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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엘레지 이야기
한국인의 피에는 한(恨)이 녹아 있다. 슬픈 분위기의 전통가요,
엘레지(elegy)는 한의 정서와 잘 어울린다. 우리의 부모 세대가
엘레지를 좋아한 것은 한 많은 그들의 인생이 노래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해운대 엘레지」, 「용두산 엘레지」,
「황혼의 엘레지」등 등 1960년대는 애절한 곡조가 심금을 울리는
엘레지 전성기였다. 그 속에 「해운대 엘레지」란 가요는 뭍 사람
들의 아련한 추억속에 세월의 벽을 넘어 오늘도 노래방 어디에선가
불려지고 있다. 「해운대 엘레지」를 탄생시킨 작사, 작곡, 노래의
주인공 세사람과 가사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한다.
1960년대 해운대 해수욕장
첫번째 이야기- 해운대 엘레지
「해운대 엘레지」는 전체 3절의 장절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절은 사랑의 맹세와 다짐에도 연인이 떠났음을 서러워하는 내용,
2절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연인을 잊기로 하고 미련을 버리겠다는 내용,
3절은 실연당한 연인이 정든 해운대를 떠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61년 가수 손인호가 불렀으며, 백영호가 작곡하였고 한산도가 작사
하였다. 1958년 발표된 「해운대 엘레지」는 해운대 대중가요의 원조라
할 수 있다. 해운대의 엘레지는 여기서 싹텄다.
손인호가 「해운대 엘레지」를 부른 것은 순전히 장소성 때문이다.
해운대 백사장엔 그리운 님이 있고 애틋한 정이 흐른다. 손인호의
미성은 애조띤 가사와 선율에 실려 왠지 모를 그리움에 사무치게 한다
해운대 엘레지(1958) 작곡 : 백영호, 작사 : 한산도, 노래 : 손인호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니냐
세월이 가고 너도 또 가도 나만 혼자 외로이
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 못 잊어 내가 운다
백사장에서 동백섬에서 속삭이던 그 말이
오고 또 가는 바닷물 타고 들려오네 지금도
이제는 다시 두 번 또 다시 만날 길이 없다면
못난 미련을 던져 버리자 저 바다 멀리 멀리
울던 물새도 어디로 가고 조각달도 기울고
바다마저도 잠이 들었나 밤이 깊은 해운대
나도 가련다 떠나가련다 아픈 마음 안고서
정든 백사장 정든 동백섬 안녕히 잘 있거라
해운대 백사장 과 동백섬에서 헤어지지 말자는 절대사랑의 맹세가
세월에 의해 무너진 어느 훗날, 해운대백사장에 찾아와, 떠나버린
옛사랑을 추억하는 남자의 아린 심정을 잘 나타낸 노래이다. 바다,
백사장, 동백섬 등 노랫말의 소재가 해운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해운대는 1960~1970년대에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신혼
여행지였을 뿐 아니라, 젊은이들 사이에 여행해 보고 싶은 선망지
이기도 하였다. 당시 해운대를 찾은 사람들은 유일한 호텔이었던
극동호텔을 기억한다.
해운대 해수욕장 중앙쯤에 있는 해운대 엘레지 노래비
전체 3절 가사 가운데 제2절은 아예 기록되지 않았고, 제3절
'조각달도 기울고'는 '조각달도 흐르고'로, '나도 가련다'는
'나는 가련다'로, '안녕히 잘 있거라'는 '안녕히 잘 있게나'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가사 오류에 관해서는 이미 지역 전문가들과
언론이 문제를 지적한 바 있으나, 아직까지 해운대구청의 보완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0년대 이후 지방 자치단체에서
앞다투어 기념비 설립에 추진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일들이다.
