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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0일 : [눈물의 문] 앞에서 깨달은 것들.
어제 오후 4시 40분 지부티에 회항한 다음, 앵커리지에 배를 잘 앵커링하고 간단히 샤워와 몇 가지 세탁을 한 뒤, (이젠 바닷물로 세탁하고 마지막에만 헹굼.) 아껴두었던 신라면에 떡을 조금 넣어 떡라면을 끓였다. 무조건 먹어 둬야해. 하고 남은 밥까지 말았지만 밥은 절반가량 남아 버렸다. 어쩌면 입맛이 이렇게나 없을까?
샤워하면서 얼굴을 보니 타서 그런지 아주 새까맣다. 누가 보면 간에 문제가 있는 줄 알 정도다. 얼굴 타는 것은 아무 상관없다. ‘남자와 깃발은 낡을수록 좋다’는 서양 속담이 있다. 그러나 건강하고 상관이 된다면 다른 이야기다. 갑자기 짐을 뒤져 영양제 한 알 꺼내 먹는다. 어차피 내일이면 또 잊어버리고 안 먹겠지만, 약간의 정신적 위로다. 회항하는 9일 하루에, 떡라면 한 끼를 먹고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바브엘만데브 해협(Bab-el-Mandeb海峽)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이의 해협. 바브엘만데브라는 이름은 아랍어로 "눈물의 문“ 이다.
생각도 못 했는데, 강릉의 한 기자분이 이 명칭을 알려줬다. 아하, 내가 이 곳 눈물의 문을 통과해서 계속 울게 되는구나. 가족과 생이별. 강한 역풍으로 회항. 바람 바뀔 때가 언제일지 모르니 한정 없는 기다림. 선실 바닥에 구르는, 사랑하는 딸 리나 장난감을 치우며 울고, 주인 없는 작은 옷가지들을 치우며 운다. 고향 부모님의 염려에, 여전히 죄 많은 불효자로 울고, 거친 바다의 거부에 좌절해 운다. 별 많은 아프리카의 밤하늘을 보며, 고향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다가 기막혀 운다. 울자. 실컷 울고, 맑은 정신으로 ‘눈물의 문’을 뒤로하고 아덴만을 잘 빠져 나가자. 마음 편히 먹고, 기다리자. 거친 항해에 주어진 휴가라고 생각하자. 세상사 맘먹기 달렸다는 어른들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런데 왜 그런 좋은 말씀은, 뭔가 구렁텅이에 빠지기 전에 와 닿으면 안 되나? 예방 차원으루... 모두 내가 어리석은 탓이다.
세계일주의 이력이 빛나는 김승진 선장님께 격려 문자가 왔다. 너무 감사한 일이다. 이런 멋진 분들의 경험에서 우러난 조언으로, 나는 보다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다.
10일 오전 10시. 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강한 동풍. 안전한 앵커리지에 있어도 바람의 힘과 무게가 느껴진다. 내가 여전히 아덴만을 항해 했더라면, 어제 회항 할 것을! 하고 후회할 바람이다. 다행이 나는 어제 지부티로 회항했다. 내가 회항 했다는 소식을 알리자, 여러 나라의 세일러들이 안부 인사를 보낸다.
독일 마르코 : Hello Kim. Good decision and we are happy to hear you are fine. But most important is you learned and have more experience now and nobody hurt. - 좋은 결정이고 니가 괜찮다니 다행이다. 중요한 것은 니가 배웠고 이젠 더 경험이 많아졌고 아무도 안다친거다.
영국 아담스&다이애너부부 : Yes we dislike sailing upwind too. Wishing you fair winds. 네, 우리는 풍상항해 안좋아해. 네게 좋은 바람이 있기를.
영국 존 선장 : Welcome back.... 잘 돌아 왔수.
미국 Ruley & Klara 커플 : That sounds like a good idea Kim. Better to have good weather for such a long passage! We are still here, so see you when you get back! - 좋은 생각이었어. 그런 긴 항해에는 좋은 날씨를 기다리는게 더 나아. 우린 아직 여기 있고 오면 만나자.
나 : I think I made a big mistake in this upwind sailing. 이라고 솔직히 실수를 인정한다. 다시는 이번 바보 같은 세일링은 안 할 거다.
