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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1:29)라는 증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믿음입니다. 값없이 부어주시는 선물입니다. 믿겠다고 작정한다고 믿어지지 않습니다. 믿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셔야 믿을 수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자리에 있다면, 아니 조금 흔들리고 있을지라도, 혹 심하게 흔들리고 있을지라도 믿음만큼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여전히 은혜를 부어주고 계시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감당하기가 정말로 쉽지 않은 환경과 상황과 조건 속에 아무렇게나 버려지듯 방치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난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가는 길을 다 알고 계신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처럼 깨끗할 것이다.”(욥23:10)라는 고백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사랑하는 당신 백성을 연단해 주십니다. 당신의 거룩한 인격과 성품을 소유한 특별한 존재로 다듬어 주십니다. 창세전에 이미 저와 여러분 안에 허락해 주셨지만, 마치 없는 것처럼 감추어져 있는 당신의 거룩한 모양과 형상이 도드라져 나오게 해주십니다.
순금처럼 흠이 없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고난도 은혜입니다. 그A. W. Tozer는 영적인 사람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① 행복해지기보다는 거룩해지기를 갈망합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사랑 안에서 온전해진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구별될 수 있는지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종교를 즐기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기 때문이다.”라는 그John Wesley의 지적에 따르면, 행복에 대한 갈망은 거룩하지 않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참된 행복 역시 은혜 안에서 거룩하게 구별되었을 때 값없이 부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을 때를 돌아보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② 범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합니다. 마치 질식 상태에 있는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곧 반사적으로 신선한 공기를 갈망하는 것과 같습니다. 고해 같은 힘겨운 인생을 사는 동안 무수히 많이 주어지는 선택의 순간 자신과 논쟁을 벌일 이유가 없습니다. 전혀 흔들리지 않습니다. 확고합니다. 힘에 지날 정도의 고난과 수치를 당하고 또 희생을 치르게 된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하나님 영광이 우선입니다. ③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물을 판단할 수 있기를 갈망합니다.
자신의 명예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지극히 무지한 사람이라고 치부置簿할 수도 있습니다. 원치 않는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범사를 오직 하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판단할 수 있게 되기를 고집합니다. 자신의 판단과 평가가 하나님의 관점과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 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합니다. ④ 의로운 삶을 갈망합니다. 삶과 죽음으로 채워져 있는 인생을 얼마나 더 살 수 있는지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어차피 한 번은 끝나게 되어 있는 이 세상에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고귀한 신앙적 가치를 희생시키지 않습니다. 타협의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런 불신앙은 조금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잘못 사느니 차라리 옳게 죽을 수 있기를 사모합니다. 의로운 삶에 집중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은 삶의 길이를 결정해 주시도록 온전히 맡깁니다. 더할 나위 없는 평안을 누립니다. ⑤ 희생적인 삶을 갈망합니다. 형제를 자신보다도 낫게 여깁니다.
형제의 향상 곧 발전을 기뻐합니다. 형제가 주목 받기를 바랍니다. 형제에게 영광이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자신을 기꺼이 희생합니다.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더할 나위 없이 큰 기쁨으로 여깁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갑니다. ⑥ 범사를 제한된 시간의 관점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영원의 관점에서 판단할 수 있기를 갈망합니다. 누구나 알아주는 유명한 사람보다는 유용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섬김 받기보다는 섬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몸은 비록 시간의 제한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영혼만큼은 영원히 이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합니다. ⑦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질 수 있기를 갈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뗄 수 없는 하나로 연합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적인 지배를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합니다. 굳이 당하지 않아도 될 환난과 시험과 조롱과 멸시 곧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고난이 따르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예상하면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기꺼이,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선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서 가신 고난의 길을 따릅니다. 한편, “나는 이제...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라는 증거에 따르면,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게는 십자가를 지는 고난이 필연적으로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지체인 저와 여러분에게도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철학자인 그Nicolai Hartmann는 자신의 책 “윤리학”을 통해서 “고난도 가치다...사실 불행을 견뎌낼 능력이 없는 자에게 고난은 가치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견뎌낼 만큼 충분히 강한 자는 고난을 통해 스스로 강화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충분히 강한 자는 고난을 통해서 더 강화된다고 말했습니다. 고난은 저주라기보다는 오히려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어진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스스로 선택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기꺼이 동참하고 있습니까? 영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천 명이 넘는 무리를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부르게 먹이셨습니다. 이후, 서둘러서 제자들을 먼저 해산시키셨습니다. 무리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만드셨습니다.
