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것이 무엇일까.
안동 병산서원 밖 주소(廚所) 앞에 있는 화장실이다. 진흙 돌담의 시작 부분이 끝 부분에 가리도록 둥글게 감아 세워 놓았는데, 그 모양새에서 이름을 따왔다. 출입문을 달아 놓지 않아도 안의 사람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배려한 구조이다. 지붕이 따로 없는 이 하늘 열린 '달팽이 뒷간'은 유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일꾼들이 사용하던 것이다. 400여년 전 서원건물과 함께 지어졌으며, 옛 기록에는 대나무로 벽을 둘렀다고도 전해진다. 병산서원의 부속건물에 포함되어 사적 제 206호(1977년)로 지정되었다. 2003년 보수 작업이 이루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나즈막한 진흙 돌담이 달팽이 모양으로 꼬인 모습이 위에서 보면 움막같으나 하늘이 뻥 뚫려서 무엇일까 싶어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니 용변 보는 '뒷간' 이다. 이른바 공중화장실이다. 높이는 어른 키에 조금 모자라는 정도이며 진흙돌담 벽 두께는 두 뼘, 길이는 약 4m 되는 진흙 돌담을 시작 부분에서 끝 부분이 가리도록 둥글게 감아 세워 놓았다.
이웃 하회마을에 살았던 서애 류성룡 선생이 후학을 양성했고 사후에 선생의 위패를 모신 안동시 풍천면 병산서원 주사(廚舍) 앞마당 한쪽에 자리잡은 이 건물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달팽이의 모습을 닮았다. 바닥에는 용변을 담는 옹기를 묻고 그 턱 위에다 나무 송판으로 짠 발판을 올려놓았다 용변이 차면 퍼내는 '푸세식의 재래식 전통 뒷간이다. 이 뒷간은 병산서원의 부속 건물에 포함돼 지난 1977년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었고 지난 2003년 보수작업이 이뤄져 원형을 지키고 있다. 이 뒷간은 370여 년 전 서원건물과 함께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병산서원 울타리 안에는 나무기둥에 기와를 이은 번듯한 또 하나의 뒷간이 있다. 양반(유생)들이 사용하던 것이다. 반면 울타리 밖, 하늘 열린 허름한 '달팽이 뒷간'은 유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일꾼들의 것이라 한다.
유홍준 전문화재청장은 달팽이 뒷간이라고 했다. 왜 달팽이 형상으로 지은 것일까? 안동대 민속학과 배영동 교수는 "문을 설치하지 않고서도 뒷간 내부에서 용변을 보는 사람의 모습이 외부에 드러나지 않게 하는 은폐기능을 갖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즉 출입구 쪽 돌담을 타원형으로 구부려 놓으면 입구 정면을 쳐다봐도 내부가 바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부에 사람이 있는데도 보이지 않아 다른 사람이 불쑥 들어갈 경우가 있는데 어떻게 이런 낭패를 피했을까. 배 교수는 뒷간에 들어가려는 사람이 구부러진 입구의 작은 공간에 잠시 멈춰 서 헛기침을 하고 내부에서 응대하는 헛기침이 있으면 사람이 있는 것으로 알아차리고 맞닥뜨리는 것을 피해갔다는 흥미로운 풀이를 전했다.
배 교수는 이런 양식의 뒷간은 조선시대에 지어졌던 서민형으로 지금은 대전 등 일부 지역에 극소수만 남아 있어 당시 생활사를 이해하고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우리 말에서 뒷간을 가리키는 단어는 정말 다양하다. 서각(西閣), 정방(淨房), 측실(厠室), 측옥(厠屋), 측소(厠所), 모측(茅厠), 회치장(灰治粧), 세수간(洗手間), 해우실(解憂室) 등등.
변소(便所)는 일제강점기에 쓴 말이고 화장실은 'dressing-room'을 번역한 표현이다. 뒷간에 측(厠)자를 붙인 것은 집 한쪽 구석에 있기 때문이며, 모측은 짚으로 엮어 간단히 만든 것, 해우실은 근심 푸는 방 이라는 뜻. 또 정방과 청측은 뒷간이 더러운 곳이기에 깨끗이 해야 한다는 반어적 의미의 표현이라 한다.
병산서원의 '달팽이 뒷간'은 화장실이란 예쁘고 세련된 듯한 단어에 덮여 버린 우리 전통의 뒷간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