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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7) - 2023. 5.20(토) 5.21(일) |
5월20일(토)
이번 순례는 전주교구인데 전주교구로서는 두 번째다. 이번은 모두가 전주시내에 있는 성지이다. 치명자산 성지, 전동 순교성지, 서천교 · 초록바위, 전주 옥터, 전주 숲정이 성지로 5곳인데 전동 순교성에에 속한 풍남문을 별개로 보면 6곳이고 서천교와 초록바위를 따로 보면 7곳이다.
아침 8시 성모상 앞에서 성모님께 출발 기도를 바치고 차에 올랐다. 차량봉사는 문 베드로 형제. 참여자는 5명.
이동 경로는 지난 3월25일 익산에 갔던 때와 같이 광주-대구 고속도로를 타고 함양 IC애 가서, 대전 - 통영 고속도로에 올리는 길이다. 논공 휴게소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진안 마이산 휴게소에서 한 번 더 쉬는 것도 전과 같다. 단 다른 것이 있다면 산빛. 먼저와 달리 마이산이 푸른빛으로 갈아입었다. 말 그대로 꽃보다 아름다운 신록 - 녹음의 내륙 산지를 달리는 드라이브 자체가 오월의 축복이다. 12시 30분 경 전주에 도착.
치명자 산 순교 성지 - 호남의 사도 유항검 순교가족의 영광 |
점심때라 일단 점심을 먹어야 한다. 미리 알아 놓았던 전주비빔밥을 전문으로 하는 가족회관이라는 식당에 갔다. 붐비는 식당이 다 그렇듯 사전 예약은 안 되며 현장에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바로 점심때여서 그런지 식사하려는 사람들이 많아 입구부터 줄을 서 있다. 행렬에 섞여 줄을 서서 벽에 붙은 식당 홍보물을 보니 참 화려하다. 전주비빔밥으로 대한민국 식품 명인, 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은 것들이다. 주인공은 1979년부터 3대를 이어 비빔밥을 해왔다고 하며 자기 가족처럼 고객을 대한다고 가족회관이라는 상호를 쓰며, 어머니로부터 배운 바 그대로 곧 본 대로, 먹은 대로, 느낀 대로 정성껏 음식을 만든다고 한다. 30여분을 기다려 겨우 자리를 잡아 육회비빔밥을 시켜 식사를 했다. 하지만 맛은 엄지척을 내밀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 중론.
목적지인 치명자산 아래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10여분. 문제는 성지가 해발 300m 기린봉 정상 부근에 있어서 느린 걸음으로 가면 약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전북 전주시 완산구 바람쐬는 길 120. 이것이 치명자산의 주소다. ‘바람쐬는 길’, 이 참 재미있는 이름이다. 이 산의 원래 이름은 승암산(僧岩山, 중바위 산). 기린봉 바로 아래에 있는 또 하나의 봉우리다. 신유박해 때 순교한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그의 가족 6명을 합장한 묘가있다. 이로 인하여 이 묘원은 전라북도 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되었으며 천주교인은 ‘루갈다 산’이라고도 한다.
유항검(柳恒儉)[1756~1801] 가족의 순교사
유항검의 본관은 전주(全州),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이다. 전주 초남리[현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草南里 혹은 最南里]]에서 양반이며 호남의 대부호(大富豪)였던 아버지 유동근(柳東根)과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784년(정조 8) 가을, 유항검은 경기도 양근의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 집에서 권철신과 권철신의 문하생들이 서학을 탐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권철신의 집을 찾아갔고, 권철신의 집에서 십자가상과 천주교 서적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이때 권철신의 동생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우고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입교 후 고향 전주로 돌아온 유항검은 가족과 친척, 노비 등에게 복음을 전파했고, 1786년 가을에는 가성직자단(假聖職者團)의 신부로 임명되었다. 가성직이란 정식 신부가 오기 전 초기 신자들이 임의로 조직한 성직을 말한다. 신부로 임명된 유항검은 고향에서 미사를 집전하며 성무 활동에 전념했고, 진산에 사는 이종사촌인 윤지충의 집에 자주 모여 동생 유관검과 함께 교리를 연구했다. 나중 유항검은 북경 주교에게 문의 편지를 보낸 결과 가성직 제도가 교리에 어긋나며 독성죄가 됨을 깨닫고 중단했다. 그는 주문모 신부를 입국시키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다.
