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리 미군기지 도보답사기
1.도보답사 한 번 해 볼까요!
‘우리도 도보답사 한 번 해볼까요?’
평택참여연대 신년모임에 갔더니 남상경씨가 불쑥 말을 꺼냈다. 1월 초 송탄여중 선생님들과 평택지방 도보 답사했던 기사를 신문에서 읽고는 자신도 한 번 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까짓거 그럽시다. 뭐 어려울 것 있나. 걸으면 되지’
단박에 결정하고는 날짜까지 잡았다. 일정은 하루답사였으므로 송탄미군기지 정문에서 팽성대교와 대추리를 지나 함정리까지 걷는 것으로 정했다. 인원은 남상경씨, 이철형 기자, 나 그리고 10년만에 만나는 내 제자 정혜숙으로 정해졌다.
19일 이른 아침, 전화가 걸려왔다. 정혜숙이었다.
‘선생님 밖을 좀 내다보세요. 지금 비가 오는데 갈 수 있겠어요, 저도 술마시고 늦게 들어왔고?’
얼른 내다 본 창밖은 비가 아니라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 글쎄 한 번 상의해봐야겠다’
이철형기자에게 전화한 뒤 남상경씨에게 전화를 했더니 상경씨는 어제 과음했다며 10시로 한 시간만 연기하자고 하였다. 설마 펑크야 내겠냐는 생각에 이철형기자와 정혜숙에게 연락을 취하고는 밥을 먹고 시간을 기다렸다. 약속장소로 가는 중간에 정혜숙을 태우고 이동하는데 남상경씨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선생님, 아무래도 못 갈 것 같은데 다음으로 연기하지요’
상황은 이해가 되었지만 나선 길 되돌아가기도 뭐해서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약속장소에는 이철형 기자가 먼저 나와서 서성이고 있었다. 잠시 후 도착한 남상경씨는 아직도 술냄새가 짖게 풍겼지만 체념한 듯 답사복장을 갖추고 나왔다.
2.당신들 뭐 하는 사람이여!
대추분교 마당에 주차를 하고 길을 나섰다. 오후 3시에 있을 모임을 고려해서 일정도 안정리 미군기지만 한 바퀴 돌기로 수정을 했다. 거기에는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한다는 우리의 뜻도 담겨 있었다. 마을입구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 곤지나루터 기우단과 미군기지에 수용될 도두리벌을 먼저 답사했다. 한참동안 곤지나루의 유래와 기우단의 중요성, 도두리 들판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노인 한 분이 우리에게로 걸어오셨다. 이런 경우는 전에도 몇 번 겪었기에 침착하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어디서 왔는냐, 지금 뭐하는 중이냐’며 꼬치꼬치 물었다. 요즘 대추리가 처한 상황을 짐작하고 있던 터라 우리 신분을 말씀드리고 미리 연락드리지 못한 것에 대하여 용서를 빌었다. 할아버지는 월요일에 국방부에서 ‘토지 지장물 조사’가 나오게 되어 있어 대책위 분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는데 갑자기 우리가 나타나서 회관 사진도 찍고 마을을 돌아다니는 바람에 마을에 비상이 걸렸다고 했다. 사태(?)는 김지태 위원장께 전화를 해서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 아니 일단락 된 것으로 알았다. 내리막길을 걸어 황새울 들판으로 내려가는데 아래쪽에서 하얀 트럭 한 대가 거칠게 달려오더니 우리 앞에 멈춰 섰다. 험상궂은 분위기가 우리 때문에 달려왔다는 것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다행히 트럭에는 저번 1월 달 도보답사 때 신세를 졌던 도두2리 마을 이장님이 계셨다. 함께 오셨던 분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우리를 보고서야 긴장을 풀었다. 이장님은 미안하다며 우리를 황새울 영농조합 앞 대책위 사랑방으로 안내해서 음료수까지 대접하였다. 죽기로 결심하고 고향과 자기 땅을 지키려는 주민들의 결연한 태도에 발걸음이 무거웠다.
