읽은 이사야 9:1-7절 말씀중심으로 <존재의 가벼움을 왜 참으려 하나?> 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존재의 가벼움을 왜 참으려 하나?’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1984년 출간된 책인데 타임지가 1980년대 10대 도서를 선정했는데 그 안에 들어간 책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제목을 염두에 두면서 ‘왜 존재의 가벼움을 참으려고 하느냐 존재의 가벼움을 즐겨라. 존재의 가벼움은 축복이다.’라는 취지의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은혜받기 원합니다. 밀란 쿤데라의 이 작품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문제를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생을 가볍게 살 것이냐? 무겁게 살 것이냐?'
밀란 쿤데라는 아주 오랜 옛날로 돌아가서 그리스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가 우주생성의 원리를 설명하려고 할 때 도입한 개념 중의 하나가 바로 가벼움과 무거움인데 파르메니데스는 가벼움에 더 힘을 실어주는 사상을 피력을 했는데, 그의 사상에 과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가벼움을 원하고, 가벼움을 따라가고 가벼움을 추구하는 것만이 옳은 것이냐? 때로는 무거움의 어떤 순간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했다는 겁니다.
이 소설 속에는 가벼움과 무거움을 대표하는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두 여인이 인간관계 특별히 이성관계에서 가벼움을 대변하고 있고 무거움을 대변하는 여인이에요. 한 여자는 테레사이고 한 여자는 사비나입니다. 테레사는 호텔의 식당 종업원이고 사비나는 미술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비나는 가벼움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배반을 통해서 모든 얽매임을 다 끊어버립니다. 소설 속에서 나오니 그런 것이지 이렇게 배반을 즐겨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마는, 어쨌든 사비나는 남자친구건 부모건 조국이건 내 마음에 부담이 되도록 얽매이는 모든 관계를 배반함을 통해서 끊어버리면서 가벼움을 지향합니다. 가벼움이란 결국 자유로움이에요. 자유로움.
반면에 테레사는 우리식으로 말하면 일편단심 민들레에요. 이성의 관계에서 그게 누구든지 상관없습니다. 누구든지 간에 한 사람과 인연을 맺으면 오직 그 사람의 사랑만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그것으로 끝장을 냅니다. 무거움을 지향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이 테레사와 사비나의 마음가짐이 우리 삶에서도 그대로 다 확인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이제 밀란 쿤데라 작가의 질문은 이겁니다. 서구 사회의 모든 역사와 그리고 인류 역사가 가벼움을 지향해왔다고 합니다. 서구 사회를 보면 핵가족입니다. 그리고 에티켓이라는 것, 예의라는 모든 것들이 가벼움을 지향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혼이 쉬워지고 연애는 연애로 끝나면 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뭐, 당신과 내가 하룻밤 데이트를 했으니까 어떻게 이렇게 끝낼 수 있느냐고 얘기하면 촌스럽다고 얘기를 해버립니다.
이제 밀란 쿤데라가 제기하는 의문은, 과연 그런 가벼움 사비나처럼 내 마음을 얽매이게 하는 모든 관계를 다 끊어내서 가벼움을 이뤄냈다고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가벼움은 오히려 공허함으로 전락돼버리고 인생의 허무함으로 끝나버린다고 하면서 이 가벼움과 무거움의 문제를 어찌하면 좋겠느냐는 말을 합니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지해집니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날아가 버려서 지상적 존재로부터 멀어진, 그래서 기껏해야 반쯤은 생생하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 것인가? 묵직함인가? 아니면 가벼움인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삶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지요.
‘화려한 싱글’
연애는 자유롭게 하라. 그러나 결혼은 하지 마라. 결혼을 하면 묶여버린다. 얽매인다는 것입니다.
‘돌아온 싱글’
돌싱이라고 합니다. 이혼하고 싱글로 환원합니다. 가볍게 살기위해서 결혼하지 않습니다. 외롭습니다마는 외로움의 순간을 다른 방법으로 해소합니다. 술을 마시고 심지어는 극단적인 경우 마약을 한다든지 그러나 얽매이기가 싫습니다. 얽매인다는 건 뭐에요? 일찍 결혼했습니다. 자식을 셋이나 낳았습니다. 시부모님들 모셔야 합니다. 얽매입니다, 무거워집니다.
