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씨에 관한 족보를 보면
삼한시대의 형성과정이 보이는듯.
...............삼한시대부터 한반도 성씨 유래..............................
기자조선 영역은 요하 하류, 해성, 압록강 중류, 청천강 상류
B.C 3세기 흉노족에게 시라무렌하 영역을 잃고 연 한 진 때 쇠퇴.
기자조선 후예는 행주 기씨 , 서씨 , 태원 선우씨 , 청주 한씨
그외 해주, 태인 경, 토산 궁(弓), 봉화 금, 밀양, 함평 노(魯)
고구려 고씨(高句麗 高氏)·
백제 여씨(百濟 餘氏) ·
신라 김씨(新羅 金氏) 주류.
고구려는 을(乙)·예(禮)·송(松)·목(穆)·우(于)·주(周)·
마(馬)·손(孫)·동(董)·예(芮)·연(淵)·명림(明臨)·을지
백제는 사(沙) · 연(燕)·협(협)·해(解)·진(眞)·국(國)·목(木)
묘(苗)·왕(王)·장(張)·사마·수미(首彌)·고니(古이)·흑치(黑齒)
신라(新羅)는 박(朴)·석(昔)·김(金)·이(李)·
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요(姚)
우리나라 성씨의 유래는 백제 근초고왕 4세기 초.
그 이유는 그 이전까지는 모계사회 풍습이 있었고
그 이후부터 한반도에 부계사회가 뿌리내렸던 때문.
한반도 성씨는 중국 고대 패망 왕조 국가를 총 망라.
즉, 중국에서 이주해온 유민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
백성이란 100 성씨 씨족들이 모여 이룬 나라의 구성원.
씨족마다 풍습 문화이 다르고 가옥 구조도 천태만상.
한반도는 고대 국가, 8도 지방마다 색다른 가옥구조
전세계에서 가장 천태만상 가옥 전시장 같은 한반도.
.................우리나라 주거환경 특징................
구석기시대 인간은 동굴이나 바위틈 그늘에서 살았다..
그후 나뭇가지 원추형 뼈대와 나뭇잎 등으로 만든 가옥.
제 4 빙하기 이후 신석기시대에는 가축을 기르고 농사
집단 공동생활을 하기 시작하며 반 지하 타원형 주거지.
원형, 타원형, 방형으로 바뀌었고, 말기에긴 네모꼴 형태.
청동기 시대(B.C 10세기경)에는 나즈막한 언덕에 10∼20호.
많게는 100호 정도의 마을을 형성하며 농경 어업 또는 목축.
주거지가 커졌으며 기거, 취사, 작업, 저장 등으로 나뉜 벽체
고조선 시대 움집은 지하를 깊게 파고 기둥을 세워
서까래를 걸쳐 지붕을 짜고 풀 흙 등을 덮은 주거지.
지붕이 땅에서 떨어지는 반 움집의 형태가 생겨났다.
이때 비로소 여자는 안쪽 깊은 곳을 차지하고
중간은 작업실, 입구는 남성 및 야외 생활도구
고구려 주거지는 온돌과 지붕에는 기와를 사용했다.
백제는 고구려와 유사했고 산 중턱에 살았다는 기록
신라는 기후가 따뜻한 지방이므로 평상 위에서 생활
고려는 백성은 움집 형태였고 귀족은 기와집 형태.
이조시대에는 고려 때 주거지 구조를 그대로 계승
목조가구식 온돌과 마루가 있는 민도리집 양식이다.
이조 건축은 규모가 작고 검소하면서 위엄을 갖췄다.
건물 자체의 균형 뿐만 아니라, 주위 환경과의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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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는 전 세계에서 가장 잘 정돈된 우리나라.'
2천년 혈통을 족보로 만들어 대물림한 유일한 나라.
현재 국립 중앙도서관 자료실엔 600종, 13,000권 소장
원래 중국 6조(六朝)시대에 시작된 족보는 왕실 계통 기록.
한반도에서 족보가 보편화된 시기는 1565년(조선 명종20년) 이후
<문화유씨 가정보>에 민족혈통을 수록하자 명문가문도 족보 간행
17세기 이후에 여러 양반 가문들이 다투어 족보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조 초기에 간행된 족보 대부분은 관계 자료를 충실히 보완한 내용.
이조 중기에 들어서자 조상을 미화하고, 조상벼슬을 과장하거나 조작.
심지어 명문 가문의 족보를 사고 팔거나, 훔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사대주의 사상에 물들어
중국에서 유래된 족보도 많았다.
이조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양반은 국가의 지배 계층.
이조시대 후반부터 양반 계층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난다.
양반 상민의 신분격차가 없어질 무렵 너나 없이 양반 주장.
이조시대 말기에는 매관매직, 족보를 사고 파는 행위도 성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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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는 언제부터 성씨를 쓰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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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민족은 누구나 성씨를 사용하고 있다.