무리들의 잘못된 기대를 바로 잡아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돕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의 정치적 야망 성취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제자들의 한껏 들떠 있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자신을 정치적인 왕으로 옹위擁衛하려는 무리의 의도와 분위기를 잠재우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한적한 곳에서 홀로 기도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리로부터 분리된 제자들에게 당장 갈릴리 바다 북서쪽으로 건너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돌아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던 대부분의 무리들은 재촉해서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당신은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셨습니다.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능케 하는 내적 본질이었습니다.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는 행위가 더 중요하지 않습니다. 행위를 돕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가 행위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행위는 기도의 결과입니다. 곧 기도를 입증하는 것이 행위입니다. 사역 곧 행위보다 기도가 항상 먼저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합니다. 날이 저물었습니다. 제자들을 태우고 떠난 배는 육지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었습니다. 문제는, 갈릴리 바다에서 부는 바람이었습니다. 돌풍이었습니다.
폭풍우를 동반했습니다. 급격한 기후 변화까지 일으켰습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들은 갑자기 불어온 돌풍 때문에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습니다. 바람은 “거슬러εναντιος” 불었습니다. 이는 “반대하는, 대립하는, 대적하는” 등의 뜻입니다. 가려던 방향과는 정반대로 불어오는 역풍을 가리킵니다. 순풍이 불어와도 힘든 판이었습니다. 역풍이 가야할 길을 가로 막았습니다. 불안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고통스러웠습니다. 특히 “시달리다βασανίζω”는 “고문하다, 궁지로 몰아붙이다” 등의 뜻입니다. 제자들은 거슬러 불어오는 풍랑에 고문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벼랑 끝에 몰려있었습니다. 한껏 들뜨게 만들었던 오병이어 기적을 완전히 잊어버릴 정도로 힘겨웠습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는 힘을 다 동원해서 힘껏 노를 저어보았지만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악화되었습니다. 더 이상 타고 있던 배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는,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스스로의 수고와 노력으로는 결단코 해결할 수 없는 고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시간, 예수 그리스도 역시 협곡峽谷으로부터 불어오는 거센 바람을 몸으로 맞으며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셨습니다.
“맞바람을 때문에 노를 젓느라 고생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셨다.”(막6:48a)라는 평행본문에 따르면, 제자들이 당하고 있었던 고난 또한 정확하게 목격하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시 달려가지 않으셨습니다. 주어진 고난을 맨몸으로 당해내도록 그대로 버려두셨습니다. 의도적으로 버려두셨습니다. 그들 스스로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버려두셨습니다. 그들의 절망이 하나님의 기회가 되고, 그들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 될 때까지 고난의 한 복판에 그대로 버려두셨습니다. 고난은 밤 사경 곧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까지 이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부터 정해놓으셨던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드디어, 그때가 도래하였습니다. 무던히도 몸부림치던 제자들이 애씀을 내려놓아야할 때입니다. 이제 더 이상의 애씀이 소용없는 때입니다. 애쓸 기력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때입니다. 내놓을 힘이 완전히 다 고갈되어버린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는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시는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던 갈릴리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셨습니다.