SIM 카드 데이터를 거의 다 썼다. 아산에게 새로운 SIM 카드를 부탁하고 기다리고 있지만, 알다시피 언제 올지는 그야말로 인샬라다. 노심초사 하지 말고 배나 점검하자. 추가 배터리를 확인해보니, 아뿔싸 그제 밤, 배가 하도 요동치는 바람이 단자 하나가 빠졌다. 다시 잘 고정하고 위치를 잡는다. 더 이상 움직이면 안 되는데... 더 나은 고정 방법을 고안해야겠다. 아니 이 배터리 단자가 이탈할 정도의 항해는 이제 하지 말자!
엔진 실을 연다. 기어박스 캡을 확인한다. 약간 오일이 묻어난다. 플라스틱이라 목이 부러질까봐 내가 너무 소심하게 잠궜나? 오링을 확인하고 오일량을 체크하니, 오일은 적정수준이다. 엔진실 바닥의 오일은 소주 반 컵 정도. 다시 잘 닦아낸다. 오일이 조금이라도 샐 때, 바로 확인하려면 바닥이 깨끗해야 한다. 오일이 약간 새서 모자라면 보충하면서 가면 된다. 다행이 오토파일럿도 든든하고, 바닥에 물 한 방울 새는 데가 없다. 혼자 항해하면서 오토파일럿 고장은 진짜 방법이 없고, 물새면 퍼내느라 정신없는 항해가 될 텐데, 제네시스는 참 좋은 배다.
영국선장 존에게 문자가 온다. : Sadly, this is not the right season to go east... You may wait a long time for SW Monsoon. 헉 나는 남서풍몬순을 오래 기다려야 한단다. 그러니까, 그게 언제까지 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4월 내내 기다릴 수도 있다는 건가? 그리고 인도양에 가서는 싸이클론? 아하 이게 지금 보통 문제가 아니로구나. 나는 생각보다 큰 덫에 걸린 것 같다. 답답해서 몇 년 전 지부티에서 5월 2일 출항하셨던 김석중 선장님께 문의 한다. 곧장 답변이 온다.
[제가 출발할 때도 앞바람 7~8노트라서, 세일을 전혀 못 펴고 북쪽으로 올라갔으며 대조영함의 캄보이를 받았습니다. 지금 기억으로 거의 돛을 사용 못하고 엔진만 사용, 5노트 이하 속도로 살랄라까지 갔습니다. 앞바람이 7노트 이하이면 출발하여야합니다. 바람이 순풍으로 바뀌는 것은 지금 시기에 불가 합니다] 그럼 역풍이라도 5~6일 동안, 7~8 노트로 약하게 불면 기주운항이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아예 순풍은 기대하기 어려우니. 7~8노트 이하의 약풍을 기다리자. 작은 희망이 다시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윈디를 체크하니 4월 17일 까지도 전부 12노트 이상 역풍이다.
나는 하염없이 기다리더라도 역풍이 7노트 이상이 되면 출항하지 않을 작정이다. 어차피 출항해 봐야 살랄라 못 간다. 나는 노련한 선장들에게 문자를 보낸다. A few years ago, on May 2, when the headwind was 7 knots, my friend captain in Korea went from Djibouti to Salalah in 8 days. When will the headwinds be below 7 knots? Does the wind get weaker by the end of April? : 언제쯤 동풍이 7노트 이하로 약해질까? 4월 말쯤? 전 세계 선장들의 집단 지성에 기대해 본다.
이건 진짜 중요한 문제다. 4월에 지부티 도착한 세일 요트 선장들은 동풍이 7노트 이하로 약해지기 전엔 아무도 동쪽으로 출항하지 못한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신나게 지부티로 왔다. 여기까지도 운이 좋았다. 그리고 ‘눈물의 문’ 앞에서 덜컥 발목이 잡힌 것이다. 서양 선장들은 이런 몬순 사이클론 데이터를 다 가지고 항해하는 거였다. 정오가 되자, 여기저기 모스크에서 알라를 찬양하는 기도 소리가 드높다. 알라를 전혀 모르는 내겐 참 심란하다.
