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44. 카이버고개를 넘어
혜초스님도 넘었던 카이버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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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버고개> |
사진설명: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국경에 있는 카이버고개는 긴 실크로드의 역사 속에서 항상 주역의 역할을 해온 고개다. 현장스님과 혜초스님도 이 고개를 넘었고, 한국에 전래된 불교도 이 고개를 넘었다. 란디코탈에서 바라본, 아프가니스탄 방면의 카이버고개. |
‘중앙아시아 여러 민족들이 그들의 힘을 과시’했던 간다라국 중심지 페샤와르. 지금은 이슬람 땅으로 변했지만 인간의 모습을 한 불상이 처음으로 탄생된 불연(佛緣) 깊은 지역이다. 이곳에서 ‘내공’을 키운 불교는 파미르고원을 넘고 실크로드를 지나 마침내 우리나라에 도착했다. 지금의 한국불교가 ‘당시 전래된 불교’, 아니 ‘간다라 지역에서 성장한 불교’와 얼마나 차이 나는지 자세하게는 모른다. 설사 ‘차이가 있다’해도 간다라 지역은 우리나라 불교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불교라 아니 할 수 없다.
2002년 4월25일. 페샤와르 그랜드호텔에서 일어나자마자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착잡한 상념에 잠겼다. 어제 본 ‘샤지키델리의 묘지’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고대하던, 바미얀대불이 있었던 아프가니스탄 가는 날이 바로 오늘이기 때문이다. 몸도 마음도 기대로 설렜지만, 한편으론 걱정도 됐다. 파키스탄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아프가니스탄 가는 것을 말렸다. 2001년 9·11테러 이후 11월경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고, 외견상 전쟁은 종료됐지만 일부 탈레반들은 산악지대에 은거하며 여전히 저항하던 상황이었다. 안내인까지 ‘아프간 전쟁이 아직 진행 중이라 들어가면 죽을 수도 있다’며 말렸다.
그럴수록 바미얀에 가보고 싶었다. 신라 혜초스님(705∼787. 723∼727년 인도대륙 순례)이 참배했고, 당나라 현장스님(?∼664. 629년 8월∼645년 2월 인도대륙 순방)이 예배드렸던 부처님. 2001년 3월경 탈레반에 의해 파괴된 ‘큰 부처님’이 계신 그곳에 꼭 가보고 싶었다. “파괴된 높이 53m, 높이 38m 부처님은 과연 어떤 상태로 방치돼 있을까. 바미얀엔 아직도 불교유적이 남아있을까”도 몹시 궁금했다.
현장스님 등 구법승들이 지나간 고갯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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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버고개로 가는 도중 만나는 스폴라스투파> |
새벽 6시 드디어 호텔에서 출발했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파키스탄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넘어가는 곳에 위치한 험준한 카이버고개로 나아갔다. 페샤와르 시내를 벗어나자 카이버고개가 있음을 알리는 게이트가 보였다. 성벽처럼 생긴 문을 지나 계속 가니 사람도 민가도 없는 길이 나왔다. 곧바로 구절양장(九折羊腸) 같은 꼬불꼬불하면서 험한 고개가 이어졌고, 산 속에 철로가 보였다. 영국이 인도대륙을 지배할 당시 만들어놓은 철로였다. 철로를 따라가던 눈에 무엇인가 다른 것이 들어왔다. 스투파가 철로 변에 있었다. 반가웠다. 이런 곳에 스투파가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사진에서만 보던 ‘스폴라(spholla)스투파’였다. 라호르에서 이슬라마바드로 가다 참배한 마니꺌라스투파, 탁실라에서 본 발라스투파와 외형은 비슷했다. 카이버고개,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을 거쳐 불교가 중앙아시아로 전파됐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스투파임을 알 수 있었다.
흔들리는 차 속에서 스투파를 향해 합장하고, 촬영했다. 합장한 채 무사귀환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과연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을까.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호전적이지는 않을까. 짧은 순간에 별의별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차는 다시 출발했고, 생각에 젖어있는데 안내인이 “카이버고개 정상에 도착했다”며 깨웠다. 차에서 내려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구불구불한 길이 눈 아래 펼쳐져 있고, 길 너머로 페샤와르 시내가 어렴풋이 보였다. 차타고 와 제대로 살피지 못한 아득한 길이었다. 그 옛날 혜초스님이 걸어갔던 길.〈왕오천축국전〉엔 이렇게 나온다. “간다라국 서쪽에 있는 산에 들어가 7일 만에 람파국에 도착했다. 이 나라에는 왕이 없고 대수령이 있는데, 간다라국의 통치하에 있다. 사찰도 있고 스님도 있으며, 삼보를 공경하고 대승불교가 행해진다.” 혜초스님은 7일간 걸어 카이버고개를 넘었던 것이다.