무서울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고 있었던 바람, 거칠게 휘몰아치고 있었던 물결, 눈에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던 지구의 중력 등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제약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우셨습니다. 만유의 주재이신 당신의 초자연적인 위상位相을 여지없이 보여주셨습니다. 순간, 이성적으로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기이奇異한 현상 앞에서 제자들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버렸습니다.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졌습니다. 당연히 상황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유령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렇게 외치는 것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14:27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βασανίζω”는 “담대 하라, 용기를 내라” 등의 뜻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μη φοβείστε”는 “(조금도 망설이지 말고) 지금 즉시 두렵고 떨리는 상태로부터 나오라, 지금 당장 무서워하는 상태를 중단하라.” 등의 뜻입니다. 현재 명령형입니다. 두 가지 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자칫 너무나 공허하게 들릴 수 있는 명령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맞닥뜨리고 있었던 위기 상황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명령처럼 들릴 수도 있었습니다.
마음에 안심하겠다고 작정한다고 안심할 수 있는, 안심이 되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작정한다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두려움이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사라지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나니έγώ είμι”라는 주님의 선포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곧 나다I am who I am”(출3:14a)라는 증거대로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입니다. “내가 너희들이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과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는 여호와다. 그러니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고 안심하라.”라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어두운 상황에서도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근거입니다. 근심과 걱정을 버리고 안심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제자들은 몹시 시달리던 곳, 바람이 거슬려 불어오던 곳,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한 발자국도 빠져나올 수 없는 곳, 두려움과 고통으로 얼룩져 있던 곳에서 “내가 바로 여호와다!”라고 외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고난이 은혜라는 역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야곱에게는 아버지 집을 떠나서 방황하고 있던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역설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은 이런 하나님의 역설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역설들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을 당신께로 이끌어주고 계십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질병과 굶주림과 귀신들림과 영적 갈급함과 인생의 온갖 문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피라미 한 마리 잡지 못한 채 근심하고 있던 자리에서 물고기들이 그물로 들어가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군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역설을 경험했습니다.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파선의 위기를 겪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있어서 “나는 나다.”라는 주님의 말씀은 더할 나위 없이 큰 힘과 위로와 격려가 되었습니다. 신앙과 삶의 위협을 받고 있었던 초대 교회 성도들은 물론 오늘의 저와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큰 힘과 위로와 격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순간, 이미 말씀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했던 베드로가 나섰습니다.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한다면 자신에게 갈릴리 바다 위를 걸으라고 명령해달라고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를 향해서 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걸어서 당신께 도달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당신을 믿고 바다 위를 걷는 베드로에 대한 보호와 안전장치를 사전에 마련해 두셨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자신의 전인격을 복종시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모험冒險입니다. 아브라함은 무려 칠십 오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어디로 갈지 모르면서도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믿음으로 넘쳐흐르고 있던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습니다.
베드로 역시 믿음으로 알지 못하는 세계를 걸었습니다. 풍랑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던 바다 위를 걸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일상 속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바다를 걷고 있던 베드로가 “바람을 보았다.”(마14:30a)라고 증거 합니다. 관심의 대상이 달라졌다고 증거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던 바람에게로 향했습니다. 뼛속까지 바다사람이었던 베드로의 입장에서 볼 때,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바람 앞에 선 자신은 무용지물에 불과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동시에 믿음으로 붙잡고 있던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믿음이 완전히 고갈枯渴되었다는 의미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없이 많이 보여주셨던 탁월한 능력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거칠게 휘몰아치는 폭풍이라는 위험 앞에서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곧 앞만 바라봐야함에도 불구하고 바람 곧 밑을 바라보았습니다. 자신을 삼킬 듯이 달려드는 풍랑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에 완전히 매몰埋沒되었습니다.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상황과 환경과 조건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세계에는 중간 지대가 없습니다. 물 위 곧 완전한 믿음이 아니면, 물 아래 곧 완전한 의심 둘 중 하나밖에 없습니다. 두렵고 떨리며 도무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은혜 안에서 선물로 받은 믿음으로 반응하게 되면 “나다 곧 온갖 상황을 통해서 일하는 여호와다.”라고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놀라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들로 가득 찬 그야말로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도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라고 외쳤습니다. “고해와 같은 힘겨운 인생을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온갖 종류의 사건 사고들 앞에서 염려하지 마라. 모든 일을 가지고 기도하라. 하나님께 집중하라. 간구하라. 하나님을 구하라. 감사하라. 가장 선하고 아름답게 응답해 주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라고 외쳤습니다.
