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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고 사랑하며 인생을 배우다.(회복과 성장)
: 정신건강 당사자ㆍ가족ㆍ치료진
3가지 입장이 되어본
장우석 살아온 이야기
2023.6월초
만47세된 장우석(75년생)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중장비사업이 잘 되었을때 부유했지만, 10세이후 아버지 중소기업이 큰부도를 맞고, 많은 풍파가 다가왔고,
저는 어릴때 우울하고 마음과 몸이 아파 사는 낙이 없어서 종교심으로
10세에 해인사 성철스님을 뵈러가려고 7~8시간가량 1500배 절을 하며 극락장생을 꿈꾸던 불자였다. 어머니는 3000배를 하고 오셨다.
그 당시,
가정 속 스트레스도 많고 부모님의 갈등으로 저는 불안과 공포를 자주 경험했고 몸도 매일 아팠다.
약골로 허약하게 태어나서 기질적으로도 성격적으로도,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예민하고 까칠한 나였다.
유치원과
국민학교때는 ADHD성향으로 자랐고 유치원때 분리불안과 학교에서는
체벌을 많이 받았다.
그후로 기가 눌리면서
환경에 영향을 받으며 순응적이고 반항하지못하고 억눌린 분노와 우울 정서는 정신적인 어려움을 점점 더 가져왔다.
스스로를 좋아하지 못하고
열등감이 많고 자신감이 없었다.
중ㆍ고등학교2학년까지 모범생이지만, 시험공포증과 발표불안증이 심한 심약한 청소년이었다.
종교를 천주교로 11살에 개종후
성당에서 복사를 7년 하며 대입으로
카톨릭대를 지원하게 되었고
신부가 꿈이었으나,
정신적인 문제가 찾아왔고
과대망상과 종교망상으로 빠지는 상황이 되었다.
지속적이고 점진적인
신체화증상ㆍ 공황장애ㆍ대인공포증ㆍ우울증ㆍ자살시도ㆍ조현병ㆍ조울증ㆍ환각ㆍ망상들을 종합병원으로 모두 경험했다.
그 촉발사건에는 부모님의 높은 기대치와 학업의 부담 그리고 기질ㆍ성격적인 부분도 더하고 고교시절 학폭으로 선생님께 모질게 빰을 맞았던 것ㆍ 동급생과 원치않는 싸움후 그 친구들에게 몰매맞고 또 그 동급생의 아는 양아치 선배들에게 여러번 보복구타 당했다.
그리고 대입실패와 첫사랑의 실연당함과 첫 사회생활에서 심한 언어폭력으로 괴로웠다가 한계점이 왔고 기분과 사고에 변화와 현실판단력이 약화되었고 불면증과 악몽을 꾸다가 잦은 음주 후 제어되지못한 상태로 이상행동을 나타나고 환각과 망상으로 멘탈이 붕괴되었다.
그 당시,조절할 수 없는 분노폭발로,
액팅아웃을 하고 위험천만한 교통사고가 날뻔했고 집안 집기를 다 부수고 위험한 도구를 사용해서 결국 119대원들한테 결박당해서 입원하게 되었다.
응급상황으로 20대초중반 3번이나 재발되면 입원해서
사회에서 격리된 총2년간의 정신건강의학과 폐쇄병원생활 후 회복과정은 참 희망없어보였고 눈물겨웠다.
대학병원에서 경제적인 이유로 서민 병원으로 옮겨가면서,
인생 막장같은 경험과 인권이 없는 시대에 병원 속 바닥 같은 삶이었다.
정신증ㆍ 알콜중독ㆍ치매 환자들ㆍ분노조절장애있는분ㆍ노숙자와 범죄자들도 많았다.
정신건강에 안 좋아서
그 와중에 정신줄을 놓치면 5~7일간 침대에 묶이기를 7번가량하고, 증상재발로 정신건강이 나빠져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다가,
힘센 타환자형들에게 몰매도 맞기도 했다.