1790년 10월, 천주교회가 조상 제사를 금지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양반 신자들이 교회를 떠났지만, 유항검은 교회의 명령을 충실히 지키기 위해 신주(神主)를 조상의 무덤 곁에 묻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1791년(정조 15) 제사 문제에서 발단된 신해박해(辛亥迫害)가 일어나 윤지충이 처형되었다. 당시 유항검은 7개월 동안 피신해 있다가 자수한 뒤 배교(背敎)를 선언하고 일단 석방되었다.
이후에도 여전히 신앙생활을 계속하던 유항검은 1795년 5월에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를 전주로 초청해 미사를 봉헌했고, 자신의 장남 유중철과 이윤하(마태오)의 딸 이순이가 ‘동정 부부’를 서약하고 혼인하는 것을 허락했다. 1796년 겨울,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서양 군함을 불러들여 무력시위를 통해 결판을 내야 한다는 ‘대박청래(大舶請來)’ 사건에 깊숙이 관여했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유항검은 1801년 3월 전라감영에 체포당했다. 그리고 ‘대박청래 사건’에 개입됨이 드러나 4월에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10월에는 대역부도(大逆不道) 죄로 능지처참(陵遲處斬)과 파가저택(破家瀦澤)을 받고 전주로 이송된 후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전동성당 터인 풍남문 밖에서 45세 나이로 처형되었다. 파가저택(破家瀦澤)이란 죄인의 집을 허물어 못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복 동생 유관검에 이어 11월 14일(음력 10월9일)에는 큰아들 유중철(柳重哲, 요한)과 둘째 아들 유문석(柳文碩, 요한), 다음해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에는 부인 신희(申喜), 며느리 이순이(李順伊, 루갈다), 조카 유중성(柳重誠), 제수 이육희(李六喜)가 모두 숲정이에서 순교했다. 온 가족이 도륙당해 가문이 절손된 것이다.
순교 이후 무덤 이전 과정
한편 류항검과 가족들이 순교한 뒤 남아 있는 노비와 인척들은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고향 마을에 돌아가지 못하고 초남리 너머에 있는 재남리(김제군 이서면과 용지면의 경계 마을) 바우배기에 합장하였다. 그 후 전동 본당이 설립되면서 재남리 공소는 전동 본당 관할이 되었으며, 초대 전동 본당 주임 보두네(Baudounet) 신부는 자주 이 공소를 순방하면서 바우배기의 류항검 가족 무덤을 돌보았다. 그러던 중 1914년 사순 시기에 땅 주인이 무덤을 이장하도록 권고하자, 보두네 신부는 신자들과 함께 그곳으로 가서 파묘를 하여 순교자 7구의 유해와 이름이 적힌 사기 접시를 확인하게 되었다. 7명은 류항검과 부인 신희, 둘째아들 문석과 조카 중성, 제수 이육희, 그리고 동정부부 맏아들 류중철과 이순이였다.
보두네 신부는 신자들과 함께 7구의 순교자 유해를 각각 작은 항아리에 담고 이름을 써서 달았다. 그런 다음 전동 성당을 지을 때 재목을 구하기 위해 사두었던 성당 동쪽 기린봉 자락에 있는 중바위산(현 치명사산〕 (전주시 대성동 산 11번지)에 이들 일곱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장하였으니, 그때가 1914년 4월 19일이었다. 이어 1949년에는 전동 성당 신자들이 치명자산에 십자가 기념비를 건립했고 교구장 김현배 신부의 집전으로 제막식을 가졌다.
