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는 영암군 사람으로 중랑장 조안정의 부인이다. 나이 17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8세에 남편이 돌아가시고, 19세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는데 모두 3년씩 여묘를 하면서 애훼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생업에는 종사하지 않았으므로 정려를 하사하였다.
연촌공배(烟村公配) 평양조씨는 유복녀(遺腹女)로 태어났다.
중랑장 조안정(趙安鼎)은 효열김씨가 18세 일 때 사망하였으므로, 연촌공배 평양조씨는 유복녀로서 태어났음을 알 수 있고, 혹시 유복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유복녀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처지로 평양조씨는 아버지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연촌유사 존양루기
띠 풀로 지붕을 이은 초가집 백여 호가 바둑알처럼 주변을 둘러싸고 있으니 모두 연촌공이 부리는 노비들이 사는 집이고, 기름진 논밭이 수백 마지기나 되어서 논두렁과 밭두렁이 엉키어 있으니 모두 연촌공의 논밭이다.
茅茨百餘家環布碁拱皆侯之蒼赤也良田數百畝畦畛相繆皆侯之田畝也
연촌공이 낙향할 때 영암에 많은 재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모두 효열김씨가 딸 평양조씨에게 유산으로 물려 준 것으로 전주최씨, 서흥김씨, 거창신씨, 남평문씨가 영보촌을 중심으로 터를 잡아 세거하는 데에 있어서 경제적 기초가 되었다.
효열김씨의 유산은 전주최씨, 서흥김씨, 거창신씨가 정착하는 경제적 기초가 되었다.
당시는 18세가 결혼 적령기이다.
통덕랑공 최윤조(崔潤祖)
연촌공은 1401년 무렵 전주에서 성본을 알 수 없는 전배와 혼인하였으나,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전배는 후사 없이 사망하였다. 1405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이듬해 모친상을 당하여 출사하지 못하였고, 상제로서 재혼이 불가하였다.
1409년 모친상을 마치고 벼슬에 나갔는데 아버지와 두 형님이 모두 문과에 급제한 명문가의 막내로서 자신도 문과에 급제하여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 이었지만 초혼에 실패한 홀아비라는 흠결이 있었다.
평양조씨는 어머니가 효열부로서 <삼강행실도>에 오를 정도로 유명하고, 또 논밭이 수백 마지기나 되고 노비를 백여 호나 거느린 부유한 가정의 무남독녀이지만,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바닷가 영암이라는 외딴곳에서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자랐다는 흠결이 있었다. 영암군수를 지낸 연촌공의 외삼촌 박진(朴晉)이 중매하였다.
세계표
연촌공은 1384년에 태어났으며, 평양조씨는 1392년 무렵에 태어났는데, 두 사람은 1410년 무렵에 혼인하여 서울에서 살면서, 1412년 무렵 장남 최주 낳았고, 1416년 무렵 장녀를 낳았는데 김총과 혼인하였고, 1420년 무렵 차녀를 낳았는데 신후경과 혼인하였고, 1423년 차남 최창을 낳았으며, 1425년 무렵 막내 최숙을 낳았다. 최숙을 낳을 무렵 연촌공은 외직으로 나가 함양 군수로 있었으므로 최숙은 함양에서 태어났다.
사위 김총은 서흥김씨로 조선 성리학의 거두 한훤당 김굉필의 숙부이고, 신후경의 할아버지 신이충은 증손녀가 연산군의 왕비이고 증손자는 신수근으로 딸이 중종의 왕비 단경왕후이다.
삼강행실도
효열김씨는 조안정(趙安鼎)의 후실(後室)로 추정된다.
양반(兩班) : 5품 이상 문반(文班)과 무반(武班)
조안정(趙安鼎)과 효열김씨(孝烈金氏)는 최소한 10세 이상 나이 차이가 있다.
중랑장은 5품 무장으로 상당히 높은 벼슬이므로 20세 전후 젊은 나이로는 오를 수 없다. 만약 조안정이 20세 즈음 중랑장에 올랐다면 매우 큰 전공을 세웠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겠으나 조안정이 사망한 1390년 무렵에는 그와 같은 전쟁이 없었다.
효열김씨가 18세 일 때 조안정은 이미 중랑장 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매우 크고 후실이 아니면 성립될 수 없는 혼인 조건이다. 평양조씨 제주공파 파조 조희정(趙希鼎), 병사공파 파조 조을정(趙乙鼎)은 조윤(趙淪)의 아들이다.
평양조씨는 18개 파를 가지고 있는데 종가 제주공파는 파조가 조희정이고 두 번째 병사공파는 파조가 조을정인데, 나머지 16개 파에는 그 무렵 사람으로서 이름에 정 자가 들어간 사람이 없다. 조안정, 조희정, 조을정은 같은 정자 돌림이어서 세 사람이 혹시 형제간일 가능성도 있다고 추정해 보지만 뒷받침할 만한 물증이 없다.
평양조씨.
평양조씨는 조춘(趙椿)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는데, 평양부(平壤府) 상원군(祥原郡)의 한미한 가문이었다. 5세 조인규(趙仁規, 1237~13 08)가 몽골어 통역관으로 출세하여 충선왕의 장인이 되어서 권문세가 반열에 올랐다. 조인규는 평양조씨 가문의 비조(鼻祖)로서 후손이 18개 파로 나누어졌는데, 장남 조서(趙瑞)와 장손 조굉(趙宏)은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조굉은 조방우(趙邦佑)를 낳고, 조방우는 조윤(趙淪)을 낳았으며 조윤의 아들은 조희정(趙希鼎)과 조을정(趙乙鼎)으로 조안정(趙安鼎)과 돌림자가 같다.
조인규는 평양부 상원군의 한미한 가문 출신이지만 재상의 반열에 올랐으므로 수도 개성을 중심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안정은 후사가 없으므로 평양조씨 가문 문헌에서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효열김씨가 딸 평양조씨에게 상속한 재산은 논밭이 수백 마지기, 노비가 백여 호나 되는 막강한 규모다. 그 많은 재산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호남에는 평양조씨 집성촌이 없고,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에서 영암군 토성(土姓)으로 김씨는 없다.
세종실록지리지.
토성이 아홉이니, 김, 나, 오, 정, 진, 손, 남, 박, 유이다. 영산의 속성은 하나이니, 윤이요, 압해의 성은 다섯이니, 박, 주, 정, 강, 남이요, 반남의 성은 다섯이니, 홍, 조, 박, 채, 송이요, 회진의 성은 넷이니, 양, 임, 신, 조요, 안로의 성은 넷이니, 김, 서, 차, 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