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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2275.2024.11.10)
렘32:38-41
할렐루야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힘을 얻는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치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농촌에서는 대나무로 만든 것으로 ‘키’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어렸을때에 오줌을 싸면 키를 쓰고서 다니며 소금을 받아오라고 했던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곡식만 골라내는 키처럼 좋은 곡식을 잘 먹고 잘 자라서 다시 이불에 오줌을 싸지 말라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소금이 귀한 것이라서 소금은 나쁜 기운을 막아주고 몰아내는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키를 뒤집어 씌우고 소금을 얻으러 다니면 친구도 만나고 어른들의 놀림도 감수해야 하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여 야뇨증을 치료하는 것이라고도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아이에게 긴장감을 주어 문제 행동을 치료하는 조상들의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느덧 나이를 먹어서 전립선이 걱정하는 나이가 되어서 모이면 밤에 오줌을 몇 번 누러 일어났다고 하고, 뭐가 좋다고 약 먹어보라고 할 나이가 되어서 어렸을 때 오줌싸개 걱정이 늙어서 오줌이 자주나오는 걱정, 졸졸 작게 나오는 걱정을 하니 흘러간 세월이 무심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키는 곡식에 섞인 겨나 검불을 까불어 내는 기구로서 곡식을 담고 위로 치켜 올렸다 내리면 바람에 의해 겨나 검불은 날아가고 곡식은 안으로 모아들여 집니다. 이처럼 환난과 곤고가 찾아오면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인지 아닌지를 키지를 통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환난 때에 택하신 백성은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오지만 악인은 하나님의 곁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시편1편에서는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고 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의 자녀들은 악인들을 따라가지 않도록 성도들이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눅23:28절‘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가실 때 여인들이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예수님 때문에 가슴을 치며 슬피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왜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을까요? 주님이 십자가 지고 가심이 너무 안타까워서 울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고통을 겪으시면서 상처 입은 모습, 지쳐서 쓰러지시는 그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서 울고 슬퍼서 울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비침하고 고통스러운 가운데서 그런 자신을 위해서 울고 있는 여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내 문제는 너희들이 애통해 하며 울어야 할 사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애통해 하는 관심의 대상이 잘못 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너희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내가 불쌍하다고 울고 있지만 사실은 너희와 너희 자녀가 훨씬 더 불쌍하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지금 당하고 있는 십자가의 고통은 그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가야하리라 말씀에 예고되고 약속된 대로 가야 하기 때문에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여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기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우는 여인들에게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영혼이 아닌, 바로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자신을 위해서 울어주고 있는 여인들의 자녀들이 앞으로 맞을 미래가 참담할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 울어본 적이 언제였습니까? 지금 자녀를 위하여 눈물을 흘려 기도하는 것이 미래에 자녀 때문에 피눈물을 흘릴 위험을 막는 길인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네 자녀를 위해 울라’는 말에는, 울면서 기도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 네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눈물을 흘리라는 뜻만이 아닙니다.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자녀들을 위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슬피 울며 애통하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는 것과 기도를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6:6절에 다윗은‘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시39:12절‘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시56:8절‘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시42:3절‘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고 하면서 그처럼 울면서 주야로 기도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자녀에게 울며 기도하는 부모님이 필요합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은 응답받지 못한 기도가 아니라 드리리 못한 기도’인 것입니다. 눈물의 기도가 없는 것이 비극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왜 자녀들을 위하여 울며 기도해야 합니까? 기도하는 삶에서 나타나는 능력의 가치가 너무 크고 놀랍기 때문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녀들을 위해 우리도 능력 있는 기도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완벽한가는 별 상관없이 없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울며 기도하는 것을 듣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하여 흘리는 눈물을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담을 금향로와 함께 또한 성도들의 눈물을 담을 눈물병을 들고 서 계십니다. 본문을 통하여 한 길을 걸어가고 있는 성도에게 교회를 통해서 자손대대로 복이 임한다는 말씀을 나누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39절‘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라는 말씀은 그분을 경외하는 삶을 통해 후손들이 복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후손을 축복하시겠다는 약속은 옛 언약 안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의지할 수 있는 견고한 대상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손들에게도 확실한 피난처를 마련 해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18:19에서 아브라함에게 그분의 계획을 말씀하시면서 경건한 자들과 그들의 후손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그의 모든 후손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그가 진리의 청지기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부모들은 이 말씀을 명심하여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죽고 사는 것을 넘어 이 땅이 어려움을 당하고 심판을 받을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영적으로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상주감리교회는 지금도 끊임없이 그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러줄까? 어떻게 하면 믿음의 대를 이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으로 세워질까?’를 고민하며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구약의 부모들과 같다면 그 결과를 성경을 통해 확인해야 합니다.
