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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게 하라 (7), 욥기에 나타난 그리스도
(엡3:17)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오늘은 시가서 공부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마지막으로 욥기를 공부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욥기를 이해하기를,
고난을 잘 참으면 믿음이 자라게 되며 복도 두 배로 받게 된다고 이해들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욥기를 잘 공부해 보면 욥기는 결코 그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욥기는 복음입니다. 아마 욥기만큼 복음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는 책도 드물 것입니다.
욥기라는 이름은 이 책의 등장인물인 욥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욥기가 된 것이지요. 욥은 실제 존재했던 인물입니다.
(겔14:14)
14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거명하시는 것을 보면 그가 실제 존재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언제 적 사람인지는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적 증거로 볼 때 욥은 아브라함과 동시대, 족장시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욥42:16)
16 그 후에 욥이 일백 사십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욥의 고난이 끝난 후에도 욥은 140년을 더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LXX 70인 역 성경을 보면 그 구절이 “그의 시련이 있은 후에 170년을 살았다. 따라서 그는 모두 240년을 향유하였다”라고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욥에게 고난이 닥친 것이 욥의 나이 70이었을 때라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사실이든 간에 욥이 200년을 넘게 장수를 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수명은 족장시대의 일반적 평균 수명이었습니다.
(창25:7)
7 아브라함의 향년이 일백 칠십 오세라
그리고 욥기 1장 3절에 보면 욥의 부귀의 정도를 가축의 수효로 제시를 합니다.
(욥1:3)
3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이것도 역시 족장시대의 관례였습니다.
(창12:16)
16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 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이렇게 족장시대에는 부의 정도를 가축의 수요로 헤아려 표현을 했습니다.
그리고 욥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같은 족장들처럼 자기 가문의 제사장적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욥1:5)
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모세 이후에는 누가 제사를 드렸지요? 레위지파 사람들. 그 전에는 집안의 가장들이 제사장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면 욥은 모세 시대 이전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모세 시대 이전을 우리가 족장시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족장 시대에는 하나님께 대한 대표적인 호칭이 “솨다이”였습니다. 욥기에도 그“솨다이”라는 단어가 31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욥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2,000년 경 서부 셈족 사람들이 많이 가졌던 이름이었습니다. BC1,000년경만 해도 그런 이름을 쓰진 않았답니다. 그래서 욥은 족장시대의 사람일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욥기의 저자는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욥기의 저자는 욥이다, 엘리후다, 모세다, 솔로몬이다, 이사야, 히스기야, 예레미야, 바룩, 에스라 중 한 사람으로 거론이 되지만 욥기의 저자를 증명할 만한 분명한 자료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나중에 천국에 가서 물어보지요.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욥기의 저자는 뛰어는 문학적 재능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의 문학자들도 이 욥기의 문학적 기교와 수려함에 혀를 내 두를 정도입니다.
유수한 문학가들이 이 욥기를 세계 문학의 걸작 중의 걸작으로 손을 꼽습니다. 그래서 문학도들은 이 욥기를 깊이 연구를 합니다.
이 욥기의 기록 연대도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알 필요가 없으니까 안 알려 주시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생각하자고요.
그럼 이 욥기의 내용을 한번 분석해 보겠습니다.
욥기는 총42장의 긴 책입니다.
1:1-5 까지는 욥에 대한 소개가 나옵니다.
그리고 1:6-12에서 첫 번째 천상의 장면이 나옵니다.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사단이 대화를 나누십니다. 어떻게 사단이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으니까 궁금해 하지 말자고요.
하나님께서 욥을 칭찬하십니다. “네가 내 종 욥을 보았느냐?”하시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사단이 대답합니다“그가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많은 것을 주셨으니까 하나님을 경외하지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욥을 칠 것을 허락합니다. 그게 두 번째 부분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부분이 욥이 재난을 당하는 장면입니다. 그게 1:13-22까지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부분에서 다시 천상의 장면이 나옵니다. 그게 2:1-6까지고요.