전주 초남리에서 시작된 유항검 일가의 길고도 먼 순교 여정은 이렇게 치명자산에서 마쳤고 그 길은 시련과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은 물론 가문의 단절까지도 감수하며 천주를 섬겼고, 그들이 흘린 피가 오늘날 호남 천주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치명자산 성지 조성 사업
전주교구의 치명자산 성지 성역화 작업은 1987년 교구 설정 50주년을 앞두고 처음 시작되어 치명자산 개발 계획을 세운 뒤 1985년 성직자 묘지를 조성하고 1988년 십자가의 길과 산행로 정비작업을 완료했으며, 1994년 5월 9일 산 정상 순교자들의 합장묘 아래에 산상 기념성당을 봉헌했다. 1997년 입구 조경을 위한 몽마르트 광장을 조성하고 이어 주차장과 진입로 등을 차례로 진행했다. 또한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가장 빛나는 진주로 불리는 유중철과 이순이 동정부부를 현양하는 요한 루갈다제를 2001년부터 매년 개최하여 순교자 현양행사를 지역문화 축제로 승화시키고 있다. 한편 이곳 합장묘에 묻힌 유항검 일가 순교자 중에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아들 유문석 요한, 유중철 요한과 며느리 이순이 루갈다, 조카 유중성 마태오 5명은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어 복자품에 올랐다.
지금까지 이곳 사적지에서는 크고 작은 기적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었다고 한다. 앞으로 그것이 류항검, 류중철, 이순이 등의 시복(諡福)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에게도 커다란 감동을 주게 될 것이다. 또 하나, 석양이 질 때 드러나는 이곳 언덕의 기념 십자가 옆에 있는 바위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성모 마리아 상과 비슷하다. 이처럼 치명자산은 더 많은 사람들을 진리의 길로 이끌어 주기 위해 오늘도 전주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
몽마르뜨 광장/파티마 성모 동산
산상 성당의 출발지는 성지관리소 앞 몽마르뜨 광장이다. 몽마르뜨란 파리의 북동쪽에 있는 몽마르뜨 언덕을 말한다. 몽마르뜨 언덕은 지금은 유분방함을 즐기는 예술가들의 아지트로 유명하지만 실제 몽마르뜨의 ‘마르뜨르(martre)’는 ‘순교자(martyrs)’라는 뜻이며 언덕을 뜻하는 ‘몽(Mont)’과 합쳐져 몽마르뜨가 되었는데 이는 ‘순교자의 언덕’을 의미한다. 파리의 초대 주교였던 성인 디오니시오가 이산에서 순교했기 때문이다. 해발 130m의 야트막한 언덕이지만 평지가 주를 이루는 파리에서는 시가지를 내다볼 수 있을 만큼 높은 지대에 속한다.
파리의 몽마르트르 주변에는 걸어서 돌아볼 수 있는 사크레 쾨르 성당, 몽마르뜨 묘지 등 관광명소가 있다. 사크레 쾨르 성당(Basilique du Sacré Cœur, 예수성심성당)은 1870년의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독일에 패배했을 때 상처 입은 파리 시민들과 가톨릭교도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지었다. 성당 꼭대기의 돔에서는 파리 시내의 전경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인근 몽마르뜨 묘지(Cimetière de Montmartre)에는 스탕달, 드가, 모로, 졸라 등 문인과 화가들의 묘지가 있고 고흐와 동생 테오가 함께 살았던 반 고흐의 집, 다다이즘의 대표 시인 짜라가 살았던 ‘트리스탄 짜라의 집’, 작곡가 비제가 살았던 ‘조르주 비제의 집’ 등의 볼거리가 있다.
치명자 성지 아래를 몽마르뜨 광장이라 한 것은 단순히 순교자의 언덕을 뜻한다. 안내소 바로 옆에 치명자산 성지 안내도와 성지 해설 게시판이 서 있다. 그리고 바로 몽마르뜨 언덕 표지석과 함께 광장이 나타난다.
그런데 몽마르뜨 광장을 여기서는 파티마의 성모동산이라고도 부른다. 주지하다시피 파티마의 성모는 1차세계대전 중인 1917년에 포르투갈 파티마에서 세 사람의 목동에게 발현하셨다. 그래서 이 성지에는 유독 양 조각상이 많다.
십자가의 길
파티마의 성모 동산을 지나면 예수성심상이 서 있고 가까이 피에타상 왼쪽으로 오르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다. 안내도 대로 올라갈 때는 십가가의 길로 가고 내려올 때는 성직지묘를 거쳐 오는 길을 택하였다.
