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알 수 있다면 죽어도 좋아!
-영화 ‘히든 피겨스’
박성춘이라는 인물이 있다. 1862년에 출생하여 1933년에 사망했으니 우리나라의 근현대를 모두 경험한 인물이다. 그의 출생지는 관자골(관철동)로 아버지는 천민 중에서도 천했던 백정이었다. 영원히 차별과 수모 속에 살아야했던 그의 삶이 혁명적으로 변한 것은 1894년 무어선교사의 배려와 에비슨선교사의 치료로 장티푸스에서 살아나면서부터다. 이를 계기로 무어선교사가 시무하던 곤당골교회(미장동)에 출석했는데, 양반교인들이 ‘천것들과 한 자리서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거부했다. 결국 양반들은 무어선교사의 설득까지 단호하게 뿌리치고 홍문서골교회를 설립해 분립했다.
무어선교사를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인 박성춘은 근대의식에 눈을 떴다. 근대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결코 불평등하지 않았다. 양반과 상민층, 천민들이 함께 어우러져 예배드리는 교회가 천국처럼 느껴졌다. 성령의 은혜를 받고 신앙의 열정에 사로잡힌 박성춘은 서울과 경기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상민, 천민층을 대상으로 열심히 전도했다.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곤당골교회도 크게 부흥시켰다.
갑오개혁(1894) 후에는 백정들의 신분해방을 위해 헌신했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됐지만 백정들은 여전히 사회적 차별을 받고 있었다. 교육의 기회나 공직진출도 불가능했다. 박성춘은 무어선교사와 곤당골교회 예수교학당의 한국인 교사의 도움을 받아 ‘백정 차별 철폐운동’을 전개했다. 1895년 박성춘의 노력으로 정부는 ‘백정들에 대한 차별금지’ 칙령을 내렸다. 결과 백정도 평민들처럼 갓 쓰고 도포를 입게 되었다.
백정신분해방운동을 통해 박성춘은 상민층, 천민층의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1898년 10월 28일 종로네거리에서 독립협회가 개최한 만민공동회에서 박성춘이 첫 대표연설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신망(信望) 때문이었다. 이날 연단에 선 박성춘은 서재필 등 쟁쟁한 개화지식인들과 만민들 사이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나는 대한에서 가장 천하고 무식한 사람입니다. 이런 나도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뜻을 대강 알고 있습니다. 나라에 이롭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길은 관(官)과 민(民)이 마음을 합친 다음에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천막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대나무로 받치면 부족하지만 많은 대나무로 받치면 그 힘이 튼튼합니다.... ”
박성춘이 비유한 한 개의 대나무는 ‘양반층’일 것이고 많은 대나무는 상민, 천민을 비롯한 다양한 계층을 의미할 것이다. 역사책에서는 이 내용을 독립협회 활동을 통해 민중의식이 근대적으로 변한 것의 명확한 증거처럼 설명한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도 나오고 수능시험에서도 빈번하게 출제되곤 한다. 하지만 박성춘의 의식은 만민공동회에 참석하기 전부터 기독교의 영향으로 바뀌어 있었다. 박성춘이 다니던 곤당골교회는 1898년 화재로 소실됐다. 그러자 무어선교사는 신분문제로 분리됐던 홍문서골교회와 통합을 주선했고, 두 교회가 연합해서 서울 인사동 입구의 승동교회가 설립되었다. 박성춘은 승동교회 두 번째 장로가 되었다.