어떻게 사실래요? 여러분!
그러면 이 가벼움과 무거움의 문제를 성경은 어떻게 다루고 있느냐는 겁니다.
'가볍게 살아야 되느냐? 무겁게 살아야 되느냐?'라고 하는데 성경은 가볍게 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제 남 왕국 유다가 북 왕국과 아람의 연합군에 의해서 위협을 받는 역사적인 상황을 밑에 깔아놓고, 그리고 계속해서 예언을 진척시키다가 이제 남 왕국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선민의 멸절을 예언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다른 지역, 이방 지역, 이방에 근접한 가나안복지 중에서도 스불론과 납달리 땅,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선민 생활의 중심권에서 벗어나버린 그러한 변방을 향하여 구원의 빛이 비추어지고, 그 어둠의 땅에 빛이 비춘다는 내용과 맞물려서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탄생하면, 그 동안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바깥 어둠 속에 머물고 있던, 변방의 땅에 은혜가 임하게 되고 구원의 축복이 임하게 되는데 그 내용을 본문 4절에 “멍에가 부서지고 채찍이 끊어지고 압제자의 막대기가 부러질 것이라”라고 얘기합니다.
기드온이 300명으로 모래알처럼 많은 미디안 군대를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불면서 멸절시켰던 것처럼, 그렇게 생의 멍에와 채찍과 압제자의 막대기를 끊어버릴 것이라고 합니다.
추수 때의 기쁨이 얼마나 기쁘겠어요. 추수 때의 기쁨이 굉장히 기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전쟁에서 전리품을 획득해서 쟁취해서 그 전리품을 나눌 때의 그 기쁨 자체를 말하는 거예요. 전쟁에서 남의 물건을 뺏으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메시아가 오셔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나면 그런 기쁨의 삶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여러분! 밀란 쿤데라의 소설 속에서 가벼움과 무거움, 그 가벼움을 나타내는 가벼움의 코드는 자유로움 그리고 빛입니다. 반면에 무거움은 진지함과 어둠, 이런 식으로 낱말들의 뉘앙스와 의미가 나눠집니다.
‘이 어둠의 땅에 메시야가 임하셔서 구원의 빛을 발하신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러면 기독교가 말하는 가벼움은 도대체 뭐냐는 겁니다.
밀란 쿤데라가 말하는 가벼움과, 기독교가 말하는 가벼움은 어떻게 차이가 나느냐는 겁니다.
밀란 쿤데라는 걱정하는 거예요. 사비나처럼 모든 인간관계를 다 끊어내고, 얽매일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내버리고 배반해버리고 가벼움을 추구해보지만, 그 가벼움의 끝이 공허함과 외로움과 허무함으로 끝나지 않겠느냐는 것이고 때로는 베토벤의 영웅에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 같은 그런 어떤 생의 진지함, 환란과 고난과 역경을 딛고 서려고 하는 어떤 무거움의 태도가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에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서 멍에를 벗겨버리시고 마음의 부담을 제거해버리시고 가볍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문제를 기독교는 이렇게 다루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겁게 살고, 이 세상에 대해서는 가볍게 살라는 것이에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겁게, 세상에 대해서는 가볍게.
세상에 대해서 가볍게 산다고 하는 것을, 메시아가 오시면서 우리에게 허락하는 첫 번째 은혜로 묘사하고 있는 거예요. 세상은 가벼워져야 합니다. 가볍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얽매임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오셔서 하시는 일은, 세상에 대해서 가볍게 해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무겁게 진지하게 얽매이도록 하는 것이 메시야 구원의 역사의 핵심이라는 거예요. 세상에 대해서는 가볍게,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겁게.