욥이 그의 모든 소유가 다 날아가 버렸는데도 여전히 순전함을 지켰다고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니까 사단이 “그럼 이제 그의 살과 뼈를 한번 쳐 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또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부분인 2:7-10에서 욥의 신체적 재난의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는 2:11-13에서 욥의 세 친구가 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3장 전체에서 욥이 자신의 삶을 저주합니다.
그리고 4장부터 26장까지에서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 그리고 욥의 변론들이 이어집니다. 총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각기 자기들의 경험과 지식을 다 동원해서 욥이 뭔가 잘못을 했기 때문에 그러한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주장을 하고 욥은 “나는 정말 아무 잘못 없다”라고 반박을 합니다.
그리고 27,28장에서 욥이 첫 번째 독백을 합니다. “난 잘못 없다”
(욥27:1-6)
1 욥이 비유로 말하였다.
2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다. 그분께서 나를 공정한 판결을 받지 못하게 하시며,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몹시 괴롭게 하신다.
3 내게 호흡이 남아 있는 동안은, 하나님이 내 코에 불어넣으신 숨결이 내 코에 남아 있는 한,
4 내가 입술로 결코 악한 말을 하지 않으며, 내가 혀로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6 내가 의롭다고 주장하면서 끝까지 굽히지 않아도, 내 평생에 양심에 꺼림칙한 날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29장과 30장 31장에서 두 번째 독백을 합니다.
29장에서는 과거에 좋았던 시절을 회상합니다.
그리고 30장에서는 애가를 부릅니다. “나는 너무 너무 슬프고 괴롭다“
그리고 31장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의 결백을 주장합니다.
이렇게 욥이 끝까지 자기의 결백을 주장하자
이제 그 세 친구와 욥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리후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욥과 그의 세 친구들에게 일장 연설을 합니다. 그것이 32장에서 37장까지의 내용입니다.
(욥32:1-5)
1 욥이 끝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므로, 이 세 사람은 욥을 설득하려고 하던 노력을 그만두었다.
2 욥이 이렇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잘못을 하나님께 돌리므로, 옆에 서서 듣기만 하던 엘리후라는 사람은, 듣다 못하여, 분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엘리후는 람 족속에 속하는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이다.
3 엘리후는 또 욥의 세 친구에게도 화를 냈다. 그 세 친구는 욥을 정죄하려고만 했지, 욥이 하는 말에 변변한 대답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4 그들 가운데서 엘리후가 가장 젊은 사람이므로, 그는 다른 사람들이 말을 끝낼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였다.
5 그런데 그 세 사람이 모두 욥에게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는 화가 났다.
이 엘리후라는 청년이 욥과 세 친구를 묵사발을 만듭니다. 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욥33:8-30)
8 어른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9 "내게는 잘못이 없다. 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나는 결백하다. 내게는 허물이 없다.
10 그런데도 하나님은 내게서 흠 잡을 것을 찾으시며, 나를 원수로 여기신다.
11 하나님이 내 발에 차꼬를 채우시고, 내 일거수 일투족을 다 감시하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2 그러나 내가 욥 어른께 감히 말합니다. 어른은 잘못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보다도 크십니다.
13 그런데 어찌하여 어른께서는, 하나님께 불평을 하면서 대드시는 겁니까? 어른께서 하시는 모든 불평에 일일이 대답을 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하나님께 원망을 할 수 있습니까?
17 하나님은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도록 하십니다. 교만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18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파멸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시며, 사람의 목숨을 사망에서 건져 주십니다.
19 하나님은 사람에게 질병을 보내셔서 잘못을 고쳐 주기도 하시고, 사람의 육체를 고통스럽게 해서라도 잘못을 고쳐 주기도 하십니다.
22 이제, 그의 목숨은 무덤에 다가서고, 그의 생명은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23 그 때에 하나님의 천사 천 명 가운데서 한 명이 그를 도우러 올 것입니다. 그 천사는 사람들에게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상기시킬 것입니다.
24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천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가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도록, 그를 살려 주어라. 내가 그의 몸값을 받았다."
25 그렇게 되면, 그는 다시 젊음을 되찾고, 건강도 되찾을 것입니다.