“고해와 같이 힘겨운 인생을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모든 일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하면, 하나님 한 분만 구하면, 가장 이상적인 선을 이루어주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이 세상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완벽하고도 절대적인 평안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파수꾼처럼 지켜 줄 것이다.”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라면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누구나 만나게 되는 고난 앞에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독려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합니다.
그Paul Brand는 의료선교사입니다. 한센 병의 국제적인 권위자입니다. 출장을 위해서 비행기 편으로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들어갔습니다. 여러 지역에서 일을 보고, 몇 시간의 기차여행 끝에 런던에 도착했습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위해서 신발과 양말 한 짝을 벗었습니다. 발뒤꿈치에 어떤 감각도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지나칠 수 있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나병환자를 수술한 경험이 있는 전문가인 그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심각한 의심이 떠올랐습니다. 기계적으로 일어났습니다. 핀을 찾아서 발의 복숭아 뼈 밑 부분을 찔렀습니다.
감각이 없었습니다. 핀을 더 깊이 찔렀습니다. 피가 솟았지만 여전히 감각이 없었습니다. 나병에 감염되었다고 확신했습니다.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나병환자로 살아가야 할 자신의 두려운 인생을 생각했습니다. 버림받은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가까이 지내던 의료진들로부터 백안시白眼視되는 입장도 생각했습니다. 가족들로부터 떨어져 살아야한다는 생각에 이르렀을 때는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고통의 밤이 지났습니다. 동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는 이런 아침과 같은 희망이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핀을 들었습니다.
복숭아 뼈 밑 부분을 푹 눌러 쑤셨습니다. 순간, 기절할 것처럼 아팠습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쳤습니다. 그 아픔, 그 고통은 그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이었습니다. 그때서야, 장시간의 기차 여행을 하는 동안 신경의 한 부분이 눌려서 발이 마비 상태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후, 그는 실수로 손가락을 칼에 베였을 때도, 잘못 디딘 발목이 너무나 아파서 펄쩍펄쩍 뛰면서도, 심지어 버섯을 잘못 먹어서 온 몸이 뒤틀리고 토하는 심각한 고통을 당할 때도 “‘하나님! (허락해 주신) 저의 고통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Danyer는 “하나님은 기쁨 중에서는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일 중에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고통 중에서는 우리에게 소리치신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음성은 고난 중에 뚜렷해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고통 중에 무신론자는 ‘보라, 하나님이 없다.’라고 말한다. 비관론자는 ‘보라, 이제 희망이 없다.’라고 말한다. 편집증환자는 ‘보라, 이제까지 내게 좋은 일은 하나도 없었다.’라고 말한다. 성도는 하나님이 왜 이런 상황을 허락하셨는지 잠시 생각하다 ‘하나님은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라고 고백한다. 고난 중에도 감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12:2-3)라고 외쳤습니다. 환난과 시험의 때,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의 한복판으로 뛰어 들어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고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 자녀로 거듭난 저와 여러분은 가시밭에 핀 백합화입니다.
동풍이 불어오면 서쪽편의 가시에 찔립니다. 서풍이 불어오면 동쪽편의 가시에 찔립니다. 그렇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흘러나옵니다. 주변을 물들입니다. 고난은 은혜입니다. 가치입니다. 꼭 필요합니다. 고난의 때에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기보다는 허물과 죄로 죽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 고난의 한복판으로 뛰어 들어가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역설들로 가득 찬 복된 삶,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복된 삶, 지극히 어려운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