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ebook.cbck.or.kr/gallery/view.asp?seq=214561
♡ 맨위의 파란색 유튜브 글자를 클릭하시면 동영상으로 신부님 강의 함께 보실수 있습니다!!
성경과 생태신학 5강을 시작하면서 『찬미받으소서』 175쪽의 '우리의 지구를 위한 기도'를 바치며 시작했습니다.
4월 16일인 오늘, 몇년 전의 세월호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어른들의 탐욕때문에 아이들이 희생되는 그런 세상은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은 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곳곳에서 일어나는 큰 변화들을 보게되고 그렇게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애쓰시는분들을 만나면서 새삼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용기를 얻게되고,
이 세상에는 정말 좋은분들이 애쓰며 살고 있다는 그런 생각이, 사제 생활을 하면서 자주 체험하게 되는것 같습니다.
얼마전의 서울 시장과 부산 시장의 선거가 있었는데 조금은 아쉬은 마음으로 본것 같습니다. 시장에 출마하시는분들의 공약의 내용에서 지금 세상이 맞고있는 생태적 위기를 "나는 하나의 도시의 리더로서 어떻게 이겨나가겠습니다."라는 공약들이 원하는 수준에서 발견되지 못한점이 아쉬웠던 점이었습니다. 그것은 출마하시는분들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 사회의 생태의식수준에 대한 성찰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이 사회가 생태적 문제에 있어서 깨어나, 의식수준이 높은 사회였다면 시장으로 출마하시는분들 또한 유권자들 앞에서 당연하듯 생태적 공약을 했을것입니다. 그러한 공약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높은수준의 생태의식을 갖고있지 않았던 부분이 선거에서 하나의 단면으로 우리들 모두에게 다가오게 된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과 이와 같은 사회안에서 생태의식을 한단계 더 높이기 위해서는 우리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할 일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생각도 함께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소비주의 사회중의 하나인데, 소비주의 사회에서 제일 큰 권한을 갖고 있는 사람은 소비자들입니다. 그래서 서구사회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consumer activism(소비자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가장 주류가 된것이 생태의식을 바탕으로 하고있는 consumer activism입니다. 이러한 생태의식에 기반한 소비자운동은 특정기업이 나쁘다고 불매운동을 하자는 의미가 아닌 같은 상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이 있을때, 생태계 보존을 위해 생산의 과정안에서, 또는 사회적 기여면에서 애쓰고 있는가를 평가하며, 소비하고자 하는 기업의 제품을 정하는 것을 소비자운동이라고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통해서 기업들은 소비자의 패턴을 알아 "소비자들이 그렇게 원한다면 우리도 그에 맞춰서 상품들을 생산해야겠네.." 이런식의 생각으로 선순환에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는 요즘의 미국에서는 "정의로운 소비운동"이라는 모토아래 생태의식을 기반으로한 소비자운동이 많이 활성화되었다는 보도를 보게됩니다. 우리도 나중에 강의 중간에 한번쯤 말씀드릴 기회가 있겠지만 이태리에서 시작된 'slow city movement' 라던지 멀리서 나는 생산물이 아니라 가까운 거리에서 나오는 식재료들을 이용하자는 로컬푸드운동이라던지 여러가지로 좋은 지향을 갖고 있는 운동들이 시작되었고 여러곳에서 좋은일들을 하고 계신분들이 있습니다.
특히나 서울대교구안에서는 우리농을 통해서 생태계보전을 위한 여러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고, 유튜브를 통해 보고 있는 분들 또한 본당에서 하고 있는 '하늘 땅 물 벗'이라는 생태운동의 소그룹들이 자리잡아가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라는 당부의 말씀도 하셨습니다.
지난시간에 우리는 '찬미 받으소서'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새로운 인간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창세기 1장과 2장을 돌아보았습니다. 간략히 요약하자면,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서 창조된 특별하고도 존엄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특별함과 존엄함은 인간이 다른 생명 또는 다른 존재들에 비해서 우월하다라고 이야기하기보다는 인간이 그런 다른 존재(생명)들을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잘 돌보아야하는, 잘 케어해야하는 존재라는 인간학이, 인간관이 그 바탕에 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난 주에는 창세기 1장과 2장에 있는 텍스트를 인용했는데요, 『찬미 받으소서』 65항에 55쪽에보면 예레 1,5절이 인용이 됩니다.