26 그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은 그를 다시 정상적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27 그는 사람들 앞에서 고백할 것입니다. "나는 죄를 지어서, 옳은 일을 그르쳤으나,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28 하나님이 나를 무덤에 내려가지 않게 구원해 주셨기에, 이렇게 살아서 빛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29 이 모두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두 번, 세 번, 이렇게 되풀이하시는 것은,
30 사람의 생명을 무덤에서 다시 끌어내셔서 생명의 빛을 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엘리후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욥과 세 친구들에게 강하게 피력합니다.
그 엘리후의 연설이 끝나자 이제 바로 하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그 부분이 38:1-40:2까지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욥38:1-6)
1 그 때에 주께서 욥에게,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 대답하셨다.
2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3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
5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
6 무엇이 땅을 버티는 기둥을 잡고 있느냐? 누가 땅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자 그 때까지 자기는 결백하다고 “악악거리던 욥의 답변이 이렇게 나옵니다.
(욥40:3-5)
3 그 때에 욥이 주께 대답하였다.
4 저는 비천한 사람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주님께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손으로 입을 막을 뿐입니다.
5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하나님께서 두 번째 말씀하십니다. 그 부분이 40:6-41:34입니다.
그 말씀을 다 듣고 욥이 최후의 고백을 이렇게 합니다. 그 부분이 42:1-6까지입니다.
(욥42:1-6)
1 욥이 주께 대답하였다.
2 주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3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4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5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6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엘리바스를 비롯한 욥의 세 친구들에게 이러한 판결을 내립니다.
(욥42:7-9)
7 주께서는 욥에게 말씀을 마치신 다음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분노한 것은,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할 때에,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8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마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지고 가서, 너희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번제를 드려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용서하여 달라고 빌면, 내가 그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다.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할 때에,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않고, 어리석게 말하였지만, 내가 그대로 갚지는 않을 것이다."
9 그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하니, 주께서 욥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42:10-17까지에서 욥의 모든 사정이 두 배(倍)로 회복이 되는 장면이 나오고 욥기는 끝이 납니다. 우리가 이 욥기가 가진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욥기를 읽게 되면 “하나님의 공의에 회의”를 갖게 되는 엉뚱한 신정론에 빠지게 됩니다.
이 신정론(theodicy)은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하나님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세상과의 조화를 학문적으로 모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는데 왜 세상이 이렇게 모순투성이인지, 아니면 악인이 의인을 압제하는 것을 볼 때 ‘혹시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신 것은 아닌가?’하는 회의를 심층적으로 다루는 것이 신정론(神正論)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이 욥기를 읽으시면서 그런 회의가 들지 않으셨습니까?
“왜 착한 사람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예수 잘 믿으면 복 받고 잘 산다고 해서 믿었는데 예수 믿고 났더니 오히려 일이 더 잘 안 풀리고 행복 끝 고생 시작이 되었다“ 이런 경험들 없으세요?
욥기에 그러한 하나님의 불공평함과 불합리함이 보이지 않으세요?
욥기를 단순히 ‘욥이 당하는 고난‘의 관점에서만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기는 인간의 고통과 고난의 문제에 대한 해 답을 제시하는 책이 아닙니다.
욥기는 구원을 얻은 의인들은 인생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통해서, 고난을 통해서 자신들이 받아 가지고 있는 그 선물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완성이 되고야 만다는 것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반드시 인과율에 의해서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진리도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또 아울러서 올바른 신정론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책입니다. 그러니까 참 지혜,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의 인간의 지혜의 보잘 것 없음이 잘 나타나 있는 책인 것입니다.
욥기는 이렇게 단순히 고난의 문제에 관해서 기록되어 있는 책이 아니라 복음이 적혀 있는 책입니다. 그것을 지금부터 하나하나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욥기 1장에 보면 욥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거기서부터 출발해 보지요.
(욥1:8-12)
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 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1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욥이 왜 고난을 당합니까? 사단이 참소해서? 사단이 왜 참소 했습니까? 하나님이 욥의 의로움을 자랑하시니까? 그럼 결론적으로 욥은 왜 고난을 당하게 된 것입니까?