1960년대 해운대 해수욕장
051탄약창은 '60년대 후반 좌동쪽으로 옮겨 간뒤 '90년대에 중부지방으로 옮겨가고
그 자리에는 해운대 신시가지가 들어서버렸고 미609부대는 '70년대에 철수해 버리고
그 자리엔 해운대 LCT가 들어 섰다, 미609병기(탄약)부대는 예전에 가버리고
051탄약창도 가고 없는데 해운대 609아가씨들은 떠나간 님들을 기다리며 끈질기게
남아있었다. 세태의 변화에 못 이겨 2020년 1월 해운대609마을도 결국은 철거되고
609아가씨들도 떠나가 버리고 그 자리에는 호텔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두번째 이야기- 작곡가 백영호
부산 출신 대표 가수 현인의 노래비가 영도와 송도에 나란히 있는
것 처럼, 부산 출신 대표 작곡가 백영호의 작품이 새겨진 노래비
두 개도 해운대에 서로 멀지 않은 거리에 세워져 있다.
남북으로 길게 펼쳐진 해운대 백사장 한 가운데쯤에 서 있는
「해운대 엘레지」노래비에서 우선 부산 작곡가 백영호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해운대구청이 제작한 이 노래비는「해운대 엘레지」
가 발표된 지 40년 만인 지난 2000년에 세워졌다. 또 다른 백영호
작품이자 가수 이미자의 대표곡이기도 한 「동백 아가씨」노래비가
있다. 기념물이 세워질만한 곳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 다소 엉뚱한
장소(해운대구 우2동 동부올림픽타운 118동 부근 대로변)에 있는
이 노래비는 「해운대 엘레지」노래비와 같이 2000년에 건립되었다.
백영호가 2003년에 타계했으니, 운 좋게도 생전에 노래비가 건립된
경우이다. 현인 노래비는 모두 2002년 현인 타계 이후에 세워졌다
백영호(1920~2003) 부산 대신동 출신으로 당시 음악인들 대부분이
그랬듯 가족들의 만류로 공식적인 음악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만주 신경음악학원을 수료, 음악공부를 한것이
전부였다. 해방 후인1947년 코로나레코드에 입사하였다. 1953년
부산광역시 서구 남부민동 소재의 미도파레코드에서 문화 부장 및
전속 작곡가로 활약하면서 백설희·방운아·정향·신해성 등 미도파
레코드 전속 가수를 통해 작품을 발표하였다.
백영호는 첫 히트곡으로 남인수가 불렀던 "추억의 소야곡"이 있으나
30대 중반에 첫 출세작을 내게된다
동백아가씨 자캣
1964년4월 당대 최고의 배우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동백아가씨>
개봉을 앞둔 김기 감독은 주제곡을 삽입하기 위해 작사가 한산도
(본명 한종명)에게 영화의 줄거리를 압축한 가사를 의뢰한다.
한산도는 몇 번의 퇴고를 거쳐 작사를 마무리하고 작곡가 백영호에게
전달한다. 가사를 넘겨받은 백영호는 몇차례 기타를 튕겨보다가
떠오르는 악상을 그대로 오선지에 옮겨 명곡 '동백아가씨'를 완성한다.
가사를 받은지 두시간 여만이었다. 실제로 영화 <동백아가씨>는 크게
흥행을 못하고 간판을 내렸다가 노래가 유명해지면서 재개봉해 매진
사례를 이어갔다.