당시 카이버고개를 넘은 혜초스님은 혜라성(아프가니스탄 잘랄라바드 하다지역), 카피시국(지금의 카불 근처)을 지나 범인국(犯引國. 바미얀)에 도착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등에는 경전과 음식을 지고, 신발도 변변치 않았으리라. 뜨거운 태양,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을 흉맹한 산악인들, 육체적 괴로움 등 모든 것이 구도승의 몸과 마음을 피곤하게 만들었으리라. 그럼에도 스님은 걸어 바미얀 대불에 참배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우리는 차타고 이렇게 편하게 올라오지 않았나. 무엇을 걱정한다 말인가.” 마음을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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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카이버 고개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게시판. |
당나라 현장스님도 카이버고개를 지나 천축에 들어갔고, 이 고개를 넘어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다. 당시엔 얼마나 어려웠을까. 멀리 보이는 구불구불한 고개 길에 구법승들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들이 흘린 땀이 있었기에 불교는 중앙아시아, 중국을 가로질러 해동에 전파될 수 있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파될 적마다 넘어야 했던 고개 가운데 하나가 카이버고개다. 그곳에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 취재팀이 도착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마음 속 두려움은 멀리 사라지고, 마치 구도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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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카이버고개 넘어 토르크함에 있는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국경검문소. |
천천히 카이버고개를 다시 살폈다. 주지하다시피 “카이버고개는 역사의 고개”다. 숱한 영웅과 패자(覇者), 다양한 민족들이 이 고개를 넘었다. 그리스, 사카족, 대월지족 등 간다라 지방에 영욕을 심어놓고 사라진 무수한 민족들이 고개를 넘어 인도대륙에 발을 디뎠다. 알렉산더와 징기스칸의 군단도 이 고개를 넘었다. 유목민도 넘고, 나그네와 구법승도 카이버고개를 넘어 동서로 오갔다. 긴 ‘실크로드 역사’에서 항상 주역의 역할을 해온 고개가 바로 카이버고개다. 과거 역사 속 요충지 역할을 했던 카이버의 위력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았다. 짐을 가득 실은 트럭과 만원버스가 쉼 없이 고개를 넘나들고 있었다.
카이버고개를 안고 있는 산맥은 술라이만산맥. 다시 말해 카이버고개는 술라이만산맥을 끼고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아프가니스탄 쪽, 다른 하나는 페샤와르로 향하는 쪽. 페샤와르로 향하는 곳, 멀리 인더스평원으로 달리는 페샤와르 쪽이 경치가 훨씬 좋다. 산허리를 둥둥 감아 오르는 듯한 길이 끝없이 이어져 페샤와르까지 연결돼 있다. 무수한 사람들이 이 고개에 애환을 묻었고, 수많은 순례승들이 이 고개에서 고향을 생각했으리라. 남인도를 순례하던 혜초스님이 읊었던 오언시가 떠올랐다.
상념을 접고, 란디코탈 마을을 지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국경검문소가 있는 토르크함으로 달렸다.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듀랜드 라인’이라고 하는데, 1893년 아프간전쟁 종결 때, 인도와 아프가니스탄을 분할하는 국경협정에 조인한 영국 ‘듀랜드경’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국경은 붐볐다. 아프간 전쟁이 끝난 지 며칠되지 않아 그런지,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는 파키스탄 차량과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을 태우고 돌아가는 차량들로 토르크함은 북적거렸다.
불교전파 실크로드의 요충지 역할
파키스탄 세관에 신고하고, 철문을 지나 아프가니스탄으로 넘어 갔다. 철제문을 하나 지났을 뿐인데, 왜 그런지 마음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마침내 아프가니스탄에 도착했다”는 생각과 “무사하게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동시에 가슴을 울렸다. 땅도 하늘도 공기도 파키스탄과 전혀 차이가 없었다. 단지 ‘국경선’과 마음에 그어진 보이지 않은 ‘민족이라는 선’만이 두 나라를 갈라놓은 것 같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정리하고, 아프가니스탄 국경 안에서 파키스탄 안내인인 이만씨와 작별인사를 했다. “3박4일간의 아프가니스탄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다시 만납시다”는 이만을 뒤로 한 채, 준비된 차를 타고 아프가니스탄 잘랄라바드를 향해 내쳐 달렸다. 점점 멀어져 가는 토르크함이 차창 뒤로 보였다.
■ 혜초스님의 오언시
달 밝은 밤 고향 길 바라보니
뜬 구름 너울너울 고향으로 돌아가네.
편지 봉해 구름 편에 보내려 하나
바람은 빨라 내 말 들으려 않네.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다른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누가 내 고향 계림으로 나 위해 소식전할까.
파키스탄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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