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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복희 최초로 데뷔 60주년 기념공연의 주인공이 되다.
윤복희(尹福姬, 1946년 3월 9일 ~ )는 가수, 작사가, 작곡가, 영화배우, 영화 기획가, 영화음악감독, 뮤지컬 배우이다.
1952년 뮤지컬 〈크리스마스 선물〉을 통하여 뮤지컬 배우로 데뷔하였고, 1963년 필리핀과 홍콩, 싱가포르를 거쳐 영국, 독일(서독), 스페인, 스웨덴, 미국으로 차례차례 건너가 1964년 미국 네바다 주 라스 베이거스에서 1976년까지 활동하였다.
1967년 〈웃는 얼굴 다정해도〉라는 곡들외 7곡로. 판을 만들었고 또한 대한민국에 미니스커트를 유행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1967년 1월 6일 미국에서 잠시 귀국하였을 때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한 비행기에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내려 귀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1996년 신세계의 TV 광고로 인해 생긴 오해이다.[2] 이 미니스커트는 노라 노가 디자인했다고 한다.
가족관계로는 싱어송라이터 겸 개신교 목사인 오빠 윤항기(尹恒基)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기로 윤복희의 남매는 윤항기 1남 1녀로 오해하지만 실제로 윤복희가 SNS에서 남매로는 오빠 윤항기와 현재 개신교 목사인 윤영기가 있고, 언니 윤수현이 있다고 밝혀 실제로는 2남 2녀로 밝혀졌다.
1968년 12월에 가수 유주용과 결혼했으나 어린 나이에 결혼한 탓이 있는지 성격과 경제 차이에서 많은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로 유주용과 이혼한 후 유주용은 미국으로 이민하였다. 이혼 이 후, 가수 남진과의 스캔들이 터졌는데, 평범한 기사가 잘못 와전되어 윤복희와 남진의 연애 스캔들 기사가 나온 것이다. 결국 1976년 가수 남진과 결혼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악성 루머가 터지고 안 좋은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끝내 1979년 이혼하였다. 이 후로는 현재까지 독신 생활을 해오고 있다.
윤복희는 우리나라에 미니 스커트를 제일 처음 알린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신세계 백화점이 윤복희의 미니스커트를 소재로 CF를 제작했는데, 1960년대 중반 외국에서 서울로 돌아온 윤복희가미니스커트 차림으로 비행기에서 내리며 계란 세례를 받는 장면을 페이크 다큐로 촬영한 것이다.
그런데 윤복희는 훗날 무릎팍도사에서 "그 일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혔는데, 사실 윤복희는 해외 활동 도중 오빠 윤항기와의 연락이 닿지 않아 걱정되는 마음에 1967년 1월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일시 귀국하였는데, 사실 계란 세례는 후에 과장되게 한 것이고 오히려 추운 날씨로 미니스커트가 아닌 롱 코트에 트레이닝 바지 차림으로 귀국했다고 한다.
또한, 공항에 내린 직후 통행금지가 해제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평범히 택시를 타고 서울로 왔다고 한다.
윤복희가 선보인 미니 스커트는 당시 여성들에게 많은 센세이션을 일으키는데, 이 미니 스커트의 영향으로 당시 시대상으로 여성들의 치마가 짧아지는 것을 금기시 하였는데, 미니 스커트가 금기를 넘어서자 정부에서는 급기야 치마를 일정 길이 이하로 못 줄이게 하고 줄자로 치마 길이 단속에 나서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오늘은 한국대중음악사상 최초로 개인뮤지션의 데뷔 60주년 기념공연의 대미가 장식되는 날입니다.
주인공은 바로 '미니스커트'로 유명한 뮤지컬의 대모 윤복희선생님.
데뷔 60주년을 맞아 그동안 전국투어를 마치시고 오늘 마지막으로 서울 세종문화회관 공연이 저녁에 있습니다.
최초이기에 의미심장한 그 공연 팜프렛에 윤복희선생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주최측인 CBS의 요청이 있어
장문의 글을 작성했기에 오늘 공연에 초대되어 갑니다.
저 혼자 보기엔 아깝다는 생각에 친구 몇몇 분을 윤복희선생의 세종문화회관 기념공연에 초대했습니다.
오늘은 마음 편하게 무대위에서 60년 음악인생을 불사르실 윤복희선생님의 열정을 보고 싶네요.