십자가의 길의 각처는 모두 통나무 모양의 십자가로 만들었고 그 가까이 양 한 마리씩 배치되어 있다. 이 역시 파티마의 목동과도 관계가 있다. 14마리의 양을 바쳐야 성지에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길은 경사가 졌지만 그리 심하지는 않다. 묵묵히 14처의 숫자를 늘여갔다. 저마다 묵상으로 기도를 대신하며 헐떡거리며 오르기를 30-40여분. 드디어 다 올랐다. 출발 전의 염려만큼 어렵지 않았다. 성전 마당에 이미 성모님께서 한 다발의 장미꽃 바구니를 준비한 채 마중 나와 계신다. 바로 산상 성당으로 이어진다.
산상기념성당(순교자 기념성당)
경사진 바위산을 깎고 비집어 지은 성당이기에 마당이 좁다. 석조 건물로 가운데 성당과 그 오른쪽 옆에 유물전시관이 있고 건물 좌우에는 전망대와 순교자 묘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성당 내부에 들어가니 제대 뒤벽은 모두 모자이크로 되었는데 정면에는 성모마리아와 성 요셉이 예수님을 양쪽에서 손잡은 성가정 상이 있다. 그리고 제대 오른쪽으로는 상투를 올린 유중철 요한이 서 있고, 왼쪽으로는 쪽머리를 한 이순이 루갈다가 꿇어 앉아 있다.
그리고 특징적인 것은 제대 좌우로 루갈다의 편지가 클로즈업 되어 제시되어 있다.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이순이(李順伊) 루갈다는 이윤하(마태오)의 딸이다. 이윤하는 당대의 학자 이익의 외손으로 권철신은 그의 처남이다. 이순이는 어려서부터 신자인 어머니로부터 교리와 글을 배웠다. 1801년에 순교한 이경도(가롤로)와 1827년에 순교한 이경언(바오로)은 그녀와 남매간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6세가 되던 1797년 동정을 바치기로 결심하여 어머니로부터 허락을 받고 주문모 신부와 상의, 주문모 신부는 평소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유항검의 아들 유중철이 떠올라 이에 혼인을 주선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가을 유중철의 고향인 전주 초남이에서 시부모 앞에서 부부가 동정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보내겠다고 서약하고 혼인생활을 시작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시 체포되어 유중철은 22세로 그해 11월 동생 유문석과 함께 전주 감옥에서 순교하고 루갈다 역시 옥중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20세의 나이로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했다.
여기서 제시된 편지는 이 루갈다가 옥중에서 친정어머니와 오빠 이경도의 처인 올케에게 쓴 편지의 일부이다. 이 대목을 포함한 루갈다의 편지를 소개한다. 모두 현대식 용어와 맞춤법으로 고친 것이다.
어머님께
슬프고 두려운 이 때를 당하여 이 자식의 마음을 아뢰려 하니 다할 길 없사오나 그간의 여러 가지 사정과 4년 동안의 심정을 직접 글로 써 올립니다.
비록 이 딸자식이 죽는 지경에 이르러도 너무 상심하여 주님의 각별하신 은혜를 배반하지 마시고 부디 마음 편히 순명하십시오. 주님께서 다행히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치명의 은혜를 주시거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십시오. 제가 지금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은 진실로 떳떳치 못한 일입니다. 쓸데없는 자식이지만 특별한 은총으로 치명의 결실을 맺는 날이 오면 비로소 어머님께서도 기특한 자식을 두었다고 할 것이요, 저도 또한 떳떳한 자식이 될 것입니다. 치명하는 일이야말로 미천하고 쓸데없는 자식을 진실되고 보배로운 자식으로 만드시는 것이니 천만 번 바라오니 너무 마음 상하지 마시고 너그러이 참으십시오.