예레 1,5
º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º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º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찬미받으소서 55쪽에서는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너를 알았다." 라는 첫번째 문장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될 한 단어가 있다면 "알았다"라는 동사입니다. 야다(ידע)라고 히브리어로 말하는데 하느님이 나를 알고 있다, 여러분들 중에서 성경을 열심히 읽으신분들이라면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그날이 오면 내가 너희를 모른다고 할지도 몰라, 하시며.." 가르침을 말하시는데 '안다' 와 '모른다'로 나는 예수님, 하느님을 알고 있는지, 그리고 예레 1,5에서 하느님께서 나를 혹은 우리를 알고 계시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알고 계시다..라는 어찌보면 좀 두려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사실 좀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한토막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하신 하느님께서 나를 알고 있다.라는...
이 문장을 통해서 인간이 또는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우리들이 스스로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목현장안에서 많은분들을 만나면서, 신자분들이나 청년들이 때때로 자신을 미워하더라구요..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예쁘지도 않고 잘생기지도 않고, 가진것이 많지도 않고, 나는 스펙도 모자르고, 좋은 학교 나오지도 않았고,...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이 또한 생태신학에서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우리가 생태계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깨달아야하는 출발점이 "내가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인가를 깨닫고 그 깨달음의 바탕위에서 우리들이 내가 받은 사랑을 타자와 생태계와 나눌수 있는 출발점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빈곤하면( 우리가 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신앙의 체험,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충분히 사랑받았다는 그런 체험,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것에 대한 의식이 빈곤하면) 타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 되어버립니다.
하느님께서 "나는 너를 알고 있어" 라는 예레(1,5)말씀과 찬미받으소서가 인용하는 뜻을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안에서 인간관에 관한 이야기가 정리되어진다면 이제부터는 세계관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 창세기에 관한 강의를 하시면서 창조의 구도를 표를 보여주신적이 있습니다.
창조의 구도
1일 4일
빛 해, 달, 별
낮과 밤 계절과 축제
2일 5일
궁창 하늘에 사는 것들
하늘 위의 물과 아래의 물 바다에 사는 것들
3일 6일
하늘 아래의 물이 모임 동물
땅 인간
- 7일동안 세상을 창조하시는데 마지막 7일은 안식일(שבת샤밭)이라는 휴식의 시간을 갖으시고 6일의 구도는 2개의 칼럼으로 세상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텍스트를 따라가면서 다시 되짚어 보신다 하시며,
창세 1,1
º 한처음에
º 하느님께서
º 하늘과 땅을
º 창조하셨다.
- 여기서 '한처음에' 라는 말은 창세기가 갖고 있는 대단한 표현입니다. 오늘날에도 자연과학자들이 세상의 창조를 이야기하면서 시작에 관한 가설은 빅뱅이론입니다. '모든것은 한점에 있다가 폭발과 함께 이세상이 시작되었다..'라고 빅뱅이론을 이야기하는 물리학자들에게 빅뱅이론이 있기전에는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그것이 있기전에는 이야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빅뱅을 통해서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 조차도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라고 합니다.
오늘날 현대 물리학에서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기초개념의 두가지가 바로 시간과 공간입니다. 물리학자들이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지만 모든 학자들의 의견이 단일하지 않은 '시간을 무어라고 설명할 것인지? 그리고 공간을 무어라 할건이지?' 에대해서 이러한 설명이 어렵습니다.
창세기 1,1절부터 2,4절의 내용자체가 시간과 창조, 하느님께서 시간을 창조하시고, 하느님께서 공간을 창조하시고, 그 시간과 공간안에 하느님께서 생명을 두셨다.라는 고백을 만나게 됩니다.
창세기 1,1에서 '한처음에' 라는 말이 갖고있는 히브리어의 어감은 '이제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라는 어감입니다. 고대인들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참으로 놀랍다! 라는 생각과 함께 이 첫단어를 읽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다른 신이 아니라, 고대 근동안에서 '엘'이라는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위 문장에서는 엘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이집트로부터 해방시켜주신 그 하느님께서 창조의 주체가 되셨다. 라는 말입니다.
