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형 당하는 얀 후스. 후스의 추종자들은 이에 격분해 후스파를 결성했고 마침내는 후스 전쟁을 일으켰다. 출처=한국가톨릭대사전
▲ 교황 마르티노 5세
■ 이단 문제
콘스탄츠 공의회가 이단 문제를 다룬 것은 피사 교황 요한 23세의 탈출과 체포, 폐위 등으로 좀 어수선하던 1415년 4월~6월이었습니다. 핵심 대상은 영국 종교개혁가 존 위클리프(1330?~1384)와 그의 사상의 핵심 추종자로 지목된 보헤미아의 얀 후스(1369?~1415)였습니다.
세상을 떠난 지 이미 20년이 넘었고 또 영국에서 이미 여러 번 단죄받은 바 있는 위클리프 문제를 공의회가 다시 다룬 것은 그의 사상이 얀 후스를 비롯한 보헤미아(유럽 중부 현 체코 공화국 일대) 교회 개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부이자 옥스포드 대학 교수를 지낸 위클리프는 성경을 모든 교리와 제도의 원천으로 제시하면서 성경에 직접 토대를 두지 않은 것을 전부 거부했습니다. 교황 권위와 수도회를 부정하고, 대사와 고해성사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제들의 재산 소유를 비판하며 극단적 청빈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특히 성체성사의 실체변화를 부정하고 축성된 후에도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미 그의 생전인 1382년 런던 교회회의에서 24개 주장이 단죄받으면서 그의 저작들은 금서로 공포됐습니다. 또 그가 죽은 후인 1388년과 1397년에도 그의 주장은 단죄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교회 개혁과 민족 운동으로 꿈틀거리던 보헤미아 지역 개혁가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프라하 대학 교수이자 나중에는 총장까지 지낸 얀 후스 신부가 있었습니다. 후스는 프라하 대학에서 위클리프의 저서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했을 때 공공연히 위클리프 편을 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관할 대주교에게서 설교 금지와 성무 정지를 당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후스는 성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성경을 최고 규범으로 삼으면서 제도 교회의 폐해를 비난하고 영적 교회를 지향했습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1415년 5월 제8차 전체회의에서 위클리프가 내세운 45개 명제를 이단으로 단죄한 데 이어 제15차 전체회의에서 위클리프를 이단자로 선언하면서 그의 주장이 담긴 저서들을 소각토록 했습니다.
콘스탄츠 공의회가 이단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을 때 보헤미아 얀 후스는 이미 콘스탄츠에 있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공의회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던 시지스문트가 안전을 보장한 데다가 후스 또한 자신의 주장이 이단이 아님을 공의회에서 밝히기 위해서였습니다.
공의회 개회에 맞춰 콘스탄츠에 내려온 후스는 그러나 한 달이 조금 지나 도미니코 수도원에 감금되고 맙니다.
공의회는 얀 후스에 대한 재판을 통해 후스의 주장 중 30개 항을 뽑아 이단으로 규정합니다.
그 몇 가지를 보면
△베드로는 거룩한 가톨릭교회의 머리가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다
△교황의 품위는 황제에게서 기원하며 교황의 임명과 제정은 황제의 권위에서 나왔다
△품행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나 베드로의 대리자가 아니다
△교회적 순종은 사제들이 만들어낸 것이지 성경의 권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위클리프의 45개 명제에 대한 단죄는 비합리적이고 부당하며 가톨릭적이 아니다
△대죄 상태에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세속의 군주, 고위 성직자, 주교가 아니다.
후스는 자신의 주장이 결코 이단이 아니라고 항변합니다. 또 이단적 주장을 철회하라는 권유에 대해서는 철회할 것이 없다고 거부합니다. 공의회는 결국 제15차 전체회의에서 후스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화형선고를 내립니다.
후스는 그날로 국가 법집행기구에 넘겨져 화형당합니다. 공의회는 또 당시 보헤미아 지방에서 유행하던 평신도의 양형 영성체를 금지하면서 평신도에게 양형 영성체를 해주는 사제를 단죄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 공의회는 후스를 변호하러 콘스탄츠에 와 있던 동료 히에로니무스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화형에 처합니다.
또 공의회를 앞두고 '포악한 군주가 있다면 그 폭군을 살해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로 교회가 시끄러웠습니다.
공의회는 이 문제를 다룬 끝에 '폭군에 대해 아무나 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을 신앙과 윤리에 어긋나는 오류이며, 국가와 국왕에 대한 불충이라며 단죄했습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1418년 4월 22일 교황 마르티노 5세 주재 하에 45차 전체회의를 끝으로 폐회합니다. 이로써 공의회는 3년 6개월의 긴 여정을 마무리합니다. 성경을 최고로, 제도교회 비난한 위클리프 이단자 그의 사상 추종자 후스와 히에로니무스 화형시켜 추후 후스파 결성돼 무장봉기, 10년간 후스 전쟁
■ 공의회 결과와 그 이후
교회사에서 16번째 세계 공의회인 콘스탄츠 공의회는 40년 가까이 계속된 교회 대 분열을 종식시켰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가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비뇽 교황이었다가 공의회에서 폐위된 베네딕토 13세는 아라곤 국왕 영토인 발렌시아 페니스콜라 성에 머물면서 1423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 합법적 교황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가 사망한 후 아비뇽 추기경들은 후임 교황으로 클레멘스 8세(재위 1423~1429)를 선출합니다.
그런데 클레멘스 8세는 교황직을 사임하면서 추기경들에게 마르티노 5세를 합법적 교황으로 다시 선출토록 합니다. 이로써 이중 교황으로 인한 서구 대이교가 최종적으로 끝난 것입니다.
폐위된 요한 23세는 어떻게 됐을까요? 그는 2년 이상 감옥이 갇혀 있다가 1417년 12월 공의회 결정으로 자유의 몸이 됩니다.
이후 마르티노 5세 교황과 화해한 그는 투스쿨룸-프라스카티의 주교급 추기경에 임명됩니다. 그리고 6개월 후 선종합니다.
그렇다면 서구 대이교 당시의 교황들 가운데 적법한 교황 계보에 있는 교황들은 누구일까요? 교회는 로마 교황들인 우르바노 6세, 보니파시오 9세, 인노첸시오 7세, 그레고리오 12세를 적법한 교황 계보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콘스탄츠 공의회가 채택한 교령 '헥 상타'와 '프레쿠엔스'는 교황보다 공의회가 우위에 있음을 명시적으로 규정한 것이어서 이후 학자들 간에 논란이 돼 왔습니다.
하지만 이 교령들은 교황권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던 비상시기의 임시 방책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이 지배적입니다. 어쨌거나 이 공의회 우위설은 그 다음 공의회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한편 콘스탄츠 공의회가 얀 후스와 히에로무스를 이단으로 단죄해 화형에 처하자, 후스를 교회 개혁가로서뿐 아니라 민족 운동의 지도자로 여겨 따랐던 보헤미아 사람들은 격분합니다.
이들은 후스를 순교자로 떠받들며 후스파를 결성한 후 무장봉기를 일으키는데, 10년이나 중부 유럽을 공포로 몰어 넣었던 이 전쟁을 후스 전쟁(1420~1431)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