사비나처럼 이 세상에 대해서는 가볍게, 가볍게 살 되, 무겁게 얽매일 곳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는 정말 밀란 쿤데라의 염려처럼 허무함과 공허함으로 빠질 수 있지요. 그렇다고 또 테레사처럼, 오직 토마스라는 남자 하나를 만나서 그 남자와의 관계에 마음과 힘과 뜻을 퍼부어 버립니다. 이 세상의 인연에 자식이면 자식, 사업가 경우엔 사업, 장사하는 사람이면 장사, 어머니 같으면 자식, 연애하는 젊은이들 같으면 애인, 이성, 이것에 온 마음과 뜻을 다 퍼붓는 것인데 오직 삶을 진지하게 대하는 것도 기독교는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진지함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이 세상은 깃털처럼 가볍게 살라는 겁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하는 일이 바로 이 일이라는 거예요.
이 일이 여러분! 어떻게 가능해집니까? 한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 아기의 이름이 희한해요.
그 아기의 이름이 뭐예요? 6절에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어깨에는 정사를 멨어요.’
지금 이명박 대통령이 나라를 다스립니다. 그래서 행정부의 수장이 되셨습니다. 이 '정사'라는 건 '다스린다, 행정한다'는 겁니다. 내 생애에 메시야가 오시면 이 지상에서의 삶에 대해서 메시야가 내 생애 안에서 대통령이 되시겠다는 겁니다. 어깨에 정사를 멨다는 이야기가 그 얘기고, 내 생애의 대통령 아니면 내 생애의 회장님이 되시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이 말을 합칠 때도 있습니다. 기묘한 모사.
'모사'라는 것은 '카운슬러로 기획실장'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기묘자'라고 하는 것은 뭐냐? 기획실장인데 어떤 것을 기획하느냐? 도대체 인간의 능력과 인간의 지혜로는 따라 잡을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정말 기기묘묘한, 기가 막힌 계획들을 세워 나가는데 이게 기획실장이라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시면 내 삶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기획실장이 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회장님이 되셨어요.
‘정사를 어깨에 메었다.’
내 삶의 영역에서 예수님이 대통령이 되시거나 예수님께서 회장님이 되시고 뿐만 아니라 기묘자요, 모사라, 기획실장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뭐라고 나와 있지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못하실 일이 없으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이더스 손을 갖고 있는 영업부장님 같으신 겁니다. 내 생애 들어오셔서 행동대장이시고 영업부장이신데 만지는 것마다 돈이 되고 성공을 이루어 내는 그런 영업부장이시고 전능한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그리고 “영존하시는 아버지시라.”
아버지는 아들 예수님이 태어나시는데 거기다대고 이름이 영존하시는 아버지시라고 하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관계에서 아버지를 말하는 게 아니고. 아버지라고 하는 기능이 있는데 그 기능이 생명을 주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너무 역할이 제한되기는 합니다마는, 마치 보디가드, 육신의 아버지의 마음으로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이끄시는 분이 메시야라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평강”
평강은 우리가 너무 많이 얘기했지요. 이 땅에서는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는 평강. 예를 들면 스데반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얼굴이 천사와 같이 되어서 마음에 평강을 누리는 것은 도대체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사울 시절에 살기가 등등해서 스데반을 죽이도록 분위기를 몰아놓고 그것을 본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는 자의 얼굴표정을 본 것이지요.
‘아니, 돌에 맞아 죽는데 어쩌면 저렇게 평강할 수 있을까?’ 그 인상과 그 충격이 마음에 담겨 있다가 다메섹도상에서 깨져나간 것이라고 성경의 심리학자들은 또 그렇게 이해를 합니다.
도저히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이 세상에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사업이 망했는데 웃고 있습니다. 주님이 평강을 쑤셔 넣어 주시는 것이지요. 이게 평강의 왕입니다.
그러므로 평강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무겁지가 않아요.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가 않는 겁니다. 풍랑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주무십니다. 제자들은 풍랑만난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이 땅위에서의 풍랑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주무십니다. 전혀 받아들이지를 않으시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땀에서 피가 나오도록 하나님아버지의 뜻을 수행하시는데 진지하셨는데 이렇게 사는 것이 기독교인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볼까요? 요셉.
