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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9:57-62, 교정받아야 할 우리의 생각 2, 25.2.9, 박홍섭 목사
성령님이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면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소망이 없음을 믿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 가질 수 있는 오해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 사람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를 때 가질 수 있는 오해들을 잘 보여줍니다.
첫 번째 사람은 어떤 오해를 갖고 있습니까? 57-58절입니다.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이 사람은 어디로 가시든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자원했습니다. 평행구절인 마 8:19에 의하면 이 사람은 서기관입니다. 서기관은 율법 학자로 스승의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스승의 위치에 있는 이 사람이 스스로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고 자원합니다.
그 동기가 무엇일까요? 무엇이 오랜 수련의 기간을 통해 율법 학자의 위치에 올라선 이 서기관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는 결단을 하게 했을까요? 가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 가상한 결단을 부수는 대답을 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무슨 뜻입니까? “네가 나를 따르겠다고 자원하는데 너는 내가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 알고 그러느냐?” 뭐 이런 의미의 대답입니다.
마 8장의 문맥을 보면 이 사람이 주님을 따르겠다며 나오기 전과 후에 온통 예수님의 치유와 기적의 사건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산상수훈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신 주님에게 수많은 무리들이 따랐고 주님은 나병 환자를 고치시고 백부장의 하인을 낫게 하시며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셨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는 기적을 행하셨고 가다라 지방의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셨고 가는 곳마다 기적과 치유를 행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놀람과 관심이 이어졌고 그 중간에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자원하는 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이 문맥을 볼 때 이 사람은 지금 자신이 율법 교사로 받는 존경과 환대와 대접보다 예수님을 따라갈 때 더 많은 존경과 영광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과 기대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이 왜 이 사람의 동기를 모르겠습니까? 그래서 “나를 따르는 길은 네 생각처럼 갈채와 박수와 영광과 인정을 향한 길이 아니라 여우도 있고 공중의 새도 있는 집과 굴이 없는 길, 즉 머리 둘 곳이 없는 길이다. 그래도 따라올래?” 이렇게 반문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의 길은 우리가 기대하는 세상적인 대접과 영광이 기다리는 길이 아닙니다. 이 장면이 본문인 누가복음의 문맥에서는 십자가를 향한 예루살렘의 여정의 첫 부분에 나옵니다. 누가는 주님과 제자들이 사마리아의 어떤 고을에서 거부당하신 사건 후에 이 장면을 배치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예수를 따르는 길은 이 서기관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길임을 암시합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르는 삶은 예수와 함께 거부당하고 예수와 함께 배척을 당하며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렇게 서기관의 헛된 기대를 교정하신 예수님은 이번에는 두 사람을 부릅니다. 59-62절입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부르심에 두 사람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한 사람은 부친의 장사, 다른 한 사람은 가족과의 작별을 이유로 지금은 곤란하고 나중에 따르겠다고 합니다.
부친의 장사를 이유로 드는 사람을 학자들은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하나는 실제로 부친이 죽어서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다는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부친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아버지가 죽으면 장례를 치르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부친이 죽어서 장례 하겠다는 경우라면 어떤 해석이 가능합니까?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지금 우리보다 훨씬 더 장례의 비중이 컸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자식이 그 장사를 치르지 않는 경우는 유대 사회에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것만큼 중요하고 우선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먼저 해놓고 주님을 믿고 따라가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죽은 자는 죽은 자가 장례 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그 당연한 생각에 찬물을 끼얹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예수 따르는 길은 죽은 사람을 장례 하는 사회적인 관습이나 문화보다 더 중요한 그 무엇이라는 굉장히 급진적인 제자도가 됩니다. 사실 성도의 삶과 제자의 길은 다른 무엇보다 예수를 따르고 예수를 사랑하고 그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우선의 가치와 순서로 두어야 하는 급진적인 사상과 삶이 맞습니다. 그래서 이 해석도 가능합니다.