창세기 1장의 주된 테마중에 하나는 "우리 하느님외에 다른 신은 없다."라는 고백을 기저에 깔고 있습니다. 본래는 창세기가 쓰여지기이전의 고대신학에서는 세상을 창조한 신이 있고, 그리고 우리를 이집트로 해방시켜준 야훼하느님이 계신다.라는 다신적인 신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유일신관으로 자리잡으면서 창세기가 쓰여지게 됩니다.
창세기 1장의 가장 중심적인 내용은 다른 신이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한 주체이다!' 이고 그리고 다음에 나오는 표현인 하늘과 땅을...
여기서 하늘과 땅은 하늘과 땅만을 창조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늘과 땅으로 대표되는 온 세상' 을 창조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1,1절은 전체 창조이야기 1장부터 11장 또는 창세기라는 책의 전체의 제목처럼 쓰여졌습니다.
그리고 '창조하셨다' 라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바라'라는 동사를 사용하는데, 이 동사는 하느님만을 주어로 갖고 인간이 무언가를 창조했다(바라ברא)는 표현이 구약성경에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표현은 신적능력만을 말하는 동사일꺼라 전문가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2절부터는,
창세 1,2
º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º 어둠이 심연을 덮고
º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 이 문장을 신부님은 다른식으로 의역해 이해하셨습니다.
-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다.
그리고 어둠은 심연을 덮고 있었다.
그런데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기 시작했다 -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가 본문에서는 'tohu wa bohu'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tohu wa bohu를 거칠게 번역하자면 '뒤죽박죽' '엉망진창'이었는데, 무질서하고 뒤죽박죽 섞여 있었는데,
주석가들은 'tohu'라는 형용사를 '꼴을 갖추지 않았다'는 어원으로 생각했고 'bohu'라는 형용사는 무언가가 비워있고 공허하다는 의미로 번역을 했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는 근거있고 쉽게 이해되는 좋은 표현입니다. 꼴을 갖추지 못했다.라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 될지 알지 못했다. 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꼴은 설계도이고, 가장 잘 만들어진 것은 설계도에 가장 근접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꼴을 갖추지 못했다.라는 표현은 설계도면이 아직 없었다. 라는 의미입니다. 실존적인 차원으로 설명하자면 '어떤 목적이 없는 인생' 이라고 할까요?
'나는 뭐하며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더이상 인생의 의미에 관해 묻지 않는 삶이라고 해야할까요? 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비어 있었다"는 그것은 공허했다. 라는 뜻으로, 조금은 생각해봐야 할 주제입니다.
신학중에 영성신학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테마중에 하나가 '비어 있음'에 관한 테마입니다. 그리스어로(κενοσις ), 케노시스( kenosis)라고 합니다. 다시말해 비어있었다는 것은 좋은 말입니까? 나쁜 말입니까?에 대해 우리들의 대답은 둘로 갈려나갑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중에서 "여러분은 자신을 비어야 합니다' 를 들어보면 좋은 말씀이고, 반대로 창세기 1,2절에서의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있었다'라는 표현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보여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비어있었는데, 그것이 공허함이라면, 무의미함이라면, 긍정적이지 않는것이고, 반대로 비어있음이 무엇으로 차게될 지에 대해 기대로 가득한의 예로, 김수환 추기경님의 '자신을 비어 내십시오'라는 말은 다시 말해 하느님으로,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 비어진 자리가 채워지도록 자신안에 있는 여러가지 바램들, 욕망들을 비워내십시오...라는 뜻이라면 굉장히 긍정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kenosis라는 개념에 이중성,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아! 내 삶은 너무나 비어있어...' 라는 것과 '아! 나는 하느님을 위해서 나자신을 비어내고 있어!' 라는 비어내는 것에대한 같은 표현에 양면성이있는 의미에 대해 알아들어야겠습니다.
창세기 1,2절의 비어있음은 아직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하나의 암시적인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어둠이 심연을 덮고' 있었다는 나중에 첫번째 날 창조와 함께 '빛'이라는 특별한 첫째날의 창조가 시작됩니디만, 여기서는 빛이 없는 그리고 심연(abyss)이라것은 '깊이를 알수 없는 검푸른 물', 어둠과 심연이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태초에 상황이었다. 라고 창세기 1,2절은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땅은 무엇이 될지 알지 못했고, 공허했고, 어두웠고, 물로 가득차있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영이 그 물위를 감돌기 시작했다...무언가 동력을 갖고있는 움직임을 통해서 세상의 어떤 변화가 시작되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것들이 뒤죽박죽, 깜깜했고, 모든것들이 깊은 물로 물안에 잠겨있는 죽음의 세상(이 문장을 읽는 히브리인들이라면 즉시 떠올리게 되는)인데 그곳에서 하느님의 영이 그 물위를 감돌고 있었다. 라는 상징적인 태초의 상황에 대한 묘사를 창세 1,2절에서 만나게 됩니다.
