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챙김은 가장 적절한 번역어
마음챙김..알아차림..
법보신문 | 김재성 교수(서울 불교대학원대)
마음챙김에는 초기불교․선 정신 담겨
‘챙김’은 대상에 대한 접근방식 의미
알아차림은 ‘awareness’ 번역어 적절
동방대학원대 교수이자 한국명상치료학회장 인경 스님이 “불교심리치료의 핵심개념인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는 것은 불교명상과 심리치료의 근본정신에 명백하게 어긋난다”며 “마음챙김은 비불교적인 용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런 가운데 김재성 서울불교대학원대 교수가 인경 스님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사띠의 대표적인 번역어는 ‘mindfulness 마음챙김’, ‘awareness 알아차림’, ‘bare attention 순수한 주의(집중)’이며, 어느 말도 사띠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필자도 이 용어들을 ‘관찰’, ‘깨어있음’ 등과 함께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대상을 놓치지 않고 마음을 챙기거나, 대상을 알아차리거나, 대상에 순수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 이 순간 깨어있는 것, 이 모든 의미가 빠알리어 사띠(sati)에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이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제 수행이 필요하다.
문제가 된 ‘마음챙김’에 대하여 정리해 보자. 사띠 또는 마음챙김이라는 용어의 다양한 의미나 사용례에 대해서는 임승택 교수의 ‘사띠(sati)의 의미와 쓰임에 관한 고찰’(보조사상 16) 김정호 교수의 ‘마음챙김이란 무엇인가: 마음챙김의 임상적 및 일상적 적용을 위한 제언’(한국심리학회지 건강, 9-2) 등을 참조하기 바란다.
‘마음챙김’이라는 조어(造語)는 1988년에 고요한소리에서 출판된 『부처님, 그 분 - 생애와 가르침』(피야다시 스님 지음/ 정원 김재성 옮김)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당시 이 책을 번역한 필자는 팔정도의 정념(正念, samma-sati)과 그에 대한 영역 right mindfulness를 옮기면서 활성스님과 번역어 선정문제로 고민하였다. 활성스님께서 참선에서 ‘화두를 챙기다’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정념(正念)을 ‘올바른 마음 챙김’으로 번역하자고 제안하셨고 필자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기억한다.
sati라는 초기경전의 용어를 번역하면서 초기불교에서 ‘마음’을 가져오고, 참선의 화두를 드는 정신이 배어있는 말인 ‘챙김’을 결합시켜 새로운 조어(造語)를 만든 것이다. ‘마음챙김’은 초기불교와 선불교의 정신을 함께 접목시킨 신조어이다. 이후, 필자와 고요한소리에서는 사띠와 그 번역어인 mindfulness라는 용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는 ‘마음챙김’을 사용해왔다.
필자는 1991년 여름, 미얀마에서 우 빤디따 사야도의 지도 아래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들은 법문을 “지금 이 순간 그대는 깨어있는가”(고요한소리, 1992년 5월 발행)로 정리해서 발행할 때, ‘사띠’라는 용어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다양하게 사용된다는 것을 확인하였고, 사띠를 ‘대상을 놓치지 않도록 마음을 챙기다’ 또는 ‘마음이 대상을 챙기다’라는 용어로 사용하면서 ‘마음챙김’을 ‘마음으로 현재의 경험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다’는 의미로 사용해 왔다.
(‘마음챙김’에 대한 초기불교와 주석서의 의미에 대해서는 각묵스님의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2004 개정판) 서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사띠는 마음작용 또는 마음부수[心所]의 하나이다. 이 때 마음작용은 고정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조건에 의해서 생겼다가 사라지는, 연기(緣起)하는 정신활동을 말한다. ‘마음이 대상(신,수,심,법)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것’이다.