병원퇴원 중간에 재수를 도전해서,
21세 체대를 가려고 체대입시로 구덕운동장을 매일 10km씩 육상훈련을 하며 구토할때까지 뛰었다.
3개월간 스파르타로 1000km를 뛰어서 ㅡ13kg가 빠졌다.
그러나, 정신건강이 나빠지고 재발되어 대입시험 중간에 술마시다가 좌절후 재발해서 1년3개월간을 또 입원했다. 기나긴 터널속 어둠의 시간이었다. 병원에서 자살시도를 시행하려 했으나, 다행히 보호하셔서 살아남았다.
23세 마지막 퇴원후 5년간 좀비같이 정신과약에 취해지내고 무기력한 생활을 했다.
초발때,
CPZ 500 mg을 먹으며 지내다가,
치아가 약부작용으로 다 썪어 이치과를 수없이 많이 했다.
많은 비용도 썼다.
부모님은 저의 병원비들을 감당으로 등골이 휘어질것 같이 가정붕괴 직전이었다.
그래도 저의 회복을 위해 정신건강 가족교육을 1995년도 받으시고 2년간 긍정적인 의사소통과 지지와 따뜻한 포옹으로
저가 조금 회복되는것을 보시고는 눈물을 머금고 극빈자상태로 결국 미국이민을 가시게 되셨다.
그후 우리 원가족은 이산가족이 되었다.
저는 한국에 남았고 작은누나랑 좀 더 지냈고
이모부노래방에서 근근히 알바를 하게 되었다.
저의 상태와 현실은 더 떨어질때가 없었고,
죽는것을 포기하고 그래도 살아가고 싶었다.
23세부터 저는 고졸에 질병도 남아있고 사회기능와 집중력과 인지력도 상당히 떨어졌다.
다행히 정신과 약물을 고생끝에 잘 찾아갔고 각종 약부작용을 다 겪어보았다. 그래도 할수 있는것을 하게 되었는데,
약을 착실히 먹는것을 습관화하고
심리상담과 취미와 운동을 함께 병행했다.
노래방알바로 빗자루질과 밀대로 청소하기를 5년간 했다. 술먹고 오는 손님들을 상대하며 힘들고 괴로워 화장실가서 울기도 많이 했다.
지루한 인생과 아프고 무기력한 몸과 약부작용으로 물에 젖은 솜뭉치같이 축축 쳐지고 어리버리했고 아무런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견디어나갔다.
담배 연기 자욱한 지하노래방에서 5년간의 바닥생활이었다.
친구들은 좋은 대학가서 캠퍼스에서 공부를 하고 연애도 하고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좀 부럽기도 비교하기도 했으나,
스스로를 위해 어제보다 나아진 나를 생각하고
자중자애하면서
나는 나를 좋아하기부터 훈련하고 건강을 위해 할일을 찾았다.
그것은 약 잘 먹기ㆍ상담치료ㆍ운동ㆍ취미생활(영어학원ㆍ노래부르기ㆍ탁구ㆍ등산ㆍ독서ㆍ글쓰기)였다.
29세까지 모태솔로로 지냈고 노래방 형들이 28세에도 나를 순둥이라고 불렀다.
자기표현에 미숙하고 대인공포도 남아있었고 재발위기도 자주 있었고 말도 잘 못했다. 존재감도 거의 없었다. 1년에 3~4번 재발위기가 왔으나,
자기관리와 약물조절로 위기에 대응해갔고 재발경고체크를 알아가며 미리 예방해갔다.
드디어, 27세이후로 정규직으로 첫직장인
태권도사범일과 레크레이션강사를 10년 하며 신체가 건강해졌고 성격이 개선되고 용기가 생기고 자신감도 생기면서 질병 증상이 사라졌다.