의로워서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고난은 하나님 앞에 죄 지은 사람들이 당하는 형벌이라고 생각들을 합니다. 그래서 누가 조금 어려움을 겪으면 은연중에 “저 사람이 하나님 앞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벌을 받는 걸 거야”라고 생각들 합니다. 그것을 인과율이라고 하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보시다시피 욥은 의인이라서 고난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욥기를 그 역 창조의 관점에서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첫 창조 때의 아담과 이 욥을 한번 비교해 볼까요?
(욥1:1-5)
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2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3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4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이렇게 거두절미하고 처음부터 무죄한 자, 순전한 자로 묘사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브라함? 바울?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던 자였고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 때려죽이러 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 누구지요? 아담입니다.
그가 죄를 짓기 전에는 아담은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로 에덴을 지키도록 명령을 받은 무죄한 자였습니다. 그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다스리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욥을 보세요. 그는 동방의 가장 큰 자였습니다. 왕입니다. 그는 자식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습니다. 제사장입니다. 그리고 가축과 재산과 자식이 어마어마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요구하신 것을 그대로 이루어 내고 있는 모습이지요? 창조의 완성의 모습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것들이 하나하나 파괴됩니다.
(욥1:13-19)
13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14 사자가 욥에게 와서 고하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15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16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17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갈대아 사람이 세 떼를 지어 갑자기 약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18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19 거친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한지라
완성된 창조의 모습이 반대로 다 파괴되어 버리는 모습입니다.
새 창조는 반드시 역 창조를 거쳐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옛 언약과 새 언약에 대해서 설교했을 때 한번 설명해 드렸지요?
옛 창조는 새 창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지요? 새 언약으로 결론지어지지 않는 옛 언약은 하나님의 약속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고린도 후서 3장을 예로 들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옛 언약인 구약의 직분자인 모세를 죽게 하는 직분, 정죄의 직분이라고 바울이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처럼 첫 창조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목표 지점이 아니었습니다. 그 첫 창조를 거쳐 역 창조를 거쳐 새 창조에 이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 지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면 반드시 역 창조의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을 받고도 여전히 자기 안에 공존하는 ‘하나님 없이 살도록 잘 훈련되어진 성품, 인격, 습관, 버릇’ 이런 어둡고 못 된 것들이 고난과 환난과 궁핍 등을 통해서 무너지고 부서지고 잘려서 자기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조금 씩 조금씩 드러나게 되는 것을 우리가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고, 구원을 받고 있는 삶이라고 구원의 현재시제로 설명하는 것이고, 이미 이루어진 역 창조를 몸으로 체험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안에 선물로 넣어 주신 어떤 보물이 있는데 우리의 죄된 경향, 악한 성품, 습관 같은 것들이 그 보물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 창조를 통해서 그 썩어 가는 첫 창조의 것들을 부수어 버리시고 새롭게 창조된 그의 실체를 조금씩 조금씩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조금 쉽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욥이 욥기 서두에서 어떤 신앙고백을 하는지 보세요
(욥1:20-22)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여러분 이런 신앙 고백 하실 수 있으세요?
(욥2:7-10)
7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8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9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욥은 이러한 위대한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욥은 그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사람입니다.
(욥7:17-21)
17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18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19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20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21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하여 버리지 아니 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욥은 그 모든 고난이 주님의 허락하심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욥10:7-14)
7 내게 죄가 없다는 것과, 주의 손에서 나를 빼낼 사람이 없다는 것은, 주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8 주께서 손수 나를 빚으시고 지으셨는데, 어찌하여 이제 와서, 나에게 등을 돌리시고, 나를 멸망시키려고 하십니까?
9 주께서는, 진흙을 빚듯이 주께서 몸소 이 몸을 지으셨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어찌하여 주께서는 나를 티끌로 되돌아가게 하십니까?
10 주께서 내 아버지에게 힘을 주셔서, 나를 낳게 하시고, 어머니가 나를 품에 안고 젖을 물리게 하셨습니다.
11 주께서 살과 가죽으로 나를 입히시며, 뼈와 근육을 엮어서, 내 몸을 만드셨습니다.
12 주께서 저에게 생명과 사랑을 주시고, 나를 돌보셔서, 내 숨결까지 지켜 주셨습니다.