윤복희 데뷔60주년 기념공연 공식팜프렛에 기고한 원고를 올려봅니다.
<멀티 플레이어 재능으로 한국 대중음악사를 수놓은 윤복희선생의 60년 음악인생>
1951년 12월 서울 중앙극장 낙랑악극단 무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곱게 단장한 드레스 무대 의상을 입은 6살짜리 귀여운 어린이 가수가 등장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었던 그때, 놀라운 가창력으로 애절하게 노래했던 그 어린 아이는 뭐 하나 즐거울 것이 없었던 상처받고 고단한 관객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이후 60년의 장구한 세월동안 이 땅의 대중은 그녀의 노래, 그녀의 의상, 그녀의 연기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바로 대중가수, 영화배우, 뮤지컬 배우 등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멀티 플레이어 재능을 펼쳐온 한국 대중음악의 산증인이자 뮤지컬의 대모 윤복희선생이 주인공이다.
최근 매주 각본 없는 감동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는 중견가수들의 서바이벌 노래 경연 프로그램인 MBC <나는 가수다>는 ‘진짜 가수’, ‘명곡’을 뜨거운 화두로 떠올렸다. 도화선은 윤복희 선생의 대표곡 ‘여러분’이었다. 굴곡진 삶을 살아온 가수 임재범의 탁월한 재해석도 훌륭했지만 그동안 아이돌 가수들의 감각적이고 뜻도 알 수 없는 노래에 식상해 있던 대중은 그 노래를 통해 노래가 주는 감동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자각했다. 임재범이 절절하게 들려준 명곡 ‘여러분’은 대중가요가 몇 번 듣고 버리는 소모적 대상이 아닌 감동을 안겨주는 예술적 대상으로 인식의 전환을 불러오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처음으로 관객의 기립박수 장면을 이끌어낸 그 무대 이후 대중음악 공연장에서 기립박수를 보내는 관객의 모습은 이제 자연스런 것으로 각인되었고 수용되고 있다. 오랜 기간 우리 사회는 대중문화와 대중 문화인을 ‘딴따라’로 폄하해 왔던 것을 생각하면 상전벽해에 가까운 놀라운 반전이 아닐 수 없다.
한 번 대중에게 각인된 스타급 대중문화인의 이미지는 쉽게 지워지질 않는다. 이 점은 대중문화의 미덕인 동시에 극복하기 쉽지 않은 잔인한 속성이기도 하다. 한국 뮤지컬의 대모 윤복희선생도 쉽게 떨쳐내지 못하는 진한 이미지가 있다. 미니스커트다. 그래서인가. 미니스커트로 화제의 중심이 된 1967년 이후 41년이 지난 2008년 7월 0BS 경인TV에 출연한 그녀는 “김포공항에 귀국할 당시는 겨울이어서 털 코트에 장화를 신고 있었고, 추워서 미니스커트를 입지 않았다”고 기존의 사실을 뒤엎어 또 한 번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그녀의 미니스커트 복장에 대한 진위가 지금 시점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윤복희=미니스커트> 등식은 여전히 지금의 대중에게도 흥미를 유발시키는 그녀의 강력한 이미지임에는 분명하다.
전쟁의 잿더미를 딛고 국가재건이 시작되면서 문화적 욕구가 지대했지만 즐길 수 있는 꺼리가 부족했던 1967년 당대 대중에게 젊은 여가수의 파격적인 ‘미니스커트’ 복장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들썩거리게 하는 충격파를 날렸다. 남성들은 야릇한 시선과 무한의 호기심을 젊은 여성들은 새롭고 파격적인 패션에 상상을 넘는 관심을 보였다. 이에 깜짝 미니스커트 패션쇼가 열렸고 미니스커트는 60년대의 문화아이콘이, 화제의 중심으로 떠오른 윤복희선생은 패션리더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 시절 선생의 몸매와 귀여운 외모는 요즘말로 ‘짱’이었다. 또한 선생은 60~70년대에 최고 인기를 구가했던 미남 가수 유주용, 남진과의 결혼과 이혼으로 장안을 후끈 달궜던 핫뉴스메이커이기도 했다.