백성춘의 삶은 교과서 뿐 아니라 교회 내에서는 널리 회자되는 유명한 스토리다. 그만큼 아프고 감동적이다. 1894년 갑오개혁 때 법적으로 신분제도가 철폐되었다고 해서 우리사회가 평등해졌던 것은 아니었다. 법적인 신분은 사라졌지만 사회적 차별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경제적 불평등과 억압구조도 여전했다. 양반들과 동일하게 정치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교육의 기회, 문화예술을 향유할 기회도 동일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독립투쟁을 했던 인물들 가운데서 지금까지 널리 선양되는 사람을 보면 대부분 양반출신이나 근대적 지식인인 경우가 많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본관과 성씨를 논하며 누구는 양반 누구는 상놈이라고 구별하는 것을 볼 때가 많다. 그만큼 사회적 차별은 뿌리가 깊다. 신분적 차별, 성별에 따른 차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은 지난한 투쟁을 통해 바뀌었다. 그 어느 것도 값없이 이뤄진 것이 없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영화폴더에는 수 백 편의 영화가 저장되었다. 나는 ‘히든 피겨스’라는 영화를 다운받아서 처음에는 ‘멜로’ 폴더에 저장했다. 분명 영화 소개란에는 ‘흑인 수학천재 여성의 사랑’ 어쩌고 그랬다. 1년쯤 지나서 영화를 봤다. 영화가 끝난 뒤 나는 멜로 폴더에 있던 영화를 인권(人權) 폴더로 옮겼다.
‘히든 피겨스’는 영화 ‘아고라’와 닮았다. 로마제국 말 알렉산드리아의 최초의 여성 수학자이며 철학자였던 히파티아의 일생을 다룬 아고라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 인간 평등의 가치를 돌아보게 했다. 히든 피겨스를 만든 감독은 데오도르 멜피다. ‘세인트 빈센트’ 정도로 우리에게 알려진 멜피감독은 1960년대 미항공우주국(NASA) 최초의 우주궤도비행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데 일조한 흑인 여성들의 실화를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흑인다. 여성으로 수학 천재였던 캐서린 존슨, NASA 최초로 흑인 관리자가 된 프로그래머 도로시 본, NASA 최초의 흑인 엔지니어였던 메리 잭슨이 그들이다.
세계 최고의 두뇌들이 모인 1960년대 NASA도 차별과 폭력이 난무하는 인권의 사각지대였다. 백인중심, 남성중심의 미국사회의 모순을 비판의식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사 연구원들은 ‘백인은 흑인이나 황인종보다 우월하다.’ ‘남성은 여성보다 능력 있고 우월하다’라는 고정관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조직구성원도 남성 위주였고 중요 회의에는 여성은 참석할 수 없었다. 차별 대우를 받는 백인 여성 아래에 흑인남성이 있었고 그 아래에 흑인여성이 있었다. 흑인들은 불가촉천민처럼 백인 여성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다. 관리직이나 정규직은 주어지지 않았고 급여도 매우 낮았다. 주요 업무는 백인들이 계산한 것을 전산처리하는 업무뿐이었다. 화장실도 흑백이 구분됐으며, 그것도 전산업무를 수행하는 건물에만 한 개가 있었다. 백인들 누구도 ‘흑인도 자신들과 동등한 신의 창조물’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백인 중심 사회에서 차별과 수모는 받는 그녀들이었지만 1960년대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흑인인권운동과는 일정한 거리를 뒀다. NASA에서는 비록 당장 때려치우고 싶을 만큼 차별을 당하고 있었지만 그녀들에게는 ‘나는 일반 흑인들과는 다른 부류’라는 이중적 선민의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안주할 때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자신이 처한 세상과 사회에 비판의식을 갖고 투쟁할 때만 얻어진다는 사실을 강변한다. 흑인여성의 리더이며 성격 좋은 아줌마 도로시의 저항이 그것이다. NASA 흑인여성그룹에서 도로시는 관리자와 동일한 위치였다. 하지만 백인중심의 관리층은 수차례의 요구에도 그를 관리자에 임명하지 않았다. ‘흑인은 관리자가 될 수 없다. 옛날부터 그랬다. 굳이 관리자를 임명하지 않아도 맡은 임무를 잘 수행하지 않는가’라는 인식이 백인들의 생각이었다. 누구도 깨지 않으려는 관념을 도로시는 스스로 깨뜨렸다. 컴퓨터가 나오면서 전산실 동료 30명이 무더기 해고당하고 자신만 꿈에 그리던 정규직으로 승진시켜주겠다는 요구에 조용하면서도 단호히 거절한다. ‘전원고용’ 아니면 ‘전원해고’를 받아들이겠다는 도로시의 저항에 백인들은 두 손 들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당당한 걸음으로 백인들이 득실거리는 사무실 문을 열어 제쳤다. 역사가 진보했다.