13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주께서는 늘 나를 해치실 생각을 몰래 품고 계셨습니다.
14 주께서는, 내가 죄를 짓나 안 짓나 지켜보고 계셨으며, 내가 죄를 짓기라도 하면 용서하지 않으실 작정을 하고 계셨습니다.
이렇게 욥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뭐가 잘못된 것일까요? 왜 이러한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한 욥이 3장부터는 그렇게 하나님께 악악거립니까? 그는 의인이었고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는 자였지만 그는 진정으로 삶 속에서 그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already... not yet”의 교리입니다.
이미 우리는 구원을 얻었고 의인이 되었습니다만 우리는 구원을 얻어가야 하고 의인이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우리 안에 주어진 그 금보다 귀한 은혜의 실체를 하나하나 껍질 벗기듯 벗겨가며 알아 가는 것입니다.
보세요. 욥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무엇을 근거로 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말합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시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도 ”나는 무죄입니다“를 근거로 이야기를 해 나갑니다. 그 말은 욥은 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인의 삶이 인과율에 의해서 결정지어지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저는 죄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하나님께 항의하는 것입니다” “왜 원인이 없는 이런 고난이라는 결과가 있는 것입니까?”
욥은 내내 그것으로 고민합니다. 그것은 절대 복음이 아닙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것은 세상의 논리입니다. 사단은 늘 그 인과율로 복음을 희석시켜왔습니다.
욥기 1장에서 사탄이 어떻게 참소를 합니까?
(욥1:8-10)
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 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하나님께서 돈도 주고 명예도 주고 자식들도 많이 주었으니까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아닙니까? 한번 다 빼앗아 보세요. 그래도 그가 의인이 되는가?” 사단이 그렇게 참소합니다. 그게 인과율입니다. “원인이 있으니까 결과가 있는 것 아닙니까?“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창세기 3장 15절의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도전인 것입니다.
“인간은 좋은 것으로 채워주지 않으면 절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의로운 자를 만들어 내시더라.“ 이것이 욥기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그 은혜를 살짝 가리고 인과율에 의한 거짓 복음을 세상에 뿌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기독교가 인과율에 의한 종교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내가 믿어줬으니 내게 좋은 것으로 주세요.“”내가 착하게 살 테니 , 열심히 금식 기도 할 테니, 열심히 봉사 할 테니 좋은 것으로 보상해 주세요.“ 이게 인과율에 의한 종교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보상으로 준다고 가르칩니다.
실제로 인과율에 의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내가 믿었고 내가 착하게 살았고 내가 회개해서 구원을 얻었다, 그리고 내가 믿어 주었으니 하나님은 나에게 이러 저러한 보상을 해 주어야 한다.“ 이렇게 삼박자 축복이니 뭐니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지요? 그들이 좋아하는 돈, 건강 다 빼앗아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금방 사단의 참소대로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 있습니까?”로 갑니다. 그러나 진짜들은 어떻게 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하나님 만으로 만족합니다.”로 갑니다. 하나님은 사단의 참소를 묵사발로 만들어 버리시고 그 최악의 고난 속에 던져진 욥에게서 그 고백을 받아내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히 고스란히 나타나 있는 책이 욥기입니다.
(합3:17-18)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욥은 42장에서 바로 이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하나님은 반드시 이 고백을 받아 내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짜들은 그러한 시험에서 다 떨어져 나갑니다.
인과율은 복음과 완전히 상반되는 것입니다. “인과율은 복음이 아니다“ 욥기는 전부 그 이야기의 반복입니다. 욥의 친구 빌닷의 논리를 한번 보세요.
(욥8:1-7)
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2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광풍과 같겠는가
3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4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
5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6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어떠세요? 욥의 친구 빌닷이 욥을 책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고 청결하고 정직하면, 네가 형통하고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하고 멋있게 충고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이렇게 살 수 있으세요?
이런 삶이되던가요? 안 되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멸망이리라“ 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가 아니면 사망으로밖에 갈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그렇게 은혜로 받고 자기 삶 속에서는 인과율에 의해서 복을 받겠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어찌 삼박자 축복이라는 것이 나올 수가 있습니까? 그건 성도들을 속이는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엘리바스의 논리도 역시 인과율에 의한 논리입니다.