약력 및 주요작품 발표년도
-1920년 부산 출생
-만주 신경 음악학원 수료
-1950년대 ‘추억의 소야곡’ 발표
-1960년대 ‘동백아가씨’추풍령’황포돛대’여자의 일생’발표
-1970년대 ‘비 내리는 명동, 아씨, 여로,‘어머님 생전에’발표
-1994년 서울정도 600년 자랑스러운 서울시민 상 수상
-1999년 옥관 문화훈장
-1997년 백영호 기념관 건립(유족)
-한국음악저작권 협회 이사
-한국음악 저작권협회 고문
-서울 중구문화원 이사
-2003. 5. 21 오전 11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폐렴 등 합병증
으로 별세(향년 83세)
우리나라 대중음악에 끼친 영향은 백영호의 곡을 노래한 가수들의
면면만으로도 가늠할 수 있다. 남인수·이미자·배호·남상규·현미·
김상희·하춘화·남정희·문주란·김영임·나훈아·주현미·문희옥
등 20~30년을 거스르면서 거쳐간 가수만 203명에 이른다. 특히
'동백아가씨’, ‘울어라 열풍아’, ‘황포돛대’, ‘여자의 일생’,
‘아씨’, ‘여로’, ‘임금님의 첫사랑’ 외 수백여 곡을 불렀던
가수 이미자의 음악인생에서 땔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또
<해운대 엘레지> <추억의 소야곡> <추풍령> <황포돛대> <동숙의 노래>
<잊을 수 없는 여인> <서울이여 안녕> <여자의 일생> 등 100여곡을
히트시키고 55년동안 4000여곡을 작곡했다. 또한 5000여 곡의 노랫말을
지은 원로 작사가 반야월 선생과 더불어 각각 작곡과 작사 부문에서
최다 작가 타이틀이 붙었는데 이는 깨기 힘든 기록이 될 것이다.
장남 박경권 원장의 서울의원 내에 있는 백영호 기념관
연락처:경남 진주시 상대동 297-22 ☎ 055-758-3679
서울의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다 1991년 처가가 있는 진주 상대동에서
개업한 백영호의 장남 백경권 원장.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그는 줄곧 아버지 음악과 가까이 있었다. 1997년 병원 안에 아버지
백영호가 작곡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비롯한 수많은 명곡들의
LP판 등과 백씨의 유품들로 꾸민 '백영호 기념관'을 만들었다. 틈틈이
환자들을 위한 연주공간이 되기도 하는 그 곳에서 백 원장이 직접
선친의 히트곡을 피아노로 연주한다. 환자들에게 심신의 고통을 잠시
나마 잊게 해주려는 선친의 생전 뜻이기도 하다.
2009년 출간된 백영호의 음악과 인생
1960~80년대 국민의 사랑과 애환을 담은 곡조로 위안을 주고 심금을
울렸던 작곡가 백영호의 인생과 음악이야기를 담은 <백영호 음악과
인생>이 2009년7월 나왔다. 장남 박경원이 쓴 이책에는 백영호선생이
1971년 펴낸 <백영호 101명곡집 '마음의 노래'>에 실린 곡을 갈무리
하고 55년에 이르는 작곡인생 속 남겨진 흔적들이 옮겨져 있다.
아울러 기념관 개관 10주년을 맞아 기념음반도 내놓았다.
작곡가 백영호선생 기념관 개관10주년 기념음반으로 2009년 유작을
모은 작곡집'여자의 일생(이미자)' '동숙의 노래(문주란)' '나의
쥴리엣(현인)' 등 열아홉 곡을 우선 앨범에 실었다. '동백아가씨'는
이미자의 LP 음원과 함께, 소리꾼 장사익·재즈가수 말로·크로스
오버가수 임태경의 리메이크 곡을 앞·뒤·가운데에 실었다
둘째 아들 백경국 씨는 사천에 모신 선친 비문에 적어 놓은 것처럼
대중음악 작곡가 백영호는 한국인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있을것이다.
"당신의 모습은 지금 가고 없어도 아름다운 당신의 소리 빛은 온누리
에 퍼져 영원할 것입니다."
세번째 이야기- 작사가 한산도
그 옛날 고달픈 삶의 애환으로 우리의 대중음악이 만들어지고 민중
에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1930년 최초의 직업가수인 채규엽의
등장으로 우리 가요계는 활기를 띠었다. 그 후 일제의 모진 압박
속에서도 우리 가요는 꾸준히 발전했고 1945년 해방이 되자 일본에
체류 중이던 황해도 박연 출신의 작사가 야인초((野人草 : 본명
김봉철)가 1946년 귀국해 영도구 남항동 코로나레코드를 설립했다.