3.이렇게 가깝지 않았는데!
황새울 들판은 바람이 매서웠다. 본래 바다를 간척한 땅은 바람도 매섭다는 걸 경험으로 아는 나는 무덤덤 하게 걸었지만 술이 덜 깬 남상경씨나 혜숙이는 추위를 못 견뎌 했다. 이왕이면 미군기지 철조망을 따라 걷는 것이 어떠냐는 남상경씨의 제안에 따라 지난 12월 ‘황새울 평화축전’을 열었던 곳에서 미군기지 철조망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들판에는 최병수씨의 설치미술과 평화축전 때 횃불행진을 하였던 만장이며 깃대가 곳곳에 흩어져있었다. 철조망 가까이 난 길로 걸어가는데 부대 내에서는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차들이 시끄럽게 오간다. 시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흥얼거리며 30분쯤 걸으니 함정1리 서원말다. 서원말은 병자호란 때 척화파의 한사람이었던 화포 홍익한의 묘와 포의서원이 있던 마을이다.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지만 무덤과 신도비는 남았었는데 일제말 비행장이 건설되면서 본정리 꽃산 기슭으로 옮겨갔다.
언덕을 넘어서니 본정2리 아리랑고개다. 근내리가 고향이고 도두리가 외가라는 남상경씨는 어릴적 대추리를 지나 이곳까지 걸어왔던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불과 30여 분 만에 건너오자 꽤나 놀랐던 모양이다. ‘어 이렇게 가깝지 않았는데, 정말 여기가 아리랑고개가 맞아요?’ 상경씨는 내가 그렇다는 말을 여러 번 했는데도 믿기지 않는지 계속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아리랑고개 미군기지 옛 후문 앞에서 아리랑고개의 유래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는 네거리에서 두정리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두정리 대농곡을 지날 때 시계는 12시를 넘기고 있었다. 나는 아침을 거른 남상경씨와 정혜숙을 배려해서 빨리 걸어 송화 삼거리에 있는 ‘조가네 설렁탕’에 가서 점심을 먹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대농곡 앞에서 대보름 잔치와 척사대회를 연다는 현수막을 발견한 이철형 기자가 이왕이면 마을에 들어가서 점심을 얻어 먹자며 우리를 끌었다. 딱히 싫지는 않았지만 본래 대농곡이 미군기지에 근무하던 분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서 인심이 좋지 않은 것이 마음이 걸렸다. 마을 회관 앞에는 모닥불을 중심으로 윳판이 벌어졌지만 잔치마당 같은 흥겨움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면 그렇지, 어디 밥이나 얻어먹을 수 있겠어!’ 나는 이철형 기자와 남상경씨에게 빨리 나가자고 눈짓을 하였다. 하지만 이철형 기자는 포기하지 않고 마을 이장님을 찾더니 끝내 점심밥을 제공해 주겠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예상과 달리 마을 아주머니들이 들고 온 점심상은 소박하면서도 인심이 넉넉했다. 밥과 함께 나온 얼큰한 돼지고기 찌게는 얼어붙은 속을 확 풀어주었고 반찬들도 맛깔스러웠다. 미처 아침 속풀이를 하지 못한 남상경씨와 혜숙이는 ‘어 좋다~’를 연발하며 두, 세 그릇씩 비웠다.
