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4개국여행기-19
루이14세의 사치궁인 베르샤이유 궁전
어제 스위스 인터라겐에서 새벽에 출발, 장시간 버스와 기차를타고 파리에왔으나
바로 몽마르트, 성심성당, 루부르박물관 등을 관광하고 나니 많이 피로했었는데
오늘은 좀 늦잠도 자고 식사도 편안하게 하고나니 피로도 많이 풀렸다.
바깥을 보니 여전히 기분 나쁠정도로 촉촉한 비가 내린다. 스위스 부터는 계속
이런 날씨의 연속이다. 우린 오늘 관광의 1코스로 파리 외곽에있는 베르샤이유 궁전
에 간다고 한다 페르샤이유 궁전에 도착하니 입구 광장 부터 매우 넓다.
웅장하고 화려한 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수신기를(방 번호가
매겨져있고 그방 번호에 수신기 녹음을 틀면 한국어로 설명이 나온다)받고 각자
개인 행동으로 각 룸을 돌아 다니면서 천정화, 조각, 벽화, 인테리어등을 감상하였다.
루이 14세가 왜 태양왕이라 불려졌으며 왕실의 재정과 왕권의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베르샤이유 궁전은 본래 왕이 사냥 나갔다가 사냥터에 머물던 별장이었다.
루이 14세는 왕국의 영광과 권위를 대대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이자리에 왕궁을 짓기로
하고 궁전 건축은 르보, 정원은 르.노트르, 전체의 장식은 화가 르 브랭이하고
진행은 콜베르, 모든 결정은 루이 14세가 직접하였다고 한다.
건물은 바로크 양식의 대표작품으로 호화로운 건물및 실내장식, 정원등은 상상을
초월 할 정도다. 그 중 2층에 있는 거울의 방은 벽과 천정이 거울로 이루어져 있으며
길이는 73m로 화려한 조명과 천정벽화, 장식등은 그당시의 사치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루이 14세는 1682년 루부르 왕궁을 이곳으로 옮겼다.
또한 이 방은 1919년 6월 28일 1차 대전을 마무리 짓는 베르샤이유 조약이 체결된
곳이기도하다. 당시 왕실의 부와 왕권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잘 설명 해 주고있다.
그러나 루이 14세 사후 15세는 파리로 다시 궁전을 옮기게 된다.
베르샤이유 궁은 107년동안 왕궁으로있었다
루이 14세는 프랑스 역대 왕 중 가장 어린 나이인 5세에 왕이 되어 72년간
왕좌를 지켰다. 그러나 중간에 반란이 있어 3년동안 숨어 지내기도했다.
14세는 베르샤이유 이사 후 세제개혁을 통해 돈 맣은 귀족에게 땅을 제공하고
대신 귀족은 충성 맹세를 하게하고 봉건제도를 실시하고 귀족의 봉토가
세습화되고 왕에게는 세금으로 조금만 올리고 나머지는 귀족이 착복하므로
14세는귀족들의 세금을 직접 챙기기 위하여 왕권을 강화하게된다.
따라서 귀족들을 불러 모울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게 되어 방의 700 여개는
귀족들이 차지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어디라도 절대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많은 왕실의 재정을 쏟아
부었고 따라서 왕실 재정이 파탄에 이르게 되고 서민생활의 피폐로 이어져
1789년 프랑스 대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루이 15세, 16세와 왕비
마리 앙트와 네트를 비롯한 왕가와 그의 추종자들 천삼백여명이 콩코드 광장의
단두대에서 처형되는 비극을 맞았다. 모든 역사를 보면 영원한 권력은 없고 , 사치
스러운 정권은 그 권력이 앞당겨 망한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오늘 날 루이 14세의 화려한 궁전으로 인하여 아이러니 하게도 전 세계의
관광객이 물밀 듯 몰려 들어오니 후손에게는 큰 선물을 남겨준 셈이다.
우리 일행은 점심을 먹고 (한식인지 아님 현지식인지 지금 기억익없다)
오후 일정인 파리 시내관광을 준비하여야 한다.
베르샤이유 궁전은 왕궁보다 정원이 유명하며 본래 2400만평이었는데
지금은 200여만평 으로 줄어 들었음
* 파리, 런던에서 촬영된 카메라 칩의 일부 훼손으로 일부 이미지는
빌려와 올린 것입니다.
베르샤이유 궁전 외관 일부
왕이 쓰던 식기 중 일부
루이 14세의 침실
거울의 방
천정화
베르사이유 궁 거울의 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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