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영토 변천의 흐름(2) --- 4군 6진 개척..세종대왕,현대의 우리 국경선을 완성
아들아, 우리 민족의 영토 변천사 두번째 이야기는 조선시대로 넘어와서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압록강 하구 위화도
1388년 5월, 위화도 회군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란다. 회군의 명분은 이해하나, 어쨌든 어명을 거스른 것은 반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회군을 주동한 이성계로서는 살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왕을 세우고,
정권을 잡아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겠지.
태조 이성계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 中)
위화도 회군과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 때문에 이성계는 자신이 왕이 되려는 반역심이나
권력욕 때문에 회군을 한 것 아니냐, 또 그 권력욕 때문에 요동수복, 고토회복의 대의를
저버린 사대주의자라는 오명을 받기도 한다만..
요동정벌의 대의는 알겠으나..그것의 실현 가능성과 요동정벌 후 대외관계의 변수를
고려해서 생각해 본다면 그렇게 단순하게 판단하고 평가를 끝낼 사안은 아니라 본다.
이 사건의 명분과 현실에 대한 평가는 분명 의견이 갈리고 있는 사항이란다.
아들아,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며 왕조교체가 이루어지고 새나라 조선이
건국되었고 조선왕조에서도 북쪽으로의 영토확장과 개척,고토회복을 위한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었지.
단, 그 방향은 명과의 충돌과 견제가 예상되는 압록강 넘어 요동반도 방향이 아니라..
지금의 함경도 방향..동북면 방면으로 향했다.
조선의 북방진출은..우리의 고토회복이란 명분과 함께, 태조 이성계의 출신지이자
그 선조들의 본거지였던 곳이 바로 동북면 지역, 지금의 함경도 일대인지라..
조선왕실로서는 왕조의 발상지를 수복해서 조선의 영역으로 확실히 함으로써
왕실의 존엄과 정당성을 확보한다는 명분도 작용했지.
이를 위한 사전작업으로 태종대왕 5년에 명에 사진을 보내어 공험진 이남을 조선에서
관할할 수 있도록 상주하고, 명의 초대 황제인 홍무제 주원장의 허락을 받아낸 것이지.
공험진의 위치는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말하듯..두만강에 면한 함경북도 북단의
경원군에서 북쪽으로 약 7백리이며..
공험진 이남은 조선의 땅이고 관할로 인정된 공식적인 영토이므로, 이 땅을 점거한
여진을 몰아내거나, 조선의 백성으로 삼을 근거가 되는 것으로 바로 세종대왕 대에
단행하는 4군6진 개척의 주요 명분이 되었단다.
고려말, 조선초의 국경선
중국대륙을 지배하는 강력한 제국 명과 조선 사이의 중간은 오랜 기간 여진이 점유하여
살았는데 이들은 크게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으로 구분되고 부족과 부락 단위로
목축과 수렵, 농경도 하며 각자 독립적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어.
여진족 전사
기마술과 궁술이 뛰어나고 용맹하기 이를데 없어 중국이나 조선군이 3:1로 싸워도
여진족 전사를 감당하기 힘들고 오죽했으면 10:1로도 못이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여진족의 전투력은 대단했던 것 같아.
실제로 고려군이나 조선군이 여진족에게 당한 기록도 상당히 많고.
그래서 중국대륙의 제국들도 그랬지만 우리도 여진이 뭉치지 못하도록 경계하고
감시하고 서로 다툼도 조장하고, 때로는 힘이 커지지 못하도록 쳐들어가서 그들의
세력기반을 미리 파괴하는 예방전쟁도 수차례 했지.
때로는 그들과 교류하며 달래기도 하고, 회유하고 또 귀화를 받아들여 우리 백성으로
삼기도 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여진과의 관계를 만들어 갔는데..
역시 북진을 위해선 결국엔 전쟁은 피할 순 없었던 수순이라고 봐야 되지 않을까
생각되는 구나.
여진족 기마병
어쨌든 결론적으로..우리의 북방영토 확장과 개척을 위해서 부딪혀야 하는 여진족이
그만큼 만만치 않은 상대였고, 그 과정이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하며, 또 영토 확장과
유지를 위해서 많은 피와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결코 쉽지 않은 역사였음을 알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
조선은 태조대왕 때부터 북진정책을 꾸준히 펼쳐서 두만강까지 진출해 최전방에
경원부를 설치했는데 태종대왕 연간에 여진족의 강력한 공세에 못이겨 방어선을
경원부에서 후방의 경성으로 옮겨 후퇴했고 또다시 일시 회복한 경원부가 계속해서
여진족의 침략에 시달리게 되자..
세종대왕 대에 이르러선 지키기 어렵고 지켜도 실익이 없다면서 조정에서는 방어선을
또다시 경원부에서 한참 후방인 용성까지 물리자는 그런 논의까지 나오게 되었단다.
보통 세종대왕하면 사람들은 문화군주, 문치에서의 업적만 생각하고 문약하다는
인상을 가지는 이가 있는데..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 세종대왕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소리란다.