넉넉한 인심으로 속을 확 풀어버린 우리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우리는 대농곡에서 가급적이면 미군기지 철조망에 붙어 걷기로 했다. 그래야만 미군기지를 보다 가까이서 볼 수 있고, 기지확장 반대의 기운을 북돋을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철조망 아래에는 보안용 도로가 개설되어 있었지만 군데군데 끊어진 곳도 있었다. 길이 끊어진 곳에서도 우회하지 않고 들길을 뚫고 나갔다. 송화리 신당골을 지나니 안정리 미군기지 신정문이다. 미군기지는 관광특구 앞에 구정문이 있었지만 1980년대 중반쯤 2백 여 미터 동쪽으로 옮겼다. 나는 되도록 신정문 앞에서는 미군기지 이전에 대한 대화를 삼갔다. 미군기지 확장을 적극 찬성하는 이곳에서 전에도 기지촌 상인들과 충돌할 뻔한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정리 쪽 미군기지 주변지역은 최근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그 가운데 큰 변화라면 기지이전을 대비하여 주택건설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점이 가장 눈에 띄었다. 주택건설은 안정5리, 6리 뒤쪽 뿐 아니라 옛 곤지진로 동창리 부근까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자본의 논리로 본다면 주택을 건설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기지이전에 찬성할 것이라는 생각에 건설현장을 지나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곤지진로 태무전기 부근에서 진로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어떻게든 2시 30분까지 끝내고 싶은 나와 혜숙이는 큰길을 따라 빨리 목적지까지 가자고 했고, 이철형기자와 남상경씨는 본래의 취지를 살려 철조망 옆으로 걷자고 하였기 때문이다. 길을 멈추고 몇 번 내 주장을 고집했지만 우직한 남상경씨에게 당할 바가 아니었다. 길을 내려와서 걷는 동창리 들판은 삭풍이 불고 있었다. 조선시대 동창(東倉)리는 배가 드나들었고 평택현의 사창(社倉)이 있던 곳인데, 같은 들판이라도 간척된 땅과 그렇지 않은 땅은 지면으로부터 올라오는 온기가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끼겠다. 들판 중간쯤에서 끊긴 길을 헤치며 20여 분을 걸었더니 대추리 입구가 나온다. 요즘 대추리는 경찰들이 철통같이 지켜주고 있는데 우리가 길도 아닌 곳에서 카메라를 메고 불쑥 튀어나왔더니 경찰들이 화들짝 놀란다. 저희들끼리 한참 무전을 주고받던 경찰들은 앞서 걸어가고 있던 우리를 불러 세웠다. ‘저기요, 뭐하시는 거예요?’ 이 말에 이철형 기자가 불끈했다. ‘이봐요, 당신은 민간인을 검문할 때 기본자세도 배우지 않았나요. 내가 뭐하든 말든 당신들이 왜 간섭하는 거요’ 난감해진 경찰(사실은 의경)은 자세를 고치며, ‘어디서 오셨죠?. 무슨 일로 저기에서 나온 겁니까?’하고 물었다. ‘우린 평택사람들인데 지금 도보답사 중입니다’ 우리들의 대답이 부족했겠지만 경찰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뒤돌아 섰다. 경찰과 헤어져 백 여 미터쯤 걷는데 이번에는 경찰 봉고차가 황급히 달려오더니 급정거를 했다. 난감해진 의경이 상관을 불러온 모양이었다. 상관은 경위였는데 우리에게 신분을 밝히라고 요구하며 답사목적이 뭐냐고 물었다. 남상경씨가 화내려는 것을 막으며 신분은 밝힐 수 없고 평택에 사는 선후배들이 미군기지를 한 바퀴 도보답사하는 중이라고 말해주었다. 경찰들을 모두 뿌리치니 어느덧 출발지인 대추분교다. 아침부터 난리법석 떤 것을 사과도 할 겸 우리는 마을 경로당에 들렀다. 경로당에는 대책위 분들은 계시지 않고 노인들만 가득했다. ‘미리 연락도 드리지 못하고 아침부터 소란 피워 죄송합니다’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던 노인들은 우리가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자 그 때서야 생각나는 듯 ‘아 그거, 괜찮네 괜찮아’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돌아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여리고성을 일곱바퀴 돌았더니 성이 무너졌다”는 성경의 기록을 생각했다. 우리의 도보답사로 미군기지 확장이 저지되고 대추리와 황새울 들판에 ‘하님의 평화’ 내리기를 기원하면서. (200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