작사가 한산도(韓山島)로 널리 알려진 작곡가이자 가수 한종명은
본명이 한철웅이다
본인이 작사 작곡하고 노래까지 부른 한산도(가수명은 한종명이라 했음)
1948년경 이곳에서 야인초 작사·백영호 작곡의 "고향 아닌 고향"을
가수 한산도가 한종명이라는 예명으로 녹음했다고 한다. 그러나
레코드사가 소규모였으므로 당시 야인초는 미도파레코드에서 녹음
기사로 더 많은 활약을 하였다. 1950년대에 한종명이란 예명으로
천리여정 왕검성 길손 청춘에레지 하와이안코리안 송 등을 발표했다.
이 중 "고향아닌 고향"은 전후 부산에서 크게 히트한 노래이다.
당시 인기 절정의 선배가수는 현인,박재홍 등이었고 손인호,방운아,
남백송,허민 등이 후배 내지는 비슷한 연배라고 한다.
작사가 및 작곡가 한산도 이자 가수였던 한종명은 본명이 한철웅씨
이며 1931년(호적 1932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출생했다. 어린시절
일본에서 잠깐 체류하였다가 해방후 부산시 사상구에 정착하였으며
부산중학교를 졸업했다.
작사가로써 한산도(韓山島)는 작곡가 백영호와는 손잡고 히트한 첫
작품이 1955년에 가수 남인수(南仁樹)가 불렀던 "추억의 소야곡
(追憶의 小夜曲)"이다. 이노래는 작곡가 백영호가 진주에서 요양
중이던 가수 남인수를 찾아와서 취입해 달라고 간곡히 요청하여
취입한 내력이 있으며,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과 더불어 대표곡
중의 한곡으로 남아있다.
youtu.be/ZxmsxwnNdvE
추억의 소야곡(追憶의 小夜曲) 작사: 한산도, 작곡: 백영호, 노래:남인수
다시 한번 그 얼굴이 보고 싶어라 몸부림 치며 울며 떠난 사람아
저 달이 밝혀주는 이 창가에서 이밤도 너를 찾는 이 밤도 너를
찾는 노래 부른다
바람결에 너의 소식 전해 들으며 행복을 비는 마음 애달프구나
불러도 대답 없는 흘러간 사랑 차라리 잊으리라 차라리 잊으리라
맹서 섪구나
다시 못 올 옛 사랑이 안타까워라 못 생긴 내 마음만 원망하건만.
그래도 못 잊어서 이 한밤에도 그 이름 불러보는 그 이름 불러보는
서글픈 밤아
소야곡이란 성악의 세레나데 (serenade)나 기악의 녹턴 (nocturn)
이란 용어를 한자로 옮긴 것으로서 야상곡(夜想曲)이라고도 불렀다.
"추억의 소야곡"이란 ‘저녁 (밤)에 추억에 잠겨 부르는 노래'라는
뜻이다. 가사에서 “저 달” “이 (한)밤” “서글픈 밤”이란
표현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 후 작사가로써 한산도(韓山島)는 작곡가 백영호와는 콤비를
이뤘으며, 두 사람의 대조적인 성격처럼 좋은 하모니를 이뤄내는데
성공했다. 한산도하면 백영호가 생각나고 두사람을 떠올리면
이미자(李美子)가 연결된다.이 세사람 가인(歌人)의 만남은
불후(不朽)의 명작을 알리는 출발점이었고 훗날 가요사의 큰 획을
긋는 계기가 된다.
우리 가요의 백미라 할 "동백아가씨"를 비롯 "울어라 열풍아",
"여자의 일생", "추억의 소야곡","지평선은 말이 없다","빙점",
"동숙의 노래" 등등 그들의 콤비 작품은 내는 쪽쪽 히트했으며
두사람의 손을 거친 작품은 무려 500여편에 이른다.
1960년대 가요계는 작사가 한산도의 이름으로 도배되었고,
서민적으면서도 깊이 있는 한산도의 작품은 음반가에서 별칭하기를
'황금덩어리'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영광의 뒷켠에 아롱진
한산도의 눈물과 암울한 세월을 아는 이 또한 그리 많지 않다.