‘화두를 챙기다’라는 말은 ‘항상 화두를 놓지 않고 열심히 참구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며, 각묵스님은 ‘한국 선방에서 정착된 화두를 챙긴다는 표현은 화두를 거듭거듭 제기하는 것을 멋지게 표현한 말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2003년 2월 지리산 실상사 화림원에서 열린 제7회 선우논강의 발제문 “간화선과 위빠사나, 무엇이 같고 다른가”에서 각묵스님이 간화선과 위빠사나가 같은 점 5가지 가운데 한 가지로 제시한 ‘챙김을 중시한다’에서 표현한 말이다. ‘즉 화두라는 특정 대상에 대해서 의정을 돈발하게 하는 간화선 수행법과 몸과 마음의 특정 현상에 대해서 무상, 고, 무아로 수관(隨觀)할 것을 가르치는 위빠사나 수행법은 화두나 법, 대상 혹은 명상주제에 마음을 챙기는 것을 수행의 출발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챙김’이라는 말은 대상에 대한 접근 방식을 의미하지 ‘챙겨서 가져지닌다’는 의미를 포함하지 않는다. 사실 수행의 과정은 애쓰는 과정, 노력하는 과정이며, 그 과정은 유위(有爲)의 행위를 포함하지만, 유루(有漏)는 아니다. 범부의 입장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인 ‘마음챙김’은 ‘알아차림’과 마찬가지로 번뇌를 막아내고 없애는 역할을 하는 마음작용이지 번뇌는 아니다. ‘마음챙김’이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점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적어도 필자의 위빠사나 수행 경험이나 수행지도 경험에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가 ‘자기 관리나 통제’의 의미로 이해된 적은 없었다.
마음챙김은 있는 그대로의 경험에 마음을 열어놓고, 몸과 마음의 온갖 대상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고 알아차리는 민첩한 심리활동으로 실제 수행과 생활에서 적용하고 있다. 마음을 챙길 때, 우리는 순간순간 경험의 영역에 나타나는 대상에 집착하거나 거부하는 심리상태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마음을 번뇌의 침입에서 지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임승택 교수의 ‘마음지킴’도 사띠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일상 언어로 ‘챙긴다’라는 말은 주로 좋은 의미로 사용된다. 구글에서 ‘챙긴다’로 검색을 해보면, ‘대사증후군 조기 발견 건강 챙긴다’ ‘Happy Mind’로 정신건강 챙긴다’ ‘직원 건강 회사가 챙긴다’ ‘법을 알아야 재산도 자신감도 챙긴다’가 검색된다. 소중하고 좋은 것을 지키거나 돌본다는 의미이다.
빠알리어 사띠의 번역어에 대해 살펴보면서 우리말 번역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자.
PTS의 빠알리-영어사전(Pali-English Dictionary, 1921-1925 p.672)에 의하면, 사띠sati의 의미는 memory(기억), recognition(인식), consciousness(의식), intentness(주목, 주시), mindfulness(마음챙김, 주의깊음) 등이다. 디가 니까야를 처음 영역한 리스 데이비스는 1899년과 1911년 sati를 ‘mindful’(Dialogues of the Buddha, Vol. 1, p.80)로 satipatthana를 ‘마음챙김의 확립’이라는 의미의 ‘setting-up of mindfulness’(Dialogues of the Buddha, Vol. 2, p. 327)로 옮기고 있다. 필자가 아는 한 sati를 ‘mindful’ 또는 ‘mindfulness’로 영역한 것은 리스 데이비스가 처음이다. 이후, 대부분의 영어 번역이나 저술에서 사띠의 번역으로 mindfulness를 사용하고 있다.
『불교선수행의 핵심(The Heart of Buddhist Meditation)』(1962)에서 냐나포니카 스님은 사띠를 마하시 사야도의 사띠파타나 위빠사나(마음챙김에 근거한 위빠사나) 법문에 의거해서 ‘순수한 주의(집중) bare attention’으로 번역하였다. 정신과의사이자 위빠사나 수행자인 마크 엡스타인은 그의 저서 『붓다의 심리학(The thought without thinkers)』(1995, 2005) (전현수 역, 145쪽 이하)에서 ‘순수한 주의집중’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정호 교수가 마음챙김과 함께 이 용어를 신경증적 주의(neurotic attention)에 대비되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위빠사나 수행지도자 고엥까지는 사띠를 알아차림(awareness)으로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다.
