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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뜻이면(약4:13-17)
지난 주에 서로 비방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한 주간동안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얼마나 적용했습니까? 잘 안됩니다. 저의 집사람이 종종 지적했습니다. 또 비방한다는 것입니다. 저역시 비방이 얼마나 습관화되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력했습니다. 성령님께 도움을 구했습니다. 내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주시고 제갈을 물어서라도 남을 비방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결심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형제자매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를 비방하고 비판한다는 것은 자기 얼굴에 침뱉기와 똑같은 것입니다. 비방한다는 것은 불신앙적인 관점에서 부정적인 판단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우리의 시각이 바꾸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믿음의 삶을 살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잠시 사는 인생이 이렇게 서로 비방하면 비판하며 산다면 불행한 것입니다. 이처럼 비방하면 자신도 죽이고 남도 죽이는 것입니다. 비방을 한다는 것은 쉽게 하면서도 역으로 비방을 들으면 맘이 상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비방이 우리의 영을 어둡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 것은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듣는 사람이 은혜스럽고 덕을 세우는 말을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없이 살아가는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13절),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고 하였습니다. 여기 이 사람은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1년동안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치밀한 계획입니다. 그럴싸한 계획입니다. 나쁜 짓을 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도둑질을 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결코 못할 짓을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지혜로운 계획인 것 같습니다.
네 가지가 분명합니다. '아무 도시에' 우선 행선지가 분명합니다. '일 년을 머물며' 체류 기간이 분명합니다. '장사하여' 할 일이 분명합니다. '이익을 보리라' 목적이 분명합니다.
당시에는 이웃나라를 오가며 장사하는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부유한 상인들이 앉아서, 새로운 개척자로서 신흥 도시에 가서 무역을 통해 많은 돈을 벌려고 계획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아주 머리가 비상한 사람입니다. 부지런히 사업 계획을 논의하고 앞으로 얼마나 수지가 맞을 것인가를 이야기하였을 것입니다. 1년 쯤 장사를 하면 큰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실제적인 계획이었습니다. 나름대로는 완벽한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중요한 문제가 나타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 계획 속에는 하나님이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도, 하나님의 목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좀 더 나아가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도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돈 벌 생각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소위 저축상 시상식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남대문시장에서 지게를 지는 사람이 한 해에 무려 오천만 원이나 저금을 했다고 은행이 상패와 상금을 주는 것입니다. 사회자가 수상자에게 묻습니다.
"그 돈으로 무엇을 하겠습니까?" 수상자는 주저함 없이 대답합니다. "저금해야죠. 그리고 금년에도 오천만 원을 벌어 저금할 겁니다. 그래서 일억을 만들랍니다." 사회자가 또 묻습니다. "그 일억으로 뭘 하시려구요?" "계속 저축해서 일억오천만 원을 만들랍니다." 이 사람이 대단한 목적을 가진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이 사람속에는 진정한 목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게를 져서 한 해에 오천만 원을 저금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목적이 없습니다. 돈은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하기야 돈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다는 사람이 없지는 않습니다. 돈버는 기쁨이라는 것이 있고 돈을 붙들고 지키는 기쁨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꼭 있어야 할 기쁨이 없습니다. 돈을 왜 버는 지에 대한 선한 목적이 없습니다.
이렇다 할 목적도 없이 그저 돈만을 벌겠다고 말합니다. 돈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이익을 보겠다고만 했지, 그것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이 없습니다. 목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해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내일 일을 모르고 사는 인생이라고 말하였습니다.