윤복희선생은 1946년 3월 9일 서울 종로 인사동에서 코미디언 윤부길씨와 무용가 성경자씨의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경성음악전문학교 성악과 1회 졸업생인 아버지 윤부길은 국내 원맨쇼의 창시자로 '부길부길쇼'를 통해 1940년대 말부터 KPK 등 악극단 무대를 주름 잡았던 인물이다. ‘고향선’이란 예명으로 유명한 고전 무용가였던 어머니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재원으로 전설적인 춤꾼 최승희의 제자였다. 또한 록밴드 <키보이스>의 창립 멤버로 한국 록의 개척자라 할 만한 윤항기 목사는 그녀의 친오빠이다. 이처럼 걸출한 대중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린 시절, 사내아이들처럼 딱지치기, 말 타기, 구슬치기, 쥐불놀이를 좋아했던 적극적인 성격의 개구쟁이였다. 흙을 핥아먹는 기이한 버릇이 있었던 그녀의 본명은 ‘윤복기’다. 한국전쟁 이전까지 부유했던 그녀의 집안은 부친이 힘겨운 출연 스케줄을 견디지 못해 마약에 손을 대면서 기울기 시작했다. 이후 6.25 전쟁, 9.28 수복, 1.4 후퇴 등 민족의 아픈 역사와 함께 선생도 고난의 시절을 함께 겪어야 했다.
윤복희선생은 "부산 피난 시절, 악극의 스타 전옥씨의 딸 최신옥과 함께 소꿉친구로 춤추고 놀면서 무대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고 회고했다. 긴 피난살이 후 서울로 돌아온 부친은 낙랑악극단에 다시 출연을 했다. 이미 무대에 관심이 지대했던 윤복희는 부친의 반대에 맞서 "무대에 세워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며 당돌하게 손가락에 상처를 내며 떼를 썼다. 딸의 고집을 이기지 못한 부친은 혜은이의 부친 최성택씨가 단장으로 이끌던 낙랑악극단의 중앙극장 무대에 세워주었다. 불과 6살인 1951년 12월. 그녀에게 맡겨진 역할은 쇼의 끝 장면에 산타할아버지가 큰 자루를 메고 나오면 그 자루 속에서 나와 'I Love You 리루 리루'를 노래하며 뒤뚱뒤뚱 춤을 추며 퇴장하는 것이었다.
1952년 가을, 마약 중독 증세가 심해진 부친이 국립마약환자 수용소에 자진해 입원하자 빚을 갚기 위해 어머니가 홀로 전국의 악극단 공연 길에 나섰다. 부모와 떨어진 남매는 모진 뼈아프게 세상인심을 온 몸으로 체험했다. 이듬해 봄, 건강을 회복한 아버지가 반도악극단과 일을 시작하면서 윤복희선생은 일신초등학교 1학년 2학기에 편입을 준비했다. 그러나 강원도 묵호에서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알려온 한 통의 전보는 청천벽력이었다. 실의에 빠진 세 식구는 낙랑악극단을 따라 <윤부길과 천재 소녀 윤복희>란 간판을 내세우고 전국을 누비는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다시 마약을 손대기 시작한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윤복희선생은 9살 때 홀로 서울로 올라와 인기 가수 황정자 악단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1956년 10살 때 첫 음반 취입 기회가 왔다. 손목인 곡 '보고 싶은 엄마'를 녹음했던 것. 하지만 최초의 어린이가수 음반에 상업적으로 불안감을 느낀 레코드사는 인기가수 송민도에게 재녹음을 시켜 그녀가 취입한 노래는 사장되어 버렸다. 이 대목은 국내 어린이가수 역사에 있어 중요하다. 국내 최초의 어린이가수는 1961년 6살의 나이에 독집을 발표했던 하춘화로 정의된다. 현재까지 확인된 앨범발표 시기로 보자면 이견의 여지가 없다. 역사에 있어 만약이라는 단서는 의미가 없는 것이겠지만 만약 1956년 윤복희선생이 취입한 곡이 정상적으로 음반으로 나왔다면 ‘국내 최초의 어린이가수’ 타이틀은 주인이 바뀌었을 것이고 국내 어린이가수의 공식역사로 5년이 앞 당겨졌을 것이다.