창세 1,3
º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º "빛이 생겨라." 하시자
º 빛이 생겼다.
-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창세기 저자에 있어서 태초 이전과 하느님 창조 이후에 창조사건을 통해서 가장 큰 변화는 '빛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빛이 있으면 좋은것은? 보는 것이 가능해 지고, 여기에서 빛이 생겨라의 느낌은 스위치를 켜자, LED등 수백개가 켜지는 느낌이 아니라 '빛이 생겨라'는 이 문자의 느낌은 폭풍우가 치는 바다를 배 한척이 항해하다가 저멀리서 깜빡이는 등대 불빛을 발견한, 어두운 밤길을 누군가가 힘겹게 걷다가 저 멀리서 민가의 반짝이는 불빛을 본 느낌입니다.
부활성야 미사를 지내면서 모든 공동체가 어둠에 잠긴 성전안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사제가 촛불하나를 들고서 "그리스도 우리의 빛" 을 노래하는 그 느낌입니다.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그리고 우리는 볼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의 히브리적개념에서의 '본다'는 것은 단지 시각적인 인식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히브리적 사고방식에서 본다,라는 것은 듣는다, 느낀다, 등의 내용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빛이 생겨라! 하시자. 우리는 볼수 있게 되었고, 들을 수 있게 되었고, 느낄수 있게 되었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알수 있게 되었습니다.
궁극적으로 빛이 생겨라!라는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보고 듣고 느끼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알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는 '모태에서 태어나기 전부터 알고 있었어.' 라고 말하는 것에 상호적인 그리하여 하느님을 알수 있게되는 그것이 창세기 1,3절에서 표현을 통해 명시하진 않았지만 창세기의 내용을 구약전체와 연결시켰을 때, 그리하여 이스라엘을 통해서 온 세상민족들이 하느님을 알게 되는것!
탈출기에서도 하느님께서 이집트에 열가지 재앙을 내리셨을 때 하신말씀중에서 "내가 이런 재앙을 내리는데 목적이 무엇인줄 알아? 이집트가 나를 알도록, 알게 되도록...이다"
빛이 생겨라!를 통해 세상이 하느님을 알게되는, 『찬미받으소서』 신학으로 갖고오자면,
아! 빛을 통해서 하느님을 창조하신 온 세상을 알게 되고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고, 하느님과 온세상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함축척으로 담고 있습니다.
창세기 1,4-5
4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5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
- 여기서 '좋았다'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טוב(토브)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 형용사는 탈출기에서 하느님의 레위인 부부과 아들들을 하나 낳는데, 파라오는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아들을 죽이지 않았고, 그 아들이 잘생겼다는 말이 히브리말 어원에서 등장하는데,
여기서 '잘생겼다'라는 표현은 외모지상주의가 아니라, 나중에 후대의 신학자들이 '토브'안에는 세가지 면이 있다고 합니다. 진 선 미를 지칭하는 의미입이다.
하느님께서 빛을 창조하셨는데 좋았다.(진, 선, 미를 갖추고)
창세기에서 계속 등장하는, 이부분이 그리스도인이 갖고 았는 세계관의 긍정성입니다.
인간은 선한존재이고,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참으로 좋은 존재야, 세상은 어떤 곳이야? 세상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참으로 좋은 곳이야..우리들이 갖고 있는 인간관, 세계관은 굉장히 긍정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굉장히 낙관론자일수 밖에없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는 아름다운 존재고 우리앞에 있는 세상도 정말 좋은 세상이고, 정말로 모든 것들이 다 이상적이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고, 그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되었어. 라는 낙천주의적인게 우리들의 신학의 기저에 있는 것을 우리는 이 한마디로 알게됩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조금 그렇지는 않는듯 합니다.