14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의 생명이 도대체 무엇이냐? 내일 일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잠27:1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바벨론의 벨사살왕은 내일 일을 짐작치 못하고, 나라가 위기에 빠져있는 데도 안전하다고 호화로운 잔치를 배설하고 먹고 마시다가 망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오래 전에 제가 어떤 분을 만났는데, 그분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합니다. 서울에서 사업을 하다가 어려움을 당해 멀리 경남까지 야밤도주하다시피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한지라 한때는 교회를 잘 다녔습니다. 그런데 사업이 조금씩 잘되고 사람들이 많아지다보니 바쁘다는 핑게로 교회도 멀어지고 세상과 가까워 졌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imf가 터지면서 사업이 기울어지고 부도처리가 되어 도망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별로 아픈 데가 없었는데, 다만 조금 피곤한 것 같기도 하고 찌뿌등해서 그저께 아내와 함께 병원에를 가봤는데 위암말기라는 것입니다. 평소 이렇다 할 자각증상이 없었는데도 이미 임파선까지 전위되고 온몸에 암이 확 퍼졌다고 해요. 수술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저 기다려 볼 수 밖에 없다고 의사는 말합니다. 하늘이 노랐고 땅이 뒤집히는 것같은 커다란 충격을 받고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는데 그 때 생각나는 분이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하나님을 찾게 된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하나님 아버지를 찾아 온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어리석습니다. 내일을 알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오곡백과가 무르익은 자기의 들녘을 바라보면서 "내 영혼아 창고를 크게 지어서 쓸 것을 많이 두고 너는 나와 함께 즐기자"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No"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내가 찾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와같이 앞날에 대한 무지한 인생들은 너무 많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그러므로 잠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우리가 말하는 믿음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믿음의 정도에 따라서 맡기는 정도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적당히 맡기고 실제로는 자기가 주인 노릇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철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루 하루의 삶속에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
우리 인생이 무엇입니까? 야고보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말합니다. 일순간의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 연기와 같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토기그릇과 같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대단한 것 같지만 반드시 끝이 있고 끝에는 결산이 있습니다.
잠언 27장 1절에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욥 9:25)"나의 날이 경주자보다 빨리 사라져 버리니 복을 볼 수 없구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달리는 경주자, 얼마나 빠릅니까? 모세는 시편 90편에서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날아가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이 날아갑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하기를 모든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고 말했습니다. 희랍 철인이 한 제자로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도대체 이 짧고 허무한 인생을 왜 태어났을까요?" 그 때 그 철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영원의 가치를 알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간의 허무를 깨달을 때 영원의 가치를 압니다. 영원은 사모할만한 것입니다. 아니 우리 인생의 깊은 욕구속에 영생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고 전도서 3:1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소위 종교심이라고 부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동물에게 있지 않습니다. 인생에게만 있습니다. 순간을 사는 인생이지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채워질 때까지는 인생이 만족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그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가진 것 같았는데 허무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복음이 이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믿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소유했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최대의 특권입니다.
짧은 순간의 인생이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여기서 죽어도 그 다음 순간에는 내 아버지의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히 삽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우리의 간증입니다. 다른 것은 다 빼앗겨도 이것은 빼앗길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자랑은 다 지나가도 이 영생을 주신 주님은 빼앗길 수 없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생각하기만 하면 저는 감격이 있습니다. 어쩌다가 내가 영생을 선물로 받았는지 생각할 때마다 감격이 있습니다.
우리는 잠깐 뿐인 안개와 같은 인생을 인정해야 합니다.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잠깐이기 때문에 오히려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때를 모릅니다.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요 우리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뜻을 그대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순종할 뿐입니다. 언제 부르시든지 준비된 사람은 걱정할 것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잠깐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것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도 우리의 계획도 우리의 모든 것의 초점을 영원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3)허탄한 자랑을 하는 인생이라고 하였습니다.
16절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허탄하다는 말은 거만, 오만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에 대해 상관하지 않고 물질적 이익을 얻기 위해 계획을 세우는 오만한 태도를 의미합니다. 어떻게 하든 자기를 드러내고 싶고 자기 생각을 성취하고 싶어하는 오만한 자랑입니다. 이것을 요한일서 2장 16절은 이생의 자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허탄한 자랑, 하나님을 무시하는 오만한 자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복음서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입니다. 모든 것의 중심에 자기가 앉아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리까지 차지하고 자기가 주장하면 그것을 우리는 오만이라고 말합니다. 이 오만은 싸움의 원천입니다. 성경은 이 오만이 하나님과 원수되었다고 합니다. 이 오만은 계속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남을 비난하고 조소합니다. 이 사람은 이래서 나쁘고 저 사람은 저래서 나쁘고‥‥남의 험담이 끊이지 않습니다.