(욥4:1-8)
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였다.
2 누가 네게 말을 걸면 너는 짜증스럽겠지.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참을 수가 없다.
3 생각해 보아라. 너도 전에 많은 사람을 가르치기도 하고, 힘없는 자들의 두 팔을 굳세게 붙들어 주기도 했으며,
4 쓰러지는 이들을 격려하여 일어나게도 하고, 힘이 빠진 이들의 무릎을 굳게 붙들어 주기도 했다.
5 이제 이 일을 정작 네가 당하니까 너는 짜증스러워하고, 이 일이 정작 네게 닥치니까 낙담하는구나!
6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네 믿음이고, 온전한 길을 걷는 것이 네 희망이 아니냐?
7 잘 생각해 보아라.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일이 있더냐?
8 내가 본 바로는, 악을 갈아 재난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더라.
보세요. 죄 없는 사람은 절대 고난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인과율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8절을 보시면 내가 본 바로는, 악을 갈아 재난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더라. 라고 하지요? 그의 논리의 근거가 뭡니까? “내가 본 바로는” 즉 “자기의 이 땅에서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은 그렇게 이 땅의 경험이나 체험으로 추측하고, 미루어 짐작하고, 정의 내리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상식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이런 체험도 합니다. 이른바 직통 계시, 성령 체험 같은 것을 경험합니다.
(욥4:12-21)
12 한번은 조용한 가운데 어떤 소리가 들려오는데, 너무도 조용하여 겨우 알아들었다.
13 그 소리가 악몽처럼 나를 괴롭혔다.
14 두려움과 떨림이 나를 엄습하여, 뼈들이 막 흔들렸다.
15 어떤 영이 내 앞을 지나가니,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16 영이 멈추어 서기는 했으나 그 모습은 알아볼 수 없고, 형체가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는데, 죽은 듯 조용한 가운데서 나는 이런 소리를 들었다.
17 "인간이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있겠으며, 사람이 창조주보다 깨끗할 수 있겠느냐?
18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당신의 종들까지도 믿지 않으시고, 천사들에게마저도 허물이 있다고 하시는데,
19 하물며, 흙으로 만든 몸을 입고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사람이겠느냐?
20 사람은, 아침에는 살아 있다가도, 저녁이 오기 전에 예고도 없이 죽는 것, 별 수 없이 모두들 영원히 망하고 만다.
21 생명줄만 끊기면 사람은 그냥 죽고, 그 줄이 끊기면 지혜를 찾지 못하고 죽어간다."
굉장히 옳은 말 같고 엄청난 체험을 한 것 같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이러한 논리나 체험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욥42:7-8)
7 주께서는 욥에게 말씀을 마치신 다음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분노한 것은,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할 때에,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8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마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지고 가서, 너희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번제를 드려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용서하여 달라고 빌면, 내가 그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다.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할 때에,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않고, 어리석게 말하였지만, 내가 그대로 갚지는 않을 것이다."
“너희들 말은 틀렸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은 그렇게 이 땅의 것으로 보여 지고 이 땅의 것으로 상을 받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욥5:23-27)
23 밭에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친할 것임이라
24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25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예가 땅에 풀 같을 줄을 네가 알 것이라
26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곡식단이 그 기한에 운반되어 올리움 같으리라
27 볼지어다 우리의 연구한 바가 이같으니 너는 듣고 네게 유익된 줄 알지니라
엘리바스가 욥에게 뭐라고 충고합니까? “너 하나님 말씀대로 죄 안 짓고 잘 살면 하나님께서 이 땅의 것들로 보상해 주신다.” 그럽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를, 사람을 중심에 놓고 이 땅의 것으로 보상을 약속하는 사람들은 전부 적그리스도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중심에 계시고 하늘의 것으로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법칙이요 원리인 인과율에 의해서가 아닌 원인이 없는 곳에서 결과를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의 지혜로 구원을 완성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도 바로 그 은혜의 원리에 의해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계12:10)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 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 하던 자가 쫓겨났고
보세요. 인과율로 우리를 속이고 인간을 참소 하던 그는 이제 쫓겨났습니다. 구약은 이제 끝난 것입니다. 법을 지켜야 복을 받는 율법 아래에서 우리는 해방이 된 것입니다. 사단은 이제 절대 우리를 참소할 수 없습니다. 인과율에 의한 상벌의 시대는 끝난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속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아닌 것 같지만 그 인과율에 얼마나 젖어 있는지 몰라요. 그래서 자기 일이 조금만 안 되면 ‘새벽기도를 안 나가서 그런가?’ ”지난주일 날 예배를 빼먹고 골프를 치러 가서 그런가?“ 이런 생각들을 합니다. 기독교는 인과율에 지배를 받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여전히 인과율에 젖어 있는지, 은혜를 정말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보시려면 한 세 달 동안 교회를 나오지 말아보세요. 그리고 성경도 읽지 마시고 기도도 하지 말아보세요. “그래도 난 그리스도인이 틀림없어“ 하시는 분이 진짜예요.