사시기를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갔지만 첫 세대부터 자녀들을 믿음으로 양육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의 멸망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사사기2:10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그리고 사사기의 맨 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삿21:24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시대의 비참함과 죄악상, 그리고 어려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간간이 영적 부흥의 시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매우 짧았습니다. 자녀들을 가르치라는 고귀한 사명을 충실히 이행한 세대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레미야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을 경외함으로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후손이 복을 받는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아직까지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의 자녀들이 속썩이는 자녀는 없습니다. 현재까지는 모두가 잘 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되어갈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행동에 따라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사기 시대처럼 오늘의 시대는 각자가 알아서 가는 시대라고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 자녀들이 자기 소견대로 살아가는 시대가 되면 얼마나 심각한 일들이 펼쳐질지를 미리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혹시라도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자면 눈물로 호소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동성애를 사랑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감리교단에서 이번 36회 총회에서 퀘어신학을 이단으로 정죄를 했습니다.
우리는 생존경쟁의 삶을 살아가는 자녀들에게 이기는 법을 가르치기를 원합니다.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가장 먼저 예배 시간을 뺍니다. 그리고 신앙과 반대되는 교육을 합니다. ‘지면 안 된다. 손해 보면 안 된다. 약게 살아야 한다. 너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공부 못하고 가난한 아이와 친구하지 마라. 용서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은 아주 훌륭한 신앙인들이라서 우리 자녀들의 앞길에는 시온의 대로가 활짝 열리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배생활과 기도생활 등등 생명교육을 철저히 해야 합니다. 생명교육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아이들은 행복한 삶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자녀들이 구원받는다는 보장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지체로 연합된 사실을 알고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자녀들은 물론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많은 유익을 끼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즉 자녀들을 믿음으로 양육하고 교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의 증거는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영적 축복을 전달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를 끝까지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책임져주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끝까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우리를 책임져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을 유산으로 물려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부모님 잘 만나서 외제차 끌고 다니며,
돈을 마구 쓰면서 사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마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영원한 기업인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우리 성도님들이 제일 행복한 사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대기업의 가문에서는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계시는데 아들 둘이서 아버지 재산이 자기 것이라고 재판을 받고 나이 많은 아버지를 재판정으로 오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기업은 싸울 필요도 없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공평하게 주시는 영원한 기업임을 믿습니다. 그토록 좋으신 아버지를 잘 모시고, 아버지와 함께 이 땅에서도 행복하게 살아가고, 또 영원한 천국에서도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깨달음으로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님들은 항상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평안하고 행복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고 자기 후손들을 위하여 한마음과 한길로 걸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1.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한 마음과 한 길로 가야 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한길로 걸어가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길은 생명의 길, 좁은 길, 지혜와 거룩함과 의로움과 구원의 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길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35:8-9절‘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사30:21절‘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사42:16절 ‘내가 맹인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이 알지 못하는 지름길로 인도하며 암흑이 그 앞에서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했습니다.