사회복지사의 꿈이 생겨
주경야독으로
33세에 야간 사회복지학과 대학교를 들어갔고 열공했고 성적 장학생으로 37세 졸업했고 사회복지사1급도 3번만에 도전해서 합격했다. 꿈꾸던 직장으로 정신건강의학과 폐쇄병동에 병원 사회복지사일에 정식입사하고 과거 병을 숨기고 적응했다.
8년간 일하며 환자들을 돕는 치료진일과 보호사일까지 하다가 난폭하고 공격적인
상태로 입원하는 환자들로 위급상황에서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다.
사망의 골짜기에서 저는 감사하기와 담대하도록 더욱 기도하게 되었다.
매일매일이 전쟁터였지만,
사명감으로 가슴뛰는 일이라서,
배우고 내면을 훈련하며
일했다.
관리자께 혼나면 자기성찰하고 일과 인간관계에서 고쳐야할것을 개선하고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나갔다. 동료들과 팀워크도 해가며 융화도 하고 적응해갔다.
그 과정에,
뼈를 깎는 고통과 내면의 슬픔도 감내하며 견뎌나갔다. 생존하기 위해서.
알콜환자ㆍ노숙자ㆍ정신질환자ㆍ치매 등 많은 분들을 살폈고 매일 아침 회진과 치료자회의와 주중 13개의 교육ㆍ프로그램들을 진행했고 환자 상담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생각과 인생의 폭과 깊이가 넓어졌다.
주도적인 인생으로 자기표현도 능동적으로 하게 되고 용기와 배짱도 생겼다. 그 와중에 힘든 동료들과도 부대끼면서 존버하려니깐 눈치도 생기고 처세술도 배웠다.
때때로, 원무부장이 바뀌면서 자기사람들을 데려오면서
은따도 당해보기도 했다. 나중에는 저는 자리매김을 잘 하게 되었다.
그동안 젊은 날을 생존이라는 동기로 치열하게 버티어왔고, 생존을 위해 연약한 저는 더 강하고 세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사회에 대해 적극적이고 여유없게 경쟁적으로 살아남으려고 했다.
그 과정에 혼자서 외롭고 힘든 과정에 성격이 억세지고 가혹한 눈높이로 나를 채찍질했다.
사랑하는 원가족과 24세이후 이산가족으로 분리되었고
20대후반에 드디어 독립과 직장생활로 적응하다가,
용기를 내며 건강도 찾고 태권도사범이 되었고 노원구대표시범단도 하고 중국청도축제도 31세 외국시범도 갔다.
30세때 결혼적령기에 나는 결혼을 했다.
평범하게 지냈고 가정적으로 내 월급을 집사람에게 주고 용돈을 20만원 타서 11년을 살았다.
여유도 없고 결혼은 경제적인 부분이 참 컸고 전세집에 자동차를 몰았지만, 결혼은 인생의 무덤 같았다.
그때는 다 그리 사는듯 느껴지던 때였다.
여러 과정끝에
11년만에 안타깝게 헤어졌다.
전처는 결혼전부터 우울증과 경계선성격이었다.
저는 점점 지쳐갔고 암흑기 30대를 벗어나고 싶었다.
또 다시 암흑터널 속을 헤매는 시간이었다.
하루종일 어두운 방에 늘 누워서 티비만 보는 전처.
무기력하게 지내는 것을 돕는다고 도왔으나, 한계에 부딪혔다.
하루가 지나면 리셋되듯,
전처는 새벽마다 첫마디 말이 죽고싶다는 말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한탄했다.
지켜보는것이 참 힘들었다.
11년간의 결혼생활은 나에게 무거운 십자가였고
배우자 가정분위기와 그부모의 기질과 성격ㆍ가치관을 체크 못하고 결혼한 저는 참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30세 나는
사람보는 눈도 없었고,
이성에 대한 분별력도 없던 저였다. 참 어리고 미숙하게 결혼을 덜컹한거다.
그 나이에 결혼하셨던 아버지와 경쟁하듯이.