1958년, 서울 시공관 옆 어느 다방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난 윤복희선생은 황해, 백설희 부부와 함께 영화 <안개 낀 서귀포>에서 아역 배우로 첫 출연을 하며 멀티 플레이어로의 재능을 펼치기 시작한다. 영화는 흥행엔 실패했지만 연기력을 인정받은 선생은 1959년 조긍하감독이 연출한 김승호 주연의 영화 <곰>에 또다시 픽업되었다. 이후 미8군 무대 오디션에 낙방한 선생은 경기도 평택의 외삼촌 집으로 내려가 오산 공군 기지의 장교 클럽에서 하루 5백 원짜리 가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몇 달 후 영화 '햇볕 쏟아지는 벌판'의 주연배우 김지미의 어린 시절 역을 맡아 달라는 제의가 들어 와 다시 상경했다. 이때 우연히 명동 입구를 지나다 1년 만에 우연히 아버지를 만났다. 쌀쌀한 초겨울임에도 여름 양복 차림을 한 초라한 행색은 그녀가 생전에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고아가 된 윤복희는 소꼽친구 송영란의 집에서 기거 했다. 송영란의 모친은 윤복희, 송영란 두 소녀를 <투 스쿼럴스>란 듀엣으로 묶어 남산 UN센터무대에 출연을 시켰다. 어느 날 미8군 유명 쇼 <에이원쇼>의 단장인 박인순, 옥후연씨 부부가 깜찍한 두 소녀의 무대를 보고 반해 스카우트했다. 작곡가 김희갑이 밴드마스터였던 <에이원쇼>는 이춘희, 김성옥등 쟁쟁한 가수들이 포진했던 스페셜 A급의 쇼 단이었다. 김희갑에게 기타를 배우기 시작한 선생은 당시 만돌린, 하모니카, 색소폰, 드럼 등 모든 악기를 섭렵하며 음악 공부에 몰두했다. 미8군 무대에서 소녀듀엣 <투 스쿼럴스>의 인기가 높아지자 화양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은인으로 생각했던 박인순단장을 배신할 수 없었던 윤복희는 쇼 단에 그대로 남고 송영란만 이적을 해 듀엣은 자동 해체가 되었다.
혼자가 된 윤복희는 더욱 열심히 음악활동을 한 결과 1962년 자신의 힘으로 불광동에 작은 집을 장만했다. 18살 선생에게 첫 사랑이 찾아왔다. 상대는 경기고, 서울대를 졸업한 엘리트 가수 유주용. 독일계 혼혈아인 그와의 첫 만남은 1963년 미국 영화배우 셜리 맥크래인의 내한 기념 조선호텔 환영 파티에서 MC와 가수로 이뤄졌다. 첫 만남 때는 특별한 감정이 없었지만 유주용의 누나 모니카 유, 최희준, 박형준, 위키리로 구성된 한국 최초의 음악동호회 <포 클로버스>의 객원멤버로 참가하면서 조금씩 연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윤복희선생은 당시 민들레 악단과 함께 드라마센터의 재즈 페스티벌 등 일반무대에도 올랐다. 한번은 앙코르를 수차례 받고 들어오는데 인기를 시샘한 한 단원이 “못 배워서 영어발음이 시원치 않다”고 비난했다. 가슴 속에 교육 콤플렉스가 있던 선생은 그날 경복고에 다니던 사촌오빠를 찾아가 공부를 시작했다. 3개월 후 어머니의 성을 따 ‘성복희’란 이름으로 한양고 2학년에 편입했다. 배움의 길은 쉽지 않았다. 학교와 무대생활을 병행하다 보니 과로로 쓰러지기도 했다. 미8군 가수 김계자의 시민회관 귀국 쇼 무대에 게스트로 출연, 트위스트 춤을 추다가 완고한 교무주임으로부터 “예술계 학교로 옮기라”는 권유를 받아 서라벌예대에 들어갔지만 학교생활은 오래하지는 못했다.
1963년 워커힐 극장 개관무대는 그녀를 일반대중에게 널리 알렸던 중요한 무대다. 특별 초청된 세계적인 가수 루이 암스트롱이 자신의 흉내를 잘 내는 한국의 꼬마 여가수를 찾았고 윤복희선생은 세계적인 대스타 앞에서 전혀 기죽지 않고 기가 막히게 모창을 불렀다. 워키힐 개관무대로 유명해진 그녀는 1963년 10월, 필리핀으로 첫 해외 공연에 올랐다. 당초 2주 예정이었으나 귀국 일정이 얽히면서 6개월 동안 마닐라의 나이트클럽에서 하루 6-7회씩 출연하는 고달픈 시절이었다. 윤복희선생은 “변성기였던 그 때 무리를 해서인지 맑았던 음색이 탁한 쉰 소리로 변했다”고 아쉬워했었다. 11명의 단원들 중 윤복희와 무용수 서미선, 김미자, 이정자만이 남았는데, 이들이 훗날 <코리언 키튼즈>의 오리지널 멤버가 된다. 새롭게 팀을 구성한 이들은 동남아 순회공연을 벌였다. 그녀가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바로 이때다. 1964년 10월 싱가포르 공연을 본 영국인 쇼 프로모터 찰스 오우 마더가 4인조 여성보컬그룹 결성을 제의했던 것.