이 세상을 꿈같이 여기시고 영원한 세상을 고향으로 아시어 아주 조심하여 순명하시다가 이 세상을 떠나신다면 보잘것없는 이자식이 영원한 복락의 면류관을 쓰고 즐거운 복을 지닌 채 어머님의 손을 붙들어 영접하여 함께 영원한 복락을 누릴 것입니다. 오빠(복자 이경도)가 다시 판결을 받았다하니 진실로 얼마나 감사한 주님의 은총입니까? 우러러 늘 감사드리고 어머님의 복 받으심을 찬송합니다. 경이형제(동생 이경중, 막내동생 복자 이경언)와 큰 언니, 올케언니에게 의탁 하시고 우리 남매(큰오빠 이경도와 자신)는 생각지 마십시오. 아무쪼록 충주댁(올케, 이경중의 처)을 빨리 데려다가 함께 지내시기 바랍니다. 어머니와 제가 서로 이별한지 4년 만에 이런 상황이 되어 그간의 회포를 풀지 못하니 망극한 정이야 오죽하겠습니까마는 이것도 오로지 주님의 뜻이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심도 주님의 뜻이요, 목숨을 거두심도 주님의 뜻이니 이런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오히려 우스운 일입니다. 만번 엎드려 바라오니 마음을 너그러이 하여 자제하십시오. 영원한 세상에서 모녀의 정을 다시 이읍시다.
이 딸자식이 여기에 온 후 저희가 평소에 마음에 두고 있던 일을 이루어, 구월에 와서 시월에 두 사람이 맹세하여 4년을 친남매같이 지내는 도중에 십여 차례의 유혹에 빠질 뻔하다가, 주님의 성혈공로에 의지하여 능히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저의 일을 답답히 여기실 것 같아 이렇게 말씀 드리니 저를 본 듯 이 편지를 반기기 바랍니다. 치명의 결실을 맺기 전에 이처럼 붓을 들어 글을 쓰는 일이 참으로 경솔한 짓이지만 어머님의 근심을 풀어드리고 반기게 하려는 일이니 이것으로써 위로를 삼으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주문모)신부께서 계실 때에 그분께서 우리 집안의 풍파를 자세히 기록하여 두라 하시기에 여기에 온 요한(루갈다의 시동생인 유문석)편에 관청에서 진술한 기록을 집으로 보냈는데 어찌하셨습니까? 천번 번 바라니 마음을 너그러이 자세하십시오. 세상은 헛되고 거짓된 것으로 생각하십시오. 드릴 말씀이 많고 많으나 편지로는 다 말씀 드릴길이 없어 대강 이만 아룁니다.
1801년 9월 27일
딸자식이 이 편지를 절하며 올립니다.
올케에게 쓴 내용도 있다.
올케 언니(오빠 이경도의 처) 너무 설워 마세요. 오빠가 비록 죽었지만 참된 남편을 두었다고 할 것이니, 언니가 치명자의 아내가 되심을 천만 번 축하드립니다. 이 세상에서는 잠깐 부부가 되고, 영원한 세상에서는 성인의 반열에 모자, 형제, 남매, 부부가 영원한 세상에서 즐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제가 죽은 후에라도 전주 소식이나 발길을 끊치 말고 내가 있던 때처럼 하십시오.
유교적 효도와 신앙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스무 살 여성이 이처럼 성숙한 신앙관을 가지고 목숨을 초개처럼 여긴 그 거룩한 모습에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은 감동하지 않을 이 뉘 있겠는가? 다블뤼 주교가 루갈다를 일러 한국 순교자의 보석이라고 칭송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에 그들 순교자의 붉은 피가 흐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순교자 기념 전시관
성당을 나와서 바로 오른쪽 옆에 있는 전시관에 들어갔다.
전시관을 들어서면 현관에 유항검이 아들 부부를 안고 있는 조각상이 있다. 전시관 내부에는 치명자산 성지 조성과정이 연대별로 전시되어 있고 이 루갈다의 친정과 시댁의 가계도도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순교자 묘 이장 시에 출토된 순교자들의 유해 항아리와 이름인 적힌 백자 사발 묘지명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비록 실물은 아니지만 당시 순교와 이장 당시를 생생하게 증언 해주는 유물이어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루갈다의 옥중 편지와, 동정부부가 유혹이 있을 때마다 성혈공로에 의지해서 물리쳤다는 루갈다의 십자가도 있었다. 실제 이 십자가는 루갈다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가족에 의해 전해졌는데 십자가 진품은 호남교회사 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순교자의 묘에 가기 위해서는 성당 건물 좌우에 나 있는 계단을 올라야 한다. 계단을 올라보면 엄청 큰 광장이 나타난다. 그리고 순교자 묘와 전망대에 오르는 길이 산비탈에 X자 형으로 나 있다. 그리고 광장 한 편에는 성모님이 지키고 계신다.