구약에는 새 언약의 백성들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은 길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로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만들고 열어놓으신 길을 벗어나거나 떠나지 않도록 그분께서 지키신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강은 자기 물을 마시지 않습니다. 나무는 자기 열매를 먹지 않습니다. 태양은 스스로를 비추지 않으며, 꽃은 자기를 위해 향기를 퍼트리지 않습니다. 즉 창조의 법칙은 남을 위해 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통해 우리의 길을 열어놓으시고 계시와 말씀을 통해 그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39절‘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늘 평안하고 형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 마음과 한 길입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 하시는 여러분이 잘 알 듯이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고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약1:17절‘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그러나 우리 인생들은 연약하여 언제나 변하고 신실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또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며 살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도 아끼지 않겠다고 하지만, 막상 조금만 어려
우면 금방 예수님을 모른 척하는 우리들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지 않도록 지켜드리겠다고 장담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장담을 할 때는 정말 자기가 그렇게 의리를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분명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사람이기에 연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가 이제는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은 구주라고 외칩니다. 결국에는 죽음 앞에서도 예수님을 시인합니다. 그래서 순교를 당합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이처럼 달라질 수가 있었을까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연약하디 연약한 인간에게 한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변함이 없는 믿음,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의지력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주시는 마음이 될 때 우리가 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을 품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직 한 마음, 흔들리지 않는 마음, 오직 예수중심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야고보서에서 사탄은 우리에게 두 마음을 품게 한다고 했습니다. 약4:7-8절‘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악한 사탄은 우리의 마음을 갈라놓고, 우리의 마음에 두 가지 길을 가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향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우리 안에 한 마음을 주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을 갈라놓고, 우리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사탄의 영향에는 마음을 닫으십시오.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의 마음은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과 동행하시고,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기에 충분한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떠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는 창조의 법칙과 같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새 마음을 주시고 그들 안에 성령을 두어 율례를 지켜 행하도록 이끄실 것이라고 예언했고,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위해 거룩한 길을 만드시고, 그들의 행보를 방해하거나 그릇 치우치게 만드는 위험 요소들로부터 그들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동행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지 않고 방황하며 그분의 율례에서 벗어날 때 우리를 다시 바른길로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에서 벗어났을 때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그분께서 여신 바른길로 우리를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길에서 벗어난 언약의 백성들에게 지금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와 말씀을 주셨습니다. 구원받은 언약의 백성인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을 이것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어둠에 광명을 비춰주시고 굽은 길을 곧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잠4:18-19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벽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예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행하실 선한 일을 예비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40절‘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관계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조건의 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누리려면 반드시 그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계셔야만 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없고 복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 바로 기복신앙이요, 미신적인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하였다가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하실 것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잊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소홀히 합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훌쩍 떠납니다. 하나님께서 떠난 이스라엘, 예루살렘은 말 그대로 비참했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제야 하나님께서 떠난 삶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포로에서 귀환하여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하나님께서 돌아오실 처소인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합니다. 하나님께서 돌아오셔서 함께 하셔야만 된다는 절실한 깨달음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돌아오셔서 거하실 처소를 재건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지금 가장 중요한 그 현장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록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강조하며 말씀하신 가르침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복 주기 위해서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하나님 축복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복 받았으니 간섭하지 마시고 가셨다가 나중에 또 필요하면 그때 또 오십시오.’ 말은 이렇게 하지 않겠지만, 실제 삶의 모습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연히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들 중에는 이런 분이 한 분도 없지만, 현대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의 모습은 정말 이런 모습입니다. 