내 입에서 남이 나쁘다는 말이 많이 나오면 나쁜 사람은 남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누구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 옆에는 되도록 가지 마십시오. 그것은 손해보는 일입니다. 반드시 화를 입습니다. 이 자랑은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남을 멸시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오만한 사람은 자기는 항상 옳고 남은 항상 틀리다고 생각하며 삽니다. 그리고 허탄한 자랑으로 그 생애가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허탄한 자랑의 허무함과 인생의 욕망이 얼마나 헛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앞에 머리를 숙입니다. 하나님의 뜻앞에 자기를 내려놓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이러한 허탄한 자랑에 속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삶 전반에 걸쳐 구체적인 하나님의 경륜과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는 마땅히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15절]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이라고 말합니다. 계획을 세우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꿈을 갖지 말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도리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고 인생의 계획을 세우는 것에서부터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반드시 이에 대항하여 도리어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태도입니까? 어떤 계획을 세우고 어떤 꿈을 갖는다 할지라도 언제나 주님의 뜻이면, 주께서 허락하시면 난 이것을 하리라. 얼마나 멋진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좋은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큰 일들을 마음 속에 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새로운 계획을 품기 전에 생각해야 할 첫 단어는 "주의 뜻이면, 주께서 허락하시면"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뜻이면 하리라"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주의 뜻으로만 살기를 바랍니다. 히6: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 1)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3) 뒤돌아서지 않겠네. 2)이세상 사람 날 몰라줘도(*3) 3)세상등지고 십자가 보네(*3). 주의 뜻이라면 할 수 있고, 주의 뜻이라면 안할 수도 있어야 될 줄 믿습니다. 주의 뜻만 따라 사는 믿음의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주의 뜻을 절대 권한, 절대 명령으로 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선을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마지막으로 생각할 문제가 선행입니다. 여기서 선이란 윤리적인 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선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 바로 선입니다. 주의 뜻대로 사는 것이 선입니다. 반면에 주의 뜻을 거부하고 내 뜻대로 사는 것은 악입니다. 세상을 좇아 사는 것도 악입니다. 우리는 이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압니다.
그런데 행하지 않고 말로만 외친다면 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의 뜻을 외치지만 정작 주의 뜻대로 살지 않고 현장에서는 항상 내 뜻이 앞섭니다. 주의 뜻을 우선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사하는 것도 좋은 집, 앞으로 전망이 있는 집으로 이사 가는 것이 기준이 아니라 주의 뜻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주님의 무엇을 기뻐하시냐는 것입니다. 항상 주의 뜻을 먼저 구하고 그뜻대로 결단하고 행하는 것이 바로 선입니다.
그런데 선을 행할 줄 알면서 하지 않으면 그것은 죄인 것입니다. 제2차 대전 말기에 독일군이 온 세계를 점령하고 있을 때를 중심으로 엮은 "로베레 장군"이라는 영화 속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치에 저항했던 많은 저항운동자들이 감옥에서 처형을 당하게 되는데 그 중에는 저항운동에 참가한 일도 없는 한 사람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처형당하는 것이 억울하다고 생각되어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저항운동에는 관심도 없다. 그저 돌아다니며 장사한 것뿐인데 왜 나를 죽이는가"고 항의를 했습니다. 이 때 옆에 있던 저항운동자가 조용히 말하기를 "당신은 죽어 마땅하오. 수많은 사람들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무참하게 피를 흘리며 싸우는데, 아무 일도 안했으니 그것이 큰 잘못이요"라고 대단히 인상적인 말을 했습니다.
조국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그것이 그를 죽게 해도 마땅한 그의 죄과입니다. 달란트 비유 중에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악한 짓을 해서 주님께 꾸중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한 달란트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은데 대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레위인과 제사장이 악을 행해서 주님께 책망들은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어야 할 때 피한 사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 책망을 들은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도 자기 문전에 있는 나사로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에 나사로에게 고통을 주었던 부자가 지옥에서 곤욕을 치루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의인과 죄인을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우편에 있는 의인들에게 말합니다. "너는 내가 배고플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헐벗었을 때에는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찾아와 주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그런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좌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너는 이것도 안했고 저것도 안했고‥라고 책망하며 태만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선을 알고도 행치 않는 것이 죄니라"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의 결정에 하나님의 뜻이 우선되고 있습니까? 말로만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의 계획 속에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고 결단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허탄한 자랑에 속지 마십시오. 아무리 많은 말을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믿음의 말이 아니라면 교만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뿐 만 아니라 세상적인 성공을 이루고 자기를 자랑할 만한 일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고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자랑에 눈이 어두워졌다면 허탄한 자랑입니다. 이제 거기서 내려옵시다. 주님의 뜻앞에 내 미래를 맡기고 한걸음 한걸음 선을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앞에 순종하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