25년간의 투병생활.하반신 마비로 문밖 출입을 못한 한산도의 25년
세월은 가히 귀양살이 였다. 6,25 이전 공을 차다가 왼쪽 다리를
다치고 2년간 고생했던 관절염이 재발 급기야는 두다리를 아예
쓰지 못하게 되었고 어쩌면 그 은둔의 세월이 주옥의 작품으로
보상되었는지도 모른다.
잘 나가던 그 시절 함께 작품을 한 작곡가 백영호는 레코드사에서
환대를 받았으나 한산도는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시련을
겪어야 했는데 거동 못하는 자신의 몸탓이라며 서운함을 떨쳐냈다.
작사가로는 남인수의 추억의 소야곡 손인호 해운대 에레지 이미자
동백 아가씨 등을 남겼으며 작곡가로는 진송남의 덕수궁 돌담길
바보처럼 울었다 등을 발표해 그의 타고난 음악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갈현동에서 지내다 말년에 수원으로 이사한 뒤, 1998년 7월31일
지병으로 운명을 달리했다. 슬하에 두 형제를 두어 장남은 화가
이고 둘째는 구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
네번째 이야기 - 가수 손인호
손인호의 해운대엘레지 LP자켓
1950년대부터‘라디오'와‘스크린’을 동시에 장악했던 미남(美男),
미성(美聲)의 가수 손인호는 '얼굴 없는 가수'로 통한다. 1955년
결혼한 부인도 몇 년 뒤에야 가수인줄 알았다니 당시 사회상이라고
하지만 얼굴없는 가수임을 잘 나타내주는 일회인셈이다.
그가 브라운관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지난 2001년, 75세 때
가요무대 특집방송 ‘얼굴 없는 가수 손인호 편’에서 아들 손동준
과 함께였다. 2003년, 뒤늦게 연예협회 가수위원회에 입회, 77세
되어서야 비로소 가수에 적을 둔 셈이고 이어 40여년만의 신곡
'휴전선아 말해다오‘를 발표했다
손인호는 ‘해운대 엘레지’를 비롯해 ‘나는 울었네’ ‘울어라
기타줄’‘하룻밤 풋사랑’ ’한 많은 대동강’‘비 나리는 호남선’
같은 우리의 50~60년대를 대표하는 숱한 노래들을 히트시키며 정상
에 서있는 동안에도 방송무대에 전혀 서지 않았고 심지어 일반무대
에서 조차 거의 볼 수 없었다.
당시 일반 대중들에겐 잘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의 본 직업은
영화 녹음기사였다. 가수로써는 약 150여곡의 노래들을 발표했지만
영화 녹음기사로써는 무려 2천여 편 이상의 영화 녹음작업을 한
인물이다.
대종상 시상식에서 녹음기술상을 받고 대종상 수상자들과 함께 찍은
손인호(왼쪽 4번째)
돌아오지 않는 해병’ 그리고 ‘로맨스 빠빠’ ‘빨간 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번’ 등이 모두 그가 녹음작업을 한 영화들로 그는
대종상 녹음상 등을 무려 일곱차례나 수상했을 만큼 영화녹음작업에
있어 독보적 위치에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 손인호씨가 가수로써 받은 상은 단 한차례도 없다.
1927년 평북 창성에서 출생한 본명이 손효찬(孫孝燦)인 그는 창성
보통학교 6학년 때, 수풍댐 건설로 마을 일대가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가족 모두 만주 長春으로 이주해 생활했다. 해방 후 신의주로
옮긴 손인호씨는 평양에서 열렸던 이북 도민 전체 노래자랑대회인
"관서콩쿠르대회" 에 참가, "집 없는 천사" 를 불러 1등을 차지한다.
이 때 심사위원장으로부터 "가수가 되려면 이남으로 가야 소질을
살릴 수 있다" 는 권유를 받고 남행을 결심,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2월 여섯 살 터울의 형과 단둘이 서울로 내려온다.