41세에
돌싱이 되니, 열심히 교회봉사하던 교회집사직분도 무용지물이 되고 교회봉사에서도 배제되었다.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저는 낙오자요. 아웃사이더일 뿐이었다.
그후 8년간 가나안생활(교회 안가고 지내는 생활)로 들어갔고
세상에 있는 즐거움들을 경험해보았다.
취미댄스로 스트레스를 풀고 외로움을 달랬고
연애도, 여행도 다녀보았다.
43세때 강남에 댄스동호회 사회자로 활동했고 주7일 모두 퇴근후 3시간씩 라틴댄스를 하니 90kg에서 70kg로 ㅡ20kg를 감량했다. 기력이 다할 정도로 춤을 너무 추어서 탈모까지 왔었다.
커플댄스라서 서로 웃는 얼굴을 보며 홀딩과
스킨쉽하며 위로받고 힐링되는 부분도 있었다.
댄스운동으로 즐겁게 지내고 다양한 경험과 동호회속 인간관계에서 배움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빛뿐만 아니라, 어두움 그늘도 존재했다. 저는 이성으로 인한 시험과 유혹에 빠지며
불나방같이 끌리는 여자친구들을 만나면서 쾌락과 고통의 밤을 보내게 되었다.
세상의 겉모습의 아름다움 넘어 있는 아이러니하고 언행불일치적인 상황을 겪으며 두통약으로 지새운 날들도 많았다.
사랑이 뭔지?!
사랑 좋아하시네~
사랑에 모든것을 걸고 많은 걸 손해보고 잃어보았다.
점점 사랑의 의미가 퇴색되었고 오래 지속되지도 않고, 영원하지 않는 남녀간의 사랑의 한계를 보았다.
또,
남녀사이에 애매한 관계로 접근하는 여사친들의 어중간한 태도도 몇년사이 경험하며 어장관리녀들에 대해서도 배우고 결국 모두를 정리했다.
세상의 미와 쾌락은 오래가지 않았고 재산을 모두 소진하게 하고 몸과 마음이 괴로움 속에 빠지게 한다.
여러면에서 끌리고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이 여자다 싶으면 얼마 지나서는 내면이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보며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그래서 이번에는 세상을 등지고 한 여성을 만나 충북 시골에 내려가서 세상을 등지고 치우친 신앙심에 치우쳐서 인생을 함께해 보려했으나, 그것도 중용은 아니었다.
5년전에는 책을 쓰고 활동하려는데 전여친앞 우쭐대며 위험한 줄타기를 하다가, 떨어져서 손목골절로 철심을 박았고 갈비뼈도 3개 부러지며 호사다마로 경험했고 8개월간 실업자가 되었다.
충북 증평에 시골생활중에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공장 생산라인에서 6개월도 일해보고 노가다도 닥치는 대로 했다. 생존을 위해서.
매일 박스상자를 찢고 넣고 1만2000개씩 생산라인을 돌리니,
그러는 중에 몸무게가 12kg나 빠졌다.
사회생활은 결코 만만치 않았고
직장생활도 힘들었고 인간관계도 괴로웠고
삶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고 배워갔다.
이성교제에서
양극단을 오가는 방황의 시간이었다. 쾌락적인 여성과 1년간 연애와 금욕적인 여성과도 2년간의 연애도 이별로 정리되었다.
다시 혼자가 되었을때 고독 속에 2년 더 그곳에서 홀로 지내며
스스로를 살피고 돌아보는 회복하는 시간을 가졌다.
외롭고 고독하니 기도가 저절로 나왔고 혼자서 자족하는법도 터득해가며 글쓰기가 깊어졌고 감성이 극대화 되었다.
그 와중에 회복의 증거 2권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 채울수 없는 내 영혼의 안식은 세상에 있는 물질ㆍ쾌락 또는 이성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것이었다.
고독한 밤을 눈물로 보냈다.
그것은 지고지순한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회복하고 유지하고 확장하는 것이다.