세종대왕의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 바로 북방으로의 영토확장과 적극적인 대외군사
활동이며..이것은 우리 영토를 지키고자 하는 세종대왕의 강력한 의지가 뒷받침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세종대왕
세종대왕은 동북면의 우리 영토 방어선을 후방으로 물리자는 조정의 논의에 대해
“조종께서 지키시던 곳은 비록 한 뼘의 땅이라도 버릴 수 없다.
(祖宗所守, 雖尺地寸土,不可棄也)."라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셨지.
세종대왕의 이 강력한 의지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물론 우리 영토이고 더욱이 왕실의 본향이 되는 곳을 쉽게 내 줄 수 없다는 당연한
이치도 그렇겠으나..
고려사(高麗史)를 여러번 다듬으며 역사에도 정통했던 세종대왕은 분명 고려가
동북9성을 여진에게 넘겨준 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런 과오를 그분은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 할 것이다.
아들아, 이래서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도층에게 역사에 대한 소양과 역사의식은 기본 중의
기본이 아닐까 해.
요령성 환인현 오녀산성 (고구려 첫 왕도인 옛 졸본성, 다른 이름은 우라산성)
압록강 지류 동가강(佟佳江)과 혼강(渾江)의 옛 이름은 파저강(婆猪江).
고구려의 첫번째 수도였던 옛 졸본성이 있는 요령성 환인현 일대에 웅거한 건주여진
올량합(兀良哈)의 추장 이만주가 이끄는 여진기병 수천이 국경을 넘어 평안도의 북단
여연을 침탈하여 우리 군 수십명이 전사하고, 식량과 물자를 약탈하고 백성들을 끌고간
사건이 벌어졌단다.
정렬공 최윤덕 장상 동상 (경남 창원시)
세종대왕은 이들 여진에 대한 대대적인 정벌전을 결심하고 준비에 들어갔지.
먼저 정벌군을 이끌 사령관에는 누구를 임명할 것인가.
그렇게 세종대왕은 북방의 사정에 훤하고 여진은 물론 왜와의 전투경험이 풍부한
백전노장 정렬공 최윤덕(貞烈公 崔潤德,1376~1445) 장군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하고 휘하에 이각, 최해산, 김효성, 이순몽, 이징석, 홍사석을 부장으로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차출한 1만5천의 정벌군을 편성하여 1433년 4월, 압록강을 건너 여진의
본거지를 일거에 들이쳤단다.
파저강 전투 상황도
1만5천 정벌군은 7개 부대로 나뉘어 동시에 기습전을 펼치며 여진족의 여러 부족을
초토화시켰고, 우리 군은 4명전사, 5명 부상이지만 여진족 170여명을 참하고 230여를
포로로 잡고 병기와 마필을 전리품으로 얻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으니..
이것을 파저강 전투, 파저강 야인정벌이라고 해.
이 공로로 최윤덕 장군은 무장으로는 최초로 정승인 우의정이 되고..후에 좌의정까지
올랐으니 장수이면서 또 재상이라고 해서 정렬공 최윤덕 장상이라는 특별한 칭호를
받게 되지.
최윤덕 장상이 정승에 평안도 도절제사를 겸하여 평안도 일대의 방비를 다지고,
1436년 익양공 이천(翼襄公 李蕆,1376~1451)장군이 2차 파저강 정벌전을 감행하여
이렇게 압록강 유역의 평안도 여연, 자성, 무창, 우예의 4군이 완성되었단다.
1433년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 주요세력인 올량합과 오도리(斡朶里)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여 오도리족 추장인 동맹가첩목아가 피살되는 등 내분이 격화되자 세종대왕은
이를 두만강 일대의 북방개척의 기회로 판단하였지.
북방의 대호, 충익공 절재 김종서 장군 흉상
양정공 하경복(襄靖公 河敬復,1377~1438)장군이 15년 동안 방비하여 굳힌 함길도에
충익공 절재 김종서(忠翼公 節齋 金宗瑞, 1383~1453)장군을 후임으로 1433년 12월
함길도 도관찰사로 임명하여 북방개척의 소임을 맡겼고, 10여년의 세월동안 차례로
두만강을 따라 주요 요새가 되는 성을 수축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우리 영토로 편입
하였으니 함경도 종성, 온성, 회령, 경흥, 경원, 부령의 6진이 완성되었단다.
4군6진
그리고 새로 확립한 북방 영토에는 적극적인 사민정책을 통해 백성들의 정착을 돕고
그렇게 확실한 우리 영토로 만드는 작업이 착실하게 오랜 기간을 두고 진행되었지.
이렇게 하여 세종대왕의 치세에 백두산을 정점으로 압록강 유역 평안도에 4군과
두만강 유역 함경도에 6진이 완성되니..
지금 현재 우리나라의 국경선이 바로 세종대왕 대에 완성된 것이란다.
아들아, 세종대왕께서 완성한 이 국경선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으며..
이 국경선이 확보되기 까지 그리고 이후로도 2백년이 넘는 세월을 들인 노력과 시간,
끊임없는 투쟁의 연속 그것을 알아야 한다.
이 국경선을 확보하기 까지 우리 선조의 노력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소중한 것을 알지.
세종 대의 북방개척
다음 마지막 이야기는..4군6진 개척으로 국경선이 확보되었지만,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있는..우리에게 숙제로 남겨진 우리 땅, 영토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