순교자 묘지
X자 계단길로 능선에 올라 오른쪽으로 가면 순교자 묘와 성모 바위가 나오고 왼쪽으로 가면 전망대다. 순교자 묘는 나무로 둘러싸인 호젓한 곳에 잘 정돈된 채로 자리잡고 있다. 원형 지대석에 옛 왕릉처럼 원형 호석이 둘러져 있는, 크지도 작지도 아니한 봉토분이다. 여기에 일곱 분의 순교자가 잠들고 있다. 진목정 성지에 한 지붕 세 가족이라고 했는에 여기는 한 지붕 일곱 가족이니 비좁기가 진목정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일곱 성인의 유해와 묘지명이 각각 발견되었으니 웬만하면 무덤의 수를 늘리는 것이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무덤 앞에는 판석 두 개를 포개어 놓아 상석을 삼고 있고 봉분 옆에 작은 돌맹이가 하나 있고 그 옆에 또 하나의 안내문이 있다. 동정녀 유섬이 묘토석 안내문이다.
동정녀 유섬이 묘토석
유섬이는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딸이다. 유항검이 순교할 때 그의 가족들도 연좌제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국법상 중죄인이라도 15세 이하의 나이가 어린 사람은 사형에 처할 수 없다. 그래서 유항검 순교시 어린 자식들 유섬이 9살, 유일석 6살, 유일문 3살은 각각 거제도, 흑산도, 신지도에 유배되었다. 2014년 한 교회사 학자가 유섬이에 대한 기록을 연구한 결과, 유섬이가 거제도로 유배되어 평생 동정녀로 순교자의 삶을 살다가 1863년 71세의 나이로 선종했음을 세상에 알렸다.
이듬해 2015년 5월 거제군 거제면 내간리 송곡마을 산방산에서 유섬이의 묘인 ‘유처자묘(柳處子墓)’가 발견되었다. 2019년 1월 치명자산 성지 봉사자들과 강학회원들은 거제도 유섬이의 묘를 순례하고 묘토석을 수습하여 이곳 치명자 산 유항검 가족 묘역에 가져와서 합토하였다. 묘토석 옆의 작은 돌도 아마 그때 가져 온 것으로 추정된다. 약 220년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격이다.
이 사건을 보면 인조 때 소현세자가 생각난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돌아온 후 인조는 불안했다. 잘못된 외교로 병자호란으로 피해를 입어 노이로제 증상을 보인 인조는 소현세자가 청나라 세력을 엎고 자신의 왕위를 빼앗지나 않을까 몹시 두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현세자가 귀국 후 두 달만에 죽었다. 독살로 보는 설이 있다. 소현세자가 죽은 후 세자빈 강씨에게 역모의 누명을 씌워 강빈과 친정 어머니, 오빠, 남동생을 모두 죽였다. 그리고 어린 아들 12세 석철, 8세, 석린, 4세 석견은 모두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다. 유항검의 가족과 어린 자식과 너무도 흡사하지 않은가? 이로 보면 당시 조정에서는 천주교도를 국가나 왕실 전복 세력으로 간주한 것이다.
무덤 경내 한쪽에 작은 비가 하나 더 있다. 제목이 천주교 순교비. ‘동정녀 이 루갈다 유혜, 그 형제 유 요안 종천’이라고 씌어 있다. 유중천의 이름을 종선이라고 한 것은 착오라 치더라도 루갈다의 이름을 유혜라고 한 점은 특이하다. 그리고 남편을 형제라고 한 것은 부부가 남매처럼 살기를 목적으로 했다니 이상할 것이 없다.
이 비석은 전직 대법관 김홍섭(바오로, 1915-1965)이 세운 것이다. 김홍섭은 전북 김제 출신으로 죄수들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으로 인해 ‘수인(囚人)들의 아버지’, ‘법복(法服) 속에 성의(聖衣)를 입은 사람’으로 칭송 받는 천주교 신자 법관이다. 그는 생전에 순교자에 대한 공경심으로 이곳을 자주 방문하였다고 한다.
