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0.4%’ 자이나교도 신자, 유독 돈 잘 버는 의외의 이유
⑬싯다르타, 인도의 계룡산으로 가다
싯다르타는 당시 인도에서 이름난 세 산을 올랐다.
밧가와와 알라라 깔라마, 그리고 웃다까라마뿟다.
고행이나 요가를 앞세운 이들 수행 공동체에서 싯다르타는 꼭대기까지 올랐다.
스승의 경지와 똑같았다.
그런데 산꼭대기에는 ‘해탈’이 없었다.
그가 찾던 생로병사에 대한 답은 없었다.
어찌해야 할까.
수소문 끝에 찾아간 세 명의 스승.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웃다까라마뿟다는 오히려 공동체를 떠나는 싯다르타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자네가 먼저 해탈을 이룬다면 다시 돌아와서 우리에게 그 길을 일러주오.”
그렇다고 싯다르타의 노력이 헛된 건 아니었다.
당대에 내로라하는 세 명의 구루.
싯다르타는 그곳을 거치며 더 깊은 안목을 갖추게 되었으리라.
이제 싯다르타는 알았다.
더는 스승을 찾아다닐 필요는 없겠구나.
이제는 고요한 곳을 찾아가 나 스스로 길을 찾아야겠구나.
그렇게 다짐했다.
#인도의 계룡산, 네란자라강의 수행림
2500년 전 인도에는 숱한 수행자들이 있었다.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진리를 찾는 이들이었다.
그들이 모인 곳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고행림(苦行林)”이라고 불렀다.
당시 고행림에는 약 2만 명의 수행자가 있었다고 한다.
굳이 비유하자면 ‘인도의 계룡산’쯤 되는 곳이다.
한국도 계룡산에 가면 ‘도(道)’를 찾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그랬다.
계룡산에 대한 삼국시대의 기록까지 남아 있다.
유달리 기(氣)가 강한 곳이라서 그럴까.
불교와 유교는 물론이고 무속을 좇는 사람도 계룡산을 많이 찾았다.
인도의 네란자라 강가에 있던 고행림도 그랬다.
브라만교 전통과 요가, 고행 등 숱한 방식으로 나름의 길을 찾는 이들이 모인 곳이었다.
나는 네란자라 강가에 있는 고행림으로 갔다.
강의 폭은 무척 넓었다.
강물은 거의 말라 있었다.
우기에는 물이 넘친다고 했다.
건기에는 강이 말라서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2만 명, 어마어마한 숫자다.
눈을 감고 당시를 그려본다.
강가에는 숲이 우거져 있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고행하는 수행자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었을 터다.
그 수행의 열기가 얼마나 대단했을까.
일종의 열린 사원이자 열린 수도처가 아니었을까.
#개미라도 밟으면 어떡하나
싯다르타와 다섯 명의 동료는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는 스승도 없었다.
기댈 곳은 나 자신뿐이었다.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 답을 찾아야 했다.
수행의 방식으로 그들은 고행을 병행했다.
몸에서 불쑥불쑥 올라오는 욕망을 눌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몸을 이기지 않고서는 해탈을 이룰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치열하게 수행하는 사람일수록 강도가 더 높은 고행을 택했다.
브라만교 전통의 고대 인도에서 눈에 띄는 종교가 하나 있다.
당시 불교와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룬 자이나교다.
불교를 객관적으로 알기 위해 자이나교에 대한 이해가 있으며 좋다.
자이나교도 ‘고행’을 중심에 둔다.
그들의 수행 방식은 독특하다.
자이나교 수행자는 살생을 금한다.
그들은 걷다가 자신도 모르게 개미나 벌레를 밟아 죽일까 봐 극도로 조심한다.
오죽하면 빗자루 같은 걸 들고서 자신의 앞을 쓸면서 걸어 다녔다.
불살생, 불간음, 무소유, 금욕, 고행이 자이나교의 엄격한 계율이다.
심지어 무소유를 실천하고자,
아무런 옷도 걸치지 않고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사는 수행자도 있다.
자이나교를 창시한 마하비라의 조각상을 봐도 그렇다.
정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이다.
자이나교 신자들은 마하비라가 깨달음과 해탈을 이룬 성자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그의 조각상에는 남근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무소유를 통해 욕망을 넘어선 존재. 그게 자이나교의 지향이다.
자이나교에서는‘살레카나’를 수행의 최고 경지로 삼는다.
명상에 든 채로 곡기를 끊고 스스로 굶어서 죽는 행위다.
자이나교는 이걸 ‘살레카나(삼매사ㆍ三昧死)’라고 부른다.
요즘도 그렇다.
가령 한 자이나교 수행자가
“곡기를 끊고 해탈에 들겠다”며 공식 선언을 한다고 치자.
그럼 그가 앉은 자리의 사방에 CCTV가 설치된다.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든 그의 24시간이 대중에게 실시간으로 공개된다.
정말로 쌀알 한 톨 먹지 않고 금식을 하는지 자동으로 확인이 된다.
그뿐만 아니다.
자이나교 신자들이 그 둘레에 모여든다.
그리고 그를 향해 기도를 한다.
그렇게 열반의 순간을 지켜본다.
그럼 요즘은 어떨까.
곡기를 끊고 해탈에 드는 자이나교 수행자가 종종 나올까.
그렇지 않다.
요즘은 그런 사례를 거의 보기 힘들다.
그렇지만 자이나교에 흐르는 이런 수행 풍토를 고려하면
2500년 전의 인도를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
불교와 자이나교는 동시대에 일어난 종교였다.
둘을 함께 보면
싯다르타 당시에
인도 전역에 흘렀던 고행과 수행의 풍토와 정서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2500년 전 고행림의 수행자들도 상당수 이런 정서를 공유하고 있었다.
#곡기를 끊다시피 한 싯다르타
싯다르타는 고행림에 홀로 앉았다.
요가의 연꽃 자세인 가부좌를 틀고서 명상에 들었다.
수행을 거듭하면서 그는 식사량을 줄였다.
나중에는 하루에 먹는 양이 극도로 줄었다.
나무에서 떨어진 씨앗 하나 혹은 쌀 한 톨, 물 한 그릇 정도만 먹고서 하루를 버텼다.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보드가야에는
세계 각국에서 순례객들이 찾아와 수행한다. 백성호 기자
어찌 보면 무모하다 싶다.
그렇지만 2500년 전 고행림에 흘렀던 수행의 풍토를 고려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싯다르타는 치열했다.
당시 고행림에서도 싯다르타만큼 치열한 수행자는 찾기 힘들 정도였다.
싯다르타는 날이 갈수록 피골이 상접한 상태가 되어 갔다.
거의 뼈만 남다시피 했다.
고행의 끝자락. 거기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출처:중앙일보]백성호: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