또 다른 해석은 아직 부친이 살아계시는데 중한 병에 걸려 있어 그 아버지를 간호하고 돌아가시면 장례까지 마치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해석입니다. 이 경우, 사실 아버지의 재산에 대한 욕심이 숨어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아버지가 죽으면 아버지의 재산은 아들이 물려받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를 잘 모시고 있다가 돌아가시면 장례를 치르고 유산까지 받아 살길은 마련해놓고 따르겠다는 뜻입니다. 이 경우는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은 더 명확해집니다. 그런 생각은 영적으로 죽은 자의 생각이니 네가 영적으로 죽은 자가 아니고 살아 있는 자라면 지금 당장 나를 따르라는 뜻이 됩니다. 여러 가지 핑계로 주님 따르는 결단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오늘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늘 이런저런 핑계로 신앙생활을 미루는 특징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런 핑계, 내일은 저런 이유를 대면서 오늘은 이것만 해놓고, 내일은 저것만 해놓고 그 다음에 신앙생활 잘하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평생을 자기를 우선하고 자기 본위로 살면서 주님의 뜻과 말씀은 늘 뒤로 밀쳐두고 삽니다. 이렇게 늘 자기 삶의 우선순위에서 주님을 밀쳐두면 결국 어떻게 됩니까? 세상의 가장 하잖은 일이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삶보다 더 중요하고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주님은 이런 자를 영적으로 죽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자들은 주님을 따르는 일에는 자신의 열정과 시간과 재능과 재물을 드리지 않지만,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일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죽은 자입니까? 살아 있는 자입니까?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하십니다. “얘들아, 너희가 죽은 자가 아니라면 오늘 나를 따르라, 나를 믿고 따르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오늘 너의 아버지를 모시면서 나를 따르고, 오늘 너의 일을 하면서 나를 따르고, 오늘 장사하면서 나를 따르고, 오늘 너의 욕심을 버리고 나를 사랑하고, 오늘 너의 뜻을 내려놓고 나의 뜻을 받아들여 순종하라”라고 말입니다. 그게 살아 있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세 번째 사람은 가족과의 작별을 이유로 지금은 따르지 못하고 나중에 따르겠다고 합니다. 정황상 이 사람은 아마 갈릴리에서 주님을 이미 따르고 있었는데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었으니 가족과 작별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경우 같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대답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쟁기는 날이 여러 개가 아니라 하나인 쟁기입니다. 뒤를 돌아보면 금방 밭고랑이 삐뚤하게 갈리므로 절대로 뒤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 농부가 일단 쟁기를 잡고 밭을 갈고자 하면 다른 곳을 보거나 뒤를 돌아볼 수 없는 쟁기가 당시 유대 사회의 쟁기입니다. 예수 믿고 따르는 길은 이렇게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것과 같은 성질이 있습니다. 일단 믿기로 하고 따르기로 했다면 세상을 향해 뒤를 돌아보거나 다른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 신앙에 이런 절대적인 우선순위의 가치가 있음을 알고 계십니까? 예수 믿는 것은 이 험한 세상살이에 마음의 위안이나 위로를 공급해주는 종교 활동 정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진노와 멸망에 연관된 절대적이며 가장 우선적인 가치이기 때문에 절대로 뒤로 돌아볼 수 없는 위대한 부르심이며 그 부르심에 대한 결단과 선택입니다.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늘 애굽을 그리워했습니다. 애굽을 나왔다면 다시는 애굽을 그리워하거나 돌아가서는 안 되는데도 그들은 틈만 나면 애굽을 생각했고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다가 광야에서 멸망했습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나오게 하실 때 그 성에 남겨둔 그 무엇에 미련을 두거나 잊지 못해 뒤돌아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가족들과 작별하고 오겠다는 이 사람에게 왜 쟁기를 잡았으면 결코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만큼 중요하고 절대적인 가치가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신앙생활이니 지금 그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 사람은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길을 주님의 가르침과 다르게 생각하거나 적당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수와 인정과 칭찬과 영광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때그때 중요한 일이 있으면 잠시 미뤄도 되고 또 믿다가 잠시 쉬거나 중단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는 하나님도 이해해 주신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래도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생각을 죽은 자의 생각,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의 생각처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런 생각을 고쳐서 지금 당장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영광과 박수와 갈채를 기대하고 예수를 믿고 따르다가는 좌절하고 실망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길에는 뜻하지 않는 고난이 있고 거절이 있으므로 우리는 신앙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장난은 아니잖아요. 취미생활이나 동호회 활동이 아니라 우리의 전부를 거는 것이지 않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반응하는 삶이 신앙생활 아닙니까? 예수 믿기 전의 삶과 비교하면 굉장히 레디컬하고 파격적이고 우리의 영혼을 찔러 쪼개는 혁명과 같은 삶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망이 파쇄되고 새로운 생각과 가치관이 진리로 우리 영혼에 장착되어 우리를 이끌고 가는 삶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나 이 길이 금욕과 고행은 아닙니다. 나를 따르라고 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금욕과 고행의 길로 부르지 않습니다. 이 길은 영광의 길이요 사랑의 길이요 참된 행복의 길입니다. 내 인생이 끝나는 길이 아니요 새롭게 시작됩니다. 요 17:1-5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이제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가 되었으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주옵소서”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는 당신의 죽음을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영화롭게 되는 죽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님 자신과 성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십자가를 통해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에게 주신 영혼들이 살아나고 구원을 받고 죄 용서를 받아 아버지와 아들을 알게 되는 영생을 얻고 그것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이 창세 전에 누렸던 영광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시는 이유는 바로 그것을 위해서입니다.
그 길을 가시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라고 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지신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대속의 길은 주님만 갈 수 있고 대속의 십자가는 예수님만 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따르는 주님의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이 부르심은 금욕과 고행으로의 부르심이 아니라 주님과의 사랑을 위한 부르심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십자가로 가시는 주님은 우리를 사랑해서 그 길을 가십니다. 십자가만큼 아픈 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버리는 자리입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버림을 받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아픔과 고난과 죽음이 우리를 위한 사랑입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아버지의 아픔, 아버지에게 버림받는 아들의 고통과 아픔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감당하는 아픔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주님은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따르라는 그분의 부르심은 사랑의 부르심이지 고행과 금욕과 불행으로의 초대가 아닙니다. 사랑의 방해가 되는 탐욕과 이기심, 우리 안에 있는 죄 성을 부인하고 그것을 내려놓고 따르라는 뜻입니다. 언제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질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 사랑으로 기꺼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내 삶의 가장 우선순위로 삼을 수 있습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기쁨과 사랑으로 이 길을 잘 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