팬이었던 싱가폴의 호텔 사장 후레디 유는 팀명을 <코리언 키튼즈>로 지어주었다. 그 해 11월 <코리언 키튼즈>는 영국 런던으로 가 한복을 입고 BBC 방송 투나잇 쇼에 출연해 갈채를 이끌어 냈다. 당시 활약상은 외신을 타고 국내에도 소개되었다. 1966년 초 부푼 꿈을 안고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갔으나 반응은 냉담했다. 그러나 4개월간의 피나는 연습 끝에 코파카바나로 스카우트돼 TV 쇼에 출연하자 쫓겨나다시피 했던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 호텔에서 다시 초청을 해와 미국 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이후 유명 코미디언 봅 호프의 주선으로 CBS TV 특별 쇼에 출연한 후 그의 월남 공연단에도 참여한 후 1967년 1월 7일, 3년 만에 귀국했다. 경제재건으로 문화적 욕구가 팽창되어있던 당시 미니스커트를 입은 그녀의 사진은 충격파를 날렸다. 이에 온 나라가 들썩거리며 남성들에겐 호기심을 젊은 여성들에겐 상상을 넘는 관심을 불러왔다. 이에 디자이너 박테일러는 화제의 주인공 윤복희를 위해 깜짝 미니스커트 패션쇼를 주최했다. 이후 여성들 사이에는 신드롬처럼 미니스커트 입기가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대중음악계에선 드물게 앨범 재킷 사진만으로 사회적 파장을 던진 기념비적인 음반이 있다. 윤복희의 미니스커트 사진을 앨범재킷으로 장식한 <윤복희 스테레오 1집>(1967년)이다. 이 앨범은 그의 공식데뷔음반이다. 1951년부터 무대생활을 시작한 윤복희선생은 첫 음반 발표가 꽤 늦은 가수다. 12곡을 담은 데뷔음반은 미니스커트 열풍에 묻혀 음악적 평가는 지금껏 유보되어 왔다. 당대 최고의 작곡가로 떠오른 이봉조가 작업한 이 음반은 20대 초반의 풋풋한 창법을 담고 있다. 타이틀곡은 블루스 팝 계열의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 하지만 타이틀곡을 제치고 2면에 3번째 트랙 ‘웃는 얼굴 다정해도’가 대중의 열광적 선택을 받았다. 세상 세파에 시달리면서도 당차게 살아온 그녀는 60년대 식 ‘불신의 사랑 정서’를 통해 거짓말이 난무하는 안개정국을 은유적으로 노래했다. 함께 수록된 팝 레퍼토리 5곡은 모두 당대 미8군 무대와 외국공연 때 그녀가 즐겨 불렀던 애창 팝송들이다.
흥미로운 곡은 1면에 수록된 독일의 70년대 세계적 팝 혼성보컬 <보니 엠>의 리메이크 버전으로 유명한 'sunny'다. 바로 이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부문이다. 전 세계를 강타한 보니 엠이 1978년에 발표했으니 그들보다 무려 11년이 앞서 발표했기 때문이다. 처음 이 노래를 발표한 오리지널 가수는 미국의 흑인 팝 가수 <바비 헵>이다. 1966년에 발표되어 미국 현지에서 유행 중인 팝송을 1년도 안되어 한국가수 윤복희가 세계 최초로 리메이크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보니 엠> 버전이 댄스 풍으로 경쾌하다면 윤복희 버전은 원곡에 충실한 블루스 스타일이다. 사실 이 노래는 제목처럼 찬란한 햇빛에 대한 찬사를 담은 노래가 아니다. 비명에 간 오리지널 가수 바비 헵의 동생 핼과 암살당한 케네디 대통령을 추모하는 슬픈 운명을 소재로 한 노래다. 더블재킷으로 발매된 윤복희 선생의 데뷔음반의 초반은 미니스커트 돌풍과 더불어 폭발적인 반응 속에 날개 달린 듯 팔려나가며 이듬해 동명의 영화제작으로 이어졌다. 1969년까지 재발매와 재킷사진을 달리한 싱글 변형재킷 발매로까지 이어진 데뷔음반의 성공은 그녀의 향후 음악적 행보에 힘을 실어주었다.