교회 한 주 만 빼 먹어도 불안하고 초조하고 ”혹시 이 일로 내게 어떤 벌이 내려지지 않을까?“이렇게 노심초사하는 분은 아직 은혜가 뭔지 잘 모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또 진짜 시험해 보지는 마세요.
하나님은 인과율에 근거하지 않은 원인 없는 결과 “십자가”로 그렇게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켜 내심으로 원인과 결과의 법칙으로 참소 하던 자들을 쫓아내시고 그 완성시켜 놓으신 구원을 우리 인생을 통해서 이해시키시고 설득시켜 내시는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는 평생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가능케 하신 하나님의 능력 앞에 겸손히 항복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순종이요, 거룩인 것입니다.
창세기에서의 아담은 자신을 원인으로 해서 실패를 했지만 욥기에서의 욥은 원인이 없이 성공을 거두는 자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게 신약과 구약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욥이 이유 없이, 까닭 없이, 자기 자신에게서는 요만큼의 근거도 없이 의인으로, 복을 받은 자로 처음부터 등장을 하는 것이고 또 고난을 받을 때도, 세상 적인 시각으로 볼 때는 까닭 없이, 이유 없이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하나님의 섭리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인 것입니다.
보세요, 그러한 고난의 끝에 하나님께서 어떤 결론을 이끌어 내십니까?
(욥38:1-3)
1 그 때에 주께서 욥에게,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 대답하셨다.
2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3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
욥이 계속해서 자신이 옳고 하나님이 실수하시는 것이라고 자기의 지혜를 여전히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에게서 항복을 받아내십니다.
(욥40:4-5)
4 저는 비천한 사람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주님께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손으로 입을 막을 뿐입니다.
5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능력 면에서도 욥의 항복을 받아내십니다.
(욥40:6-9)
6 그러자 주께서 폭풍 가운데서 다시 말씀하셨다.
7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여라.
8 아직도 너는 내 판결을 비난하려느냐? 네가 자신을 옳다고 하려고, 내게 잘못을 덮어씌우려느냐?
9 네 팔이 하나님의 팔만큼 힘이 있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천둥소리 같은 우렁찬 소리를 낼 수 있느냐?
(욥42:2-6)
2 주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3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5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6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욥은 지혜의 면에서나 능력의 면에서 모두 하나님 앞에 완전한 항복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바로 이 항복을 받아 내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하나님께 항복 할 때 진정한 승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욥의 고백 후에 욥이 풍성한 하늘의 풍요를 획득해서 구원이 완성되는 모습으로 욥기가 끝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이 땅의 것을 열심히 구하다가 이 땅의 것으로 풍성하게 보상받고 이 땅에서 장수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나는 천국보다 여기가 훨씬 좋아요” 하고 이마빡에 써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배우며 하나님의 지혜에 순종하고 비록 인과율에 의해 나에게 이 땅에서 주어지는 보상이 없다할지라도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방해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서 “하나님만 옳습니다.”라는 고백을 받아내시고야 말, 분이시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마시고 다른 곳에 눈 두지 마시고 오로지 우리의 소망, 천국을 향하여 올곧게 가십시다.
(무명)