영국이 아담과 다이애너 부부 : Jimmy Cornell은 9월에 동쪽으로 향하는 인도양 항로를 추천합니다. 그의 세계 순항 안내서 379쪽이 그것을 다룹니다. 당신은 배를 지부티에 정박시키고 9월에 돌아올 수 있습니까? 가이드를 다운로드할 수 있는 링크를 드리겠습니다. 라며 World Cruising Routes 링크를 보내준다. 한국 갔다가 9월에 오라니! 그럼 한국엔 최소 12월 도착인데, 10월에도 태풍이 불 것이며, 그때는 북풍이 불어 한국에는 내년 봄이나 도착이다. 점입가경에 설사덮밥이다. 불가능한 이야기다. 지금으로써는 김석중 선장님의 루트가 최선이다. 다만 사이클론을 필사적으로 피해야 한다.
www.pdfdrive.com/world-cruising-routes-e189201132.html
<= World Cruising Routes site
필사적으로 자료를 검색해 보니, NE 및 SW 몬순 계절의 절정기인 1월(겨울)과 6월(여름)의 홍해 및 아덴만 기후가 바뀐다. 6월에는 확실히 바뀌지만, 5월에는 이랬다저랬다 한다는 것. 여기에 나온 아덴만 풍향 사진을 독일 선장 마르코에게 보냈다.
독일선장 마르코 : Yes, this is why you see all the boats going east to west and north now. But soon Monsun will change wind direction by 180 deg. 맞다. 그래서 지금 지부티에 동쪽으로 가는 달마는, 오직 나 혼자 뿐이다.
그렇다면 가능한 시나리오는, << 4월에는 기대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7노트 이하 약풍이 4~5일 계속 될 때, 오만 살랄라로 가서. 연료, 물, 식량을 풀로 채운 후, 10~14일 동안 사이클론이 없을 때를 잡아, 죽어라고 스리랑카로 가는 거다. 그것도 직항이 아니라. 인도양을 굽이 도는 바람을 따라, 인도 북부까지 올라갔다, 인도 해안선을 타고 내려오는 회전 항로.>> 결국 이 루트를 직접 항해한 김석중 선장님의 데이터가 제일 현실적이다.
이런 상황을 마주칠 때마다 내가 뭘 모르고 있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이런걸 말해 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뭘 모르는지 나 자신이 아예 모르니 질문도 안했다. 세계일주 선장들은 이렇게 바람이나 날씨가 안 맞으면 비행기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몇 달이고 다른 일을 보다가 계절이 맞을 때 다시 돌아와 세계일주를 계속하는 거다. 나는 그럴 수도 없다. 9월이라고? 아이고... 이렇게 일차 조사를 마치니 걱정도 되고, 머리가 뻐근하다. 잠시 쉬자!
계란 빵, 설탕 토스트에 우유 한잔을 마시며 고향 대선배님이신 신봉승님의 조선사 나들이를 읽고 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다.
영국선장 존이 수단 수아킨으로 갈 모양이다. 나는 에이전트 모하메드의 연락처, 진입로 주의 사항, 물은 절대 사지 말 것, 디젤은 깨끗하지만 1.6달라, Sim카드 30달라, 시장은 가까운 곳에서 야채만, 등의 자료를 준다. 나도 이렇게 세계일주 항해 선장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마침내 도움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도 주는 선장이 된 거다. 너무 만족스럽다.
하루 종일 배에만 있는다. 고무보트를 타고 다른 배에 놀러 갈 수도, 가까운 마트에 가서 둘러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낮의 지부티는 너무 덥고 흙먼지 가득하다. 또 동풍이 매우 강하다. 텐더 보트를 타고 부두로 나가다 행여 엔진이라도 꺼지면, 노를 죽어라고 저어도 위험하다. 앵커리지에 정박한 선장들 끼리는 왓스앱을 통해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다. 바람이 없으면 놀러갈 수도 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가기엔 시간이 너무 많다. 내일이나 모레, 바람세지 않은 날 가도 늦지 않다. 아, 영국선장 존은 이번 토요일 출항한다고 한다. 독일선장 마르코는 이집트 wadi el gemal 에 앵커링 중이라고 한다. 마르코는 여기저기 잘 알려 지지 않은 앵커리지도 수십군데 파악하고 가니까, 역풍불면 가까운데로 가서 앵커링하고 워터메이커로 물 만들어 먹고, 풍력발전기나 솔라패널로 전기 만들어 가며, 하염없이 바람 바뀌기를 기다리며 대기한다. 그러니 항해가 자유자재다. 나는 그런걸 전혀 몰랐다.