사띠는 ‘관찰 또는 관찰하는 힘’(마하시 사야도 우 빤디따 사야도, 우 자나카 사야도 등), 깨어있음(alert!!, wakefulness), 알아차림(noting, awareness)이라는 말로도 사용되므로 사실 영어 표현 자체에도 상당히 다양한 번역이 시도되고 있다.
마음챙김에 근거한 스트레스 완화(MBSR)의 창시자인 존 카밧진 박사의 주저서 『Full Catastrophe Living』(1990)을 번역한 장현갑 교수, 김교헌 교수도 1998년 번역본 『명상과 자기치유』(학지사)에서는 mindfulness의 번역어로 평범한 주의집중 또는 주의집중 명상이라고 사용하였는데, 2005년 2판에서는 책제목을 『마음챙김 명상과 자기치유』로 바꾸면서, ‘주의집중’을 학계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마음챙김’으로 용어를 바꾸었다고 한다. 김정호 교수는 1994년 이후, 고요한소리의 출판물을 참고로 하여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심리학계에서 처음으로 ‘마음챙김’을 사용하였다.
사실 심리학계에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 사용에 가장 큰 공헌을 한 분이 김정호 교수라고 생각한다. 국내에서는 위빠사나 수행자나 지도자 사이에 사띠의 번역어로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서양의 심리치료에서 마음챙김을 ‘현재의 경험을 수용의 태도로 알아차림’(마음챙김과 심리치료, 김재성 역, 36쪽)으로 사용하는 것은 원래 의미를 잘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어는 사적(私的)이지 않고 공적(公的)인 도구이자, 사용자들의 의식과 경험, 문화를 담고 있다.
‘마음챙김’은 1988년 이후 처음 사용된 이후, 사띠와 mindfulness의 우리말 번역어로 사용되어 왔다. 필자를 위시로 하여, 각묵스님, 대림스님, 미산스님, 김열권 법사, 김정호 교수, 김교헌 교수, 장현갑 교수 등이 이 용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띠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좋은 우리말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될 것이며 필자도 사용하게 될 것이다. 현재로는 영어의 mindfulness가 가장 보편화된 용어이고 mindfulness에 대한 우리말 번역어로 ‘마음챙김’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알아차림’ ‘자각’은 영어 awareness에 해당하는 번역어로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mindful 또는 mindfulness의 영어사전의 용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빠알리어 sati는 영어 mindfulness와 가장 가까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www.oed.com, 2009년 12월 9일 검색)을 보면 mindful의 의미는 형용사의 용법으로 ‘좋은 기억을 가진’ possessing a good memory, ‘주의 깊은’ full of care; ‘조심성 많은’ heedful, thoughtful, ‘기억으로 가득 찬’ full of memories이고 술어로 사용될 때는 ‘상기 또는 기억하고 있는’ having recollection or remembrance, ‘사려 깊은 또는 주의 깊은’ taking thought or care, ‘조심성 많은’ heedful, ‘의식하고 있는 또는 알아차리는’ being conscious or aware이라는 의미이며, 세 번째로 불교나 요가에서는 ‘순간을 완전하게 알아차리는’ fully aware of the moment, ‘이러한 알아차림을 의식하고 있고 주의하고 있는’ whilst self-conscious and attentive to this awareness의 의미로 사용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명사형인 mindfulness는 ‘mindful한 상태나 자질’ state or quality of being mindful ‘주의(집중)’attention; ‘기억’memory‘의 의미로 설명하면서 요가와 불교의 맥락에서는 ‘순간을 완전히 알아차리고 있는 명상 상태, 또는 이러한 알아차림에 자기의식과 주의하고 있는 상태’ the meditative state of being both fully aware of the moment and of being self-conscious of and attentive to this awareness, ‘자기-자각(알아차림)’ self-awareness로 정의하고 있다.
김재성 교수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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