축복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놓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 놓치고 아무리 축복을 거머쥐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차라리 다른 것 다 놓치더라도 하나님만은 절대 놓치지 않는 삶이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모든 것을 다 가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절대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하나님의 약속에 뿌리를 내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혹시 믿음이 나약해져서 말씀을 멀리하며 세상으로 떠내려간 자신을 발견했다면 다음 세 가지를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기도하러 나오십시오. 신앙이 좋을 때는 이 말씀에 동의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위에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도 쉽게 권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어려움을 당하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럴 때 나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빨리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느끼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이 방법과 수단이 될 때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둘째, 다른 교회를 따라가지 마십시오. 성경에 나오는 교회를 모델로 삼고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교회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시대는 전도가 안 된다고 전도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바쁜데 무슨 소모임이냐 다른 교회도 안 하는데’ 또는 ‘기도회는 무슨 기도회냐 지금 얼마나 바쁜데’와 같은 생각으로 세상과 타협하거나 세속에 물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육신에 거하지만 육신과 싸우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무기는 ‘복음’을 반대하는 견고한 진을 파하고 하나님의 강한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셋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쓰지 마십시오. 물론 사람에게도 인정받아야 하지만, 사람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삶의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면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칭찬해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들을 명심하시고 교회와 가정과 후손들이 복을 누리는 참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41절‘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들의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에 뿌리를 내리도록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식물도 뿌리를 어디에 내리느냐가 정말 중요합니다. 블루베리는 아무 흙에서 안 되고 반드시 ‘피트모스’라는 전용 흙에 심어야 합니다. 감나무는 절대 퇴비성분이 많은 땅에서 키우면 감이 영글기 전에 다 떨어집니다. 퀴즈 나갑니다. 그러면 포도나무는 어디에 심어야 좋을까요? 포도나무 목장에 심어야 합니다. 이런 아재개그에 웃어줄 수 있는 수준도 좀 가지시기 바랍니다~ㅎㅎㅎ)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로 인생의 뿌리를 어디에 내리느냐는 정말 중요합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곳에 심어서 뿌리를 내리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이라도 빨리 인생의 뿌리를 뽑아서 옮겨 심어야 할까요? 오늘 이곳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여러분들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자리에 잘 심어져 있다고 믿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본문 41절을 새번역에서 표현한 것처럼 뿌리를 굳게 내리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양분이 충분히 뿌리를 통해 섭취될 수 있도록 믿음의 뿌리를 잘내려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 안에 심어졌다 해도 그 뿌리가 온전히 내리지 않아 하나님의 영양분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은 뿌리가 예배의 영양분을 잘 섭취할 수 있는지, 말씀의 영양분을 잘 섭취할 수 있는지, 성령님의 감동을 잘 섭취할 수 있는지 살펴보셔야 합니다.
사람이 그냥 살아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양분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마4:4절‘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사람의 뿌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영양을 받아야만 정상적인 존재가치를 가지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구조가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영적인 DNA가 그렇게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잘 심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영양분을 잘 섭취할 수 있도록 뿌리를 더 굳건히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하면 우리는 영적인 영양실조에 걸립니다. 그래서 열심히 사는데 행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적 조건이 좋은데도 공허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영양실조입니다. 빨리 뿌리를 점검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의 뿌리가 예배로 잘 연결되어 있는지, 뿌리가 말씀으로 잘 연결되어 있는지, 기도로 하나님께로 뿌리가 닿아 있는지 살펴보셔야 합니다. 그 뿌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양분을 섭취한 삶에 맺히는 열매는 기쁨의 열매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는 열매와는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 묻어나는 열매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맺힌 물질은 기쁨의 맛이 나는 물질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맺힌 건강, 인간관계, 성공 모두 다 감사의 맛이 나는 열매가될 것입니다. 그 축복의 열매를 가지고 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자녀손들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눈동자처럼 지키며 사는 자들이 되기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더욱 잘 알아 하나님의 음성, 주님의 음성만 알고, 오직 그분만을 따르도록,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여 결코 어떤 이유에서라도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일에 옳고 그름을 분별할줄 알고 살아가는 자녀들이 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의 자녀손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해 주시기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 손들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자긍심을 갖게 되기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통 가운데서 뒤를 돌아보시며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신 이 말씀이 나에게 주신 말씀인 줄 알고 우리의 가정을 돌아보고 우리의 자녀들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는 부모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인생을 책임지시고 형통케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의 크기와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우리는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개인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응답하십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은 한마음을 품고 한길로 가는 것입니다. 한마음을 품고 한길로 갈 수 있도록 서로 돕고 기도하는 상주감리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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