요셉이 히브리인, 떠돌이 히브리인, 유랑자와 같이 떠도는 족속의 아들로서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지만 지금의 미국 같은 나라입니다. 지금의 중국처럼 대국(大國)의 총리가 됩니다. 집시와 같이 떠도는 사람의 아들이. 그러면 집시와 같이 떠도는 사람의 아들이 미국 같은 나라의 총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진지함을 갖고 이 세상을 살면, 그런 떠돌이의 아들이 히브리 족속의 아들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습니까? 얼마나 생을 진지하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아무리 진지해도 총리가 되지 못합니다. 요셉은 총리자리를 비전으로 삼고 자기가 이루고 싶은 인생의 꿈으로 정하고 그것을 향해 나가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꿈을 꾸었지만, 애굽의 총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고 총리가 되는 어떤 구체적인 것을 실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한 게 뭡니까? 형들에게 팔렸어도 형들과 재회할 때 “형들이 나를 팔았으므로 염려하지 마세요. 내가 복수할까 염려하지 마세요. 형들이 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미리 보내신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형들이 팔아서 사비나처럼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 나오는 사비나처럼 배반을 당한 겁니다. 배반을 당한 입장에서 얼마나 원통하고 분했겠습니까마는, 그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해석하고 하나님의 섭리로만 이해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만 진지합니다. 감옥에 가서도 그렇고, 보디발의 집에 가서도 그렇고, 항상 내 앞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태도만 진지하게 가졌습니다. 무겁게 가졌습니다. 감옥을 가든 어디를 가든 변명 한마디 하지 않습니다. 세상일은 그냥 다 가볍게 지나갑니다. 그러더니 너무너무 가볍게 장난도 아니고 코미디도 아니에요. 꿈 한 번 해석했다고 암흑에 있던 죄수가 곧바로 총리로 뛰어 올라 갑니다. 세상일은 이렇게 살라는 겁니다.
히브리인으로서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은, 아무리 진지하게 세상살이를 맞이하고 노력해도 되지 않을 일입니다. 그저 세상에 대해서는 잊어버리는 겁니다. 나를 배반하면 배반당하고 감옥에 집어놓으면 감옥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배반당한 상태에서 하나님만을 진지하게 찾았습니다. 감옥에 들어간 상태에서 하나님만은 진지하게 찾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감옥에서 총리로 뛰어 오르게 하셨습니다. 지금 총리 다음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총리를 원하고 있었던 총리자리에 들어가기를 원했던 귀족들과 신하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진지하게 내가 다음은 총리라고 벼르고 있었던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옥에 있던 자가 총리가 됩니다. 이 세상의 삶은 여러분이 대통령에 출마하더라도 가볍게 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장난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지할 것은 지금 내가 한 걸음, 한 걸음을 걷는 것이 하나님아버지 보시기에 올바른 것인가? 하나님아버지를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메시야요. 십자가사건입니다. 십자가사건을 무조건 붙잡고 있어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죽었다. 주님이 죽으신 것뿐만 아니라 내가 같이 죽은 것이다.’
세상에 대해 내가 죽었다고 이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점점 더 친해집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있으면, 마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테레사처럼 하나님 한 분에 모든 것을 올인 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는 다 죽어버리고 하나님 한 분에 대해서만 살아갑니다. 그래서 세상의 멍에, 세상의 부담, 세상의 얽매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집니다. 자유로워진다고 공허합니까? 하나님이 무겁게, 무겁게 내 마음에 자리 잡습니다. 깊이, 깊이 진지하게, 진지하게 자리 잡습니다.
여러분! 지금 집에 어머니가 와 계십니다. 저희는 보고 있지 않은데 어머니가 보시는 드라마가 있으신가 봅니다. 드라마 '동이'에요. 숙종 때 이야기를 드라마로 엮은, 장희빈이 나오고 인현왕후가 쫓겨나고 하는 얘기입니다. 어머니와 얘기를 하면서 재방송 동이를 틀어놓고 봅니다. 드라마가 아주 진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런데 그날 낮에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TV에서 '해피투게더'라는 프로가 나왔습니다. 그것도 재방송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사회를 보던 유재석씨가 그런 말을 합니다. ‘아니, 뭘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여? 뭘 그렇게 안색이 변하면서 그러냐고.’
