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0일 책방 풀무질에서 열린 [영성 없는 진보] 북토크에 참석했다. 작년 동학/광주518기행으로 모셔배움을 가지려 했던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교수가 작년말 이 글을 공유해주었고, KSCF 청년학생들과 이 글을 함께 읽고 공부했다. [영성 없는 진보]는 김상봉 교수가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에 대한 성찰 글이다. 김교수는 한국 정치의 파행은 영성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한국 사회의 정치적 파행은 우리 믿음이 병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치와 영성이 무슨 상관이 있으며, 그것도 보수가 아니라 진보 진영의 문제라고 본걸까? 그 이유는 짧게는 해방 이후, 길게는 동학 농민혁명 이래, 이 나라의 진보적 정치 활동이란 '전체를 위한 자기희생'이라고 요약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의 역사가 돌이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져들지 않고 의미 있는 진보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 고통에 응답하고, 우리 모두의 선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 사람들이 이 땅에 많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이렇게 역사가 선을 향해 진보한다는 믿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이보다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내가 전체와 하나라는 믿음-영성이다. 내가 느끼는 고통의 끝이 나의 한계인데, 나와 세계가 고통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나와 세계가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이는, 나와 세계의 분리가 전태일에겐 결코 당연한 것도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에겐 타인의 고통이 곧 자기 자신의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버스비로 써야할 돈으로 배고픈 어린 여공들에게 붕어빵을 사주고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도봉산 기슭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자기 한쪽 눈을 팔아 착취 없는 공장을 만들려 했지만 그 시도조차 좌절되니, 자신의 몸을 불살라 어둔 세상을 밝힌다. 한 사람의 희생이 만 사람의 응답을 불렀다.
이성은 나와 이 세계 전체가 하나라는 것도, 역사가 선을 향해 진보한다는 것도 증명할 수 없다. 하지만 증명할 수 없다해서 역사가 진보한다는 것도, 나와 세계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도 내가 믿지 않는다면, 과연 나는 전체를 위해 나를 희생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왜나하면 나에게 나는 절대적 목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전체를 위해 나를 버릴 수 있으려면, 세계가 나와 하나이며, 역사가 선을 향해 진보한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오직 그 믿음 때문에 나는 전체를 위해 나를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전체와 하나이므로, 내가 전체를 위해 나를 버리는 것은 나를 영원히 잃어버린느 것이 아니고, 전체 속에서 나를 되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이 바로 영성이다.
영성이란 이성이 알지 못하는 신비적인 체험이 아니라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굳건한 믿음에 존립하는 것이라고 한다. 김상봉 교수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가 '신앙을 신앙했던 것이다!' 외쳤던 부분을 강조하며 새로운 믿음을 기다린다. 앞으로의 출사표라 외치며 말이다. 그래서 아쉽다. 이 아쉬움은 출사표 이후 만남을 통해 풀어갈 수 있겠다.
김상봉 교수는 종교건 정치건 어느 단체가 전체를 참칭할 때, 모든 문제가 발생했다고 했다. 맞다. 전체를 참칭한 단체는 신의 자리에 올라, 뭇 사람들을 지배한다. 서구 제국주의가 그러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단체가 이러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면 단체는 아예 없어져야 할 것인가 생각해본다. 나와 전체를 잇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사건이 잠깐 껌뻑거리고 끝난다면, 우리는 역사의 의미 있는 사건들을 되뇌이기만 할 것이다.
이 껌뻑임을 삶으로 끌어 안는 단체가 곧, 한몸살이(공동체)다. 이 관계 안에서 타인의 고통은 내 고통이 되고, 타인의 기쁨은 내 기쁨이 된다. 내 고통과 기쁨이 타인에게로 간다. 나와 전체를 잇는 일상의 경험을 쌓아가며, 비로소 서로 주체가 되는 것이다. 예수 운동은 누구도 핍절하지 않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갔다. 서구 제국주의 침략이라는 상황 가운데, 새 문명을 내다본 동학 역시 새로운 관계를 맺고 일상 영성을 통해 삶의 혁명을 도모했다. 전태일이 살았던 시대는 지금보다 가난했지만, 상부상조하는 마을의 관계망은 살아있었기에 예수 신앙으로 자기보다 어려운 어린 여공들을 위해 그리할 수 있었다. 광주518의 해방광주의 경험 또한 그러하다. 오늘의 동학, 전태일, 해방광주는 가능하다!
오늘날 자본은 모든 것을 자본화하기 위해 전체를 참칭한다. 타인의 고통에 상관 말고 모든 것을 개별화하여 자본 순환을 빠르게 하는 자본주의 지배전략이 더 강력해진 지금,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영성이 사라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래서 새로운 믿음-영성은 생명이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망을 모색하고 살아갈 때에 비로소 경험할 수 있다. 영성은 프로그램으로 훈련될 수 없다. 서로를 비추어 주는 관계, 그 관계를 통한 일상의 삶을 사는 것이 영성수련이며, 이로서 나와 전체는 하나가 된다. 이 경험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한다. 이 땅에 서려 있는 깊은 적대와 증오의 해소는 각각에 사무친 원통함을 푸는 것이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오늘날, 기독청년학생운동의 중요한 입지점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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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 교수의 글에 대한 남기업 소장의 반론격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