천국이란?
지금 이순간 우리 마음속 있으며,
내 영혼이 즐거이 영원한 생명에 잇대어 사는 과정속에 있다.
그 안에 있는 하늘 생명은 사람을 소생케하는 신실한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진리 안에서 나를 자유케 한다.
그 진리는 세상 속 불교철학 안에서도 답을 찾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자신만 살필 뿐이다. 자력 구원은 위로를 주지 못한다.
노자사상에서 물같이 순리대로 사는 삶은 인생과 자연의 합일뿐이나 답을 주지못한다.
자연 속 귀결되는 것을 얘기한다.
허나, 타종교와 다르게 예수그리스도의 기독교는 그분이 인생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선명하게 이야기한다.
인생에 명쾌한 답을 주고 천지창조의 목적인 창조주를 알고 믿고 사랑하여 의지하게 한다.
구원은 인간의 불완전성으로 자력구원이 어렵고, 외부적인 절대선의 협력 또는 타력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닐지!
오직, 인류 속 유일하게 죽음을 이기신분.
예수님의 십자가죽음과 부활만이 영적 연합으로 인생에서 참된 살 길을 여셨다.
그분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고,
삶과 죽음의 문제에 답을 주신다.
영원한 생명과 영적 공동체를 고려해 의와 희락과 화평을 누리길 소망한다.
이 세상에서 의미있고 행복하게 살며 욕심부리지않고 순례자로 소박하게 살다가 때가 되면 미리 선약한 장기기증 후 본향으로 가고 싶다.
2023.6.2
장우석 글쓰기.
첫댓글 우와~~거대한 파노라마 같은 다큐멘터리,
처절한 수기입니다;;;
장우석님의 일대기를
감동으로 읽었습니다.
"구고구난"이라는 단어가 생각납니다!
병과 함께 어찌 이리 다양한 삶을 입체적으로 살아오신데 대해 놀랍기만 합니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보다 더 인간적으로 능가하는 내용에 가슴이 미어지네요;;
영화 시나리오로 강추 합니다!
영화 주연배우로 강우석님을 추천합니다!
혹시 영화가 나온다면....
"화양연화"같은 예술영화?
"허삼관 매혈기" 같은 주어진 삶과의 투쟁하는 특별한 인생 영화..
작품성 있는 좋은 감독 만나서 장우석님의 일생을 영화화 했으면...;
개인적인 소감이오니 너무 앞질러 갔더래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귀한 소감과 좋은 내용과 아이디어도 참 감사합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지금으로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남은 여생 소소히 지내며 내담자들을 돕는 심리상담사로 살고 가렵니다^^
감사합니다~!
파란만장한 인생입니다..
모든 인생이 순탄하지않는 듯 합니다~^^ 함께 힘내어요~!
치열한 삶이
골고다 언덕을 피 흘리며
십자가를 끌고 올라가시는
영화 속 예수님이 연상됩니다.;;;;;
존경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좇아야하는데 세상의 즐거움을 아직 병행하니 고귀한 삶까지는 아직 못가고 있습니다. 여호와이레 여호와샬롬~^^
^^대단하세요. 다시 읽어봐도 대단합니다.
사람에게 진한 감동주는 삶. 상처받은 치유자 우석형.^^
항상 응원합니다.^^
고맙네^^
성훈아~!
나도 늘 너를 응원한다~
이제는 아픔말고
늘 평화 행복 좋은 일들만
있길 기도합니다.
글 잘 봤습니다. 형
감사합니다.^^
당신은 아파했던 만큼 행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인생은 고해(고통의 바다)라서 받아드리며 소소한 행복과 자족하는 거지~!^^
그래~!
응원한다~
솔직하게 자신얘기를 한다는것이 참 대단하세요~^~^. 멋지세요~^^
당신은 아파했던 만큼 행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1권
회복의 증거 2권
책들에 쓴것들 일부 요약한것과 추가 일들 쓴것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