아울러, 그 성과 본관의 유래가 담긴 족보가 있다.
족보는 한반도의 역사 전통 사회구조 파악에 길잡이.
'고대부터의 혈연과 지연도 알 수 있는 족보.'
성씨는 출생 혈통 겨레(족) 소속집단 국가를 나타내는 호칭.
즉, 혈연집단인 씨족에서 비롯되어 소속 국가까지 알려준다.
하여 성씨는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 뿌리가 하나로 모아진다.
성씨는 한자로 이름 앞에 붙여 본관과 함께 사용한다.
하여, 같은 성씨라도 혈연 관계가 없는 타 성씨와 구별.
성씨는 대대로 갈라져 같은 조상이라도 성씨가 달라지고
같은 성씨이면서도 그 조상이 혈연과 무관한 경우도 많다.
부 또는 모 성을 따르기도 하며 모성 변성, 사성, 자칭성 탓.
중국의 고대사회에서는 남자는 씨, 여자는 성으로 호칭했다.
즉, 부계사회는 씨를 사용했고, 모계사회는 성으로 호칭했다.
훗날 성씨가 합쳐졌고, 씨는 신분의 고귀함을 나타내는 호칭.
귀한 신분은 씨를 사용, 천한 신분은 이름만 있고 씨는 없었다.
고려 초기(10세기) 지배층이 부계 혈통을 표시하는 성을 사용.
성은 사회구성원이고 명은 개인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씌여졌다.
하여, 성은 본관을 의미하고 씨는 높임 말의 의미로서 사용했다.
씨는 이조시대에 들어와 양반의 부인을 부를 때 경칭으로 씌였다.
한반도는 삼국시대 전후부터 성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에서 중국식 한자 성을 쓴 시기는 고구려 장수왕 시대.
그당시 중국에 보내는 국서(國書)에 고(高)씨의 성을 사용했다.
백제는 근초고왕 때부터 여(餘)씨, 무왕 때부터 부여씨(扶餘氏)
신라는 진흥왕 시대부터 김씨 성을 사용했던 역사기록이 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누구나 모두 성을 사용한 것은 아닌 듯.
성씨(姓氏)가 보편화 된 것은 고려 중기 문종(文宗) 9년(1055)
성을 쓰지 않는 사람은 과거급제 자격을 주지 않는 법령 이후.
성씨 유래와 족보들을 보면, 한반도가 한 핏줄 만은 아닌 듯.
동아시아의 수많은 고대국가들로부터 유래된 성씨의 흔적이다.
서해 지역이 육지였던 시점에서부터 여러 민족이 살았던 한반도.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빙하가 녹아 해수면 아래로 잠긴 서해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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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저지대 민족들은 어디로 뿔뿔이 흩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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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말.
조선시대 초기에만 만해도 성씨가 있는 양반은 10%
조선시대 중기에 들어와 양반이 족보를 가지게 되면서
평민들도 구전 자료에 의하여 족보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토착민들은 지역 별 동일 씨족으로 족보를 가지게 되었다.
집성촌을 이루지 못하고 생활한 유랑민이거나
원래 천민은 성씨없이 돌쇠,떡쇠, 개똥이, 삼돌이 등
성씨 없이 이름만 불리웠는데 조선후기에 양반 도움으로
성 하나 만은 가지게 되었고. 1909년 일제가 민적법 시행시
성씨가 없던 천민들에게 원하는 성씨의 호적을 일제가 주었다.
그 때 가장 인기 있던 성씨가 "김이박 등.
그래서, 유명한 성이 더욱 흔해지게 된 것.
일제가 성이 없던 밑바닥 천민(노비)계층에게
유명 성씨의 호적을 준 것은 조선 양반성씨들이
씨족별로 단결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한 조치였다.
노비를 양민화 시켜
수탈 대상을 늘이기 위한
식민통치정책의 일환이였다.
일례로 김좌진 장군댁 노비 100명도
안동김씨 호적을 만들어 가졌다 한다.
조선시대 양반집 법도는 엄격한 유교의 윤리로
양반 행세하기는 행동거지가 참 어렵고 엄했다.
따라서 천민은 흉내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는 사회
현재 품성과 관계없이 성씨로 양반입네 떠드는 사람은
양반집 "돌쇠"거나, 그 마을 "개똥이"였을 가능성이 높다.
양반은 따르는 권속들에 대한 책임감과
가문의 명예를 위해 중압감을 느끼며 생활
자신의 행동이 가문과 직결되었기 때문에
막된 행동이나 막말 등을 할 수가 없었으며
지역사회에서 한번 쌍놈의 가문으로 찍혀지면
자녀 출가와 직결될 만큼 성씨가 품행을 구속했다
법도와 예의를 생명같이 여기고 산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점에서 양반 사회는 순기능 역활도 했다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