여기 묻힌 순교자들이 하루빨리 복자 또는 성인의 반열에 오르기를 바라며 시복시성 기도문을 합송했다. 그리고는 더 높은 곳에 있는 예수 - 마리아 바위와 전망대로 갔다.
○거룩하신 하느님 아버지!
저희 신앙의 선조인 순교자들과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사제에게
사랑과 성덕의 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감사하나이다.
●주님께서는 저희 순교자들에게
강한 믿음과 용덕의 은혜를 베푸시어
순교로 주님을 증거하게 하시고
최양업 토마스 사제에게는복음 선포의 열정을 주시어
주님을 현양하게 하셨나이다.
◎자애로우신 주님!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 신앙의 선조인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에게
시성의 영예를 허락하시고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사제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와 동료 37위에게는
시복의 영광을 허락하시어
후손인 저희들이 그들을 본받아신앙을 굳건히 지키며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은총 내려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한국의 모든 성인 성녀와 복자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예수 - 마리아 바위 /전망대
예수-마리아 바위 는 높이 4m 석조 십자가 밑에 있는 천연기암(天然奇巖)으로 묘지쪽에서 이 바위를 바라보면 겟세마니에서 우러러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이고, 반대쪽에서 보면 십자가를 향해 기도하시는 성모님의 모습이다.
내려 갈 때는 올라올 때의 십자가의 길과 다른 길로 간다. 성직자의 묘지를 다녀가야 하기 때문이다. 갈림길에서 갈라져 성직자묘로 내려간다.
전주교구 성직자 묘지
입구에 2008년 12월 6일에 새운 묘지 조성비가 있어 성직자 묘지의 조성과정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 비에 의하면 전주교구는 1987년 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이하여 이곳 치명자산에 성직자묘지를 조성하였다. 햇수를 거듭하다 보니 장소가 협소하여 더 이상의 공간이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어려움을 해소하고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의 장묘문화 개선에 한 몫을 하기 위해서 2008년 11월 6일 사제단의 뜻을 모아 그동안 이곳에 잠들었던 유해를 화장하고 봉안함에 수납하여 12분씩 한 봉분에 모시는 방식을 채택하고, 묘지를 새로 꾸몄다. 이 일에 따른 모든 비용은 이북석(요한), 강방자(루시아) 부부가 부담했다고 한다.
성직자 묘지는 경사진 곳에 계단식으로 되었는데 맨 위에는 십자고상과 그 아래 슬퍼하는 성모님과 위로하는 제자와 지키는 군병이 있다.
다시 출발지인 몽마르뜨 광장으로 내려와 평지에 있는 시설을 순회하였다. 복합 교육 문화관인 평화의 전당, 요안-루갈다 광장, 기도 숲, 옹기가마 경당 등이다.
평화의 전당
요안-루갈다 광장
옹기 가마 경당
우리나라 초기 천주교회에서 옹기촌은 대표적인 신앙공동체였다. 드러내놓고 경제생활을 할 수 없는 그들로서는 깊은 산속을 터전으로 옹기를 만들고, 숯을 굽고, 목기를 만들어 행상을 하면서 생존을 영위했다.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에도 한동안은 배운 것이 이것뿐이라 어려운 생활을 계속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교우촌에서 드러내놓고 경당이나 공소를 만들어 공동 신앙생활을 했던 것이다.
옹기 교우촌의 의의는 3가지인데 첫째는 박해를 이기기 위한 자구책으로 저절로 형성된 점, 둘째 그 안에서 신앙생활을 지키며 생활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갖춘다는 점, 셋째는 비신자와의 조화를 이루어 선교를 이끌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순례자기념성당 - 공사중으로 차단 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어 치명자 산 순례를 마쳤다. 오늘 다음 가야 할 곳으로는 서천교와 초록 바위이다. 그런데 아직 해가 많이 남아 우선 숙소를 정해놓고 내일 일정 중 전동 성당도 시간이 되는 데까지 보기로 하였다. 숙소 예약을 늦게 한 통에 간신히 낭만시대라는 여행자 게스트하우스에 가서 계약을 하고 전동 성당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