그는 당시 작곡가 김해송씨가 이끌던 "KPK악단" 에서 실시한 가수
모집에 응모, 참가자 3백 명 중 1등을 차지해 악단생활을 시작했고
이어 윤부길씨가 이끌던 부길부길쇼단에서 가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곧이어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는 군예대에 들어가 "군번 없는 용사"
로 전쟁터를 누볐다. 제대 후 공보처 녹음실에 입사한 그는 '대한
뉴스 녹음을 담당하며 아울러 영화 녹음기사로 활동을 시작한다.
그 무렵 많은 음악인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작곡가 박시춘씨로 이 인연으로 그는 노래 두 곡을 받아 취입하게
되는데, 그 곡이 바로 "나는 울었네" 와 "숨쉬는 거리" 이다. 휴전
이듬해인 1954년의 일이다.
이후 그는 신세기레코드를 거쳐 오아시스레코드에서 1956년, 바빠
1년 이상 미루다가「비나리는 호남선」 을 발표해 자유당 시절
대통령 선거에서 급서한 해공선생의 추모곡으로 뜨거워 작사가
손로원, 작곡가 박춘석과 함께 당국에 불려가 곤욕을 치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1959년에 발표된 반야월 시, 김부해 곡, 박재홍
노래의「유정천리」가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조병옥 박사가 또
급서하여 국민의 개사로 불려진 스토리로 이어진다.
이어 "사랑찾아 칠백리", "하룻밤 풋사랑", "이별의 성당고개"
등을 히트시켰다. 1957년 말에 도미도레코드로 이전, "짝사랑",
"물새야 왜 우느냐", "이별의 부산항", "청춘등대", "향수의 블루스",
"남행열차" 등의 히트곡을 쏟아내었고, 1958년 빅터레코드에서
"해운대 엘레지"를 발표하여 크게 히트시켰다.1960년대 중반까지도
"돌아가자 남해고향","한 많은 명사십리"등을 취입하여 히트시켰다.
손인호가 부른 "해운대 엘레지"(한산도 작사·백영호 작곡)는 해운대
와 관련된 노래 가운데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노래다.
2006년 해운대구청 초청으로 해운대를 방문하고 노래비를 둘러보는
손인호는 "해운대 엘레지" 노래 발표 이후 50년뒤 2006년에야 노래비
로 초대 받아 처음으로 해운대를 방문했다고 한다. 1950~1960년대에
톱 가수 위상이면서도 '얼굴없는 가수'라는 별칭은 녹음기사로 분망
해서 무대에 서지 않아서이고 1955년 결혼한 부인도 몇 년 뒤에야
가수인줄 알았다니 당시 사회상이 저렇다고 하지만 얼른 이해가
안되는 대목이다.
75살 된 2001년 처음으로 'KBS 가요무대'에 출연함으로써 얼굴이 있는
가수가 됐다. 1980년대 중반까지 영화녹음작업을 했으며, 현재 그는
원로가수거목회, 만나리, 뿌리회 등 가수친목회에서 활발히 활동중이다.
대한민국 영화녹음 발전사의 산증인이자 탁월한 실력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고있는 가수 손인호는 올해 87세로 최근 '손인호팬클럽'이 결성되어
그를 사랑하는 많은 팬들과 함께 모여 조촐한 만남의 자리를 가지고
있는 가운데 개인리사이틀 열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수려한 용모의 아들 손동준이 그를 이어 가요계에 얼굴을 비치고 있다.
"해운대엘레지"의 마지막증인으로 오래오래 국민과함께하길 기원해본다.
출처 : 다음 블로그 등신불님의 글
본문 내용은 위 글을 참조했으며 아래 위 첨부 사진들은 우리 카페와
인터넷 여기저기서 가져 온 사진입니다.
해운대 해수욕장 주변 2020
첫댓글 역시 "홍깨"님 대단 하십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부끄럽구로 와 이랍니꺼...ㅎ
용심님은 상대방을 기분좋게 하는 분 같습니다..
지도 존경합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