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12시 40분. 학교가 끝나자마자 30명이 넘는 아이들이 놀이터로 몰려온다. 한 사람이면 땅따먹기를 하고 두서넛이 모이면 고무줄이나 긴 줄넘기를, 대여섯이 모이면 팔자놀이를 시작한다. 혼자 노는 것보다 둘이 노는 게 더 재밌고 셋, 넷, 다섯이면 놀이판이 활기를 띤다.
“마음이 시원해져요!” 놀고 난 아이들은 말한다. 놀이터에서 흠뻑 논 아이 얼굴은 정말 환하다. 아이들에게 이 얼굴을 돌려주려고, 오늘도 아이들과 함께 놀이터에서 논다.
“그냥 노는 거예요, 같이 놀아요”
“놀이터에도 벽이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나가 논다던 아이는 친구를 못 찾고 돌아오는데, 엄마들 만나 이야기하면 아이들은 날마다 논다는 거예요. 가만 보니 놀 시간과 장소를 주고받으려면 엄마들 연락망 안에 들어가야 했어요. 그런데 주변을 살펴보니 나 같은 마음인 엄마들이 더러 있는 거예요. 기존의 연락망에 끼려고 종종거리기보다 우리가 중심이 되어 버리자, 아주 다른 중심이. 그래서 놀이터를 시작했어요. 울타리가 없는 놀이터, 누구나 올 수 있는 놀이터가 우리가 만들려는 놀이터예요.”
막상 놀이터를 열었어도 아이들이 마구 몰려들지는 않았다. 손을 잡은 엄마와 아이가 한참을 탐색하다가 쓰윽 지나간다. 궁금한 것도 많았다. 놀이 선생님이냐, 전통놀이를가르쳐 주는 체험수업이냐, 돈 주고 배우는 거냐 등으로 물을 때 “그냥 노는 거예요, 같이 놀아요.”라고 말해도 고개를 갸우뚱하고 가버리는 일이 허다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일일이 말을 붙이고 함께 놀자고 이야기했다. 한두 명씩 노는 아이들이 늘고 아이들 소리가 높아지면서 놀이터는 신이 났다.
그러자 엄마들이 슬그머니 와 말했다. “왜 같은 놀이만 하냐? 지도 선생님이랑 프로그램이 있으면 더 좋겠다. 놀이영역을 정하고 노는 방법을 알림판에 써 놓자.” 효과적인 놀이체험을 하자는 얘기였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아이를 놀게 하는 모습도 있었다. 그런 마음으로 아이를 데려온 엄마는 한두 가지 놀이를 맛 본 후 아이를 끌고 떠났다. 학원 가야 한다는 말에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아이와 실랑이하던 엄마는놀이터를 피해 빙 돌아가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좋은 긴 줄넘기. 이모들도 함께한다.(위) 8자 놀이를 하는 아이들.(아래)
놀이는 체험이 아닌 생활
“놀이는 체험이 아닌 생활”이라는 데 마음을 모은 엄마들은 동네 놀이터를 열기로 했다. 또 놀이터 ‘이모’가 되어 아이들을 돌보기로 했다. 2012년 서울 쌍문동 솔밭놀이터, 중계동 팔각정놀이터, 상계동 햇빛놀이터, 면목동 참새들의놀이터가 열렸다. 같이 놀고 싶은데 멀어서 부러워하는 친구도 생겼다. 어릴 때 학교 운동장에서 놀던 생각이 났다. 학교 운동장이면 누구나 올 수 있고 형, 언니, 동생이 모두 함께 어울릴 수 있어 얼마나 좋을까 꿈에 부풀었다. 학교와 상의해 2013년 쌍문동, 상계동 동네 놀이터가 상원초등학교, 쌍문초등학교, 유현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옮겨 갔다.
놀이터 이모들은 ‘마음밥’이란 모임도 만들었다. 하루 세 끼 밥으로 몸을 챙기듯, 아이들에게 마음의 밥인 놀이를 챙겨주자는 것이다. 놀이터 이름도 ‘와글와글놀이터’로 같이 쓰기로 했다.
쌍문초등학교 놀이터에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는 아이들.
아이들은 놀 권리가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학교의 변화를 약속했다. 첫째, 생활지도와 연계해 쉬는 시간 10분을 침해하지 않는다. 둘째, 방과 후 학부모들의 자발적인 어린이 놀이지원활동을 적극 권장한다는 것이다. 지금껏 몇몇 학교에서는 생활지도를 이유로 아이들의 쉬는 시간을 5분으로 제한하거나 화장실 갈 사람만 교실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하면서 바깥 놀이를 금지하는 경우가 있었다. 아이들이 쉬는 시간, 점심시간만이라도 자유롭게 자기 맘껏 논다면 학교생활이 더 행복할 것이다.
빽빽한 일정에 하루 30분이나 1시간밖에 못 노는 아이도 있었다. 초등학교 때만이라도 학원에 보내기보다 놀게 하자는 말에 꿈쩍하지 않던 엄마 마음을, 놀이터에서 놀면서 변화하는 아이들이 움직였다. 다른 아이들도 보고 내 아이와도 놀면서 마음이 여유로워지는 것. 기다리고 지켜봐주며 “그것이 과정”임을 믿는 것. 놀이터에서 엄마들이얻어가는 가장 큰 선물이다.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놀면서 깨달았다. 논다는 것, 쉰다는 것은 인간 권리의 핵심이란 것을. 사람은 누구나 일과 쉼을 같이 하며, 쉴 때만은 자기 뜻대로 한다. 그런데 아이들은 쉴 때조차 조정되고 제한당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놀이는 곧 권리다.
2013년 11월 28일 이미란 놀이터 이모의 일기
1년 동안 놀이터에서 만난 현수는 얼굴이 뿌루퉁하고 늘 화가 난 아이였다. 잘한다는 칭찬이나 그냥 한 말에도 “전 원래 못해요. 못하는데요.” 같은 말을 자주 했다. 웃음기가 없고 자신감도 없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현수는 꼭 놀이터에 나왔다. 그러다 딱지 따먹기 하던 날, 현수의 눈빛이 빛났다. 눈꼬리에 웃음기가 비쳤다.
“저 잘 하죠? 다 땄어요!” 한 시간 넘게 친구들과 딱지 따먹기를 하고 제일 많이 땄다며 말수가 많아졌다. 현수네 집에 전화를 해서 현수가 딴 딱지를 버리지 않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다음 주 현수 엄마가 놀이터에 나왔다. 그 다음 주에도 놀이터에 나와서 현수를 지켜봤다.
올해 놀이터가 마지막으로 여는 날, 현수가 처음으로 자기 이야기를 했다. “이모! 저는 놀이터에 저녁 9시까지 있고 싶어요.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 집에 아무도 없어요. 엄마는 일 나가고 아빠가 9시에 와서 밥을 줘요.” 마음이 짠해서 안아주니 가만히 있었다. 이모들은 “그래, 그래. 너는 할 수 있고 잘할 수 있다”고만 했을 뿐인데 현수는 달라졌다.
와글와글놀이터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http://cafe.daum.net/nolisarang, 02-902-9246
↘ 와글와글놀이터 이모들은 동네와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며 마음의 밥인 놀이를 실컷 나눠 먹습니다. 아이들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는 기쁨을 느끼고 아이들과 즐겁게 노는 기회를 갖게 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