오후 2시 37분. Sim카드 데이터가 다 소모됐다. 마침내 인터넷이 끊긴다. 오늘 아침 25% (3기가) 남았다고 했는데, 그럼 하루만에 25%(3기가)를 다 썼다고? 오늘 여러 가지 자료를 좀 많이 검색하긴 했지만, 그럼 Sim 카드 하나에 4일이란 말인가? 겨우... 아산에게 아예 한 3개쯤 사둬야겠다. 이런 건 꼭 급할 때 끊어지니까. 그러나 아산은 오늘 중 온다고만 하고 인샬라다. 나도 그렇거니~ 하고 느긋하게 기다린다. 아우가 보내준 한국 소설 텍스트를 읽고 있다. 백치 아다다 같은 단편소설들이다. 인터넷이 끊어지니 소설에 집중한다. 너무 빨리 다 읽어 버릴까 걱정이다. 기다려야할 시간은 아직도 창창하다. 역마(驛馬) - 김동리, 감자 – 김동인 등을 읽으며 이런 멋진 글을 쓰다니 하고 연신 탄복중이다.
오후 3시 50분. 아산과 같이 일하는, 정확히는 아산의 밑에서 일하는 토마스와 그 친구가 나를 부른다. 이들이 아산의 오더를 받아 내게 디젤을 실어 주었던 사람들이다. 나더러 왜 돌아 왔느냐고 묻는다. 바람이 안 맞아 죽을 고생만 하고 왔다고 했다. 토마스는 이디오피아에서 돈 벌러 온 사내로 나더러 일자리를 달라고 조른다. 자기를 고용해서 같이 항해하자고 한다. 몇 번이나 부탁한다. 그러나 나는 거절한다. 그가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해서, 생각해 보겠다고만 한다. 나는 2주 정도 여기 기다려야만 하니, 그동안 생각해 본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람이 맞으면 나 혼자로 충분하다. 바람이 안 맞으면 서너명이 있어도 지부티를 떠나지 못한다. 여럿이 항해하면 식사와 잠자리, 모든 것이 불편하다. 생면부지의 이디오피아 인과 그 불편한 짓을 내가 왜 하겠는가?
나는 토마스에게 혹시 Sim 카드가 있느냐고 묻는다. 토마스가 있다고 한다. 아산은 1개에 7달라 라고 한다. 맞냐? 물으니, 맞다고 한다. 그럼 2개 사다달라고 하고 20달러를 주며 6달라 거슬러 달라고 하니, 그렇게 한단다. 이따 아산이 오면, 또 1개나 2개를 더 사야지. 어차피 4일에 하나씩이고, 12기가에 7달라. 9천원 정도다. 한국의 핸드폰 로밍은 10기가에 8만원. 애초에 비교가 안 된다. 지부티에선 실제 Sim 카드가 얼마일까? 아산은 자기 외엔 아무도 돈을 주지 말라고 했지만, 이들의 선량함을 한 번 시험해 본다. 2주 기다리려면 최고 48기가는 있어야겠다. 사진전송이 어려울 정도로 느리지만, 되기는 된다. 나는 Sim 카드 데이터가 다 소모되어 몇 시간째 완전 무인도가 된 제네시스에 혼자 있다. Sim 카드 사오는데 1시간이면 가능하냐? 1시간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기다려 보자. 잘못되면 20달러 날리는 거고, 잘 되면 지부티의 연결 라인이 두 개가 되는 셈이다.
토마스가 왔다. Sim 카드는 그대로 두고 카드 패키지로 돈만 충전하는 시스템이었다. Just check*165#를 누르고 충전 카드의 번호만 입력하면 충전이 된다. 12기가를 일주일 사용하는 거다. 그래서 25% 남은 내 잔여 데이터는 일주일이 다 되어 홀랑 다 날라 간 거였다. 토마스 패거리들은 택시를 타고 다녀왔다며 6달러를 거슬러 주지 않는다. 그럴 줄 알았다. 너희는 이제 끝이다. 소탐대실 하는 놈들. 나는 아산하고만 거래 할 거다. 아산은 정확히 7달러씩만 받았다. 아산에게 연락이 왔다. 자기는 이제부터 나의 무료 에이전트니, 필요할 때 언제든 연락하란다. 그래? 늘 인샬라면서? 오늘 온대드니 다시 내일 온단다. 어쨌든 내 상황을 미리 항만 당국에 다 이야기 했고, 내 체류에는 문제가 없단다. 이럭저럭 Sim 카드 문제도 해결했다. 다행이다.
오후 6시. 지부티에서 산 라면과 계란 후라이로 저녁을 먹었다.
* 요 며칠, 갑자기 카톡이 울리고 카카오뱅크 알림이 오길래 뭔가, 확인 했더니, 몇 몇 분들이 제게 마음을 보태주고 계셨다. 이런 건 처음이고 예상 밖의 일이라 어안이 벙벙하지만 너무나 감사합니다. 한국 가면 일일이 인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