신부님께서 유튜브를 보다가 어떤 프로그램에 꽂힌적이 있어서 일주일 동안 30~40개되는 프로그램을 모두 봤는데요, 그 프로그램의 제목이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였는데 거기에 나오는 개에 관한 전문가가 주인들과 만나서 상담하면서 개와 주인들의 관계를 바로잡아 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신부님은 보면서 강아지가 그렇다면 사람도 그런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맺는게 힘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내 지혜로움이 부족해서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나쁜 사람도 없고,....심리학자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빙산에 나오는 그 부분만 보면 살아가지만, 빙산의 커다란 아랫부분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안에서 빙산의 아랫부분에서 좋은 것들이 위로 올라오기도 하고 때로는 나쁜것들이 위로 올라오기도한다. 따라서 내가 내 주위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나의 좋은 부분이 올라오고, 상대방의 좋은 부분들이 올라오고, 또 우리의 어두운 부분들은 절제되고 조절될 수 있는 그런것들 안에서 인간이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이상적인 삶의 형태다. 이를 종교적인 영역으로 끌어 온다면 그와같은 '완덕'에 이르는 하나의 길이다! 말할 수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좋았는데 왜 좋지 않게되었는가? 우리의 아직 지혜로움이 부족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지혜로움을 다음 문장에서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라는 말이 나왔는데...
가르시어는 각자의 자리를 지정받는 것을 의미한다. 옛날에 신부님께서 파리에서 지낸적이 있었는데,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깜짝놀란게 굉장히 큰 건물에 비하여 화장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밥을 먹는 것, 잠을 자는 곳, 책을 꽂는곳, 등 하느님의 창조행위는 적어도 창세기 1장에서 이야기 하는 창조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마술사처럼 무엇을 만들었던 이야기가 아니라 뒤죽박죽이었던 혼돈스러운 세상에 하느님께서 그 각자의 것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잡도록 질서잡혀 있는, 이와 같은 모습들.
따라서 혼돈에서 질서로 나아가는 이런 모습으로 창세기 1장에 창조이야기는 하느님의 창조에 관해 표현합니다.
그리고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는 이름을 주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김춘수 시인의 꽃을 알고 계십니다. 관계가 맺어진다는 것은 나와 그 사이에 서로 이름을 알게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관계에서는 특별한 이름들이 생깁니다. 애칭, 별명들이 생기면서 신부님과 평범한 관계이신 분들은 "최분도 신부"라고 부르지만, 청년성서나 사목적 현장에서 특별한 관계인 이들과는 서로의 애칭을 부르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는 창세기 2,4절부터 시작되는 두번째 창조이야기에서는 하느님께서 남자를 창조하시고 나서, 그 아담과 함께 하나하나 이름붙이게 하시는 이런것들은 그것과 내가 관계맺도록 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지 요즘에 생태문제에 관심이 많은분들이 하고 있는 것중에 하나가 아이들 숲교육을 말합니다. 숲에 다니면서 나무나 꽃이나 풀들의 이름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면서 또한 그런것들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생태계(자연)와 우리가 이렇게 멀어진 한 이유는 우리가 도시 생활을 하면서 자연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그것이 생태문제에 본질은 아닐까? 라고 질문하는 생태주의자들은 그런식의 해법을 찾아가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숲으로 데려가서 나무와 풀도 보고 이름도 가르쳐주고 관계맺도록 하는..)
집에서 화초를 키우시는 분들이 화초에도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있으십니다. 화초와 인간이 이야기하며 이름을 부르며 키웠을 때 화초가 더 건강하더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검증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
하루에 날이 지나가는 첫번째창조의 첫날, 그리고 둘째날
창세 1,6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
- 궁창이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창공이라고 번역하는 일종의 바가지같은, 갈라놓는다는 자리잡게한다.의 의미입니다. 이 이야기가 창세기6장의 노아의 이야기에서 확인됩니다. 노아의 홍수사건을 이야기하면서 단지 비가 많이오는게 아니라, 궁창과 땅밑을 통해서 온세상의 물이 밀려나고 아래위로 공간이 생기는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창세 1,9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곳으로 모여,
뭍이 드러나라.