해피투게더는 진지함이 금기사항입니다. 다 웃자고 하는 얘깁니다. 동이는 너무너무 진지합니다. 장희빈이 이 불리한 정치적 판국을 역전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자작극으로 독극물을 마시고 난리가 났어요. 진지함이 이를 데 없습니다. 무겁기가 이를 데 없어요. 해피투게더에서는 진지한 얘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진지한 얘기를 하더라도 웃자고 하는 얘깁니다. 가벼워지자고 하는 얘깁니다. 동이와 해피투게더에서 정답이 나오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 붙잡으면 삶이 어떻게 변합니까? 하나님의 관계는 동이로 변합니다. 동이처럼 진지해 집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삶은 해피투게더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어야 해피투게더가 된다는 겁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해피하게 살고 싶으십니까? 추수 때의 기쁨을 가지고 전쟁 때 노획물을 나누는 기쁨을 가지고 살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메시야 되시는 주님의 십자가에 날마다 매달리는 겁니다. 매달리다보면 이 세상에 대해 죽는데 이 세상살이가 해피해지기 시작합니다. 가벼워져야 해피해집니다. 진지하고 무겁고 ‘내가 대통령돼야지. 내가 장관돼야지. 우리 아들이 서울대학 들어가야지. 내가 금년 말에는 수익을 어느 정도까지는 올려야지.’라고 하지 마세요. 이렇게 진지하게 살지 말아요. 이 세상은 가볍게 게임하듯이 사는 겁니다.
지금 월드컵이 열리고 있는데 우리 국민들이 너무 진지하게 월드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 웃자고 하는 거예요. 너무 진지하게 그러지 마세요. 그저 이 세상은 가볍게, 세상에 대해서 그냥 죽어버려요. 연기처럼. 밀란 쿤데라처럼. 그냥 공허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가볍게 죽어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만 진지한 마음을 유지합니다. 그러다보면 회장님 되시고, 기획실장님 되시고, 마이더스 같은 손의 영업부장님 되시고,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나를 지키시고, 평강을 쑤셔 넣어서라도 내게 행복을 허락하시려는 메시야,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주님이 내 생애, 이 땅에서의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십니다. 나는 이 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안 돼요. 메시야가 오셔서 주님의 십자가를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잊지 않고 매일매일 죽는 자들에게, 세상은 가볍게 해피투게더, 하나님과의 관계는 진지하고 무겁게 드라마 동이처럼. 이러한 가벼움과 무거움의 완벽한 조화, 여기에서 복지의 삶이 실현될 것입니다.
존재의 가벼움을 왜 참으십니까? 누리셔야지요. 누리세요. 해피투게더. 그리고 하나님은 진지하게 오직 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관심은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 것을 마음에서 버리는 십자가의 역사를 붙잡고. ‘하나님께 좀더, 좀더, 좀더, 깊이 나가야지.’라고 이것만을 진지하게 추구하시면 모사되시고 영업부장 되시고 행동대원 되시고 기획실장 되시는 우리 주님께서 내 삶을 살아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백하잖아요. 갈2:20절에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라고”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돈이 없다고 너무 무겁게 마음을 먹고 살았습니다. 몸이 불편하다고 너무 무겁게 살았습니다. 자녀문제로 너무 무겁게 살았고 결혼문제로 너무 무겁게 살았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그 무거웠던 모든 멍에들이 다 깨어져 나가게 해 주시고 오직 진지함과 무거움이 하나님만 향한 마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한없이 가볍게 해피한 마음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짊어지지도 못할 일생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한숨과 낙담으로 무거운 삶을 살아온 나날들에 십자가의 반전이 있게 하시사 죽고 훌훌 털어버리고 그리스도와의 사랑에 푹 빠져서 세월가는 줄 모르게 하시니 이게 인생인가 봅니다. 또한 복음인게지요.
내 존재에 이유는 오직 하나님뿐임을 말씀을 통해 다시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길또한 십자가가 정답임을 알게하심을 또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