캐서린 존슨이나 메리 잭슨이 맞닥뜨린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캐서린은 어릴 때부터 수학천재로 이름났다. 창의적이고 탁월했고 대학과 대학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였지만 NASA에서 주어진 일은 비정규직 전산업무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우주궤도비행 프로젝트’와 관련되어 백인남성들이 계산한 것을 검토하는 업무가 주어졌다. 흑인여성에게 그와 같은 업무가 주어지는 것 자체가 파격이었지만 그의 일할 공간은 백인들만 근무하는 사무실이었다. 백인들의 커피포트에서 함께 커피를 내려 마실 수도 없었고 건물 내에 흑인화장실도 없어 소변이 마려우면 800미터를 뛰어가야 하는 악조건이었다. 그가 동료가 아니다보니 누구도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편견과 무시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실력과 자존심이었다. 그의 탁월한 실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흑인에 대한 사회적 모순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개선하려 했던 본부장 알 해리슨(캐빈 코스트너)의 역할도 컸다. 소변문제로 자리를 자주 비울 수밖에 없는 캐서린의 고충을 듣고 흑백구별의 화장실 팻말을 부수는 모습, 전례를 깨고 여성 그것도 흑인여성인 캐서린을 전략회의에 참석시키고 발표시킨 태도는 해리슨의 건강한 생각, 세계관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메리는 또 다른 적과 싸우고 있었다. 자유분방하고 활달했던 공학도 메리는 NASA 엔지니어로 일하는 것이 꿈이다. 하지만 그의 길을 가로 막은 것은 실력이 아니라 편견과 제도였다. NASA는 취업조건에 ‘버지니아대학원 졸업’을 추가시켰다. 그것은 당시 버지니아대학원은 흑인 입학을 불허했으므로 흑인들의 취업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았다. 메리는 당당히 법정에 섰다. 단 한 번도 흑인 입학을 허가한 적이 없다는 버지니아대학원에 대항해서 ‘어느 사회나,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내가 그 첫 번째 흑인이 되겠다. 당신(재판장)은 위대한 판결의 첫 번째 재판장이 될 것이다’며 대항했다. 그렇게 졸업장을 쟁취해서 당당히 NASA 엔지니어가 됐다. 이렇게 그들은 미국역사에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전설이 되었다.
영화 ‘히든 피겨스’는 멜로가 아니라 ‘인권(人權)’ 영화가 분명하다. 영화는 천재수학자의 삶과 사랑을 조명한 것이 아니라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고발이며 저항이다. 우리에게는 불과 50여 년 전에 세계 석학들이 모였던 NASA에서까지 불평등과 부조리가 존재했던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 그것이 미국이었고, 오늘날 미국인들은 그와 같은 ‘민낮’을 재현하고 싶어 근본주의자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페미니스트’운동에 대한 찬반이 엇갈린다. 필자도 변화의 속도 문제, 여성들의 지나친 피해의식과 남성 혐오, 보복적 태도, 여성 우위적 의식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찬성한다. 불과 40, 50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들은 차별적 존재였고 세상은 평등해져야하기 때문이다. 영화 ‘아고라’에서 히파티아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마녀로 지목받아 광신도들에게 불태워 죽어가면서 이렇게 말한다.
‘진실을 알 수만 있다면 기꺼이 죽어도 좋아’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꿈꿀 수 있는 자유, 이웃들과 함께 손잡고 나갈 수 있는 평등세상이 가능했다. (20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