- '뭍이 드러나라'도 역시 갈라놓는 하느님의 창조 행위를 엿볼수 있습니다. 따라서 첫째날, 둘째날, 셋째날에 전체 창조를 6일로 봤을때 처음 3일동안의 창조의 최종적인 목적은 뭍이드러나는 것입니다(땅이 생겨난 것에 있고 그것이 최종적인 목적이라는 것이 셋째날 창조의 후반부인 1,11절에서 확인됩니다)
창세 1,11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땅 위에 돋게 하여라.
- 히브리인들의 식물도감은 비교적 간단한 것 같습니다. 풀과 나무( 씨를 맺는 풀과 씨있는 과일나무, 개체를 번식할 수 있는 식물 다시말해 생명이 있는 것들은 분화하게 되었있는데, 그래서 씨가 나옵니다)
- 이 부분에서 특별한 점은 하느님이 직접 명령하지 않고 땅에게 명령하셨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특별한 점으로 첫번째 창조이야기의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하느님외에 다른 신은 없어! 우리 하느님만이 유일한 하느님이고 그 하느님만이 세상을 창조하셨어.라는 것이 창세기의 중심 메세지입니다. 여기서 땅은 마치 하급신처럼 하느님의 명령을 받고 행위를 합니다. 굉장히 땅이란 존재가 특별하게 나오게 자리잡게 되는데 이것은 구약전체에 있어서도 알아 들을 수 있는, 구신약 전체를 관통하는 대목이라고 우리가 생각해야 겠습니다.
구약(舊約)은 옛계약이란 말이고 옛계약이란?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이집트 탈출사건후 시나이 산에서 맺은 계약입니다.
그 계약의 내용은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을 주시고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율법을 지킬 것이다. 라는 것이 계약의 내용입니다. 구약 성경 전체가 땅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전체가 그렇게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어떤 국가를 이루며 살아가다가 아시리아와 바빌론에 의해서 멸망을 하게되고, 유배를 가게되면서 구약 성경전체에 대한 하나의 질문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어쩌다가 야훼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을 잃어버리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과 함께 구약성경이라는 텍스트가 생성되기도 하고, 편집되기도 한 구약성경이라는 텍스트가 쓰여진 시대적 역사적 배경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오늘날 성서신학자의 대답은 " 아! 그들이 땅을 잃고 유배를 가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을 우리가 왜 잃어버리게 되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자신들의 역사를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는 이런 텍스트를 만들어낸 것이 인간적이고 역사적인 배경이 될 것이라는 것이 오늘날 성서신학자들의 일반화된 대답일것입니다.
땅은 특별하다, 창세기의 문학적 상징 체계를 보게되면 "땅과 물의 갈등"입니다. 물로 가득한 그 죽음의 세상에 하느님께서 땅이 드러나게 하셨고, 그 땅을 통해서 이 세상에 생명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땅과 물의 갈등, 생명과 죽음의 갈등..
그러면서 문학적인 흐름안에서는 과연 땅이 물을 압도할 것인가? 생명이 죽음을 압도할것인가?
반대로 다시 물로 이 세상이 회개할 것인가? 라는 궁적적인 질문과 함께,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된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즉 생명이 죽음을 이겼다.라는 부활의 메세지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최종적인 해답을 갖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을 읽는 독자들 궁금해진 독자들은 땅이 물을 넘어설 수있을까? 죽음을 이기고 세상을 넘어서 이렇게 풍요롭게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창조 1,14- 15
하늘의 궁창에 빛물체들이 생겨
낮과 밤을 가르고
표징과 절기, 날과 해를 나타내어라.
그리고 하늘의 궁창에서 땅을 비추는
빛물체들이 되어라
-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별과 같은 단어가 있는데, 저런 것들은 신들이 아니야! 하느님이 궁창에 매달아놓은 하나의 조명이다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표징과 절기 날과 해를 표시해주는 하나의 기능을 위해서, 달려 있는 거라고 말하여 넷째날의 창조가 마무리됩니다.
창세 1,20
물에는 생물이 우글거리고
새들은 땅 위 하늘 궁창 아래를 날아다녀라.
