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세계관
기의 세계와 꿈
무제한의 범위에 이르기까지 꿈을 꾼다는 것은 사람이 우주적 존재임을 말해준다. 사람은 때로 3차원 공간의 형상인 조그만 몸의 규모로 의식이 축소되고 제한되기도 하지만 여기에 만족하여 고정적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꿈의 모험은 매순간 생동하면서 우주와 하니될때까지 거듭한다. 따라서 사람들이 서로를 사람으로 바라보고 사람답게 만난다는 것은 자신과 상대를 전 우주의 규모와 고차원의 세계를 향해 꿈을 꾸는 행위이자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더 넓은 세계를 향하여 자유롭게 꿈꾸는 것을 억압하는 것은 사람의 생명다움을 빼앗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을 주제로 보지 않고 대상화하며 도덕률을 따라야 할 존재로 수단화 하려는 것이다.
꿈은 스스로 꾼다. 꿈꾸는 과정은 주체적이고 창의적 이다. 꿈은 일체의 도그마를 거부한다. 설사 많은 사람의 동의를 얻고 있는 진실이라고 할지라도 외부에서 강제할 수 없다. 우여곡절을 거칠 수 있는 스스로 꿈꾸는 과정을 억압하는 한, 언어로 표현된 진실은 왜곡된 도그마에 불과할 것이다. 주체의 참여 없는, 사람의 꿈꾸는 과정을 배제한 언어는 죽어 있는 것이다. 죽어 있는 언어는 사람의 자율적인 참여를 불러일으키는 꿈의 모험을 통해서 되살아난다. 사람이 있지도 않은 것을 꿈을 허황되게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몸과 의식에서 우주의 규모로 기운 소통하고 있다. 꿈은 그러한 기운의 흐름을 바탕으로 해서 나타나는 기능성과 잠재성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기수련은 꿈꾸는 과정과 비슷한 면이 있다. 기의 장은 나와 세계의 만남을 통해서 형성된다. 그런만큼 나의 의식적 지향,몸의 긴장 이완여부에 따라서 나와 세계의 소통은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기는 물질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다. 기를 협소한 물질에너지로 여기고 운용하는 것은 그렇게 행하는 사람의 의식이 그러한 경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기는 우뇌식 꿈꾸기처럼 대상과 만나는 범위를 넓힐수록 그만큼 장이 색다르게 열린다. 기존의 나라는 경계를 고수한 상태에서는 기를 통해서 대상과 제대로 만날 수 없다. 나와 대상이 주객일치 상태로 만난다는 것은 매순간 기존의 나로부터 탈중심하는 것이며 새롭게 인식한 세계속에서 새로운 나를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그렇다고 지금.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지금.여기는 의식으로 경계 지은 모든 벽을 허물 때 도래한다.시공간 개념으로 분별된 세계의 경계를 넘어설 때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여기에 임할 때 나와 대상의 모든 개별적인 만남도 폐쇄적일 수 없다. 어떠한 만남도 전 우주의 범위, 고차원 세계까지 열려 있다. 나도 대상도 세계도 모두 전 우주, 고차원 세계의 흐름 속에 있으며 그 사이에 넘지 못할 경계는 없다. 나와 대상 사이의 개별적인 만남이 다른 세계와 구별되는 벽으로 보이고 느껴지는 것은 의식이 개별적인 만남의 범위 안에만 머물면서 우주 전체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기운의 흐름을 배재하고 있기 대문이다. 기의 패러다임은 스스로 창의, 주체적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이고 어느 단계에서 고정된 실체로 머물 수 없다는 점에서 꿈꾸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기로써 세계를 해석할 때도 마찬가지 원리가 작용한다. 무한한 우주의 정보 가운데서 사람이 어떠한 주관적 의도로 세계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만큼 다른 정보세계가 나타난다. 마치 어떠한 검색어를 입력하느냐에 따라서 무수한 인터넷상의 자료가 검색어의 기준으로 재정리되어 화면에 뜨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 다만 인터넷 자료와 기의 장이 다른 것은 인터넷에서는 검색어에 의해서 인터넷 자료가 재정리될뿐 개별 정보나 사실은 변화하지 않지만, 기의 세계에서는 부분적으로 소통하더라도 그때마다 주체와 대상이 공동의 장을 만들어 나가기 때문에 서로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무리 사소한 대상과도 완전한 만남을 이룬다면 개별적 만남의 장에 국한되지 않고 전 우주의 범위로 열려진다는 것이다.
꿈이 극대치인 무한대의 우주에 이를 때까지 머무를 수 없는 것처럼 기의 세계는 온 우주와 하나되는, 전체로서 하나되는 상태까지 열려 있다. 그런데도 기의 장이 일정한 형태나 국면을 띠고 나타나는 것을 고정적인 것으로 본다면, 이미 자신의 경계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며 그 결과 세계를 왜곡하여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관점으로는 자신을 쇄신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이기심만 강화시킬 뿐이다.
기와 꿈의 세계를 통해서 사람은 우주의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일상생활에서나 수행에서 아주 중요하다.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불교의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사람이 우주이고 만물이 부처이다. 나와 내 것은 없으며 또한 나 아닌 것과 내 것 아닌 것이 없다. 기독교의 원죄 의식도 전체와 유리된 것을 지칭하는 만큼, 개체인 나를 넘어설 때 전체로서의 하나가 된다.
부모와 자녀, 남과 여, 스승과 제자라는 존재는 없다. 그러한 것은 일시적이고 사소한 차이와 관계에 대한 편의상의 명칭일 뿐이다. 서로가 동등한 우주적 주체이다. 서로를 바라볼 때 부모와 자녀, 남과 여, 스승과 제자로서가 아니라 우주적 존재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명칭이나 사소한 차이를 근거로 서로를 인식하거나 차별할 때 자연스러운 우주의 흐름에 장애를 초래한다. 우주적 주체로 바라본다는 것의 요체는 서로를 우주적 존재로서 인정하고 자유로이 꿈꿀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꿈을 자유로이 꾼다는 것은 스스로가 신분이나 지역, 인종이라는 가짜 존재의 벽에 갇히지 않고 전 우주의 흐름 속에서 우주적 존재로 눈을 뜨게 된다는 것이다. 또 서로 다른 점은 곧 우주의 다양한 모습과 맥락이기에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내가 열리면 세계가 열린다 - 곽내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