미니스커트에 이어 또 하나의 깜짝 쇼가 연출되었다. 1968년 윤복희선생은 시민회관에서 첫 개인 리사이틀을 갖던 도중 국제우편을 통해 사랑을 키워왔던 유주용과 깜짝 약혼식을 올려 핫이슈가 되었다. 이에 유니버샬 레코드는 1968년 8월 ‘윤복희 유주용 쇼’라는 커플 음반을 발매했을 정도. 10월엔 미니스커트로 화제가 된 선생을 소재로 한 임영찬감독의 영화 <미니아가씨>에 주연배우로 발탁되어 남진과 함께 출연했다. 영화개봉 2개월 후인 1968년 12월, 결혼과 함께 <유&윤>이란 쇼 단을 결성했다. 이때 옛 매니저인 아더가 찾아와 재결합을 제의했다. 윤복희 유주용 부부와 윤항기, 강경숙, 김현아 등으로 이뤄진 <록&키> 쇼 단은 그렇게 결성됐다. 하지만 채 몇 개월도 지나지 않은 1969년 9월 오빠가 빠진 4인조로 2기 <코리언 키튼즈>로 바뀌었고, MBC TV 개국 기념 고별 쇼 녹화를 끝으로 유럽순회공연을 떠났다. 1년 남짓 유럽 공연 후 1970년 말 라스베이거스에 재 입성했지만 이미 윤복희 부부는 의견충돌로 갈라선 뒤였다.
다시 귀국한 것은 1975년 2월. 오빠 윤항기의 곡 ‘나는 어떡하라구’가 빅히트되며 박태원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자 남매가 함께 출연을 했다. 또한 뮤지컬배우로 변신한 윤복희선생은 1977년 ‘빠담 빠담’에서 에디뜨 피아프 역으로 백상예술대상을 받았고 여세를 몰아 1979년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여러분’으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대상을 받은 노래로 인해 고초도 겪었다. 1980년 청와대 초청공연에서 가사 내용 중 반말인 ‘니가 만일..’부분이 ‘윗분의 심사를 거스릴수 있다’는 이유로 가사 수정 요구를 받았던 것. 하지만 예술적 주관과 고집이 확고했던 선생은 요구를 거부하고 원곡대로 노래해 한동안 활동제약을 받기도 했다. 1982년 강대진감독의 영화 <죽은면 살리라>의 출연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했다. 그해 이장호감독의 영화 <낮은대로 임하소소>의 주제가로 제21회 대종상 영화주제가상을 수상하며 재기했다. 뮤지컬배우로 꾸준한 활약을 했던 윤복희선생은 1987년에는 김종옥감독의 <바람부는 날에도 꽃은 피고>에 영화배우로도 출연을 했다.
빅히트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막달라 마리아 역만 20년 가까이 한 것은 그녀만의 자랑이다. 그녀를 한국 뮤지컬의 대모로 추앙 받게 한 역작이기 때문이다. 2001년 9월 윤복희는 세종문화회관에서 50년 노래 인생을 정리하는 기념공연을 열었고 그해 신보 <삶>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녀가 신세대들에게도 친숙한 것은 개그맨 김영철이 마치 오열하는 듯 선생의 열창을 흉내 내 인기를 끌었기 때문. 대중음악사에 지울 수 없을 명장면 하나가 생각난다. 선생이 1979년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여러분’으로 그랑프리를 수상했을 때 오열하며 절창하던 모습 말이다.
윤복희선생의 진정한 가치는 대중적 인기와 흥미를 유발시켰던 수많은 사건들에 있지 않다. 불우했던 어린 날의 역경을 딛고 스스로를 한국 뮤지컬의 대모로 인정받게 한 음악 열정과 노력 그리고 사람을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적인 노래에서 찾아야 마땅할 것이다. 한국 대중음악사의 산증인인 그녀의 60년 음악인생이 총집결될 이번 무대는 또 하나의 감동으로 대중음악사에 기록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100년의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개인 뮤지션의 데뷔 60년 기념공연은 한 번도 없었던 최초의 일이다. 데뷔 60년을 맞은 윤복희 선생에게 진심으로 축하 인사를 드린다.