=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생명으로 가득하기를 바라십니다. 신부님께서 이 부분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께서 오늘날 우리들의 시선으로 해석했을때 이런 말씀을 주신것은 아닐까? 온 우주에 생명이 가득한 세상으로 만들어봐, 달에도 화성에도
제프 베조스나 엘런 머스크가 달이나 화성에 생명이 가능한 공간을 만든다는 계획들을 듣고서 그와 같은 계획에서도 하느님의 뜻이 있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과 작은 지구를 넘어서 모든 인류가 공동의 힘을 좀 합쳐서 광활한 우주를 생명으로 채우는 일에 마음이 하나가 될 수는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창세 1,21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
큰 용들과
물에서 우글거리며 움직이는 온갖 생물들을 제 종류대로
또 날아다니는 온갖 새들을 제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 재밌게 본 표현이 큰 용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용은 아직까지 발견된 적이 없고, 공룡들이 발견되기는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큰 용들은 거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다를 다스리는 신들입니다. 고대인들이 신들처럼 생각했던 동물이 있는데요,? 구약성경에서 확인되는 동물들은 세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뱀, 다른 하나는 악어고, 그리고 하마가 고대인들에게 조금 인간에게 공격적으로 다가오는 어떤 바다의 신처럼 느껴졌던것 같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그것을 신이라고 생각했지만 창세기 1장의 저자는 "아 ! 큰 용들은 신들이 아니야. 그것들은 하느님이 민들어 놓으신 피조물에 불과해, 생물들도 만들어 놓으셨고, 새들도 만들어 놓으셨어." 라는 1,21절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세 1,22
번식하고 번성하여 바닷물을 가득 채워라
새들도 땅 위에서 번성하여라.
- 최종적으로 번식하고 번성하여 바닷물을 가득 채워라. 새들도 땅위에서 번성하여라. 계속해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어떤 꿈을 썼을까? 라는 질문에 창세기 저자는 1,22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창세 1,24
땅은 생물을 제 종류대로,
곧 집짐승과 기어다닌 것과 들짐승을
제 종류대로 내어라.
- 여섯째날 다시 땅에게 명령합니다. 히브리인들의 식물도감은 풀과 나무인데, 동물 도감은 집짐승과 들짐승 그리고 기어다니는 짐승,이고 집짐승이란 것은 길들일릴수 있는 짐승이고, 이런 것들을 땅에서 내어 놓으라고 땅위에서 뱉어눟은 것처럼
- 땅위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들은 그 생명을 모두 땅에 빚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이 모든 생명에 하나의 제공자라는 인식이 창세기 1장 특히, 창세기 1장의 저자는 "하는님외에 다른신은 없어"라고 말하였습니다.
- 신학적인 명제를 특별하게, 갖고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땅이 그와같은 생명을 제공하고 있어야하며 땅에대한 특별한 가치를 내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창세 1,29-30
이제 내가 온 땅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 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느 모든 생물들에게는
온갖 푸른 풀을 양식으로 준다.
- 창세기 1장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면 우리는 모두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풀과 과일만) 나중에 노아의 홍수 사건이 끝난다음에는 너희가 고기를 먹어도 돼. 하지만 피는 먹으면 안돼. 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인간에게 주시는 것을 발견합니다만, 창세기 1장 태초의 세상안에서 우리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은 풀과 나무였다...라는 특별한 창세기저자의 관점이 발견됩니다. 요즘에도 신부님이 학생신부로 유럽에서 공부할 때 아주 특이한 그룹을 만났는데, 그분들은 29절의 내용을 조금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던것 같았다고 하십니다. 물론 생태적인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그룹이었는데 그 그룹에있는 분들은 과일만 먹는데, 땅에 떨어진 과일만 먹는 그룹이었다고 합니다. 저런 삶의 모습이 과연 하느님의 뜻일까?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런 그룹도 만났었다는체험의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들려드립니다. 이 부분을 문자적으로 고정시켜 생각했던 그룹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두번째 파트, 인간도 풀과 과일을 먹고 모든 짐승과 새와 이런 것들 또한 풀을 뜯어먹는 세상, 이것이 창조주가 우리에게 허락했던 세상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이었다라고 창세기 1장의 저자는 기억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최종적으로
보시니 좋았다
-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것이 갖고 있는 어떤 인간관과 세계관이 갖고 있는 어떤 낙천적인, 긍정적인 그와 같은 모습들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타종교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조금 조심스럽스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타종교에서는 이런 세계관 이런 인간관이 쉽게 발견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자주 들었던 불교에 가르침안에도 엄격히 말하면 불교 바탕에 있는 힌두사상에서 세상을 이야기 했을때 생로병사라는 고뇌, 백팔번뇌라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인간이 끊임없이 윤회의 고를 겪다가 나중에 많은 덕을 쌓으면 부처가되는 열반에 이르게되면서 더이상 윤회를 겪지 않고 극락으로 떠나게 된다는, 그 안에 담겨있는 세계관은 사실은 보시니 좋은 세상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세상은 좀 고통스러운 곳, 언제가는 이 고통스러운 곳을 떠나서 좋은 곳으로 가는 희망 이런 것들이 힌두사상에 바탕에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교는 세상은 본질적으로 좋은곳,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나중에 신약으로 넘어와서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런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저세상 뿐만아니라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하느님나라라고 생각해 봤을 때 이 땅에서도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이미 구현할 수 있다! 이 땅에서도 이미 살아갈 수 있다! 라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모습들,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기도안에서도 발견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보시니 좋았다!