/글=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전 한국일보 편집위원oopldh@naver.com
[출처] 윤복희 최초로 데뷔 60주년 기념공연의 주인공이 되다|작성자 절판소장
윤복희 미니스커트 파동의 진실은 무엇일까?
OBS경인방송에 출연한 윤복희선생의 '67년 귀국날 미니스커트를 입고 귀국하지 않았다'는 말이 의외의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영상 1호는 대역을 사용한 96년 CF라는 황당한 기사가 난무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마디 해야겠다.
67년 귀국날 미니스커트를 입고 귀국했다는 보도를 한 당시 언론은 없는 것으로 조선일보가 최근 확인했다.
분명한 것은 당시 수도없이 외국 공연을 다녔던 윤복희는 70년대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공항에 내리는 장면이
당시 TV에 수차례 방송되었다. 당시 초등학생 중학생이었던 난 TV를 통해 분명히 그 영상을 보며
신기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다만 67년 첫 귀국이 아닌 그 뒤 70년대의 영상인 것으로 기억한다.
분명한 것은 경인방송의 보도자료는 당시 언론이 보도하지 않은 사실에 대한 확인없이
윤복희 선생 본인의 언급으로 구성된 막연한 추측이고 황당한 뒤엎음인 것 같다.
헌데 어느 평론가가 쓴 기사에서 데뷔앨범에 사용한 미니스커트 사진은 당시 중앙일보에서
게재했던 사진이라고 주장을 본 적 있다.
당시 중앙일보를 확인해 보지 않았으니 그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 확인해 줄 수는 없지만
조선일보 확인에 의하면 게재된 적이 없다니 어느 것이 진실인지 언제 직접 중앙일보를 확인해봐야 겠다.
여하튼...이번 사태는 아마도 윤복희선생은 단순하게 당시 67년 귀국때 미니스커트를 입고 귀국하지 않았다는
증언을 하고자 했던 것 같다.
헌데 본인이나 방송국 측은 당시 그런 기사가 게재된 신문이나 잡지를 제시하지 않고
즉 전후 사정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일을 부풀려 일이 묘하게 꼬여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째되었든 67년 이후 윤복희선생은 미니스커드로 인해 큰 화제가 되었던 것이 사실이고
대중에게 각인된 불변의 사실인데 왜 지금 싯점에 67년 귀국시 공항 트랩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내렸건 아니건
무슨 상관인데 이 난리인지 모르겠다.
67년 귀국후 곧바로 발표한 윤복희 데뷔앨범의 미니스커트 재킷.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67년 1월 귀국하자마자 아현동 고가도로위에서 찍은 사진으로
곧바로 발매된 그녀의 데뷔음반이 미니스커트 사진으로 구성된 재킷이란 사실이다.
고로 미니스커트의 진원지는 67년에 발매된 윤복희의 데뷔음반이라 해야 옳다.
당시 미니스커트 앨범재킷은 세간에 큰 화제가 되었다.
그래서 60년대 당시 윤복희를 위한 미니스커트 패션쇼도 열렸고
이후 윤복희의 미니스커트 사진은 각종 잡지에 수도 없이 게재되었다.
1968년 당시 대중잡지에 실린 윤복희의 미니스커트 사진.
당시의 잡지에 수록된 사진을 소장하고 있으니 분명한 사실이다.
심지어 첫 남편인 유주용과의 결혼식 때도 미니스커트 드레스를 입어서 화제가 되었는데
1996년 cf영상이 대중이 기억하는 윤복희 미니스커트 1호라니...
96년 CF는 솔직히 기억도 못하겠는데 그걸 찾아낸 언론의 노고는 대단하다^..^
하지만 그 CF영상이 누구에게 확인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윤복희 미니스커트 논란의 발원지라는
주장은 참으로 어이없는 기사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68년 12월 윤복희 유주용 결혼식 때 미니스커트 웨딩드레스 사진.
그런데 40년도 넘은 그 사실이 왜 이 싯점에 이리 뜨거운 감자가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문제는 67년 귀국때 미니스커트를 입고 귀국했다는 당시 언론의 기사가 나간 것으로
윤복희 선생님이 착각하에 언급한 방송멘트가 아닌가 싶다.
60년대에 윤복희 선생의 미니스커트 신드롬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출처] 윤복희 미니스커트 파동의 진실은 무엇일까?|작성자 절판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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