아까의 본래의 표인 ,창조의 구도에서 마지막 결론으로 말씀해 주신,
1일과 4일은 낮과 밤 그리고 계절과 축제라는 시간( 하느님께서 시간을 창조하셨다)
2닐과 5일은 궁창으로 하늘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5일에는 하늘위에 사는 것들과 하늘아래 물에 사는 것들이 창조가 됩니다 그러므로 (2일과 5일은 공간을 만드셨다)
3일은 뭍이 땅이 드러나고 6일에는 뭍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이 창조되고 또 그 뭍에서 살아가는 동물들과 하느님이 창조하신 온 세상을 돌보게 되는 인간이 창조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3일과 6일을 앞에 내용과 묶어본다면 아! 하느님께서 시간을 창조하시고 하느님께서 공간을 창조하시고 (그 시간과 공간에 틀안에 하느님께서 생명을 두셨습니다).라는 고백으로 첫번째 칭조이야기를 알아 듣게 됩니다. 오늘날 자연과학자인 그가 만약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느님에 대해서 고백했을 때도 그와 같은 한 문장으로 고백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텍스트를 뜯어보았을 때 놀라운점이 아닐까?라는 생각과 함께 이 창조의 구도를 읽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창조의 세계관을 그림으로 본다면,
창세기 1장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창조와 관련된 시편에서 세상끝에 있는 기둥들에 관하여 이야기가 나옵니다. 궁창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이 있고 그다음에 밑에는 바다와 땅 뭍이 있고, 그 밑에는 다시 물들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여지는 모습입니다)
창세기 1장이 보여지는 세계관 안에서 제일 강하게 다가오는것은, 온 세상은 하느님이 창조하셨어...라는 고백이고 텍스트로 본다면 『찬미받으소서』 67항에서 맨 후반부의 시편 24편 "땅은 주님에 것입니다" 그리고 신명기(10,14)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레위기(25,23)의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다"라는 말씀을 회칙은 인용했습니다.
구약성경 전체에 흐르는 땅, 그리고 땅에 대표되는 생명, 그 전체의 주인인 창조주는 곧 하느님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그런것들을 내껏, 우리껏, 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데 그렇지 않더라 하는 세상의 이야기를 세상 창조 때부터 다시 한번 되짚어 본다면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더라.는 세계관 안에서 우리들이 땅을 잘 돌보아야 할 인간의 존재 이유를 상실한채 하느님의 것인 그 땅을, 그 세상을 잘못된 방식으로 지배하고 또 착취하고 하는 그와 같은 잘못 자리 잡힌 인간의 문화 사고방식이 생태문제에 본질에 있다는 것을 텍스트를 통해서 다시 한번 반성해 볼수 있습니다.
다섯번째 강의 마무리하시면서 『찬미받으소서』 177쪽의 그리스도인들이 피조물과 함께 드리는 기도를 같이 바치겠습니다.
찬미받으소서. 아멘.
첫댓글 세월호 아이들을 기억하는 추도의 말로 강의를 시작하시네요. 최신부님이 아니었다면 저도 까맣게 잊고 지나쳤을 것 같습니다...
좋은 기도로 나눔해주셔서 좀더 기억하며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창세기1장이 얼마나 아름다운 본문이었는지, 새삼 느끼게 되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최신부님께, 그리고 빗방울님께도 감사 인사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네 저두요.^^
강의를 들으면서 좀더 깊이있게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